
독살은 여성 연쇄살인범들이 오랫동안 선호해온 수단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직 여성들만 독살을 행했던 것은 아니었다. 1800년대 말 스트리크닌으로 매춘부들을 잇달아 해치운 토머스 닐 크림을 비롯해 영국에서는 남자 독살자들도 제법 악명을 떨쳤다. 빅토리아 시대 때 윌리엄 파머는 크림이 썼던 것과 같은 물질로 자신의 장모, 동생, 자녀 넷, 삼촌, 채권자들, 친한 친구들을 모두 살해했다. 최근 영국 역사에서 가장 이름을 떨친 연쇄독살자는 여러 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살인 경력을 쌓은 조숙하면서도 영리하고 무자비한 사이코패스였다.
1947년에 태어난 그레이엄 영은 태어난 지 석 달만에 어머니를 잃었다. 아기 때 그를 돌본 것은 그의 이모였다. 그레이엄 영은 두 살 때 재혼을 한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다. 훗날 정신과 의사들은 그레이엄 영의 극단적인 정신병의 원인을 정서가 발달할 중요한 시기에 어머니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간적인 온정이나 동정심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독약에 대한 평생의 집착은 어릴 때부터 나타났다. 학교 친구들이 운동선수나 가수들을 우상으로 삼을 당시, 그레이엄 영의 소년 시절 영웅은 악명 높은 영국의 독살자 파머와 의사 할리 크리픈이었다.(크리픈은 1910년에 아내를 죽이고 지하 석탄창고에 매장한 뒤 자신의 비서와 도망을 쳐서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특히 빅토리아 시대 때 아내와 장모를 독살해서 1855녀에 글래스고에서 교수형을 당한 에드워드 프리처드는 그레이엄 영이 좋아한 우상이었다. 이후 그는 아돌프 히틀러를 대단히 존경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히틀러의 악질적인 권력이 부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레이엄 영은 약국에서 학교 과학 숙제 핑계를 대고서 안티몬 타르타르 산염 약병을 구한 다음 늘 지니고 다녔다. 그는 약병을 자신의 ‘작은 친구’라고 말했다.
얼마 뒤 그레이엄 영은 학교 친구들을 상대로 실험을 시작했고, 아이들이 먹는 샌드위치에 약을 섞어서 병이 나게 만들었다. 이후 그는 자신의 가족들에게 관심을 돌렸는데 그 첫 실험 대상은 누이동생이었다. 그는 약을 섭취하는 분량에 따라 증상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약을 먹은 사람들은 구토를 하고 복통을 앓는가 하면 심한 경련을 일으키기도 했다. 1962년에는 오랫동안 독약 때문에 고통을 받은 그의 의붓어머니가 죽었다.
얼마 뒤 학교의 화학 교사는 그레이엄 영의 책상에서 깜짝 놀랄만한 증거물을 발견했다. 독약병을 옆에 두고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사람들의 그림과 또 다양한 독약의 효능과 치사량을 적은 도표가 있었다. 그레이엄 영은 경찰의 조사를 받았고, 경찰은 소년의 주머니에서 안티몬 약병을 찾아냈다. 그레이엄 영은 가족들을 상대로 실험을 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는 감옥에 갇혔고,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자살을 시도했다. 죄책감이나 수치심 때문이 아니라 독약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962년에 열린 재판에서 그레이엄 영은 유죄가 확정되었지만, 정신 이상 판정을 받았고, 브로드무어 정신병원에 위탁되었다.
그레이엄 영은 병원에서 9년을 지냈다. 정신과 의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완전 치유’된 것으로 여겨졌다. 그 후 그레이엄 영은 보빙턴 마을로 이사를 갔으며, 그곳에서 시력장비를 생산하는 회사의 창고 일을 맡게 되었다. 회사에 들어갈 당시 그는 사랑하던 의붓어머니가 죽은 뒤 그가 신경쇠약에 걸려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고 사장에게 말했다.
새로 일자리를 얻은 지 불과 하루가 지난 뒤 그는 시내에 나가서 거의 수백 명을 죽일 수 있는 양의 독약을 구해왔다.
그 뒤로 그레이엄 영의 회사 사람들은 심각한 병에 걸려 고통받기 시작했다. 그들은 설사,경련,요통,멀미,신체마비 증상을 겪었다. 거의 70명이나 되는 근로자들이 병에 걸렸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병을 사람들은 ‘보빙턴 병’이라고 불렀다. 회사 사람들은 몇몇은 입원을 했고, 그중 두 명은 고통을 겪다가 죽고 말았다.
그레이엄 영이 가져다 준 커피와 차를 마시고 나면 병에 걸린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공장의 누군가가 동료 근로자들에게 독약을 먹인다는 의혹이 불거졌으며, 곧 수사가 이루어졌다. 그레이엄 영은 경찰의 조사를 받는 동안 자신의 뛰어난 화학 지식을 자랑하지 못해서 안달을 냈다. 그는 수수께끼의 질병이 탈륨 중독일 때 나타나는 증상으로 보인다고 말했고, 경찰은 즉각 그를 의심했다.
그레이엄 영의 과거를 조사하자 소름끼치는 진실이 밝혀졌다. 경찰은 살인혐의로 그레이엄 영을 즉각 체포했다. 그레이엄 영의 아파트에서는 탈륨, 안티몬, 아코니탄 같은 독약들이 발견되었고,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의 액자 사진도 나왔다. 한편 경찰은 그레이엄 영의 일기장도 찾아냈다. 일기장에는 여러 독약이 사람들에게 끼친 결과가 자세하게 객관적으로 적혀 있었다. 그레이엄 영은 일기장에 기재한 내용이 단지 소설을 쓰기 위한 기록이라고 주장했지만, 진실을 감추지 못하고 범행사실을 털어놓게 되었다. 그레이엄 영이 사람들의 목숨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범행을 저질렀다. 그에게 인간은 실험실의 동물과도 같았다. “마음만 먹었으면 전부 다 죽일 수 있었어요. 그렇지만 내가 살려준 거죠.”라고 그레이엄 영은 형사에게 자랑했다.
1972년 6월, 재판은 10일 동안 열렸다. 그리고 배심원들이 유죄선고를 하는 데는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레이엄 영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는데, 그는 아주 짧은 기간만 감옥신세를 졌다. 1990년 8월, 그레이엄 영은 자신의 감방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그의 나이는 42세였고, 사인은 심장마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