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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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0 16:52
물빛40집원고 (정해영)
하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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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정해영
사랑은
받지 않아도 줄 수 있는 것
꽃핀 나무 그림자 속에는
그 꽃의
색깔과 모양과 향기가 들어 있지
사랑 하는 마음은
나무 그림자의 꽃에 대한 기억
같은 것
사랑을 섣불리 말로 그리려 하면
깎아 놓은 사과처럼 변색하지
말없이 등을 내밀어
너를 업는다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너의 심장이 닿는다
사랑인 줄도 모르는 채
너를 들쳐 업은 일
사랑은 몰라도 줄 수 있는 것
원래
너의 앞이었던 나의 뒤
그 벌판 같던 등
하나면 충분하지
마음이 닿았던 자리
정해영
우연히 펼친 책 속
그녀의 언어가 내 마음을
대신 해 주는 것 같아
밑줄을 그었다
마음이 닿았던 자리
저울이 빈 원을 그리다
가리키는 눈금 같은
그곳
햇빛과 바람과 초록의 눈부신 생기
피어나는 쪽이 아니라
꽃이 진 다음
잎이 다 떨어진 뒤에도
바람은 왜 부는가의 문장에서
오래 머물렀다
폭풍우 속에서
오직 흔들리지 않는 나무는
죽은 나무라고
사계절 바람을 보내는
그분께
매일 매일 흔들리는
그림자로
꼬박꼬박 답장을 쓴다는
그녀 때문에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문득
없다가 생긴
흰 구름덩이에 밑줄을
그었다
기차가 밀어내는
정해영
기차를 타고
미 대사관에 비자 받으러 가는 길
차창 밖
천천히 물들어 가는 나무는
지난여름
무성한 푸른 잎 점령군처럼
너울거렸을 때
마른 낙엽의 날
예감 했을까
가벼워 질 것은 가벼워지고
꺾일 것은 꺾이고 있는 나무
배어 나오는 빛
붉으레하다
높은 가지의 나뭇잎도
낮은 가지의 나뭇잎도
떨어지면 같은 바닥
사흘 뒤
미국으로 출국해야 할
내 급한 사정이 슬그머니
속도를 늦춘다
기차가 밀어내면
또 다가오는 느긋한 풍경
고함지르는 햇볕에게도
발목 잡히지 않는다
마음의 역
정해영
내 마음의 역사에는
작은 매표소 하나 있다
사람을 만날 때
마음 한 조각 떼어
내미는 말 한마디가
차표 한 장
수레국화 바퀴 달린 말
우산버섯의 말
꽃같이 붉고
뿌리처럼 단단한 말
한 장씩 들고 오르는 기차
먼 길 가깝게 한다
종착역은 다르지만
닿고 싶은 사람에게 내리는
마음의 역
속을 보이며 겉을 보이며
함께 가는 길
그 사람의 가을비가
바닥 적시는
호젓한 산길 같고
깊은 골짜기 같은,
비가와도 눈이 와도
문을 닫지 않는 매표소
따뜻한 말
주고받는 중이다
수국의 무게
정해영
새벽 아파트 정원에
목수국을
꺽으러 간다
빈 병 같은 마음
수국의 웃음으로
채우고 싶어
떨리는 손이
몇 가지 꽃을 꺽어
돌아 서려는데
새 한 마리
이쪽을 쳐다보다 얼른
고개를 돌린다
종이가방에 담아가는
꽃송이 무게 보다
새에게 들킨 마음이 더
묵직하다
꼭꼭 숨긴 속을
누가 다녀가는 것 같다
연한 속대 같은
새의 눈길이
사람보다 더 가슴을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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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빛40집원고 (정해영)
꽃나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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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3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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