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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3단계
출 24: 1-18
우리 하나님은 지금, 이 곳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드린 찬송과 경배를 받으신 것을 믿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
본문 말씀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행10:44-46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행10:44-46.
이 말씀은 고넬료라는 사람의 집에서 있었던 놀라운 사건에 대한 말씀.
당시 고넬료 집에는 고넬료 집안 사람들과 그가 초청한 친구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는데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셨다고 했습니다.
이 단어가 중요합니다.
“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저는 우리 교회에도 이러한 은혜가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성령이 내려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한 성도 여러분 모두에게도 성령이 내려오시게 되길 소원합니다.
그 날 고넬료 집에 참석한 사람들을 보면 고넬료나 그의 집안사람들은 은혜 받을 준비가 되어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넬료나 그의 집안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을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 그들은 이미 신실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일들을 하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어쩌면 그날 그렇게 은혜를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고넬료의 친구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고넬료가 한 번 와보라고 해서 와본 것 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도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성경은 그날 그 자리에 참석해서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예배도 그렇게 되길 소원합니다.
그날 그 자리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오늘 나는 분명히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오늘 예배에 참석한 모든 성도님들의 입에서도 그러한 소리가 나오게 되길 소원합니다. 성도님들이 예배당 문을 나갈 때 “오늘 나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라고 말하게 되길 소원합니다. 정말 간절히....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성경을 보면 그날 고넬료 집에 모였던 사람들은 위대한 결단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세례를 받겠다고...
그 당시 세례를 받기로 결단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결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엄청난 핍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얼마 전에 스데반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무런 잘못도 없이 단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감옥에 잡혀 들어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하고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결단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베드로의 설교 때문이겠습니까? 다시 말해 베드로의 설교가 명 설교라서 그들이 그런 놀라운 결단을 했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의 설교가 1차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러한 결단을 하게 만든 것은 베드로의 설교가 아닙니다.
베드로의 설교가 아니라 베드로가 설교할 때 설교를 듣는 자에게 누가 내려오셨다고 했습니까? 성령께서 내려오셨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말씀을 듣는 자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내려오셔서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움직이신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예배 중에도 성령께서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에게 내려오셔서 마음을 감동시키고, 마음을 움직이시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길 소원합니다.
찬송 중에, 기도 중에, 설교를 듣는 중에 성령께서 성도 여러분에게 임하셔서 여러분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마음을 움직이시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길 소원합니다.
예배 중에 임하신 성령의 감동과 역사로 말미암아 성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결단이 일어나게 되길 소원합니다.
성경 말씀을 믿지 못하던 사람들이 성경 말씀을 믿겠다는 결단이 일어나고...
자기 방식대로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결단이 일어나고...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고, 통회자복하면서 그 죄를 회개하는 결단이 일어나고....
좌절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소망을 얻고 다시 해보겠다는 결단, 다시 한번 열심히 살아보겠다는 결단이 일어나고....
주님을 위한 부담을 지는 것을 거부하던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 기꺼이 부담을 지겠다는 결단이 일어나고...
등 등 등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결단이 일어나게 되길 소원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예배가 이렇게 성령의 임재가 이루어지고, 성령의 감동이 있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예배가 되길 소원하며 오랫동안 기도하였습니다.
정말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많은 기도가 있었고, 많은 눈물이 있었습니다.
주님! 우리의 예배가 달라져야 하겠습니다.
예배 중에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주옵소서.
예배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 주옵소서. 우리의 예배가 변화되게 하옵소서.
정말 간절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때로는 안타까이 몸부림치면서 부르짖어 기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최근에 변화시킨 예배 형식은 그러한 저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의 과정이라고 믿고서 행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중에는 이렇게 질문하는 분들도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드렸던 전통적인 예배 형식 속에서는 성령님이 역사하시지 않으셨는가?
왜 안하셨겠습니까? 성령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이지요.
제가 예배 형식을 바꾼 것은 전에 우리가 드리던 예배 형식 속에서는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았기 때문에가 아닙니다. 저를 그 정도 수준의 목사로 보면 섭섭하지요.
그것이 아니라 좀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같은 예배를 드리더라도 좀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예배 중에 베풀어주시는 은혜도 좀 더 많이 베풀어주시고, 좀 더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 보면 새노래로 찬송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96:1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시98:1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대저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도다.
이 말씀 외에도 성경의 많은 곳에서 새노래로 찬송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요한계시록14장에 보면 사도요한이 천국을 보았는데 그 곳에서 구원함을 얻은 백성들이 보좌 앞에서 찬송을 부르는데 새노래로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14:3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습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습을 생각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조금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항상 듣던 노래만 듣는 것보다는 새노래를 듣고 싶어하듯이 하나님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부르는 찬송은 정말 훌륭한 찬송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부르는 대부분의 찬송은 100년 전, 200년 전에 만든 찬송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만큼 들으셨으면 이제 새노래도 불러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성가대에서 부르는 찬송 속에서 항상 은혜를 받지만 어떤 날은 정말 가슴이 뛸 정도로 은혜를 받는 날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찬송은 좀 자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가대에서는 아무리 좋은 찬송이라도 그 다음 주에 그 곡을 또 하지 않더라고요. 새노래를 연습해서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하나님께서 새노래를 좋아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식해서 그러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하나님보다는 성도들을 의식해서 새노래로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성도들을 의식해서 새노래로 하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찬송의 본래의 목적은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부르는 것이 아니고, 내가 즐기려고 부르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찬송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 들으시라고 부르는 노래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우리는 다윗처럼 새노래를 배워서라도 불러야 할 것입니다.
시144:9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열 줄 비파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일어나서 손을 들고 찬양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대위에 선 가수가 관중 앞에서 앉아서 노래하는 것 보았습니까?
무대 위에 서서 열정적으로 노래를 부르잖아요?
저는 우리의 찬송이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앉아서 찬송하는 것보다 일어나서 손을 들고 열정적으로 온 마음을 다해 찬송할 때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찬송가 가사도 그렇습니다.
어떤 가사로 하나님을 찬송할 때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더 기쁘게 들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사는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가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사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믿음을 고백하는 가사입니다.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사랑합니다. 그 것 뿐에요.
이런 가사가 담긴 찬송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과거의 찬송이 잘못되었고, 과거의 예배 형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실 수 있는 예배와 찬송을 드리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더 많은 은혜, 더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분명히 더 큰 은혜가 있습니다.
약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이렇게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듯이 더욱 큰 은혜가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지금까지 받은 은혜보다도 더욱 더 큰 은혜가 하나님께 예비 되어 있음을 믿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을 보세요.
오늘 봉독한 말씀을 보면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들이 세 부류로 나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3단계 은혜라고 이름을 부쳐보았습니다.
첫째 단계는 산 아래 평지에 있는 사람들이 받은 은혜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시내산 중턱까지 올라간 사람이 받은 은혜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시내산 정상에 올라간 사람이 받은 은혜입니다.
본문 내용을 살펴보면서 3단계 은혜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은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 머물러 있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시내산은 모세가 십계명이 새긴 두 돌 판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할 율법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산입니다.
16절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시내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산 위를 덮었다고 했습니다.
17절에 보면 산 위에 있는 여호와의 영광이 맹렬한 불 같이 보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산 정상에 불 같이 타오르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고 그 불을 구름이 감싸는 모양으로 구름이 산 위를 덮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감싸고 있는 구름 가운데서 부르셨습니다.
18절에 보면 모세는 그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40일 간을 하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 구름은 성령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성령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서 하나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소망하는 3단계 은혜입니다.
산 아래 평지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바라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첫째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종 모세를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짐승을 잡아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짐승의 피가 그들에게 뿌려졌습니다.
번제와 화목제를 예수님의 희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번제와 화목제가 되셨음을 믿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와 형벌과 저주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옮겨 버리시고 우리에게 용서와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리고 언약의 피를 뿌리시듯이 우리가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사신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신시켜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1단계 은혜입니다.
2단계 은혜는 산 중턱에까지 올라간 사람들이 받은 은혜입니다.
그들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70인이었다고 했습니다.
11절에 보면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고 했습니다.
2단계 은혜는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2단계 은혜 속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존재가 막연하지 않고 확실해집니다.
그러나 2단계 은혜는 하나님의 발과 발 밑을 본 정도입니다.
아직 하나님과 깊은 만남에 이르지는 못한 것입니다.
그래도 2단계 은혜에 들어가면 어떤 방법으로든지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 있기 때문에 신앙이 확실해집니다.
저는 고넬료 집에 모였던 사람들이 받은 은혜가 2단계 정도의 은혜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으며, 하나님께서 임하셨다는 구체적인 표시로 방언이라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저는 먼저 우리 교회의 예배를 2단계 은혜 수준으로 끌어올리기를 소원합니다.
예배 중에 하나님의 발치 정도만을 보는 한이 있더라도 분명히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예배드릴 수 있게 되길 소원합니다.
우리의 찬송과 기도가 하나님을 임재를 느끼면서 이루어지게 되길 소원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을 보면서 먹고 마셨듯이 우리의 일상생활이 하나님을 보면서, 다시 말해 하나님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삶이되길 소원합니다.
그러나 2단계에서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모세가 들어갔던 3단계 은혜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더 깊은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듣는 단계에까지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모세가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가서 40일을 보낸 뒤 산에서 내려왔는데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낫다고 했습니다.
얼굴에서 하나님에게서만 나오는 빛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모세가 들어간 3단계 은혜는 제가 꿈꾸는 목표입니다.
이러한 3단계 은혜를 성막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비교한다면....
1단계 은혜는 번제단이 있는 성전 뜰에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2단계 은혜는 촛대와 떡상과 분향단이 있는 성소에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3단계 은혜는 언약괘가 있는 지성소에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일반 백성들은 1단계 은혜에서 더 이상 더 큰 은혜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명한 사람만 2단계 은혜로 들어갈 수 있었고, 3단계 은혜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2단계 은혜, 3단계 은혜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누구나 2단계의 은혜, 3단계의 은혜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영적 등반을 하길 원합니다.
우선 목표는 2단계 은혜입니다.
성도 여러분이 예배 중에 하나님을 만나는 영적인 체험이 있게 되길 소원합니다.
이 예배당 문을 나갈 때 “오늘 내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길 소원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과 능력을 받는 예배가 되길 소원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이 저와 한 마음이 되어서 이 예배시간만이라도 전심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면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교회의 기도의 용사들이 매일 새벽마다, 저녁마다 이 11시 대예배를 위해서 부르짖어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의 예배를 2단계 은혜로 끌어올려주실 날이 곧 올 것입니다.
고넬료 집에 베풀어주셨던 은혜처럼 성령을 기름 붓듯 부어주실 것입니다.
3단계 은혜에 대한 비전과 그 과정 속에 있는 2단계 은혜에 대한 비전이 성도 여러분 마음속에 불같이 일어나게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언약과 예배
24: 1-18
1.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인과 함께 여호와에게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고
2. 너 모세만 여호와에게 가까이 나아오고 그들은 가까이 나아오지 말며 백성은 너와 함께 올라오지 말찌니라
3.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4.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 이 지파대로 열 두 기둥을 세우고
5.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6.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7.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9.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인이 올라가서
10.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11.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
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너로 그들을 가르치려고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
13. 모세가 그 종자 여호수아와 함께 일어나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며
14.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기서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기까지 기다리라 아론과 훌이 너희와 함께하리니 무릇 일이 있는 자는 그들에게로 나아갈찌니라 하고
15.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며
16.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육일 동안 산을 가리더니 제 칠일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17.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
18.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사십일 사십야를 산에 있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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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서는 구약 제사 제도를 통하여 예배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지난 시간까지 모세언약의 대표격인 십계명과 그 뒤에 나오는 계약법전(약자보호법)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제 출24장부터 제사 제도에 관한 말씀이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제사제도에 나타난 예배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제사 제도가 성경의 계시의 흐름상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계속 말씀 드리지만 성경의 계시는 조각난 단편이 아니라, 계시가 점진적으로 유기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발전해 오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즉 모든 말씀은 앞뒤가 서로 이유있게 연결되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 제도에 관한 이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십계명과 계약법전(약자보호법)의 말씀을 주시고, 왜 그 뒤에 제사제도에 관한 말씀을 주셨는가 하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할 줄 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앞에서 주어진 율법의 의의에 관해서 다시 한번 더 생각을 해야 한다. 즉 율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 백성으로서 살아야 되는 삶의 도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24장 3절에도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말씀대로 살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하겠다고 모세와 하나님께 고백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때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모세가 언약의 피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뿌리는 것이다.(8) 그러면 이 언약의 피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여기서 나타난 언약의 피는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죄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상하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대로 살겠다 하나님께 고백했는데, 왜 모세가 속죄를 상징하는 언약의 피를 뿌렸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말씀대로 살겠다고 모두 고백을 하지만 결국 그들은 그 말씀대로 항상 살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예견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죄지을 것을 미리 예견하시고 속죄의 피를 뿌려주신 것이다(결국 출32장에 보면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받으러 갈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으로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뿌려진 속죄의 피(언약의 피)는 25장부터 나오는 제사 제도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 모든 제사의 제도의 핵심은 24장에 뿌려진 속죄의 피의 의미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피는 유월절의 피와도 조금은 구분이 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유월절의 피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구원받은 것을 상징한다. 유월절의 피는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를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뿌려진 속죄의 피는 그런 의미도 포함하지만, 이 피는 특히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교제와 예배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백성들이 매일 드리는 제사에 나타난 속죄의 피는 매일 매일 구원을 되새기는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속죄의 피를 인하여 죄지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교제와 예배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다시 율법의 의미를 한번 더 정리해보겠다.
율법이란 두 가지 기능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의 도리를 나타내 준다.
또한 그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와 속죄의 필요성을 요청케하는 기능이 있다(롬7장). 오늘 말씀에서 언약의 피가 뿌려지는 것은 바로 이런 후자의 의미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받았고 지키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율법대로 살지 못할 때가 많다. 율법은 그들의 죄를 지적하고, 죄를 드러나게 해준다. 그럴때 그들은 제사 제도를 통하여 그 죄에 대한 속죄를 받고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사 제도의 계시사적인 의의이고, 이것이 예배의 의의이기도 하다. 그러면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할까?
먼저 생각할 것은 예배를 드리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할 것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리고 난 다음 우리가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할 것 인지를 생각해 보자.
그러면 우리가 예배를 드리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1.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제사 혹은 예배에 대해서 잘못 오해하는 것은, 그것이 속죄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타내기 때문에 예배 전에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배전의 삶보다도 예배 자체만 잘 드리면 된다고 오해하기 쉽다. 심지어는 우리가 예배 전에 죄를 많이 지으면 그 죄 때문에 예배 시간에 더 큰 하나님의 속죄를 경험하고, 더 은혜스러운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초대 교회 당시의 율법폐기론자들의 생각이었고(롬6장1), 지금의 구원파의 생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제사의 제도와 율법을 지키는 문제는 상호보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즉 제사의 제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대로 살려고 하지만 죄를 지을 때 속죄해 주는 기능을 함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는 것이다.
제사(예배)를 드리기에 앞서서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 있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여러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특별히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지적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선지자들은 예배에 있어서 삶이 뒷받침해 주지 않는 예배를 예배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 이사야는 참된 마음이 수반되어지지 않아 생활속에서 표현되어지지 않는 제사(예배)는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고(사1:12), 오히려 하나님께 무거운 짐이며(사1:14),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사1:24)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같은 기름이 아니라,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미6:6∼8). 예배에 앞서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그런데 이점에 있어서 선지자가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예배(제사)를 위한 삶에 있어서 특히 가난한 자를 돌아 보지 않는 삶을 선지자가 통렬히 비난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찾아보자.사1:10∼17,23(렘5:28,슥7:10)
그러면 왜 선지자가 예배 전의 삶에 있어서 특히 가난한 자를 돌아보라는 약자보호법을 그렇게 강조할까? 그것은 참된 예배(제사)란 본질상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51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예배)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7)"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우리가 가난한 자들을 멸시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것은 하나님앞에서 내가 저 가난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필요한 자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산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어디서 구원을 얻게 되었느냐를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마5장에 나타난 산상수훈에서도 예배 전의 우리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성경을 찾아보자.
마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예배를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여기서는 예배를 드리기 전에 먼저 형제와 서로 하나가 된 후에 예배를 드릴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예배를 드리기 전 뿐만 아니라, 성경공부모임을 하기 전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여러분은 예배나 성경공부모임을 가질 때마다 형제와 다툰일 또는 사이좋지 않은 문제를 모일 때마다 그 전에 해결하고 모임을 가지려고 하는가? 우리는 예배는 자주 드리고, 모임은 자주 가지면서, 그 전에 해결해야 할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단순히 인간관계에 대한 문제라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인간관계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예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내어 준 출애굽 이후의 예배는 개인주의적인 차원을 뛰어넘어, 공동체적이고 대중적인 차원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의 제도를 제정하실 때, 우리가 하나가 되어서 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기를 바라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우리가 예배에 있어서 하나됨을 이루어야 할까? 그것은 에베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몸의 원리때문이다. 즉 에베소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와 능력이 그의 몸인 교회에게로 흘러오고, 또 그리스도의 몸에 임하여진 은혜의 충만함이 이 세상 가운데로 나타난다는 것이다(엡1장).
그런데 이것을 에베소서에서 설명하고 난 다음 2장에서는 하나됨을 강조한다. 왜 하나됨을 강조하는가 하면 우리가 서로 하나되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함이 각 지체들에게 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 아무리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함이 전하여 진다고 해도 우리가 서로 하나되지 못할 때, 그 은혜의 충만함은 우리에게 온전하게 전달되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예배나 모임을 가질 때 진정한 하나됨을 이루어야지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다가도 형제와 다툰일이 있고, 사이좋지 않은일이 있다면 반드시 그것을 해결하고(용서하고)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2. 그러면 예배를 드릴때 어떤 자세와 정신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1) 하나님의 이름을 감사하며, 찬송하는 마음과 자세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성경을 찾아보자.
시69:30,31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기뻐시게 함이 될 것이라”
여기서 시편의 기자는 하나님께 대한 찬송과 감사의 예배가 황소로 제사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말은 동물로 드리는 제사의 가치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또한 이 말은 예배에 있어서의 의식이 중요치 않다는 말도 아니다. 오히려 동물의 제사들의 목적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송이라는 것이다. 시편과 그 밖의 많은 성경에서 제사의식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그 당시의 제사가 단순히 형식에 그쳐서 참된 예배의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이다.이러한 것을 설명해주는 것이 시50편이다.
성경을 찾아보자.
시50:7∼15 “8내가 너희 제물을 인하여 책망하지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제사의 제물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14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이스라엘백성들은 제물을 하나님께 대한 뇌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많은 제물을 드림으로서 그들이 하나님앞에서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은 것처럼 생각했다. 이것은 가나안땅에서의 바알제사에서 볼 수 있는 요소이다) 14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15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우리의 예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예배에 있어서도 먼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감사한 마음과 찬송이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만을 가지고 찬송할 수 있다(이름과 형상의 차이, 찬양 경배송).
2)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한다.
이상에서 우리는 예배를 드리기 전에는 예배에 합당한 삶의 모습이 있어야 된다고 했다. 그러나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결코 우리의 의를 가지고 나아가서는 되지 않는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주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야 한다.간혹 예배를 드릴 때 2가지 종류의 사람을 보게 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하나님 저는 이렇게 착하게 잘 살았습니다. 이러한 저의 모습을 받아주시고 칭찬해 주시옵소서!"라는 마음으로 예배에 임하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삶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자신이 도무지 하나님 앞에 나아올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도무지 설교를 들을 자격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제는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부담스럽고, 죄스럽다. 그래서 아예 예배를 드리거나, 말씀을 듣는 자리를 피한다. 이러한 두 사람은 결국 모두 자기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결국 그 사람은 자신의 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못 나아가겠다는 것이다.(물론 우리가 예배를 드리기 전의 삶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의로운 모습이 필요하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는 그 순간에는 그것이 필요없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대로의 삶이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잘 산 모습"을 가지고 주님앞에 나올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언약의 피)를 의지하여 담대하게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야한다.
바울을 살펴보자
히10장19∼25 19“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 나니(바울 처럼 의롭게 산 사도도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20그 길은 우리를 위하려 휘장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21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양심의 기능,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 또한 자신의 의로서 하나님 앞에서 나아가려는 기능-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23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하심을 굳게 붙들고)24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예배전의 우리의 모습) 25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 수록 더욱 그리하자(하나님께 혼자서 나아가지 말고 같이 나아가자-공동체적 요소
출처: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