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미사보다 더 큰 기도는 없기에
저는 1988년 8월 15일 성모님 승천 대축일에 33세의 나이로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세례 전 따끈했던 열정이 세례를 받고나면 더욱더 열정을 발휘해야 할 터인데 마치 졸업을 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조금은 쉴 때도 있었지만 이웃의 좋으신 형님 덕분에 견진성사까지는 어찌어찌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사를 다니며 교적도 몇 번 옮기고 지금 이곳 동림동에 왔습니다. 그저 뜨뜻미지근하게 마지못해서 신앙생활을 해왔는데 처음 제게 입교를 권하던 친구가 제 본당으로 전입을 왔습니다. 그러더니 2009년 10월쯤 꾸르실료를 다녀오라고 간곡히 권했습니다. 하지만 꾸르실료 입소가 허락 되지 않아 기다림 끝에 어렵게 꾸르실료를 다녀왔습니다.
꾸르실료를 다녀오기 전까지는 평일 미사가 있는지 없는지, 언제 어떻게 드리는 건지도 잘 몰랐습니다. 그저 주일 미사에나 빠지지 않고 지냈습니다. 나름대로 손재주가 조금 있어 성당에 손볼 곳이 생기면 처리하는 봉사를 하는 것이 신자로서 도리를 다 한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던 제가 꾸르실료를 다녀온 후부터는 레지오 마리애에도 입단하고 직장 근무에 지장만 없으면 평일 미사에도 자주 참여하려고 무척이나 애를 쓰며 살게 됐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7월 21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금요일 저녁 미사에 독서를 맡았는데 장례 미사로 저녁 미사가 취소됐습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면서 갑자기 장례 미사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야 할 일들을 서둘러서 끝마치고 성당으로 들어가니 연령회원들 숫자가 부족했던지 저를 본 신자분들이 기다렸다는듯이 어서 빨리 전례복으로 갈아입으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장례 미사를 참여하게 되면서 많은 것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고인(안강수 가브리엘)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주변 분들에게 고인의 연세가 저보다 서너살 더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미사를 드리는 동안 자꾸 눈물이 솟아올랐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장지까지 동행은 하지 않았지만 뭔가를 많이 묵상하며 돌아봐야 하는 미사였다고 생각하며 며칠을 보냈습니다. 이후 또 다른 장례 미사에 참여했습니다. 고인은 다리도 약간 불편한, 칠십이 다 되신 남편을 예비신자로 남기고 떠나가신 문선금 율리안나 자매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유가족들도 많지 않아 여러 교우분들께서 같이 장지까지 동행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또 한 번 많은 것을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극히 오묘한 방법으로 저를 이끄시어 미사 때마다 어떤 메시지를 주시고 계시는 것 같은데, 이 미련한 죄인은 아무것도 알아 차리지 못하며 헛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며 생활을 깊이 반성해 봅니다. 입으로는 “미사보다 더 큰 기도는 없답니다” 하고 떠벌리고 다니면서도 막상 레지오 마리애 회합에 가서 활동 보고를 하면 몇 번 참여를 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오로지 믿음으로만 알 수 있는 신비로운 방법으로 당신의 십자가상 죽음을 재현하시는 거룩한 제사인 미사에 오늘도 즐겁고 맑은 마음으로 나아갑니다.
세례 받은 지 30년이 돼 가고, 15년 넘도록 독서 봉사만을 해왔는데 2년 전부터는 미사 해설 봉사를 같이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미사에 참여할 때와 독서자로 참여할 때와 해설자로 참여할 때 각기 위치만 다를 뿐 어떤 자리에 있어도 편안한 주님 사랑 넘치는 좋은 시간을 영원토록 누렸으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