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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숙미론
- 세계를 실은 무게보다 더 무거운 실존의 이유 -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한 사람의 양모良母는 백 사람의 교사에 필적하기에, 위고는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하다”라고 하였다. 천지간 모든 동물에 있어서 고양이로부터 인간의 여성에 이르기까지 어머니의 마음은 항상 숭고하다. 최숙미는 지고한 삶의 양태를 가진 크리스천으로 인생이란 의미를 깊이 반추할 수 있는, 위엄과 당당한 기운이 돋보이는 작가다. 그래서 그녀가 써내는 수필의 궁극적 가치는 올곧은 생의 가치와 동일할 수밖에 없다. 문학의 가치는 즐겁고 행복한 삶의 추구에 있다. 그러한 삶의 추구는 반드시 아름다운 모성의 바탕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녀는 미처 발견하지 못해 드러나지 못한 진실을 찾아내어, 진정한 삶의 가치를 세상에 알리고 후세들에게 전하기 위한 전제로 이 수필집을 엮는다.
수필집 <전전반측할 적마다>는 어머니의 삶에 대한 이해의 한 형태가 아닐까. 최숙미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여성으로서 자신은 과연 어떻게 살아왔고 또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명제일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최숙미의 수필은 모성적 원리에 기반한다고 하겠다. 이는 자기 삶의 지향성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 같은 인간의 가장 큰 관심사와 명제의 해명을 위하여 노력해왔던 기저에는 작가가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살며 경험한 일제강점기 전전반측한 어머니의 너무나도 측은한 인생과 무관하지 않다. 아버지는 공산당이 되지 않고 숨어다니다가 가족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어 일경에 자수하여 마산형무소에서 형을 마쳤고, 고문 탓인지 온몸이 진창이 되어 평생 약골로 살다가 소천했는데, 먼저 가신 아버지를 그리는 어머니의 사부곡이 절절하다고 하였다. 또한 이런 처절함을 삭이면서 그녀의 어머니가 두루마리에 작품을 써왔다는 점에서 최숙미의 문학가적 운명은 어머니의 문필가적 삶과 맞닿아 있다. 여기에 더하여 그녀는 수필창작을 통해 이런 어머니의 치열한 삶을 미적 형상화 차원으로 고양시키고 있어 눈길을 끈다.
좋은 수필이란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체험과 세련된 정신세계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수필의 가치 척도는 여기서 출발한다. ‘가치 있는’의 성질은 문학의 보편성을, 가치 있는 체험은 구체성을, 세련된 정신세계는 날선 인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문학적 형상화는 활어로 디자인된 감각적 표현을 뜻한다. 문학적 성취를 이룬 글이라면 이런 기준을 충족시켜야 마땅하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삶의 창조적 내포를 담고 있는 참신한 의식이 작품 속에 넘실거려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최숙미의 <전전반측할 적마다>에 실린 수필들은 이런 준거를 충족시키고 있다고 하겠다. 지난날 한국의 여성들에게 생활의 즐거움과 그 가능성이 허용된 것이 있다면 오직 그것은 자식을 키우는 일밖에 없었다. 근 마흔 편의 엄선된 글들은 모두 가족과 가정이란 키워드에 기반하여 ‘여성적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절절한 물음에 진실하게 응답하는 수필이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가장 가깝고 먼, 가장 정답고, 가장 사랑하는 존재 중의 존재다. ‘어머니’라는 관념은 최숙미에게 있어서 사랑이라거나 따뜻함을 뜻하는 것이기 전에 더욱 절대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어머니’는 생명을 보호해 주고 있는 것, 생존의 방법 그것이었다. 김남조의 말처럼, 어머니는 부르면 지체없이 격렬한 전류를 내보내는 분이었다. 이러한 차원에서 보면 최숙미와 문필가 어머니는 함께 삭막한 도시적 기계의 틀 속에서 인간을 구원해 내고자 하는 작가적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할 수 있다. 삶의 문제에 맞닿아 있는 자아 성찰적 작가가 시간의 길에서 만난 문학혼을 어떻게 수놓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수필의 숲에서 만난 생의 연금술이 지닌 힘이 어떨지 사뭇 궁금하다.
1. 자외선 같은 섬세한 궁휼의 선율
천칭의 한쪽 편에 세계를 실어 놓고, 다른 한쪽 편에 최숙미의 어머니를 실어 놓는다면 세계의 편이 더 가벼울 것이다. 여성에게는 본능적인 모성애가 있다.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에는 누구도 그 무엇도 침범할 수 없는 아름답고 위대한 정이 녹아 있다. 부모라도 본능적인 사랑만으로는 자녀를 잘 키울 수 없다. 의지의 힘이 감정과 합쳐져 모성애를 다듬어 넓은 인성의 폭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본인의 마음이 맑지 않고서는 올바르게 자식을 인도할 수 없다. 어머니 자신이 총명하고 어질고 굳센 의지를 용감히 나타낸다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좋은 감화를 줄 수가 있다. 탈무드는 ‘송아지가 안전하면 어미소는 위험하지 않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알을 낳은 새가 아니라 알을 부화시킨 새를 말한다. 최숙미 문학에서 없어서는 안 될 키워드는 ’어머니‘요, 필요한 정서가 있다면, 그것은 ‘모성원리’일 것이다.
최숙미 수필의 풍경은 앞으로 전개될 분석적 틀에서 잘 드러나겠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면, 고독한 정신의 사유가 호수 위를 스쳐 가는 바람처럼 잔잔하게 그려져 있고, 자외선 같은 섬세한 모정이 물결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문학성을 안겨 주기 위해 내출혈에 가까운 진한 고백을 진솔하게 펼치는가 하면, 내면의 풍경을 그림 그리듯이 감각적으로 구체화한다. 이렇듯 수필을 모성성의 전통 위에서 현대적 감각으로 감싸안는다. 소설가 특유의 표현 기법은 독자에게 산뜻하면서도 시원한 정감을 안겨 준다. 그녀의 수필은 진한 문학성을 생명으로 하고 있기에 분석적 가치가 있다. 그 모성원리의 전개 속에서 독자는 편안함과 평화로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헌신과 희생으로 구축된 여자의 일생은 그 자체가 힘들고 고통스런 정서를 대동하고 있다. 이런 작가를 위요한 전통적 환경이 최숙미 문학의 한 특징인 모성성의 씨앗을 잉태했다고 하겠다.
문학성이란 말이 상당히 막연한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주제와 구성 그리고 표현의 공감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실존의 이유’는 공감의 지름길이라 할 수 있다. 어떻든 수필은 공감의 문학이기 때문에 멋과 맛뿐만 아니라 반드시 향기를 지녀야 한다. 또한 작품과 작가는 일치해야 한다. 수필적 삶의 진실이 그대로 자신의 수필 속에 투영될 때, 향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수필 쓰기를 삶의 한 행위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수필이 정보나 사실의 나열이거나 말장난이 아니라는 사실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올 굵은 석 세 삼베 치마 어머니 시름 내 심정 긴 이랑에 뿌려 놓고 종소리 나도록 지붕에 올라 박꽃으로 핍니다. 한밤을 뒤척이다 돌아눕는 베갯머리 손 시린 일생 위에 목메던 목숨인데 하얀 등 하나 어스름에 탑니다.’라는 최숙미 어머니의 글 한 대목은 어머니의 문필가적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세로로 흘려 쓴 단어마다 묵향을 풍기며 문학적인 언어들이 수를 놓아 규방가사로서 손색이 없을성싶다.’고 한 최숙미의 코멘트는 국문학 전공자다운 품격을 드러낸다. 그녀의 수필은 삶의 진실과 글의 진실이 같음을 증명한다. 일상을 조탁하는 정서의 힘이 멋을 한껏 우려낸다고 하겠다. 수필 <전전반측할 적마다>를 보면, 우리는 그녀가 어둠 속에서도 환히 피어나는 피안의 세계를 가진 작가라는 걸 알 수 있다. 오랜 방황과 거친 역정의 파도를 넘어섰기에, 자신의 모습을 진정한 자아의 영토에서 낮출 수 있는 겸허의 작가다.
‘올 굵은 석 세 삼베 치마 어머니 시름 내 심정 긴 이랑에 뿌려 놓고 종소리 나도록 지붕에 올라 박꽃으로 핍니다. 한밤을 뒤척이다 돌아눕는 베갯머리 손 시린 일생 위에 목메던 목숨인데 하얀 등 하나 어스름에 탑니다.’
어머니가 유품으로 남기신 두루마리 글 중의 일부다. 일제강점기에 학교를 못 다니고 외할아버지 사랑채에서 익힌 언문이 다였지만 어머니는 분명 문장가였다. 세로로 흘려 쓴 단어마다 묵향을 풍기며 문학적인 언어들이 수를 놓아 규방가사로서 손색이 없을성싶다. 도시 지식인들과는 반세기가 늦은 듯하지만 나름으로 언문을 익히고 글을 써서 당신 인생의 흔적을 두루마리 글로 남겼다.
어머니의 글에 나오는「전전반측」에 오래 머물렀다. 누워서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뜻이다. 바라만 봐도 흐뭇한 장녀 출가시켜 자식 넷에 어우렁더우렁 잘 살 줄 알았건만, 젊은 나이에 남편을 병으로 잃고 설워하는 장녀 생각에 전전반측한 날을 쓰고 또 쓰시었다. ‘병환 중에 있는 우리 현서 *고풍참알채라고 하급 관리들도 서너 번이나 간다는데 장모가 뭐가 해롭다고. 눈 떠 있을 때 못가 본 게 철천지한이라.’라고 하신다. 어머니 성품으로 병중에 있는 사위를 보러 가는 것조차 신중하셨던 회한이 눈물겹다.
- <전전반측할 적마다> 중에서 -
그녀는 시린 마음으로 어머니의 한스런 삶을 두루마리 글을 통해 훑어보고 지켜보는 고독한 작가다. 세월의 그늘에서 어머니 두루마리 글을 정리하고 한 권의 책으로 펴낼 오늘까지 오랜 기다림에 매달려왔다. 최숙미의 문학세계를 이루는 가장 두드러진 그림자 형상은 존재에 대한 짙은 추구와 가시지 않을 짙은 향기다. 이는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만의 독특한 정서라 하겠다. 그러기에 그녀는 ‘펜 잡을 힘도 없는 손으로 이별을 고한 어머니의 쪽지 글은 볼 때마다 목이 멘다.’고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어머니 가시고 두루마리 글을 생전에 옮겨놓지 못한 게 가장 아쉽고 죄송하다. 내가 늦깎이 작가가 되고 보니 어머니의 글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았다. 어머니가 문학에 열정이 얼마나 컸던가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정신이 혼미한 때였으니, 꿈에라도 오시면 어머니의 문학에 대한 열정을 존경한다”고 고백하고 싶어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기를 표현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드러낸다. 많은 수필 중 상당수 작품이 정신적 ‘궁’의 상황에서 생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녀야말로 눈물의 습기를 통해 황홀한 기적을 만나는 작가다. 수필을 씀에 있어서, 작가는 한 작품이 실존적 불안이나 죽음을 표현하든, 소시민적 생활의 애환을 그리든, 병든 사회에의 저항과 분노를 나타내든 간에, ‘문학성’ 속에 그 대상을 용해하고 있다. 원고지 사각의 모서리가 어머니의 두루마리 같이 느껴질 정도의 외로움 속에서 그녀는 감각의 촉수를 갈고 닦았으리라 본다.
짙은 외로움을 동반하고 있는 이 작품은 최숙미 어머니가 문필가로서 살아왔던 시간 중에서도 고독한 향기가 서려 있던 시간들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수필의 특성 중 하나가 자조적 성격이다. 수필은 자기 자신의 내면을 보는 것과 같다. 수필 <전전반측할 때마다>에서 작가는 전통적인 우리네 어머니의 자식을 향한 모정의 충만된 삶에 초점을 둔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정신이 온전할 때 두루마리 글을 정리하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한다. ‘여섯 살 된 언니가 나와 함께 홍역을 앓았단다. 심한 정도는 나였으나 언니가 갑자기 죽었다고. 어머니가 달이 뜨면 ‘둥근 달 계수나무 아래 우리 아이가 잠들었을까. 달빛은 우리 아이에게도 비추느냐.’며 목을 놓아 우셨단다. 밤낮으로 언니의 무덤을 찾아가던 어머니 때문에 어르신들이 몰래 무덤을 다른 곳으로 옮겨버렸을 정도였다고. 나마저 잃을세라 애를 태웠는데 아무것도 먹지 않던 내가 구운 갈치는 받아먹어 얼굴에 살이 오르고 살아났단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 아버지의 전전반측한 세월에 살아난 내가 위안이 되었을까. 첫 수필집 출판기념회 때 큰언니가 눈시울을 붉히고, 함께하지 못한 어머니는 내 수필집을 세 번 네 번 읽으며 보물 다루듯 하시었다. 홍역으로 잃을 뻔한 아이를 품듯이.’했다고 하는 대목은 진실을 넘어 큰 울림을 준다. 최숙미 어머니는 진정한 어머니였던 것이다. 작가는 이 수필에서 어머니의 위대한 삶을 문학의 끈으로 묶는다. 그 운명의 사슬이나 속성에 탐닉하며 고독한 정서를 드러낸 것이다.
요양원에서 근무하는 분들은 어르신들의 어린애 같은 투정이 귀엽기만 하단다. 우리더러 일주일마다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남편은 그럴 수는 없다며 꼬박꼬박 다닌다. 나도 불평하지 않는다. 이 정도도 못할까 싶어서다. 지금은 당신이 우리 몰래 그곳을 찾아간 줄 알고 갈 때마다 어떻게 알고 왔냐며 반색을 하신다. 어머님은 저희 손바닥 안에 계신다고 맞장구를 쳐준다. 처음엔 니들이 나를 버렸냐며 날마다 소동을 벌였지만.
치매 앓는 부모님을 집에서 모시다가 운명하신 분의 자식들이 부럽다. 남들이 인정하는 효도를 해서인지 당당해 보여서다. 우리는 불효라는 돌을 또 맞은 듯 기가 죽는다. 부모 섬기기를 다하라는 선인의 말이 왜 옳다 여기지 않겠는가. 고려장을 시켰다고 비난받아도 어쩔 수 없었다고 해명하면 또 돌을 던지실까.
- <또 돌을 던지실까> 중에서 -
모든 것이 구족된 환경에서 문학은 설 자리를 잃는 법이다. 욕망이 좌절되고 꿈이 상처를 입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정서가 생겨나는 것이다. 작가가 풀어내고 있는 이야기보따리는 눈물의 범벅이다. 그녀는 ‘남편이 어머니 모시고 꽃구경시켜 드린 사진을 SNS에 올렸더니 몇몇 분들이 댓글로 돌을 던졌단다. 노모 요양원에 보낸 게 자랑이냐. 고려장 시켜 놓고 무슨 짓거리냐. 더 많은 글이 있었지만 읽지 않고 지워버렸단다. 뭇매에 화가 나기도 했겠지만 저들보다 더한 고통에 다 읽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분들의 말 틀리지 않지만 치매 노인 집에 모시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임도 인정할 일인 것을.’하며 시어머니를 98세가 될 때까지 모시면서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단지 부모를 요양원에 모신다는 그 이유만으로 한때 접한 남편의 SNS상 ‘돌팔매질’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치매 앓는 부모님을 집에서 모시다가 운명하신 분의 자식들이 부럽다.’라고 자조 섞인 회한을 풀어놓는다.
회억되는 치매 어머니에 대한 이해와 해를 넘기는 긴 투병 끝에 날마다 소동을 벌였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사모곡이 되어 작가의 가슴에 남아 있다가, 최숙미로 하여금 ‘궁’의 상황에서 얻은 ‘한’의 정서로 수필을 쓰도록 요구한다. 무릇 작가는 무지개를 좇아가다가 놓쳐버린 소녀의 안타까움을 지녀야 한다. 진실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남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행위나 사회적 분위기에 대해 ‘또 돌을 던지실까’라는 말로 어필하고 있다. ‘남편도 돌 던진 분들 못지않게 효자다. 지인들은 나더러 외며느리가 효자 아들 따라 사느라 애쓴다고 위로한다.’는 대목으로 자신들 나름의 효도를 의미화시킨 수법이 대단해 보인다. <또 돌을 던지실까>는 ‘진실은 연착하는 기차와 같다’는 말을 실감나게 하는 작품이다.
꺼이꺼이 울었다. ‘춘래불사춘’ 봄은 와도 봄이 오지 않았다고 울었다. 꽃피는 아침 약도 먹고 연분홍 볼 터치도 해보건만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오늘도 내일도 병신같이 잘할 텐데 울었다. 봄꽃 지고 대궁 실한 여름꽃이 필지라도 울어버렸다. 무작정 산으로 갔다. 봄꽃은 어찌 그리도 지질맞게 흐드러졌는지. 춘래불사춘이야. 입을 벌리고 봄바람을 먹어도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남편의 전화가 실시간으로 울렸다. 오늘만 울게 내버려 주라. 제발.
맘을 추스르고 우리의 의식에 임했다. 남편과 허리를 감고 곳곳에 붙여 놓은 성경을 읽었다. 다행스럽게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를 되찾았다. ‘춘래불사춘’이라고 울었던 때와는 다른 눈물이 흘렀다. 서로가 안쓰러워 눈길을 피하고 손에 힘만 주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시어머니는 요양원으로 모시고 날마다 먹을거리를 준비해서 시누이 병원으로 갔다. 냉면 얼음이 녹을세라 눈썹을 휘날리며 달렸고, 살짝 구운 쇠고기를 기름장에 적셔 입에 넣어주는 재미로 병원을 다녔다. 오래 사니 참 좋단다. 죽음을 아는 모양이었다.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 평생 언니 소리 한 번 못 들어 봤지만, 시누이가 아니라 친동생이 되어갔다. 몇 올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늘이고 빨간 털모자를 쓸 때면 대학생 때처럼 맑아서 애틋했다. 황소고집이 병상 세례까지 받았으니 그만한 게 또 어디 있을까.
- <춘래불사춘> 중에서 -
이 작품은 작가가 병마로 고통스럽게 간 치매 어머니와 시누이를 돌보고 간병하며 비롯된 오해와 진실을 확인하며 특히 힘들었던 시누이 간병 사연을 들려주는 글이다. 평생 언니 소리 한 번 해주지 않던 시누이가 입원해 있는 병원을 오가며, 생의 마지막을 향해가는 그녀의 모습을 안타깝게 그려내면서 작가는 죽음을 준비하는 자의 바람직한 모습과 환자를 두 명이나 돌봐야 하는 가정의 애환을 보여준다. 동시에 효가 희미해져 가는 시대에 자식으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을 다하는 것인지를 반성적 성찰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인간이 겪어야 하는 심리적 불안과 애환을 어찌 “집안에 풍파가 시작될 때 슬퍼할 수는 있어도 절망은 하지 말자고, 절망은 절대자의 언어가 아니라고 내가 큰소리를 쳤었다. 지극히 감성적인 교만이었다. 절망은 내가 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들의 한계에 부딪치며 넘어졌다. 손자 돌도 못해주는 삶이 억울했다. 감정조절이 되지 않고 없던 혈압이 치솟았다. 분노 조절이 되지 않아 애민 이들을 들이받았다. 희생할 수 있다고 설겅설겅 불러대는 찬양과 좋은 글들이 다 같잖았다. 너희가 게 맛을 알아”라는 이 인용문보다 간병과 돌봄의 고통을 더 절절하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절제된 감정으로 비통하기 그지없는 안타까움을 잘 다스려 서글픈 정조를 아프게 터치하고 있는 부분이 공감을 자아낸다. 인간적 향기가 묻어나는 글이라 할 수 있다. 중증 인지장애를 바라보는 과정에서 생기는 어머니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시누이에 대한 상념은 인간사의 허망함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것이 신변 소재가 문학수필로 승화된 이유다.
병마로 고통스러워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오래 지켜봐야 했던 최숙미에게 어머니의 소동과 지인들의 오해는 형언할 수 없는 아픔으로 각인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 돌을 던지실까>의‘장애가 있는 시누이는 결혼을 안 한 터라 병간호가 우리 부부 몫이었다. 과거 병력 때문에 보호자를 한시도 자리를 비우지 못하게 했다. 시어머니 주간보호센터 차 태워드리고 병원 가서 남편과 교대해야 하는데 또 바람처럼 나가버려 기어이 폭발하고 말았다. 제발 우리도 좀 살자고 소리를 질렀다. 시어머니의 분노가 골목을 찢었다. 겨우 차에 태워드리고 내 증세가 심상찮아 병원에 갔다. 머리가 터질 듯 아프고 한쪽 뺨과 입술 주위로 거미줄이 쳐진 듯 스멀거렸다. 혈압이 180을 육박했다. 시누이 병간호에 시어머니 치매까지 정신과 육체가 견뎌 낼 재간이 없었던 것 같았다. 남편은 내 눈치까지 보느라 119를 몇 번이나 탔다.’는 표현은 폭발적인 정서적 환기를 불러일으킨다. 서러운 심사를 적절한 표현으로 처리한 대목에서 작가적 역량을 엿볼 수 있다. 다음의 진술은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문학적 광기가 느껴지게 하는 대목이다.‘시어머니의 분노가 골목을 찢었다. 겨우 차에 태워드리고 내 증세가 심상찮아 병원에 갔다. 머리가 터질 듯 아프고 한쪽 뺨과 입술 주위로 거미줄이 쳐진 듯 스멀거렸다.’고 쓴 부분에서 현상의 추상성을 개념으로 설명하기보다는 구체화로 묘사하려고 노력하는 작가정신을 만날 수 있다. 언어의 디자이너를 연상케 할 정도로 최숙미의 글은 실감과 함께 상상력을 주면서 손맛을 느끼게 한다. 격정의 순간을 절제된 품격으로 승화시켜내는 저력도 좋았다. 그녀는 우리의 몸과 마음에 신선한 바람을 채워주는 작가인 것이다.
2. 물무늬같이 얼룩진 그리움의 숨결
최숙미는 영롱한 빛살들로 가득 찬 그리움의 세계를 가진 작가다. 최숙미 문학을 이루는 또 하나의 견고한 줄기는 근원에 대한 본능적 편향성, 친정 부모님으로의 지향성, 그리고 오빠에 대한 믿음과 이해다. 그 그리움과 이해의 귀착지는 친정, 오빠와 올케언니가 가꾸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흔적이 남아있는 유년의 고향집이다. 이 책의 타이틀 ‘전전반측할 적마다’는 어머니의 두루마리 글에서 따온 것이다. 작품 하나하나에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정서가 없는 게 없다. 한마디로 절절한 사모곡이다. 사모곡뿐만 아니라, 사부곡의 습도도 흥건하다. 이는 그녀만의 독특한 정서라기보다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 수필들이 귀소본능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직조되고 있다. 어떤 경우든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순수 지극한 정성, 고향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작품 <다시 친정> 이 입증한다. 오빠와 올케언니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주제의식은 부재한 부모님의 삶을 그리는 데에 더 초점이 모아져 있다.
사람들은 물질적 변혁만 이루면 인간이 안고 있는 모든 아픔이 허물을 벗고 한순간에 환한 모습의 꽃으로 피어날지 모른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눈에 드러나는 현란함은 한때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완전한 행복의 실체는 아니다. 물질만으로는 생명을 틔울 수 없고, 진정한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무한대의 ‘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최숙미의 수필적 정서는 이러한 패밀리즘과 토포필리아에서 비롯된 인간적 향기라 하겠다. 최숙미 수필세계가 보여주는 또 다른 한 모습에는 부부애의 따스함이 스며나고 있으며, 진솔한 고백적 자책감이 반성적 성찰의 원리로 승화되어 순진무구한 인정의 미학으로 구축되어 있다. 수필 문학이 지닌 특징 중의 하나는 개인적 체험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가공하지 않고 사실을 그대로 노출시킨다는 점이다.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되는 것은 그 소재가 특별해서라기보다 작가의 진솔함이 표현에 뿌리내려 있어서일 경우가 많다. 최숙미 수필의 최대 강점은 체험의 진실성이요, 솔직한 감정의 표백에 있다. 이것이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할 뿐만 아니라 수필문학으로서의 가치와 문학성을 담보해 준다고 하겠다.
다음날 집 둘레를 둘러보며 엄마 아버지의 손때 묻은 흔적이라도 있을세라 눈길이 바빴다. 우물물은 사용할 수 없으나 우물가 꽃밭에 망울지는 명자꽃을 보며 엄마를 추억했다. 단감 잎이 떨어지면 가시겠다던 엄마의 단감 자리는 소각장이 되었다. 단감이 주인을 잃었으니 그도 살 의미가 없었을까. 오빠의 집 개조에 단감 자리도 포함됐으니 수긍할 수밖에. 아버지의 정갈한 마당은 주차장이 되고 마당가엔 엄마의 장미와 도시에서 온 꽃나무들이 움을 틔운다.
뒤꼍을 둘러친 구멍 숭숭한 낮은 돌담에 반색했다. 작년에 살았던 담쟁이넝쿨이 어그러지는 돌담을 끌어안고 있었다. 아버지의 거친 손을 만지듯 돌담을 문질렀다. 나라의 위기에 휘말려 인생을 제대로 펼쳐 보지도 못하고 사신 아버지는 꾹 다문 입술로 돌담을 쌓고 마당을 쓸었다. 돌담 틈틈이 잔돌을 박으며 헛헛함을 달래시던 아버지의 거친 손이 보이는 것 같고 돌담 너머로 우리를 부르는 어머니의 순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점심 먹으러 오이라. 띠포리 몇 마리 넣고 김치국밥을 끓여놓았을까. 빼떼기죽이라도 쒀 놓았을까. 장독대 자리를 돌아왔으나 어머니의 부엌은 없다. 어머니의 부엌이 없는데 무슨 죽 타령을 하랴.
- <다시 친정> 중에서 -
인간에게 소중한 것은 자신의 삶이 갖는 의미에서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다. 그 충족의 기쁨 없이 삶은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살아있는 것만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엄숙하게 운명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씀에 기인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무엇에 의지해 자기를 지탱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다. 적막이라도 따뜻하다면, 차라리 괜찮은 것이다. 이 역설의 낯설게 하기가 주는 미학은 그녀를 무한한 포용성의 얼굴을 가진 작가로 부각시킨다. 이 수필은 부모님을 여의고, 오빠가 자리를 잡은 고향집에 가서 살아생전 부모님의 흔적을 찾고 그리움을 품어내는 상황 제시를 통해 부모님의 삶을 다시 반추하는 글이다. 사랑하는 한 사람의 일상사에 담긴 추억이 긍정적이며 낙관적인 인생관과 버무려져 탄생한 것이어서 공감을 준다.
죽음이란 일상사의 비극에서 출발된 슬픔들이 노정된 이 글에는 부모님을 향한 그리움의 정서가 풍성하다. 수필은 인간적 삶의 소중한 경험이요, 수필가는 그 경험의 전파자라는 걸 되새겨준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잔잔한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 끈끈한 혈연의 연대라는 것을 이 수필은 말해준다. 순수한 연모와 향기 나는 우정보다 더 가치롭고 아름다운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오빠 언니가 더 늙기 전에 아버지의 담장을 만지듯 두 분이 꾸미는 친정에 손때를 묻히고 정담을 나누는 날이 잦았으면 좋겠다. 올케언니는 아무 때나 오란다. 어머니의 음성 같다. 친정집에 이런 말이 오가지 않는다면 친정일 수 없지. 친정집이라는 인생의 희락 한 자락을 느긋하게 펼쳤으니 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라는 멘트가 살짝 가슴을 찌르면서, 여운의 맛을 준다. 이런 맛이 있어 문학성이 생겨나고 공감도가 형성되는 게 아닐까.
동네 관할 순찰차는 시어머니 전용이 되었다. 길을 잃을 때마다 아무나 붙들고 순찰차를 불러달라고 한단다. 함박같이 웃으시며 요즘 순경들은 아주 친절하더라고. 열 손가락 지문도 다 찍어갔다. 전국 어디를 가도 찾을 수 있단다. 하루하루 시어머니와의 신경전에 우리 부부는 지쳐갔다. 치매 어른 돌보는 일이 장기전이라는데 어디까지가 장기전인지. 남편은 머리가 쏜다며 병원을 다니고 나는 대상포진까지 앓았다.
그 와중에 나팔꽃도 병이 들어 잎사귀가 누렇게 떴다. 마치 우리의 희망이 누렇게 떠버리는 것 같아 안달하며 약을 뿌리고 물을 줬더니 겨우 새순이 나왔다. 제법 잎사귀를 키우고 줄기를 뻗치며 나팔꽃 커튼이 되어 간다.
집에 낯선 사람 들이는 걸 질색하는 시어머니와 요양보호사 건으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주간보호센터를 두 번 옮기고서야 조금은 여유를 찾았다. 잎사귀만 무성한 나팔꽃은 언제나 피려는지.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듯 꽃이 필 날을 기다린다. 나팔꽃이 피면 우리의 시름이 걷어지려나. 시어머니 치매가 그쯤에서 나아졌으면.
시어머니 치매는 꼬리에 불붙은 여우처럼 난장판을 친다. 피난 시절 죽은 얘기들을 찾아 몇 밤을 지새우고, 집에 데려다 달라며 전화통이 불이 난다. 어느 시절의 집에 묶여있는지. 겨우 달래고 오려면 커피나 사주고 가란다. 커피를 사드린 게 몇 번인지. 방안엔 커피가 없다. 돈지갑 숨기듯 또 꼭꼭 숨겼음이다. 우리는 옷장, 서랍장을 다 뒤져 커피 봉지 몇 개를 찾아놓고 시들어가는 나팔꽃 줄기처럼 처져서 온다. 함께 사는 시누이라도 온전하면 염려가 덜 할 텐데 그렇지도 못하니 힘이 겹다.
- <애완화> 중에서 -
이 수필에는 눈물보다 끈적한 시어머니 봉양의 애환과 남편에 대한 애정의 미학이 펼쳐져 있다. 사랑과 애환의 미학을 주제로 하는 수필은 현대사회의 특성상 여성 수필에서 필연적으로 자주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도시 생활의 정신적 긴장이나 공동체 의식의 상실이나 비인간화와 같은 도시적 병리 현상으로 인하여 파생될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움은 언어적 소중함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일종의 아름다운 의식의 성찬이다. 그것은 새로운 자기 탐색을 위해서도 보람 있는 일이지만 아름다운 삶의 영토 확장에도 바람직한 일이다. 또한 그것은 얽매인 일상의 생활에서 새로운 창조의 기쁨을 누리는 희열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남편은 어머니의 병구완으로 머리가 아파 병원을 다니고, 자신은 대상포진에 걸려 힘들어하면서도 집 안에 나팔꽃을 피우며, 그 개화를 기다리는 마음을 자신들의 시름과 어머니의 차도에 견주는 모습이 문학가다운 멋을 풍겨낸다. 여기에는 필시 사랑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특히 문학적 체험과 같은 정서적 호응은 문학작품의 서정성을 구성하는 요체다. 자신에게는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모성성을 요구하는 며느리라는 위치가 가장 확실하게 그녀에게 인고의 가쁜 숨결을 부여하고 있다. 이 작품은 며느리의 위치는 가정이며 여성의 임무는 가족 구성원을 돌보고 그들에게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는 사회적 통념을 각인시킨다. 최숙미는 시누이라도 온전했으면 염려가 덜할 텐데, 시누이마저 아프니 서슴없이 힘겨움을 호소한다. 며느리 역할에 끝까지 최선을 다하지만 나아지지 않는 삶의 처절함에 고개를 젓는다. 솔직한 심사가 가슴 뜨겁게 솟구치게 하는 작품이다.
<애완화>라는 작품은 부모를 돌보는 자식의 심정이 어떠한가를 제시해주는 수필이다. 부모들은 대부분 요양원에 가기를 싫어한다. 요양원에 부모를 보내는 자식들은 효성이 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집에서 모실 능력이나 형편이 되면 아픈 부모를 불편 없이 살 수 있도록 집에서 모시며, 이런 사실만으로도 자식의 도리를 다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현실은 치매 등의 중병을 앓는 부모를 집에서 모실 정도로 사정이 그리 녹록치가 않다. 그것도 돈이 있고 여유가 있는 자식만이 베풀 수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자식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현실적인 부양의 어려움이다. 아무리 황금만능주의 사회라 하더라도 부모와 자식 간은 물질이 전부일 수 없다. 최숙미는 이런 진리를 작품을 통해 잘 보여준다. ‘시어머니 치매는 꼬리에 불붙은 여우처럼 난장판을 친다. 피난 시절 죽은 얘기들을 찾아 몇 밤을 지새우고, 집에 데려다 달라며 전화통이 불이 난다.’는 진술은 돌봄의 어려움이 최고로 극대화된 부분이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남편과 아내간의 오고 가는 사랑의 화음이 감동을 준다. 나팔꽃에 물을 주고 잘 자라기를 비는 남편의 마음에 무겁고 뭉클한 감동에 젖는 것은 그녀의 남편에 대한 고마움과 애정이 그만큼 절대적이며, 애틋하고 간절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부부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고자 한다. 부부애가 예전 같지 않은 요즘이라 이런 글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외출을 서두르는 아침. 채비를 끝낸 남편이 스카프를 다림질한다. 길고 구김이 심한 스카프를 다림질하는 손길이 신중하고 섬세하다. 딸은 남자 친구가 생기면 이 모습을 말해주고 싶단다. 스카프를 다려주는 아빠여서 엄마는 행복한 여인이라고. 시간에 쫓겨 부탁한 다림질에 남편이 후한 점수를 땄다. 한술 더 떠 스카프를 길게 늘어뜨리는 나를 보고 눈을 찡긋한다. 그래요 행복합니다. 스카프를 다려준 남편 덕에 하루가 사푼거렸다.
선물을 할 때면 스카프를 사는 편이다. 남자의 스카프를 고르는 일도 재미있다. 겨울 코트에 길게 걸쳐질 모습을 상상하기도 하고 양복 깃 속에 보일 듯 말듯 두른 스카프도 멋져 보여서다. 존경의 의미를 담아 하는 선물이지만 남편 것도 꼭 산다. 미안하지 않으려고 하는 선행이기도 하다. 긴 모직 스카프도 사고 양복 깃 속에 두를 잔잔한 체크무늬 실크 스카프도 샀다. 편리성만 강조하는 남편은 짧은 모직 스카프만 고집한다. 한 번도 두르지 않으니 내가 가질 수밖에. 긴 모직 스카프를 롱코트에 두르니 그 멋도 괜찮다. 갈색 체크무늬 스카프를 바바리 속에 두르면 성숙하고 차분한 여인이 된 듯하다. 스카프에서조차 남녀 구분을 굳이 할 이유가 없음을 깨닫는다. 태어나면서부터 남아 여아 색깔을 구분하는 고정관념을 깬 것 같기도 하다.
- <스카프> 중에서 -
작가가 여행 중에 스카프를 샀다. 오월 감잎처럼 결이 빛나는 실크 스카프를 사고 싶었으나, 겨울 한복에 어울릴만한 도톰한 스카프를 샀다. 직조의 우수성을 증명하느라 못에 끼워보며 큰 눈을 굴리는 중동 남자들의 과잉 상술에 넘어간 것이다. 어머니의 품새처럼 단아하게 두를 날을 기대하며 애장품 목록에 올렸다. 어느 날 외출을 하려는데, 남편이 아내의 스카프를 다림질한다. 이런 모습을 본 딸은 남자 친구가 생기면 이 모습을 말해주고 싶단다. 딸을 조연으로 등장시켜 작가는 남편의 극진한 애정을 더욱 크게 부각시킨다. 스카프를 다려준 남편 때문에 하루가 사푼거렸다고 고백하는 작가는 스토리 위주의 일상적 이야기에서 에세이로 승화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수필의 구조를 중층화한다. 첫 번째로 채굴한 텍스트는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그림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가 두른 스카프다. 작가는 진주 귀고리보다 눈길을 끈다고 썼다.
‘도드라진 이마 위로 두른 푸른 스카프는 멋을 부린 것 같지 않으나, 그녀를 매혹적으로 하는 데 결정적이라 할 수 있다. 소설 속에선 하녀가 화가의 요구로 귀부인의 진주 귀고리를 하고 아무렇게나 스카프를 두른 모습으로 그려졌다. 화가와 하녀 간에 사랑의 기류가 읽히는 장면이지만, 신분 차이로 고백할 수 없는 사랑을 대변하듯 남의 진주 귀고리보다 구김살 많은 그녀의 스카프가 도드라졌다.’는 이야기에 이어 두 번째로 도입한 텍스트는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라라의 스카프다. ‘17세의 어린 소녀가 황금색 스카프를 매어주는 남자로 인해 불행이 시작되나, 지바고와의 운명 같은 사랑은 대기 중이었다. 러시아의 내전이 불러온 블랙홀 같은 사랑에 저항조차 할 수 없는 지바고와 라라. 불륜이 그토록 아름다우면 어쩌나. 겨울만큼 차갑고 숨이 멎는 이별을 안겨버린 라라의 스카프는 추억처럼 선연하다.’고 적어 중층구조화해서 문학적 성취를 가져왔다.
최숙미 수필을 이루는 또 하나의 견고한 줄기는 사랑에 대한 지향성이다. 그 귀착지는 남편의 배려와 품격이다. 작품 하나하나에 남편을 깍듯하게 아끼고 존경하는 아내로서의 자세가 돋보인다. 한마디로 서로간의 연모가 위 수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이 수필의 감상 포인트는 가정 내 권력의 변화를 살펴보는 데 있다. 스카프는 아내가 다려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아내의 부탁에‘순종’한 남편의 고분고분한 태도를 딸에게 보이게 해서 자식이 남편을 모범적 남편으로 인식하게 하였다. 눈물보다 끈적한 사랑의 향기와 지혜의 미학이 이 대목에서 투영되어 나온다. 부부간의 권력관계를 짚어볼 수 있게 하는 수필은 여성상위시대인 현대사회의 특성상 필연적으로 자주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가의 남편은 바쁘다는 아내의 말을 믿고 이를 감행한다. 외출을 준비하는 아내를 도와주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이는 아내에게 져주는 일종의 아름다운 복종이다.
그것은 새로운 자기 탐색을 위해서도 보람 있는 일이지만 일상적 삶의 영토 확장에도 바람직한 일이다. 여기에는 필시 신사도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무조건적이고 권위주의를 요구하는 사회적 인식을 깨는 남편의 처신은 사회적 통념을 넘어서는 것이다. 스스로 무너뜨리는 권위주의가 여성에게 사랑받는 ‘수발남’의 현주소를 잘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어떤 경우든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순수 지극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작품 <스카프> 가 입증한다. 겉에서 보면 자신이 화소가 된 것 같은 인상이 강한 작품이나 주제의식은 부부애에 있다.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인간이 안고 있는 모든 아픔이 허물을 벗고 한순간에 환한 모습의 꽃으로 피어날지 모른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눈에 드러나는 현란함은 한때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완전한 행복의 실체는 아니다. 물질만으로는 생명을 틔울 수 없다. 이 수필은 화목한 가정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무한대의 ‘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최숙미의 수필적 정서는 남편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여성적 향기라 하겠다.
3. 주체자의 체온, 객관화된 자아
최숙미 수필이 거처하는 공간은 자화상이다.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진정한 자아의 영토에서 낮추는 작가다. 생을 조용히 사유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춘 작가다. 인생을 칼칼하게 씻어내기 때문이다. 자기 정서의 표출이라는 자기 구원만으로 수필가의 사명을 완수했다고 볼 수 없다. 이런 차원에서 수필가가 그려내야 할 수필적 주제는 인간애의 정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수필의 매력은 작가의 내면 풍경에서 나오는 체취를 음미하는 데 있지 않는가. 바로 인연의 소중함과 만남의 축복이다. 최숙미가 문학의 세계에 푹 빠져들고 있는 이유는 누구보다도 부끄러운 속 모습까지 가감없이 내어 보일 수 있는, 인간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작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독립적 자아로 세계와 마주 서는 작가의 세계관이 작용한 때문이라고 하겠다. 최숙미의 <쇠와 문학>은 자아와 현실 속에서도 자아에 우선을 두는 무의식적 행동과 정서를 펼쳐 보이는 모습에서, 그 주체자의 견고함으로부터 문학이 주는 의의를 깨닫게 한다는 측면에서 유의미한 글이다. 이 작품은 문인이면 가져야 할 문학적인 자세가 어떤 것임을 엿볼 수 있게 해서 인식 구조로서의 문학적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하겠다.
모든 수필이 지녀야 하는 공통적 요건 중에 하나가 대상을 바라보는 심미적 안목이다. 심미적 안목이란 화려하거나 현란한 언어 구사와 거창한 주제와 경이로운 소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필 작품을 통해 이르는 효과에 중요한 조건이 되지만, 인간의 흥건한 정이 배어 있고, 사물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통찰력이 자리하며 독자로 하여금 공감을 유발할 때, 문학적 미학은 완성된다. 수필은 어떤 문학보다 미학적 정서를 요구하는 글이므로 수필가는 지식은 물론 정이 풍부한 사람이라야 한다. 무심한 사물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정은 인간의 심리 중에서 가장 원시적 요소다. 그러나 그것이 물상을 사랑하는 데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객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가능한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녀가 존재론적 차원에서 소재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온통 머릿속이 문학으로 꽉 차 있을 때면, 남편으로부터 ‘아줌마는 여기서 뭐 하세요?’라는 장난기 섞인 질문을 받는다. 낭패스러운 물음에 잠시 딴생각했다고 둘러대지만, 남편이 와서 이것저것 점검할 때면 여지없이 오류가 나온다는 넉살이 재미있다. ‘이러다가 창고 서재도 헐리게 생겼다.’는 너스레가 수필의 손맛은 물론 글감을 배가한다.
가게에서도 문학에 빠져 있다가 남편의 화를 돋운다. 쇳내보다 문학이 삶의 절반을 넘어버렸으니 얼마나 재미진가. 일에 신경 좀 쓰라는 말이 남편의 구호가 되었다. 미안하기는 해도 무슨 중독자처럼 문학의 재미를 놓을 수가 없다. 손님들도 핀잔이 잦다. 아줌마, 공부 좀 하세요. 익숙해진 쇳내만큼 공구 장사를 잘할 때도 됐건만, 도무지 관심이 깊어지지 않으니 나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머리가 나쁜가. 문학에 심취해 있을 때 손님이 뭔가를 물으면 아는 것도 깜깜하다. 보링바 아바 앤드밀 탭 등등 기본은 안다고 변명하기엔 어림없이 얕은 수라 손님들을 놓치고 만다.
남편이 외근 중일 때는 문학 하기가 더 좋다. 장사가 뒷전이 되는 순간이다. 하루에 얼마를 파는지 장사가 안되는지도 관심 밖이 된다. 가게에 들어서는 손님을 맞이하지도 않고 지나가는 나그네인 양 대할 때가 있다. 온통 머릿속이 문학으로 꽉 차 있을 때다. 아줌마는 여기서 뭐 하세요? 낭패스러운 물음에 잠시 딴생각했다고 둘러댄다. 남편이 와서 이것저것 점검할 때면 여지없이 오류가 나온다. 이러다가 창고 서재도 헐리게 생겼다.
- <쇠와 문학> 중에서 -
산다는 것은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려는 원심력과 그것과 대치되는 구심력의 절묘한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줄다리기의 위험한 연속행위와 갈등 속에서 오랜 시달림과 방황 끝에 마침내 구심력을 향해서 돌아오는 동작구조, 그 회귀행위의 근저에는 스스로 낮추고 한없이 겸허해진 자아가 자리잡게 된다. ‘일에 좀 신경 써라’는 남편의 구호, ‘공구에 대해 공부 좀 하라’는 손님들의 판잔, 가게에 들어오는 손님을 나그네 정도로 취급하는 자신의 태도 등 판매자로서의 부적절한 처신에서 오는 비판은 전부 머릿속이 문학으로 차 있을 때다. 그 허망한 비장사꾼의 모습은 작가의 모습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진수이며 문학적 삶의 영롱한 에센스가 되어 왔던 것이다. 수필은 어디까지나 인간적 온기의 총체여야 한다. 정말 사람답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생각해야 할 문제, 가슴 깊이 담아두어야 할 가치 있는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수필이 궁극적으로 표현하는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그가 속한 환경과 이에 대처하는 인간의 보편적 성향이다. 가슴이 서늘하거나 후끈한 인간미가 배어 나오지 않은 글은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 비록 개인사적인 문제를 가지고 글이 출발하더라도, 그것을 통해 인간성의 순정한 면을 발견하고 진솔한 마음의 풍경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언제나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수필이 문학 장르로 확고한 자리를 굳히기 위해서는 반성적 성찰이 잘 드러나야 한다. <쇠와 문학>은 성찰이 잘 드러나 있어 좋다.
수필의 소재를 ‘생활’과 ‘자연’에서만 찾으려 하는 작가가 있다면, 소재의 빈곤과 작가의식의 부재를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될 뿐이다. 수필은 우리네 삶의 모습이다. 수필 쓰는 일은 삶을 통한 선택된 체험을 상상력으로 재창조하고 재구성하는 일련의 문학적 경로를 통해 예술로 승화시키는 작업이다. 그 소재가 어찌 ‘생활’과 ‘자연’뿐이겠는가. 그 표현 방식이 어찌 ‘고백’뿐이겠는가. 수필가들은 폭넓은 소재를 통하여 그 작품세계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수필이 ‘인간학’ ‘인생학’을 넘어 ‘인간학’이라는 새로운 틀에 맞추어 좀더 그 지평을 넓혀 갈 수가 있을 것이다. 수필가도 문학인이기 때문에 뚜렷한 자신의 문학관을 가져야 한다. 수필이 생활인의 애환만을 크게 받아들인다면, 작품세계를 스스로 좁히게 된다. 최숙미의 문학관을 엿볼 수 있는 <서릿발 돋는 수필>이라는 작품이 이루는 구도의 한 축에는 예리한 작가의식이 투과된 문학정신이 자리 잡고 있어 평자를 안도하게 했다. 최숙미 수필이 이처럼 수준 높은 문학적 향취를 띠는 이유도 자신의 수필관을 확실히 세워둔 데 기인한다고 하겠다. 자신의 문학적 인생을 이야기하면서 독자들과의 거리를 좁혀 접근성을 강화하고자 최숙미는 아래 수필을 기존의 평서체에서 경어체로 바꾸었다.
모든 언어는 문학이고 수필이었기에 핀잔들이 잦았습니다. 나는 견딜 수 없어 남편에게 양해를 구했습니다. 가슴 터질 듯한 내 문학의 수다를 한동안만이라도 들어달라고. 어느 날 밤 남편이 나를 태우고 무조건 외곽으로 나갔습니다. 밤 두 시쯤 대부도 가는 길에 나를 내려주었어요. 깜깜한 바다를 향해 섰습니다. 멀리 불빛이 보였지요.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나의 문학의 정점처럼 보였습니다. 거기로 가리라.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는 어둠이 가로막았지만 가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봤습니다. 눈앞엔 아마도 갯벌이지 싶더군요. 고요했지만 갯벌 속 미생물들의 치열함이 느껴졌습니다. 나도 저들처럼 치열해지자고. 치열해져야만 한다고 다짐을 하며 남편 볼에 입맞춤을 했습니다. 약속 같은 거였어요.
내 인생의 말풍선 같은 문학은 소몰이하듯 나를 몰아쳤습니다. 수필 이론 공부를 하며 문학 서적을 읽고 수필을 썼습니다. 내 안에 차오르는 수필을 쏟아내지 않으면 숨이 차올라 견딜 수 없는 날이 계속됐습니다. 비 오는 날 연잎에 떨어진 빗물로 인해 쏟아붓고야 마는 연잎 같았어요. 차오르는 수필은 나를 미치게 했습니다. 저를 가르친 은사님은 미쳐야 미치는 거라고 하더군요. 그랬습니다. 잠을 자기 위해 써야만 했고 다음 날 생활을 하기 위해 써야만 했으니까요. 가족들은 아침마다 외쳤습니다. “밤 새지 말란 말이야.”
- <서릿발 돋는 수필> 중에서 -
끊임없는 구도의 길로 자아를 내모는 수필창작에의 욕구 때문에 가족들로부터 아침마다 ‘밤을 새지 말란 말이야’라는 외침을 들어야 했고, 그로 인해 빚어지는 대결을 적은 위 수필은 최숙미 문학인생의 자기 고백록으로 두 가지 측면에서의 의미 있는 성찰을 제공한다. 하나는 그가 보여준 반성적 자기 성찰이 초심을 잃은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초심은 그랬습니다. 신인으로서의 초심을 잃었다기보다 수필 공부에 심취했던 치열을 잃었다는 게 맞을 겁니다. 지금은 가슴 뛰는 초심이 없어 안타깝지만, 과도기를 넘기며 다른 보폭으로 정진한다고 해명하고 싶습니다.’라는 것이 긍정적인 의미에서 성찰을 심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견고한 문학적 장치를 동반하면서 고백을 ‘고백’ 아닌 것으로 끌어올리는 힘이야말로 최숙미의 문학적 저력을 확인케 한다.
다른 하나는 그의 수필가로서의 치열성 부재라는 작가적 자기 반성이 문학적 가치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는 점이다.‘미쳐야 미칠 또 다른 정진으로 서릿발 돋는 수필 한 편 써보고 싶습니다.’라는 본격수필의 꽃을 피우려는 결연한 자세 없이는 글쓰기에 대한 반성적 통찰 또한 가능하지 않다. 최숙미 수필들은 맑고 잔잔한 샘물에 비유될 수 있을 정도다. 수필 속에는 잔잔한 감동이 있고, 포근하게 느껴지는 정감이 있다. 깊은 깨달음의 경지가 느껴질 뿐만 아니라 수수하면서도 소박하고, 은근하면서도 조용하고 은은한 향취가 풍겨나고 삶의 진솔한 파동이 꾸밈없이 담겨 있다. 그녀는 깊은 의식과 반성적 성찰로 자신의 문제를 파악하고, 다양한 시각과 풍부한 상상력으로 인간과 삶을 예리하게 살피고 있다. 이는 평소에 영혼과 마음을 늘상 갈고 닦은 까닭이다.
언제쯤에나 선생이 지향하던 조선의 마음에 설운 마음이 걷힐까. 선생의 묘소 앞에서 읊은 시 <조선의 마음>이 어스름만큼이나 어둑했다. 문학을 한답시고 웅얼거렸던 시어들이 <조선의 마음>에 모이며 허접한 나의 국가관에 돌직구를 날렸다. 조선의 향방을 몰라 술로 애태우던 선생의 설운 마음을 한 자 한 자 되짚고 보니, 애국도 애향도 등한시한 터라 도망자처럼 마음이 켕겼다. 내게 있어 애국은 뭐였을까. 국가들과의 스포츠 경기 때나 아득한 하늘가에 있을 법한 <조선의 마음>을 끌어와 소름 돋우던 정도였지 않았을까. 이런 내가 어찌 문학을 한답시고 <조선의 마음>을 읊조리며 폼을 잡았는지. 굳이 변명이라도 할라치면 현대화에 발맞추어 사노라고 조선의 마음이 들어찬 틈 한번 헤쳐 보지 못했노라고 할 판이다.
얼마 전 장미 향 가득한 인생을 즐기듯, 전혜린 수필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레몬빛 등이 온화하게 켜진 눈 오는 도시 홋카이도를 다녀왔다. 깨끗하고 조용한 일본 문화도 볼만했으나 한국 가이드의 애국심에 박수를 보냈다. 그가 한국에 오는 일본 여행자들의 가이드를 맡을 때면 언제나 경복궁 뒤 건청궁으로 안내한다고 했다. 1895년 10월 8일 12명의 사무라이가 한 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명성황후 얼굴이 그려진 그림을 들고 건청궁으로 들이닥쳐 환복을 한 명성황후를 한순간에 시해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라고. 그들 대부분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가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눈물을 훔치며 한국인 가이드에게라도 사죄를 하겠다는 일본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을 다녀오며 민족정신에 대해 반면교사로 삼는 계기가 되었다.
- <조선의 마음에 곁가지 걸듯> 중에서 -
최숙미는 다 태우지 못한 삶의 갈망들이 들끓고 있는 작가다. 심기 속에 전류처럼 민족정신이 따뜻하게 흐르는 작가다. 밀양 변씨 조상의 묘소 입구에서 수주 변영로 선생의 표지석을 발견하고, 작가는 ‘조선의 마음’을 읊조리며, 애국이란 단어에 몰입해보는 시간을 갖는다. “조선의 향방을 몰라 술로 애태우던 선생의 설운 마음을 한 자 한 자 되짚고 보니, 애국도 애향도 등한시한 터라 도망자처럼 마음이 켕겼다. 내게 있어 애국은 뭐였을까. 국가들과의 스포츠 경기 때나 아득한 하늘가에 있을 법한 <조선의 마음>을 끌어와 소름 돋우던 정도였지 않았을까. 이런 내가 어찌 문학을 한답시고 <조선의 마음>을 읊조리며 폼을 잡았는지. 굳이 변명이라도 할라치면 현대화에 발맞추어 사노라고 조선의 마음이 들어찬 틈 한번 헤쳐 보지 못했노라고 할 판이다.”라는 언급은 일상에서 꽃피우는 무딘 애국심을 반성적으로 그려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흔히 수필은 자신의 심적 나상이라고도 하고 독백의 문학이라고 하는데, 최숙미의 수필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자기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한 가이드의 애국심을 수필적 소재로 취택하고 있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현대는 다양한 욕구가 충만해 서로 좌충우돌하지만, 자신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나라 걱정에 눈을 돌리거나 귀를 기울일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없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애국과 무관하게 사는 것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수필을 쓴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문학이 문학만을 위한 작업에만 충실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 아닐까. 자기 정서의 표출이라는 자기 구원만으로 수필가의 사명을 완수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최숙미 수필가가 그려내야 할 수필적 주제는 역사와 시대를 관통하며 흐르고 있는 민족정신과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수필의 매력은 작가의 내면 풍경에서 나오는 체취를 음미하는 데 있지 않는가. 바로 인연의 소중함과 만남의 축복이다. 최숙미가 늦게나마 나라의 안녕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누구보다도 부끄러운 속 모습까지 가감 없이 내어 보일 수 있는, 인간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작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독립적 자아로 세계와 마주 서는 작가의 세계관이 작용한 때문이라고 하겠다. 최숙미의 <조선의 마음에 곁가지 걸듯>은 현실 속에서 보기 드문 훈훈한 애국심을 펼쳐 보이는 수필가의 모습을 접하고, 그 애국심의 넉넉함으로부터 국가의 의의를 깨닫게 한다는 측면에서 유의미한 글이다. 이 작품은 한국인이라면 가져야 할 자세가 어떤 것임을 엿볼 수 있게 해서 인식 구조로서의 문학적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
“아기 엄마, 실컷 울어버려. 살다 보믄 언제 그랬나 싶은 날도 오니라.”
꺼이꺼이 울었고 할머니가 자꾸만 건네던 만두는 먹지 못했다. 장사도 못하고 내 울음을 다 받아준 할머니였건만 부끄럽고 죄송해서 다시 가지 못했다. 그때 울어버리고 살아내서 지금껏 산다. 생을 스스로 정지시킨 그들처럼 이 방법뿐이라고 생각했던 때였으나, 죽을 행동을 하지 않았더니 오늘을 괜찮게 산다. 아니 감사하면서 산다. 죽을 이유는 다르나 같은 결말에 섰던 사람으로 부탁한다. 오늘을 살아내 달라고. 결심 선 순간을 잠시 미루라고. 죽음만은 실행하지 말고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라고. 이미 바닥은 쳤고, 눈이 떠지면 뜨고 감기면 감으라고. 그게 살아내는 거라고. 그 순간을 살아내 준다면 인생 어딘가는 나를 위한 일들이 있기 마련이라고. 내가 살아내야 가족이 살고 가정이 살고 사회가 사는 거라고.
살아내 주겠니라고 달래기에 늦은 순간이면 성경 구절로 외치련다.
살아 있으라! 피투성이라도 살아있으라!
- <살아내 주겠니> 중에서 -
최숙미의 수필을 읽으면, 그녀의 글은 하나같이 삶의 원형, 삶의 진리를 파헤친 지혜서란 생각이 든다. 그녀는 형이하학적 제재의 속성을 잘 파악하여 형이상적인 인간의 본질로 나아가는 데 참으로 익숙하다. 세상에 우연은 없다는 것은 논리학을 배운 사람이라면 다 안다. 인과율에 의해 삶은 계속되는 것이다. 그녀는 이런 삶의 변증적 법칙을 ‘살아내 주겠니’라는 질문으로 의미화하였다. ‘살아내다’는 그 어떤 장치보다도 사람을 하나로 모으고, 경직되고 얼었던 마음을 데우는 역할을 한다. 그녀가 중요시하는 게 무엇인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죽어야겠다고 생각해 본 사람으로서 그녀는 ‘자살’이란 글자를 ‘살자’로 돌려놓고자 한다. 어쩔 수 없어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필연으로 여기며 사는 길은 주체적 행보라 할 수 있다. 배치나 장치를 만들어 권력을 확고히 하는 것보다는 열린 자세로 그녀는 죽을 이유는 다르나 같은 결말에 섰던 사람으로 위기에 선 사람들에게 부탁한다. 백척간두 절망의 끝에 선 사람들에게 다가감으로써 작가는 튼튼한 도덕적 모럴을 구축하게 되는 것이다. 삶 속에서 사람은 삶의 법칙에 따르지 않으면 살아갈 수도 진화 발전할 수도 없다. 삶의 법칙에는 몇 가지가 있으나 그 가운데서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인과율의 법칙’이다. 이 지구상에 생명이 탄생하고 난 이래 이것을 위반하지 않고 현재까지 왔기 때문에 인간은 지금도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살고 있고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원리를 작가는 ‘살아있으라! 피투성이라도 살아있으라!’로 풀이하고 있다.
자기 삶에 대해 누구나 쉽게 부끄러움을 내비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런 차원에서 이 작품은 인간의 체취에서 풍기는 향기를 더해 주는 글이다. 수필은 인간을 위하여 그리고 인생을 보다 낫게 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가 자신을 반성대 위에 세우고 자기 성찰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작가의 진술처럼, 자신만의 울타리를 만들어 나를 가두는 것도 스스로의 고립이다. ‘그때 울어버리고 살아내서 지금껏 산다. 생을 스스로 정지시킨 그들처럼 이 방법뿐이라고 생각했던 때였으나, 죽을 행동을 하지 않았더니 오늘을 괜찮게 산다. 아니 감사하면서 산다.’이런 살아 있음에 대한 축복과 찬미는 언제나 가슴 뭉클하게 하는 힘이 있다. 수필은 힘의 문학이다. 그 힘은 작가의식으로부터 나오지만 생명의 고양으로부터도 나온다.‘살아내 주겠니라고 달래기에 늦은 순간이면 성경 구절로 외치련다.’라는 이 대목은 더욱 이러한 힘을 느끼게 한다. 주제를 제재에 담아 문학적으로 조리해내는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최숙미의 역량이 빛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지난날의 문제를 찾아서 지난 세월 비련의 추억을 되돌아보는 마음의 여유가 존재와 삶에 대한 자각과 잘 어우러져 잔잔한 감동을 준다. 바이오필리아를 향한 절규에 가까운 노력이 묻어나서 큰 감동을 준다.
그녀의 작은 바람이라면 우리 모든 이웃이 죽을 이유나 고민하지 않고 오순도순 잘 사는 것이다. 죽음의 고비에서 느끼는 심회를 삶의 소망으로 의미화한 이 수필은 뜨거운 생명에 대한 애착으로 깊은 울림을 안겨준다. 작가는 살아냄을 통해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으며, 삶에 위기를 느끼는 자에 더 가까이 다가가리라는 다짐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펼쳐내었다. 벼랑 끝에 선 자를 위한 간절한 호소가 지금도 들려오는 것만 같다. 수필이 구원의 문학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은 건강한 삶을 바라는 작가의 건강한 인식이 녹아 있어 뜨거운 공감을 자아낸다. 긴 인생을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의 향상을 목표로 삼아 자신을 비워내며 이타적인 사랑을 실천하려는 정신이 후회 없는 인생을 보내는 방법일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갈등을 극복하고 안락을 바란다. 현대적 삶의 어두움은 바로 갈등에서 출발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치솟는 이 끊임없는 안락을 원하는 이기심과의 싸움에서 지기 때문이다. 아직은 낯설고 갈 길은 멀다고 하면서도, 무슨 일이 있어도 생명을 함부로 버리는 일은 막아야겠다는 작가는 분명 이 세상을 안개처럼 부드럽게 감싸는 어머니의 손길을 가진 작가라 하겠다.
III.
최숙미 수필은 인간적 ‘온정’의 총체라 할 수 있다. ‘수필은 삶의 문학이다’라는 명제에 답하고 있어 성공적이다. 이 수필집의 작품들은 정말 사람답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생각해야 할 문제, 가슴 깊이 담아두어야 할 가치 있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측면에서 감동적이다. 수필이 궁극적으로 표현하는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그가 속한 환경과 이에 대처하는 인간의 보편적 성향이다. 최숙미 수필은 총체적이고 추상적인 현실을 보다 심미적 가치를 지닌 삶을 실상으로 구현하기에 가슴이 서늘하거나 후끈한 인간미가 배어 나온다. 비록 개인사적인 문제를 가지고 글이 출발하더라도, 그것을 통해 인간의 보편성을 발견하고 새로운 삶의 희망과 더 나은 세상이 다가온다는 믿음을 주어야 할 것이다. 언제나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차원에서 최숙미 수필은 존재 의의를 지닌다. 그녀는 문학성이 짙은 수필을 통해 보다 인간적인 향기로 이 세상의 매듭을 풀어나가고자 한다.
수필의 본령은 인간 구원에 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에서 어두웠던 추억을 추출해 내어서 렌즈 밑에 정착시키고, 그것을 극복의 역사로 다시 써내고 멋스럽게 확대시키고 있는 점에서 그녀의 작가적 역량과 신앙인으로서의 자세가 돋보인다고 하겠다. 무엇보다도 내면 풍경을 그림을 그리듯 감각적으로 구체화하는 데서 문학성이 빛난다. 언어의 활용면에서 문학수필의 멋을 한껏 우려내고 있어 읽을 만한 수필집이라 하겠다. 세 부류로 수필적 특성을 범주화했지만, 전체 글을 분자적으로 분석하면, 그 부류는 여러 갈래로 다양한 성격을 갖는다. 무엇보다도 감동을 주는 글은 표제작으로 사모곡을 표방한 작품이다. 어머니는 존재의 시원이다. 기억해 놓는 일만 해도 가치있는 일인데, 유고집을 만들어 어머니의 한을 풀어내었다. 그런 어머니의 삶을 통해서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기도 하고, 그 가운데 자신을 반성하기도 하고, 사람답게 사는 방법을 독자에게 일러두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최숙미 수필이 주는 느낌은 눈물겨운 따스함이다. 인간의 아름다운 마음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것으로 삶을 윤택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해준다.
최숙미 수필집은 가장 진솔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을 담는 그릇과 같다고 하겠다. 이 수필집에는 작가의 인품과 덕성이 거울에 비치듯 드러나 있다. 그래서 유난히 인간적 향기가 짙게 풍긴다. 문필가 어머니의 두루마리에 적은 글과 자식을 사랑한 헌신적 삶에 대한 이야기는 큰 감동을 준다. 어떤 작품보다도 이 작품은 작가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수필은 완성의 문학은 아니다. 어쩌면 완성을 향해 가기 위해 우리는 수필을 쓰는지도 모른다. 주제적 양식으로서 수필은 무엇보다도 주제의 내면화를 요구한다. 작가는 가족을 다루면서도 가족사적인 문제에 머물러만 있지 않고 시선을 공동체적인 삶에 겨눔으로써 언제나 삶 속에서 작은 행복들을 기대하고 꿈꾼다. 따스한 체온을 전해주는 작가이기에 우리는 그녀의 다음 작품집에 더 기대를 걸 수가 있는 것이다. 소설가이니만큼 서사의 묘미가 확연해서 좋았다. 좋은 수필을 위한 부단한 노력으로 우리들의 기대에 부응한 데 대해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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