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한국천주교 서울 순례길 1코스(2)
(명동성당∼가회동성당, 2023년 1월 12일)
瓦也 정유순
종로성당으로 가기 위해서는 종묘광장공원을 지난다. 종묘(宗廟)는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조선 왕조의 사당으로, 1394년(태조 3)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인 1395년에 완성되었다. 정면이 매우 길고 수평선이 강조된 독특한 형식의 건물로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의 기단과 처마, 지붕의 높이, 기둥의 굵기를 달리한 조선시대의 가장 장엄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며,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됐고, 1995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종묘 창엽문(蒼葉門)>
종묘광장공원에는 조선왕조의 도읍지를 한양으로 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삼봉 정도전(三峰 鄭道傳, 1337∼1398)을 기리는 시비(詩碑)가 있다. 1995년 서울 정도 600주년을 기념해 종묘 창엽문(蒼葉門) 바깥의 종묘공원 동쪽 끝에 세웠다. 시비에는 새로 건설된 수도 한양의 풍수지리적인 이점을 소개하고 한양에서 풍요롭고 평화로운 삶이 영위되기를 노래한 <진신도팔경시(進新都八景詩)>와 정도전의 부조가 새겨져 있다. 한양은 정도전의 구상으로 집 한 칸 한 칸 짓듯이 한양 전체를 완성했다.
<삼봉 정도전 시비>
종묘광장공원 건너 종로구 인의동에는 종로성당이 있다. 1955년 4월 10일 명동 본당에서 분리되어 설립되었으며, 초대 신부로 이계중(요한)신부가 부임하였다. 1944년 6월 12일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는 종로 지역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사목과 성화의 거점을 마련하고자 대지를 매입하였다. 한국전쟁으로 본당 설립이 되지 않다가 1955년 임시 성전을 건축하여 본당으로 설립되었다. 1961년 10월 성전을 신축하여 완공하였다가 1987년 5월 성당을 다시 신축하여 김수환 추기경의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종로성당>
<종로성당 내부>
좌포도청 순례지를 관할하는 종로성당은 2013년 2월 당시 주임이던 홍근표신부의 건의로 서울대교구장 대주교(염수정)로부터 포도청 순례지 성당으로 지정 받아 포도청 순교 성인들의 본당 수호성인으로 승인 받았다. 이에 2013년 순교자성월(殉敎者聖月), 포도청(옥터)순교자 현양관을 성당 내에 마련하여 순교자들의 신앙을 소개하고 지속적으로 미사를 봉헌하며, 포도청 순례지를 잇는 순례길을 안내하여 선조들의 신앙을 본받도록 힘쓰고 있다.
<한양순됴지 터>
<103위 성인도>
중구 광희동에 있는 <광희문>으로 가기 위해서는 을지로의 방산시장 앞을 경유 한다. 중구 주교동에 위치한 방산시장(芳山市場)은 인쇄 및 포장 관련 전문시장이다. 1945년 광복 이전에 작은 시장이었으나, 광복 직후 미군이 을지로6가 쪽에 주둔하면서 미군부대에서 유출된 각종 식료품이 거래되기 시작했고, 소위 ‘양키시장’으로 불리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 일대는 조선시대 청계천을 준설한 흙이 쌓이고 쌓여 지대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방산시장>
1396년에 건축된 광희문(光熙門)은 서울 성곽의 사소문 중 동남방향에 있는 성문으로, 지금의 장충단에서 한강으로 나가던 남소문(南小門)이 없어진 뒤 북쪽의 수구문(水口門)을 광희문이라고 불렀으며,‘광희’는 “빛이 멀리까지 사방을 밝힌다(光明遠熙)”라는 데에서 유래했다. 이 문은 서소문과 함께 도성 안의 주검을 성 밖으로 운반하던 곳으로 ‘시체가 나가는 문’이라는 뜻에서 ‘시구문(屍口門)’으로도 불렀다.
<광희문>
광희문을 통해 서울과 수원·용인 등 인근지역의 교우들이 도성 안으로 끌려 들어와 가혹한 고문 속에 배교(背敎)를 강요당하다가 끝내 이를 거부하여 치명(致命)의 길로 가야했던 생과 사의 갈림길이었고, 도성 안에서 참수당한 순교자들은 짐짝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광희문 밖으로 버려졌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망가졌다가 1975년 문을 남쪽으로 옮겨 문루와 함께 복원했다. 문 밖에는 <광희문 천주교순교자현양관>이 있다.
<광희문 천주교순교자현양관>
광희문에서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까지는 한양도성 순성길을 따라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흥인지문∼낙산공원∼혜화문을 경유한다. DDP는 복합 문화공간으로 2007년 12월 철거된 옛 동대문운동장 자리에 2014년 3월에 개관하였다. DDP의 특징은 역사적·문화적·도시적·사회적·경제적 요소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풍경을 창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규모는 대지면적 62,957㎡, 건축연면적 85,320㎡에 지하 3층, 지상 4층으로, 주요시설은 어울림광장·동대문역사문화공원과 알림 터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지도>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전경>
특히 1925년 일본 히로히토 왕세자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던 동대문운동장이 2007년 12월 철거작업을 시작하면서 매장된 유물들이 대거 출토되어 발굴된 유물을 보존, 전시하기 위한 역사문화공원을 2009년 10월 27일에 개장하였다. 부지면적은 6만 5232㎡이며, 주요 시설은 동대문역사관, 서울 한양도성(서울 성곽)과 이간수문(二間水門) 유적, 동대문운동장기념관, 이간수전시장, 이간수마당, 갤러리문(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대문운동장기념관>
<이간수문>
DDP에서 청계천 오간수교를 건너면 흥인지문이 나온다. 흥인지문(興仁之門)은 한양도성 8개 문 중 동쪽에 있는 문으로 일반적으로 동대문이라고 부른다. 1396년(태조5년) 도성을 지을 때 건립되었으나 1453년(단종 원년)에 다시 고쳐지었고, 지금 있는 것은 1869년(고종6년)에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새로 지었다. 특히 바깥쪽으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며, 조선 후기 건축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흥인지문>
<흥인지문과 DDP>
흥인지문 옆에는 흥인지문공원이 자리한다. 흥인지문공원(興仁之門公園)은 서울 종로구 종로6가에 위치한 공원으로, 한양도성 자리에 세워졌던 이화여자대학교 동대문병원과 인근 지역을 철거한 후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그 옆에는 한양도성을 전반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한양도성박물관이 있는데, 조선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양도성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박물관으로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자료실과 학습실을 갖춘 문화공간이다.
<흥인지문공원>
성곽을 따라 올라가면 낙산공원이다. 낙산(駱山)은 서울의 동쪽을 지키는 좌청룡(左靑龍)에 해당한다. 산의 모양이 낙타의 등을 닮았다 하여 낙타산으로도 불리는데, 한양도성의 동쪽 산으로 서쪽의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仁王山) 에 대치되는 산이며 산 전체가 화강암이다. 한양도성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남쪽은 전주작(前朱雀)인 목멱산(木覓山, 남산), 북쪽은 후현무(後玄武)인 백악산(白岳山, 북악산)을 포함하여 내사산(內四山)을 석성으로 연결한 도성이다.
<내사산 한양도성도-네이버캡쳐>
낙산에서는 북쪽으로 삼각산(북한산)과 보현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길게 병풍을 이루고, 동쪽 멀리 용마산이 보이며, 남산 너머로 관악산이, 인왕산 멀리 덕양산 등이 한양을 방어하는 외사산(外四山)이다. 그리고 이 외사산을 연결한 길이 지금의 서울둘레길이다. 한양 도성 중앙 남북으로는 북한산의 정기가 종묘에서 남산까지 연결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세운상가가 자리 잡아 그 맥을 끊어 놓았다.
<낙산에서 바라본 북한산>
한양도성은 축성시기에 따른 형태로 1396년 1월과 8월 태조 때의 축성은 산지는 석성, 평지는 토성으로 쌓았고, 성돌은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 사용하였다. 1422년 1월 세종 때 도성을 재정비하면서 평지의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으며, 성돌은 옥수수 알 모양으로 다듬어 사용하였다. 1704년 숙종 때부터는 무너진 구간을 여러 차례 걸쳐 성돌 크기를 가로·새로 40∼45㎝ 내외의 방형으로 규격화하여 성벽이 더 견고해졌다. 1800년 순종 때는 가로·새로 60㎝ 가량의 정방형 돌을 정교하게 다듬어 쌓았다.
<한양도성 성곽>
흥인지문에서 성 안으로 가다가 가톨릭대학교가 자리하고 있어 낙산공원을 지나서는 성 밖으로 나가야 혜화문으로 갈 수 있다. 동소문(東小門)으로도 불리는 혜화문(惠化門)은 1397년(태조5년)에 한양도성을 축성하면서 함께 세워졌다. 당시 북대문인 숙정문은 통행이 금지되면서 양주·포천 등 동북방면의 중요한 출입구였던 이 문을 처음에는 홍화문(弘化門)으로 하였다가 1483년(성종14년)에 새로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東門)과 이름이 같아 혼동을 피하기 위해 1511년(중종6년)에 혜화로 고쳤다고 한다.
<혜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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