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촉즉발【一觸卽發】
조금만 닿아도 곧 폭발한다는 뜻으로 아주 하찮은 원인으로도 크게 터질 듯한 아슬아슬한 긴장 상태를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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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351)
한양 오 백리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러
이 큰 서울은 천읍을 거느렸네
天其玄兮地其黃兮(천기현혜지기황혜)
維此大都統千邑兮(유차대도통천읍혜)
하늘은 낳고 땅은 키우니
크나큰 성인은 만류를 기르시네
天其生兮地其遂兮(천기생혜지기지혜)
維此大聖囿萬類兮(유차대성유만유혜)
하늘은 높고 땅은 두터우니
이 땅 조선은 만년을 누리 오리
天其高兮地其厚兮(천기고혜지기후혜)
維此朝鮮齊萬壽兮(유차조선제만수혜)
남산 위에서 둘러보는 서울의 자연은 너무도 아름다워, 누구도 서울을 예찬하지 않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아름다운 서울을 굽어 살펴보면서도, 서울을 예찬하고 싶은 감흥은 손톱만큼도 생겨나질 않았다.
김삿갓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도 사랑해 오는 사람이었다. 자연을 사랑하는 까닭에 오늘날까지 줄곧 자연과 더불어 살아왔었고, 이제 앞으로도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갈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을 둘러싼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만은 아무 감흥도 느끼지 못함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그것은 새삼스레 말할 것도 없이 서울이라는 도시는 인정이 없는 도시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집집마다 대문을 꼭 걸어 잠그고 있으니 거기에 무슨 만남이 있고, 무슨 인정이 있을 것인가. 문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드나들기위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문은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통로(通路)>이기도 하다. 사람은 문을 통해 서로 간에 만남으로써 이해가 성립되고 인정을 주고받기도 한다.
그런데 서울 사람들은 낮이나 밤이나 대문을 줄곧 잠가 두어 누구도 만나려고 하지 않으니, 그것은 무인고도(無人孤島)에서 혼자 살아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옛날부터 식객(食客)을 문객(門客)이라고도 불러왔다. 아무 볼일도 없이 밥만 얻어먹고 가버리는 손님하고도 인정만은 나눌 수 있기에, 문객이라는 것은 인간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기에 예나 지금이나 어진 사람들은 문객들을 많이 길러 왔었다.
그 옛날 제(齊)나라의 공자(公子) 맹상군(孟嘗君)은 문객을 삼천 명이나 길러온 일이 있었다.
얼른 생각하기에는 그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맹상군은 후일에 그들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할 수 있었고, 또한 그들의 도움으로 크게 영달했으니, 양객(養客)을 어찌 쓸데없는 낭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서울 사람들은 저마다 고래같은 기와집을 쓰고 살면서도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밥 한 그릇을 먹이려고 하지 않으니, 그게 어디 사람이 할 짓이란 말인가.
서울 장안을 내려다보며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김삿갓은 문덕 뒤가 마려워 옴을 느꼈다.
그리하여 바위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 서울 장안을 내려다보며 뒤를 보려고 하니까, 별안간 방귀 한방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나왔다.
어젯밤 땅꾼 움막에서 과식을 한 탓인지, 방귀 냄새가 고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요란스러운 방귀를 한방 뀌고 나니, 속이 그렇게도 시원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김삿갓은 뒤를 보면서 다음과 같은 즉흥시 한 수를 읊었다.
남산에서 똥을 누니 방귀가 먼저 나와
향기로운 그 냄새 온 장안에 진동한다,
放糞南山第一聲 (방분남산제일성)
香震長安億萬家 (향진장강억만가)
그 시는 서울을 저주하는 서울과의 <이별의 시>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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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生九蹟>
인생엔 아홉 가지 기적(奇蹟)이 있고, 세상은 이를 일러 인생구적(人生九蹟)이라 부릅니다.
🔹️一蹟은
건강한 몸으로
태어나는 것이요,
🔹️二蹟은
좋은 부모형제를
만나는 것입니다.
🔹️三蹟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진정한 친구를 얻는 것이요,
🔹️四蹟은
마음을 모두 주고 싶은 진실한 사랑을 만나는 것입니다.
🔹️五蹟은
효성스런 자식을 얻는 것이요,
🔹️六蹟은
존경스런 스승을 만나는 것입니다.
🔹️七蹟은
비명횡사 하지 않고
천수(天壽)를 누리는 것이요,
🔹️八蹟은
평생 재물에 궁하지 않을 만큼 갖는 것입니다.
🔹️마지막 九蹟은,
죽음에 이르러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나는 것입니다.
<해인사와 추사 김정희 父子>
해인사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팔만대장경과 장경판전 등 국보 3점, 고려각판 등 보물 14점, 대적광전 등 지방문화재 13점을 보유하고 있다. 암자는 사명대사가 입적한 홍제암, 성철 스님이 도를 닦던 백련암, 해인사 창건 때 최초로 세운 원당암을 비롯하여 길상암, 약수암, 지족암, 국일암, 삼선암, 금선암 등이 있다.
해인사는 7번의 크고 작은 화재가 발생했지만, 팔만대장경판이 보존되어 있는 장경판전만은 피해가 없었다. 순조 17년 되던 해 1817년 대화재로 대장경을 모신 판전을 제외하고 수백 칸의 건물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이때 해인사 복원 불사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이가 당시 경상도 관찰사(현 대구 경상감영(監營)공원에서 근무)인 추사 김정희 아버지인 김노경(金魯敬)이다. 해인사 입구에는 <김노경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김노경이 해인사 복구를 위해 희사한 돈은 일만 냥이었다. 또 경상도 내 70여 현의 군수들로 부터 일만 냥을 모금하고 합천군수 서정보가 일천 냥을 시주하였다.
그리고 부족한 부분은 해인사 스님들과 신도들의 모금이 모아져 지금과 같은 해인사 모습이 복원되었다. 김노경은 해인사가 다시는 화마의 재앙을 당하지 않게 발원하면서, 1817년 아들 추사 김정희에게 가야산 해인사 복원 상량문을 쓰게 하였다. 당시 추사의 나이는 38세였다. 아직 추사체가 형성되기 전의 추사의 대표적인 해서체 상량문이 세상에 전해지게 된 연유이다. 추사는 불교의 해박한 이해를 바탕으로 상량문을 써 내려갔다.
추사의 상량문이 해인사 대적광전 대들보에 들어간 이후 해인사는 화마를 입지 않았다. 추사 부자의 간절한 염원이 해인사를 지켜온 수호신 역할을 한 것이다. <가야산 해인사 중건 상량문>은 가로 485센티, 세로 94센티 크기의 감청색 비단에 금니(아교풀에 갠 금박 가루)로 사경 하듯이 해서체로 써 내려갔다. 본문 글씨만 1195자이고, 제목과 연기부분까지 합치면 금니로 쓰여진 총 글자수는 1215자에 이른다.
1971년 해인사 대적광전 보수공사 때 대들보에서 발견되어 세상에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첫댓글 해인사 대적광전 대들보 상량문을 쓴 이가
추사 김정희임을 알게 되었으며
오늘도 인생구적(人生九蹟)을 새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드립니다~~^^&♡
해인사 상량문과인생구적을 배웁니다
고맙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해인사에
이러한 내력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김노경이 아버지,
아들 추사가 상량문을 썼군요.
아버지가 해인사 복원에 일만냥을...
감사합니다.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잘 읽고 공부도 잘 하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좋은 글과 함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녁시간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