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4. 6(수) 색다른 투어 cafe의 아침편지
아전인수(我田引水)격
사고)
남의 딸이
애인이 많으면 행실이 가벼워서이고,
내 딸이
애인이 많으면 인기가 좋아서이다.
남이 학교를
자주 찾는 것은 치맛바람 때문이고,
내가 학교를
자주 찾는 것은 높은 교육열 때문이다.
며느리에게는,
"시집을 왔으니 이집 풍속을 따라야 한다."
딸에게는,
"시집가더라도 자기 생활을 가져야 한다."
며느리가 친정
부모한테 주는 용돈은 남편 몰래 빼돌린 것이고,
딸이
친정부모한테 용돈주는 것은 길러준데 대한 보답이다.
며느리는
남편에게 쥐어 살아야 하고,
딸은 남편을
휘어잡고 살아야 한다.
남의 아들이
웅변대회에서 상을 받으면,누구나 받는 상이고,
내 아들이
웅변대회에서 상을 받으면 실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남이 자식을
관대하게 키우면 문제아 만드는 것이고,
내가 자식을 관대하게 키우면 기를 살려 주는
것이다.
남의 자식이
어른한테 대드는 것은 버릇없이 키운 탓이고,
내 자식이
어른한테 대드는 것은 자기 주장이 뚜렷해서이다.
며느리가
부부싸움을 하면, "여자가 참아야 한다."
딸이
부부싸움을 하면, "남편이라도 따질 건 따져야 한다".
남이 내
아이를 나무라는 것은 이성을 잃은 행동이고,
내가 남의
아이를 꾸찢는 건 어른된 도리로 타이르는 것이다.
남의 아이가
대학 입시에 낙방하면 실력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고,
우리 아이가
대학 입시에 낙방하면 워낙 경쟁률이 치열했기 때문이다.
내 아이가
어디가서 맞고 오면 쫓아가서 때린 아이를 혼내주고,
내 아이가
어디 가서 때리고 오면 아이들 싸움이라고 접어둔다.
남의 아이가
눈치 빠르면 약삭빨라서이고,
내 아이가
눈치 빠르면 영리하기 때문이다.
사위가 처가에
자주 오는 일은 당연한 일이고,
내 아들이
처가에 자주 가는 일은 줏대없는 일이다.
남의 딸이
말이 많으면 수다스러운 것이고,
내 딸이 말이
많으면 붙임성이 좋은 것이다.
남이 아이를
셋 두면 무식한 짓이고,
내가 아이를
셋 두면 다복한 것이다.
- 좋은 글 중에서 -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
지난밤 한성동우회 번개팅 행사시 중국 여행을 다녀온 유대장께서
마호타이를 갖고 왔기에 그 유혹에 흔들려 거하게 한잔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귀가길에 대리운전을 하기보다는
시내버스로 서울야경을 감상하고 싶어 집근처에 정유장이 있는
1711호 시내버스를 탔지요. 하여 오늘 아침에도 시내버스로 출근을 하였습니다.
자하문 터널을 지나 경복궁 앞을 통과했는데,
차창밖 경복궁 담벼락에 '국립고궁박물관'의 커다란 간판이 눈에 띄었습니다. 오래전
광화문에서 열린 농축산물 축제행사시에 마나님과 광화문 행사장에 왔다가 잠시 경복궁 안을 구경하면서 국립고궁박물관의
외형만 보았기에 무척 궁금했습니다. 이제 이지역으로 이사를 왔기에 조만간 시간을 내어 꼭 한번 관람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
이곳
국립고궁박물관은 조선왕실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4만여점의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으며, 새로 단장한 전시공간에서 격조 높은
왕궁의
보물들을 선보이고 있는 곳이지요.
시내버스로 남대문과 서울역을 지나 남영역으로 향하는 버스 정류장에 잠시 내가 탄 버스가
정차했을
때, 그 버스 정유장의 안내판에도 '국립고궁박물관'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붙어있어서 스마트 폰에 담아 보았습니다.
그
안내판에는 국립고궁방문관으로 가는 대중교통의 버스 노선과 지하철 표시도 되어있고 영업은 평일 09:00~18:00 주말/ 공휴일 09:00~19:00이며 입장료도 없다는 것이 게시되어 있었습니다. 더욱 호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국립고궁박물환은
최초 1903년 창경궁 내 제실박물관(순종)으로 설립되었다가 그 후 1908년 9월에 황실박물관으로 정식 개관하였으나 1910년
한일강제병합과 함께 일제는 이곳을 '이왕가박물관'으로 격하시켰고, 우리 조선왕실이 있었던 곳에 일제는 조선왕실을 폄하 시키고자
창경궁내 동물원을 만들며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들기 까지했었지요. 그러다가 해방된 그 이듬해인 1946년 덕수궁 미술관으로
개칭하였다가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으로 명칭이 바뀌었지요.
문화재청은
1980년대 중반부터 창경원을 창경궁으로 복원하고 일제에
의해 헐린 경복궁 전각들을 복원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1992년 10월에는 4대궁궐과 종묘, 능원 등에 흩어져 있던 궁중문화재를 모아 덕수궁 석조전에 궁중유물전시관을 개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덕수궁 석조전은 전시공간과 수장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고 규모조차 너무 작아 왕실문화를 홍보하고 연구 보존하는 데 수많은
어려움에 부딪혔기에 문화재청은 1993년 옛 국립중앙박물관이자 조선총독부 건물이 있었던 자리에 왕궁박물관을 개관하기로 결정하고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였습니다. 이후 광복 60주년인 2005년 8월 15일에 덕수궁 석조전에서 경복궁 내 옛
국립중앙박물관 자리로 이전 개관하였던 것입니다. 서울에
거주하면서도 정작 국립고궁박물관을 견학하지 못한 것이 오늘 출근길 버스
안에서 몹시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무한창조 공간의 최대한 활용방안
모색
회사에선
오전 커피점 재개설 문제에 대해 새로 임명된 이감사와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다가, 일전 김전무님과 갔었던 문배동 소재의 '육칼국수집'에서
함께 점심을 먹었고, 이어 오후에는 주인이 바뀌는 커피 점문정 내부에 대한 재물조사와 더불어 어떻게 하면 내부구조를 가장 효율적으로 바꿀 수
있을까를 고민해 보았습니다.
특히
전시장과 세미나실 또 공연장과 커피점은 완전히 별개 독립시설로 간막이을 한 것이 무척 답답하다는 아들녀석의 조언이 생각나서 현 커피점의 벽체를
뚫는 것을 모색해 보았습니다. 그러면 더 넓은 공간이 생길 것이고 또 전시실과 세미나를 하기 위해 방문한 고객이 커피숖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최상의 홍보 역활이 가능하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커피숖의 벽을
허물면 자연히 '무한창조 협력공간'을 찾은 고객들이 커피숖을 이용할 수 있는 동선이
구축된다는 이야기를 침튕기며 설명하던 아들녀석이 조언을 어떻게든 실현 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물레방아
메기전문점
그리고
오후 한나절엔 우리의 호프 의리맨인 속초출신 이사장과 협의를 하다가 의기투합되어 삼총사가 오후 퇴근시에 상암동
소재의 유명하다고 이름난 "물레방아 메기전문점"으로 가기로 쇼부를 보았습니다.
이어 어둡기전 밀리는 퇴근길 차량을 요리조리 피하여
강변북로를 뚫고 저녁 6시30분경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매운탕의 진미를 이곳에서 처음으로 느꼈습니다. 역시 그 이름값을 하는 곳이 틀림없었습니다.
연남동 구가원(중화요리식당) 사장님이 추천해서
왔다는 말에 더욱 서비스가 좋았습니다. 메기매운탕에는 참게도 들어있어서 상기인은 오늘 운전에는 신경쓸 필요가 없기에 가볍게 소주 몇병을 해치울 수 있었지요.
어둠이 짙은 밤 9시경, 역시 1711호 시내버스로 귀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마음 고생했던 일들이 술 몇잔과 위로의 말로 인하여 눈녹든 사라져 엄청
기분이 좋았습니다. 서울 시내의 야경들이 그래서 더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 오늘의 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