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지정사항 ; 제주도 중요민속자료 제 68호(1979년 1월 22일)
위치 ; 표선면 성읍리 872번지
유형 ; 고건물(민가 초가)
시대 ; 조선(18세기말)
18세기말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이 가옥은 성읍리 정의현의 객사였던 전 성읍초등학교와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그 남쪽에 있으며 본래 객주집이었다고 전해진다. 325평에 이르는 넓은 대지에 안거리(20평), 밖거리(18평), 모커리(6평), 이문간(5평) 등 5채의 건물이 마당을 가운데 두고 배치되었다.
안거리는 작은방이 없는 전형적인 제주도의 삼칸집이다. 상방(대청마루)을 가운데 두고 한쪽에는 큰구들(안방)과 고팡(庫房)을, 다른 쪽에는 정지(부엌)를 배치하는 삼칸집의 평면에 작은구들을 정지 한쪽에 설치한 형태이다. 안거리의 문들은 많이 변형되었지만, 주춧돌이나 풍채의 받침돌, 물팡 등도 품위 있는 옛 민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밖거리에는 쟁기 등 재래식 농기구들을 보관하고 있으며, 마소에게 물을 먹이던 돌 구유 몇 개도 마당 구석에 남아 있다. 동전을 넣어 두는 돈궤가 보관된 것은 예전 객주집이었다는 구체적인 증거이다.
창고가 들어선 자리에는 예전 조일훈씨 개인 소유의 말방아가 있었는데 이는 조일훈의 조부가 세웠던 것이라 한다. 제주도에서 개인 집에 말방아를 설치한 예는 매우 드문 것으로 그만큼 대대로 대농가(大農家)였음을 실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마소를 많이 키웠으므로 울타리 안에는 마소를 매어 두는 시설이 있었으며, 마소를 매어 두는 공간과 안마당 사이에는 정낭이 설치되어 있었고 지금도 그 자리에는 정주목이 남아 있다.
이 가옥은 예전 정의고을 당시 주요 도로인 남문길에 울타리를 둘렀으며 '노도리방죽'이라는 남문길 옆 작은 못과 대문간이 맞서고 있어서 정의고을의 요지에 위치한 셈이다. 따라서 집으로 들어오는 길고 좁은 '올레'는 없고 대문간이 길가에 뚜렷이 배치되어 있다. 서쪽 울타리 돌담에는 '이기선휼궁비'가 끼어 있었다.(이 비석은 지금은 성읍리사무소로 옮겨졌다.)
성읍 민속마을의 중심가에 위치한 전형적 민가이며, 예전 객사와 이웃한 객주집이면서, 독농가의 가옥으로서 학술적인 가치가 있다.(제주의 문화재 142쪽)
이 집은 독립운동가 조몽구의 생가이기도 하다.
조몽구(趙夢九)는 1908년 풍양조씨 조동권(趙東權)의 아들로 표선면 성읍리 872번지에서 태어났다. 이 집은 제주도 중요민속자료 제68호(조일훈 가옥)로 지정된 집이다. 형은 광복 후 초대 표선면장을 지낸 조범구(趙範九)이다.
고향에서 정의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京城)공립 제1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으나 4학년 때에 퇴학하고 1928년 8월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大阪) 조선노동조합에 가입하여 오로지 노동운동을 통하여 국권회복을 기도하던 중 점차 항일운동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공산주의 사상이야말로 첩경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특히 정의공립보통학교 시절 은사인 김문준(金文準)의 사상과 행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29년 8월 25일 조선노동조합 나니와(浪速)지부 사무실에서 신간회 오사카지회 확대 간부회의를 개최하여 김문준은 검사위원장으로, 조몽구는 전형위원 겸 간사 후보로, 김달준(金達俊)·김용해(金容海)는 간사로 활동하였다.
1929년 12월 14일 재일본 조선노동총동맹 대표자 회의가 오사카에서 극비리에 개최될 때 김문준·조몽구 2인이 대표로 참석하여 재일본노동총동맹을 해소(解消)하고 일본 노동조합 전국협의회(全協)에 가입하기로 결정했다. 전협은 일본공산당의 외곽 지원 단체이며, 일본공산당은 조선과 대만의 독립을 중요 강령으로 삼고 있었다. 이런 관계로 조선노동총동맹을 전협 조선인회로 개편한 것이며 중앙집행위원을 구성할 때 김문준·조몽구 2인도 피선되었다.
1930년 1월 26일 오사카에서 조몽구의 노동운동 세력은 일본의 사회주의자 기다가와(北川榮造)의 세력과 합쳐 제국주의 노선에 대응하면서 오사카 지방 선거투쟁동맹을 조직하였다.
1930년 4월 제주 출신들이 ‘우리는 우리 배로’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자주운항운동을 좌우 합작으로 추진할 때 조몽구는 문창래(文昌來)·김달준과 협력하면서 동아통항조합(東亞通航組合)을 결성하여 운영하던 중 일본의 간계와 방해로 실패하였다.
1931년 5월초 ‘소비에트 러시아를 수호하라’ ‘중국 혁명을 수호하라’ ‘일본공산당 만세’등의 표어와 전협 화학노조 오사카 선전물 지방 뉴스란에 〈전쟁과 노동자〉란 유인물 등을 작성하여 배포하였다. 또 일본공산당의 보조적 기관지《제2무산자신문》등을 배포하였다.
한편 전협의 화학노동조합을 오사카지부로 해소한 후에는 同지부에 속하여 1931년부터 지부의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동년 6월 하순부터 전국산업별노동조합오사카지부협의회의 책임자가 되었다. 동년 7월 검거될 때까지 조직 및 투쟁 방침을 굳혀 전협 활동에 온 힘을 다하였다. 일본공산당의 목적·강령은 정당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전협 활동을 통하여 동당(同黨)의 목적 달성에 헌신하였다. 1931년 7월 18일 오사카 공소원(控訴院)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4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전후(戰後) 일본에서는 일본 제국주의 압제 밑에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 운동을 통하여 투쟁한 인사들을 기리기 위하여 오사카성 공원 안에 〈顯彰大阪社會運動之戰士碑〉가 세워졌는데 이 비석에 김문준과 조몽구의 이름이 올라 있다. 두 사람의 사회주의 운동은 일본공산당이 인정할 정도로 유명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국이 광복되자 남조선노동당 제주도당을 결성할 때 조직부장, 1946년 조선공산당 제주당부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제주도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에 소개된 제주도당의 조직체계에는 안요검, 김유환, 강기찬, 김용관과 함께 도당부 책임자로 되어 있다.
제주도 민전 결성대회에서 조몽구는 친일파 문제를 거론하면서 "악질 중의 악질은 과거 일제에 아부하던 자로서 또다시 권세를 부려 보려고 인민위원회에 가담했다가 (당국의) 탄압이 심함을 보고 슬그머니 빠져서 자취를 감추고 있는 기회주의자들이다."라고 지적하였다.
여성동맹 위원장까지 지냈던 조천면 북촌리 출신의 한 할머니는 이렇게 증언한다. "1946년까지는 오르그(조직지도원)가 마을에 와서 당원들에게 교육을 시킨 적도 있었고, 조몽구 선생으로부터 고구마와 무를 배합해서 엿을 만드는 방법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1월 22일 ‘2월 중순과 3월 5일 사이에 폭동을 일으키라'는 폭동지령 유인물이 발견된 조천의 남로당지부 불법회합과 관련해 106명의 좌익주의자들이 체포됐을 뿐더러 1월 26일까지 좌익분자 115명이 추가로 붙잡혔다. 보고서에는 또 '그 날 이른 아침(새벽 3시) 경찰이 습격했을 때 몇몇 남로당 간부가 탈출한 것으로 여겨지며, 등사기와 많은 양의 문서가 압수됐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 검거선풍으로 인하여 남로당 제주도당 조직부서가 있었던 조천․신촌뿐만 아니라 제주읍을 비롯해 도내 곳곳에서 핵심당원들이 체포되었다. 무장투쟁 멤버의 핵심인 김달삼(유도 2단)도 붙잡혀 경찰서로 연행되어 오다 관덕정 앞에서 2명의 호송경관을 뿌리치고 도주했다. 칠성통 금강약방에 기거하고 있던 조몽구는 경찰이 현장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에 피신, 직장세포가 강했던 측후소에 숨어 살았다는 일화가 있다.(제민일보 2007년 02월 09일)
또 제주4·3 당시 가장 다양한 정보채널을 통해 각종 정보를 수집 분석했던 제주 경찰서 정보과에서 작성한 기록 문서를 보면, 1948년 2월 25일 조천면 선흘리에서 조몽구, 김달삼, 김완배, 고칠종, 김용관, 강규찬, 고학 외 7명 등이 모여 남로당 제주도당을 구국투쟁위원회로 개편한 것으로 되어 있다.(제주의소리 2020.08.03.)
1948년 제주 4·3에 앞서 무장투쟁을 반대하고 무혈혁명을 주장하였으나 소장파의 무장봉기 주장에 밀리자 제주섬을 탈출하였다. 동년 8월 북한으로 잠임하여 해주(海州)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북한의 실상에 실망하고 마침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나자 남하하여 부산으로 잠입 은신중에, 4․3사건 발생 직후부터 수배중이던 조몽구가 부산 시내를 배회중이라는 정보에 접한 제주도 경찰국 사찰과에서는 1951년 9월 초순에 강 사찰계장 이하 3명의 형사대를 파견하여 염탐중 9월 30일 부산시 동강동 1가 노상에서 체포하였다. 이에 공개재판을 받아 8년형을 받고 진주형무소에서 복역 후 출옥하였다.(제주항일인사실기) 당시 조몽구의 체포 사실을 보도한 제주신보(1952년 5월 1일)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조몽구(趙夢九) 드디어 처형호(乎) / 당지 특무대서 본부에 압송 / 허 특무대장 담(談)
30만 도민의 기억도 새로운 본도 4ᆞ3사건을 전후하여 북한괴뢰의 지령 아래 소박한 도민을 기만 선동하여 살인 방화 약탈 파괴 등 천인공노할 갖은 만행을 감행하던 남로당 제주도 괴수 조몽구는 객년 9월 월남(越南) 부산 등지에서 배회 중임을 탐지한 본도 경찰국 사찰진에 검거되었음은 기보한 바이나 그 후 경찰에서 취조를 끝마치고 1건 서류와 함께 본도 육군 특무대(CIC)에 이첩 동 특무대에서는 그 동안 엄밀한 특수조사를 거듭하여 오던 바 이번 상부 명령에 의하여 특무부대 본부로 압송되었다고 한다.
탐문한 바에 의하면 근근 중앙고등군법회의에 회부, 최고형에 처할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이로 수많은 죄악의 발자취를 남긴 남로당 본도 최고지도책은 조명단석(祚命旦夕)의 한라산 잔비의 단말마의 아우성과 더불어 정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 같다.
이에 관하여 본도 특무대장 허세선(許世善) 소령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사건 취급에 있어서 왜 이러한 도민의 원흉을 조속 처단치 않는가 하여 일반의 의혹과 여론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나로서 결코 그 여론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차종건의 특수성에 비추어 신중한 취급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최후 처리 여하에 대해서는 아직 언급할 수 없으나 여하간 도민 소원에 어그러지지 않는 결과가 있을 것을 확신하는 바이다. 여사한 공산 극악분자는 물론 이 나라를 해롭히는 여하한 도배에 대해서라도 추호의 용납도 허용치 않는 것이 우리의 공통된 신조일 것이다."〉
그의 아버지, 아내 한정임(韓貞任), 어린 자녀 美燕(9살)·南哲(7살)·美根(4살)·南厚(2세) 등은 4·3 기간 동안 토벌대에 잡혀가 표선 바닷가 한모살에서 처형(處刑)되었다. 출옥한 조몽구 지사는 1971년 새로 성읍 출신 현두진(玄斗珍)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제사를 지낼 때에는 양푼 하나에 메를 올려 여러 개의 수저를 꽂았다고 전해진다.(제주항일인사실기)
제주의 소설가 오성찬씨는 1989년 실천문학사에서 출판한 그의 작품 《한 공산주의자를 위하여》에서 조몽구를 주인공으로 하여 글을 썼다. 본래 제목은 ‘어는 공산주의자에 대한 보고서’였다고 한다. 소설 속의 그는 고향에서 꿩을 키우고 사탕수수를 심으며 말년을 보내지만 평탄치 않아 일부 주민들에 의해 거리돌림과 뭇매를 맞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철저히 일본에게 당하고, 북쪽에서도 소외되고 남쪽에서도 버림받은 상태에서 세상사에 대해 일체 말을 않고 지내다가 1973년 12월 15일 사망하여 영주산에 조성된 성읍공동묘지에 제1호 피장자가 되었다. 자녀들이 모두 어릴 때 학살되었기 때문에 친족들이 무덤을 돌보다가 2006년 성산읍 수산리 4704번지에 가족묘지를 조성하면서 그곳으로 이장했다.
봉분 없이 평장으로 했는데 묘비에는 〈東權二子處士豐壤趙公夢九孺人淸州韓氏貞任之墓〉라는 글씨만 새겼고 옆면과 뒷면에는 아무 글씨도 없다. (묘역 안에 새로 세운 다른 비석에도 모두 뒷면에 글자를 새기지 않았다.) 앞 줄에 자녀들의 묘가 있는데 묫자리가 넓게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합장한 것으로 보이며 비석은 〈豐壤趙公夢九子女 趙美燕·趙南哲·趙美根·趙南厚之墓〉라고 하여 하나만 세웠다. 부친 趙東權의 묘비에는 (長男範九次□九〉라고 빈 자리가 있다. ‘夢’이라는 글자 들어갈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다. 미서훈.
《작성 2006.01.03. 보완 2021.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