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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3-15
나를 굴복시키소서. / 이윤재 목사
요즘같이 어려운 때 제일 듣기 좋은 덕담이 있습니다. “부자 되세요”. 우리도 한번 해 봅시다. “부자 되세요”. 여러분은 부자되기를 원합니까? 어떤 사람이 부자되는 확실한 방법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 부자 아버지밑에서 태어나면 된다. 둘째 부잣집 무남독녀와 결혼하면 된다. 셋째 이름을 부자라고 지으면 된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부자의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까?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구별짓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부자는 많이 가졌고 가난한 사람은 가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많이 가지면 영적인 부자고 영적으로 적게 가지면 영적인 가난뱅이입니다. 여러분은 영적으로 많은 것을 가졌습니까? 만일 지금 많이 갖고 있지 않아도 좋습니다. 앞으로 가지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영적으로 많이 갖고 영적인 부자가 될 수 있습니까?
저는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영적인 부자로 축복하시는 방법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말씀에 주목하시면 여러분은 하나님 안에서 가장 강한 자, 가장 큰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강을 넘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의 첫 번째 도시 길갈에 도착했습니다. 길갈이 정확하게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성경학자의 의견이 엇갈립니다. 대체적인 의견은 지금의 여리고에서 동쪽으로 약 3킬로 정도 떨어진 아랍지명 키르벳 엘 메프질입니다. 이곳에 가면 지금 아랍사람이 살고 있고(그림 1), 과거에 이곳이 중요한 곳이었슴을 보여주는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그림 2-3).
그 길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 가지를 했습니다. 먼저 요단강을 넘은 것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둘째 어린 양의 죽음으로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기억하는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피로 계약을 맺는 할례를 거행했습니다. 이중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 세 가지는 가나안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세 가지 준비였습니다. 이제 다 마쳤습니다. 육상경기로 말하면 출발신호를 기다리며 허리를 숙이고 있는 선수와 같습니다. “땅”하기만 하면 질풍처럼 달려 여리고로 진격하면 됩니다. 아, 그런데 하나님은 아직도 준비가 끝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갑자기 여호수아를 부르시더니 이렇게 말씀합니다.
수5:15,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내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이미 모세를 통해 호렙산에서 말씀한 바 있습니다. 호렙산 떨기나무 앞에서(그림 4)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자 가까이 갔을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했습니다.
출3: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여러분, 신을 벗는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지금도 이스라엘에는 비포장도로가 많습니다. 하물며 오늘 말씀이 기록된 주전 3500년전인 모세, 여호수아시대에는 어떠했겠습니까? 비가 오지 않는 메마른 비포장도로를 터벅터벅 걸어 다니는 백성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발에 먼지가 많이 묻어 있겠습니까?(그림 5) 지금 보이는 저 신발은 옛날 이스라엘 사람이 신고 다닌 실제 신발이었습니다. 가죽으로 된 신발을 양말도 없이 신고 다닌 사람들, 예수님도 아마 저런 신발을 신고 다녔을 것입니다. 저런 신발을 신고 하루 종일 다니다가 집으로 오면 온갖 먼지와 오물이 신과 발에 가득 묻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인이 냉큼 나와 대야에 물을 담아 발을 닦고 수건으로 닦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나마 저 신발을 벗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온갖 돌로 가득한 험한 길을 신발없이 다닌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돌부리에 채이고 가시에 찔리고 뱀에도 물릴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에게 신발을 벗는 것은 곧 자기를 버리는 것, 자기 권리를 포기하는 것, 마땅히 자기가 누릴 권리를 양도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길갈 평지에서 여호수아에게 네 발에 신을 벗으라 하는 뜻이 무엇입니까? 지금이 어떤 상황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길갈에 진치고 가나안 정복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때입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여호수아가 양각나팔만 불면 여리고로 진격할 때입니다.
그때 “네 발에 신을 벗으라” 했다면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누가 명령했는가도 중요합니다.
여호아의 군대장관입니다. 여호수아도 군사령관인데 그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군대장관이 나타나서 “네 발에 신을 벗으라”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포기하라는 말입니다. 그만 두라는 말입니다.
무엇을 그만 두고 무엇을 포기해야 합니까?
작전권입니다. 지휘권입니다. 명령권입니다. 군통수권입니다.
본래 여호수아의 것이던 군지휘권을 내놓으라는 말입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전쟁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시점을 주목하십시오. 지금 여리고 전쟁을 앞둔 시점입니다. 가나안의 첫 전쟁인 여리고 전쟁이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네 발에 신을 벗으라”. 너는 이제 어린아이처럼 신발을 벗고 나를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 할 때도 애굽과 싸우기 전이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애굽과 싸울테니 모세, 너는 나만 따르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굴복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굴복은 하나님 앞에서 나를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왜 복종시켜야 합니까? 우선 내가 약하기 때문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약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악합니다. 내 속에는 죄된 육신의 소욕, 곧 옛사람의 성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의 본성이 있습니다. 이 본성을 다른 말로 하면 “자기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동물에게도 자기 사랑의 본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기 사랑은 동물보다 훨씬 더 의도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에도 속박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은 부패한 마음의 태도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정욕”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믿고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이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그러면 회개가 무엇입니까?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옛 성품을 다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기를 사랑했던 자기 중심적 삶의 태도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 중심적 태도로 방향을 바꾼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돌아올 때 우리 속에 있는 옛 성품이 다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방향만 바꾼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되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와서 해야 할 일은 끊임없이 자기를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 자기를 굴복시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기를 굴복시키는 과정은 이렇게 일어납니다. 먼저 성령의 조명이 있습니다. 내가 나를 스스로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자기 사랑의 강한 독버섯이 내 속에 깊히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나에게 성령의 조명을 비춥니다. 언젠가 어느 호텔에서 목회자 조찬기도회가 있었습니다. 괜찮은 호텔이었는 데 얼마나 카페트가 깨끗하고 우아한지 파리의 베르사이유궁전에 온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도회를 마치고 나가는 데 호텔밖에서 햇빛이 카페트에 비쳤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카페트위로 햇빛이 비치자 뿌연 먼지가 하얗게 비쳤습니다. 그렇게도 깨끗하던 카페트에 그렇게 많은 먼지가 있는지 미쳐 몰랐습니다. 기도회전과 기도회후에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햇빛이 비쳤을 뿐입니다. 햇빛이 비치자 먼지가 드러났습니다.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있었던 것인 데 햇빛을 통해 뒤늦게 드러난 것 뿐입니다. 그때 제가 사64:6절 말씀을 깨달았습니다. 사64:6,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그렇습니다. 성령님이 비치면 우리는 부정한 자요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음을 알게 됩니다. 내게 죄가 없어서 안 보인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조명이 없기 때문에 안 보입니다.
문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님, 나를 비춰주소서. 내가 내 죄를 깨닫도록. 내 죄가 너무 많아 바라보기 괴로울지라도 성령님, 비추소서”.
성령님이 우리를 비추면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내 죄를 깨닫는 일이 있고 다른 하나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했던 작은 일이 죄였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앞으로 사는 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관건은 성령의 조명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결심하거나 행동하는 만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역사하고 성령의 빛이 우리 안에 비친 만큼 달라집니다.
언제나 개인이나 공동체의 부흥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굴복시킨 사람들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기폭제가 된 영국 웨일즈 부흥운동이 그랬습니다.
영국교회 부흥은 당시 영국 교회 목회자, 교회 지도자들을 통해 일어나지 않고 가난한 한 신학생인 이반 로버츠를 통해 일어났습니다.
이반 로버츠는 1904년 가을학기를 앞두고 학교 근처에 있는 작은 기도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기도모임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력한 임재를 느꼈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죽고 피흘리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자 엎드리자 성령이 그를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성령님이 비추자 그는 그 자신안에 있는 죄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가 거꾸러졌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주여, 나를 굴복시키소서”. 이 기도가 훗날 영국교회 부흥운동의 구호가 되었습니다(다같이). 그는 성령의 강력한 임재앞에 자신을 굴복시키지 않으면 나중에 엄위하신 하나님의 심판대앞에 설 수 밖에 없으리라는 강력한 충동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후로 그는 오직 한 가지만 생각했습니다. “주여, 나를 굴복시키소서. 지금 굴복시키소서. 지금 굴복하지 않으면 마지막 날에 심판대앞에 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때부터 이반 로버츠는 하나님께 쓰임받기 시작했습니다.
18세기 프랑스의 영성가 잔느 귀용은 하나님 앞에 굴복하고 사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분께 나아갈 때는 연약한 아이처럼 가라. 온통 때가 묻고 상처투성이인 아이, 연거푸 넘어져서 다친 아이처럼 가라. 혼자서는 전혀 무기력한 사람으로 주님앞에 가라. 스스로 깨끗하게 할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그분앞에 가라. 흐르는 눈물 로 사랑하는 아버지앞에 가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평생 하나님 앞에 굴복하겠습니까?
연약한 어린아이처럼, 때묻고 상처투성이인 어린아이처럼, 넘어져 다쳐 우는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가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사랑하시고 그 사람을 위하여 대신 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성경의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같이 단점투성이였다.
▶두 번째는 그래도 하나님이 쓰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굴복했기 때문이다.
보십시오.
노아는 술취한 사람이었고,
야곱은 거짓말쟁이였습니다.
요셉은 감옥에 있었고,
모세는 말을 더듬었습니다.
기드온은 겁이 많았고,
삼손은 바람둥이였습니다.
라합은 기생이었고,
디모데는 몸이 약했습니다.
다윗은 간음했으며
엘리야는 우울증 환자였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피해 도망했고
욥은 모든 재산을 잃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고
제자들은 도망갔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귀신들었고
사마리아 여자는 스캔들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삭개오는 키가 작았고
바울을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사용했는 데 그 이유는 그들이 모두 하나님 앞에 굴복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할 때 두 가지가 중요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우리의 단점을 보지 않는다.
▶둘째로 다만 보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굴복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입니다.
그래서 평생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여, 나를 굴복시키소서”(반복).
그런데 하나님 앞에 굴복하는 신앙적 태도는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속한 질서와 다른 사람에게도 해당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보면 그들은 모두 권위에 복종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며 그 일에 충성했습니다.
다윗은 아버지 이새에게 복종했고 아버지가 형들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라고 하자 그대로 했습니다.
다윗은 심지어 평생 그를 죽이려고 쫓아다녔던 사울에게도 복종했습니다. 다윗의 위대한 리더쉽은 수많은 세월 복종을 통해 연단된 것이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복종했습니다.
롯은 나오미에게 복종했고,
에스더는 아버지같은 모르드개에게 복종했습니다.
모르드개 자신도 왕에게 복종했습니다.
다니엘은 이스라엘을 정복한 정복자 바벨론 느부갓네살과 벨사살왕에게 복종했고 그 후의 페르시아 왕에게도 충성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남의 나라에서 술 관원으로 일하면서 페르시야 왕 아닥사스다에게 복종했습니다. 느헤미아는 심지어 왕앞에서 얼굴에 수심도 보인 적이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성경의 인물치고 반항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쓰임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치고 권위와 부딪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문화는 어찌된 일인지 반골(叛骨)을 훌륭하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권위에 반항하며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숭배하고 추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쓰신 사람중에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 반항적인 데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 쓰시려고 하면 반드시 하나의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실패와 고난의 터널입니다. 실패와 고난의 터널을 통하여 마치 세차장을 통과하는 자동차처럼 반골적이고 반항적인 기질이 깨끗하고 부드럽게 되어야 하나님이 쓰십니다.
그 고난의 훈련에 있어 성공한 사람도 있고 실패한 사람도 있습니다.
야곱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야곱은 본래 반골적이고 반항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쓰시기 위해 하란에서 20년간 고생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거기서 나는 놈위에 뛰는 놈을 만났습니다. 외삼촌 라반입니다. 라반은 여러 가지 면에서 야곱보다 한 수 위였습니다. 야곱은 모자란 형을 속였지만 라반은 머리좋은 야곱을 속였습니다. 야곱은 팟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빼앗았지만 라반은 레아를 라헬이라고 속여 야곱을 7년 더 일하게 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 앞에 양털을 뒤집어 쓰고 한번 거짓말했지만 라반은 야곱에게 품삯을 열 번이나 번복했습니다.
“라반”은 히브리어로 “great, 크다, 위대하다”라는 뜻입니다. 라반은 기는 놈위에 나는 놈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가끔 우리를 훈련시키기 위해 라반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그 라반을 원수처럼 보지 말고 우리의 스승으로 보아야 우리가 삽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쏙썩는 사람들은 대개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머리좋은 사람들은 더 머리 좋은 사람을 만나 속을 썩습니다. 말 잘하는 사람들은 더 말 잘하는 사람을 만나 사기를 당합니다. 파당적인 사람들은 더 파당적인 사람을 만나 스스로 소외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망하게 하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훈련시켜 살리시려고 그렇게 하십니다. 대개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나하고 같은 사람들입니다. 눈뜨고 보면 기분나쁘지만 눈감고 기도하면 감사합니다. 왜? 그를 통해 나를 보고 그를 통해 돌이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20년 실패와 고난을 통해 깍이고 다듬어졌습니다. 그리고 얍복강에서 마지막으로 부숴져 결국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그가 12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12지파의 아버지가 된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자기의 반항적이며 반골적인 기질을 하나님앞에 깨뜨리고 굴복시켜 12지파의 아버지, 곧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야곱은 성공했으나 삼손은 실패했습니다.
삼손의 일생을 보면 불순종과 반항의 역사였습니다. 그 부모가 그를 낳고 간절히 기도한 것을 보면 부모가 가르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책임은 삼손에게 있었습니다.
삿14:3절만 예로 봅시다. “삼손이 아비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를 데려오소서 하니”.
삼손이 여자문제로 복잡하고 그나마 부모의 마음을 근심시켰는 데 이번에도 말합니다.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그를 데려오겠습니다”.
여러분, 크리스쳔 결혼은 좋다고 데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의 타락은 눈에 보기 좋은 대로 하는 데 있습니다. 내가 보기 좋아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기 좋아야 결혼하는 것입니다. 이때 삼손의 부모가 얼마나 말렸겠습니까? “그 여자는 불레셋 여자요 하나님도 믿지 않으니 아들아 그렇게 하지 말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 여러번 말렸을 것입니다. 그래도 삼손은 고집을 부렸습니다. ”아니, 내가 좋아하는 여자를 데려오겠다는 데 왜 그리 말들이 많아요?“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두 눈이 뽑힌 채 짐승처럼 맷돌을 돌리다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반항의 결과였습니다.
▶여러분은 “압살롬”하면 누가 생각이 납니까?
치렁치렁한 머리칼에 잘생긴 모습이 생각납니까? 나무에 걸린 채 요압의 창에 찔린 불쌍한 사람이 생각납니까? 아버지의 권위와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아 압살롬은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여러분은 “사울왕”할 때 무엇이 생각납니까?
얼굴이 준수하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한 자나 큰 잘 생긴 왕이 기억납니까? 전쟁터에서 자살한 후 블레셋 사람들에게 목 베임을 당해 벧산 성벽에 못박힌 불행한 최후가 생각납니까? 모두 불순종때문이요 반항심때문입니다. 가정이나 교회나 회사나 나라에서 불순종하고 반항하면 공동체가 시끄러워집니다. 복종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말을 하여 다툼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잠19:3절입니다.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
잠21:9절입니다.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잠26:21절입니다. “숯불 위에 숯을 더하는 것과 타는 불에 나무를 것같이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시비를 일으키느니라”.
직언과 무례함은 다릅니다. 직언은 필요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하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먼저 해야 합니다. 자신이 동의할 수 있는 직언이어야 남도 수긍합니다. 소신과 고집도 다릅니다. 소신은 남을 살리기 위한 충정에서 나오는 것이고 고집은 자기 주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직언만 좋아하고 고집만 부리면 왕따가 됩니다. 잠18:1절 말씀이 예리합니다.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뉘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니라”.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서로 복종해야 합니다. 자기가 속한 가정, 직장, 교회, 국가의 질서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도 살고 공동체도 삽니다.
미국 택사스에 미식 축구를 아주 잘하는 고등학생이 있었습니다. 너무 뛰어나서 천재적인 선수라고 불렸습니다. 많은 대학에서 스카웃 하려고 코치와 접촉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코치가 추천을 잘 안하는 것이었습니다. 스포츠 기자가 물었습니다. "저렇게 뛰어난 선수를 코치께서 추천을 잘 안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코치가 말했습니다. ”그가 뛰어난 기량을 가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좋은 선수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과연 이 선수가 어떤 대학에 들어 갔는 데 거기서 그만 두고, 다른 곳으로 갔는 데 거기서도 쫓겨났습니다. 끝내 학위를 받지 못했고 선수로 대성하지 못했습니다. 기자가 옛날 코치를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그때 코치께서 추천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코치가 말했습니다. “저는 그가 그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그에게는 다 있는 데 하나가 없었습니다. 권위에 대한 복종입니다. 그는 늘 반항적이고 자기 중심적이었습니다. 그것을 고치도록 했는 데도 고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고치기 전에는 그가 성공할 수 없슴을 저는 알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서로 복종하십시오.
엡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자녀들은 부모에게 복종하십시오.
학생들은 교사에게 복종하십시오.
직원들은 고용주에게 복종하십시오.
교인들은 교회에 복종하십시오.
국민들은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십시오.
그들이 잘못되면 기도하고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이 다루실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도 서로 복종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께 복종했고 성령은 아들에게 복종했습니다. 하나님이 서로 복종했는 데 우리는 오죽하겠습니까?
가장 복종해야 할 사람들이 부부들입니다.
몇 년 전에 좋은 책이 나왔습니다. 제목은 “아내여 항복하라”입니다. 미국의 로라 도일이라는 여자가 쓴 책인 데 이 책을 쓴 로라 도일은 본래 여성주의자였습니다. 의식도 강했고 의지도 강했습니다. 그는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다고 믿었고 따라서 모든 일에 있어서 남편과 동등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잔소리를 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끊임없이 남편의 단점을 지적하고 충고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아내가 지적을 많이 할수록 가정은 행복하지 않았고 남편은 더 나빠졌습니다.
뒤늦게 그는 남편이 잔소리로 달라지지 않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슷스스로 깨닫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하, 남자는 말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존경받을 때 변화되는구나”. 그래서 그때부터 남편을 존경하고 복종했답니다. 그때부터 남편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존 그레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자는 인정받지 못하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 행동을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 남편은 인정받고 존경받을 때 변화되고 여자는 사랑받고 이해받을 때 변화됩니다. 남자든 여자든 서로 항복할 때만 항복합니다. 내가 남에게 항복하면 그도 나에게 항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행복합니다.
그래서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의 구호가 있답니다. 여러 형이 있습니다. 박정희형 남편: 나는 아내를 행복하게 하기 위한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햄릿형 남편: 아내를 위해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데카르트형: 나는 아내만을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제퍼슨형: 아내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케네디형: 아내가 나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바라지 말고, 내가 아내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생각하라. 사무엘형: 내가 아내 사랑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치 아니하리라. 베드로형: 내가 아내와 함께 죽을지언정 결코 아내를 부인하지 않으리라. 이렇게 서로 복종하면 행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 평생 하나님 앞에 자신을 굴복하고 살겠습니까?
요단강을 넘은 이스라엘 백성과 여호수아처럼 길갈 그 평야에서 먼지묻은 신을 벗고 겸손히 맨발로 서겠습니까?
평생 연약한 아이처럼, 때 묻고 상처 난 아이처럼 내 모습 이대로 하나님께 굴복하고 그만 따르기로 결심합니까?
하나님께 복종하는 심정으로 내가 속한 질서속에서 복종하고 섬기기로 다짐합니까?
가정에서, 부부간에, 부모에게, 직장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그리고 이 어려운 나라에서 자기 주장을 버리고 온전히 복종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바랍니까?
항복하여 행복하겠습니까?
그 결심을 가진 사람에게 다음 주에 여리고는 무너지고 굳게 닫힌 성은 문을 열고 무서워 떠는 자는 담대해져서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을 받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