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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르네상스 하면 피렌체를 먼저 떠올리고, 피렌체 하면 메디치 가문이 떠오른다. 메디치 가문이 새로운 예술과 정신을 주도하지 않고, 또 예술가를 후원하지 않았다면, 르네상스도 발생되지 않을 것이고, 다빈치,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메디치 가문의 역사는 350여 년의 동안 존속되다가 끝난다. 15세기 초에 발흥하여 18세기 중엽에 후손이 없어 가문의 문이 닫혔으나, 그 가문이 일으킨 르네상스라는 문화와 시대정신은 인류의 유산으로 빛난다.
1230년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메디치가는 평범한 중산층 가문이었다. 메디치가의 성인 'medici'가 의사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흔히들 메디치 가문이 본래 의사 가문인줄 아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메디치 가문의 출발은 미미했으나, 가문의 위세가 정점에 달했을 때는 교황을 2명 배출한 종교 명문가에, 프랑스 왕비를 두명이나 배출한 정치 명문가로, 유럽의 모든 왕실과 사돈의 인연을 맺었다.
메디치가문은 1400 년 조반니 데 메디치를 시작으로 약 350 년 후인 1743년 마지막 공녀인 안나 마리아 루도비카가 사망하면서 메디치가의 직계혈통은 끊겼으니, 지금 메디치라는 성을 쓰는 사람들은 메디치가의 후손이 아니라 방계 친족이다. 2대인 ‘국부’, 코시모(1389-1464년)는 피렌체공국의 공인된 제1시민으로 피 렌체와 예술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고, 4대인 '위대한 자‘로 불리는 로렌초(1449-1492년)는 피렌체를 이탈리아의 제1도시이자 유럽의 중심으로 이끌면서 시민들의 부를 최고로 끌어 올렸다.
5대째에 들어서는 가문에서 2명의 교황이나 배출되는 등 유럽의 역사를 좌지우지했으며, 차남 가계의 코시모가 토스카나 대공으로 즉위했다. 국가 최고 지도자가 된 대공 코시모1세는 잔인하고 냉혈적인 독재자의 면모를 보였지만 강성한 군대와 함대를 보유하고 공장을 신설하고 공공사업을 확장하여 체계 있는 행정으로 토스카나를 독립된 도시국가로 발전시켜 이후 2백여 년 간 토스카나를 발전시키는 기반을 닦았다.
300년이 넘도록 피렌체를 지배한 메디치 가문을 다 살펴볼 필요는 없으나, 5세기 피렌체 르네상스와 직접 연관이 있는 가문의 수장 두 명, 피렌체로부터 ‘국부(Pater Patriae)’로 불렸던 코시모 데 메디치와 ‘위대한 자’란 애칭을 받는 로렌초 데 메디치와 그들이 부를 축적한 과정과 당시의 유럽의 경제의 흐름을 언급한다.
15세기 초 메디치 가문이 소유한 피렌체은행의 지분은 순금 약 1,750kg의 가치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의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약 20조원 정도이다. 그런데 피렌체은행은 메디치 가문이 주인인 수십개의 은행 중 중 하나에 불과했다 하니, 그들의 재산은 엄청났던 모양이다.
코시모 메디치는 가문을 일군 사람으로, 이탈리아와 유럽 일부에서만 인정 받던 메디치 기업을 그의 말년에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가 로마의 광석자원 채취권에 투자한 돈만 해도 약 10만 피오리노(약 4조원)에 달했으니 그 부의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한때 유사 신정정치를 표방하며 적패 청산에 나선 수도원장인 사보나롤라로부터 피렌체에서 추방당했던 그는, 정권을 자신의 집권 시절의 체제로 되돌리려고 추방지에서 귀국을 위해 정부 관리 등에게 준 뇌물이 1,300피오리노 (약 511억원)였다고 하며, 로마의 광석 자원 채취 권리에 투자한 돈이 약 10만 피오리노(약 4조원)에 달했다 한다.
1400년대 초반, 유럽의 큰 항구에는 상인들이 모여 유럽과 동양에서 들여온 상품들을 사고파는 무역시장이 열렸다. 그중에서도 프랑스의 리옹에서 열리는 무역시장은 그 규모가 가장 커 유럽의 상인들이 대부분 참여하여 농축산물부터 보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품목을 거래했는데, 상인들은 이곳에서 지역 특산품과 자원들을 거래하는 한편, 구매한 물건을 자국에서 비싸게 팔아 큰 이윤을 남겼다.
그러나 나라마다 돈의 단위가 달라 국제무역을 하려면 계산이 복잡해져서 시장의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을 찾아가면, 이들은 약간의 수수료를 떼고 서로 다른 돈을 환전해주었으니 각국의 상인들은 돈의 가치 차이에 구애 없이 거래를 할 수 있었다. 당시 유럽의 국제 무역시장에는 화폐를 교환해주는 이들이 벤치에 앉아 대기하고 있었고, '벤치'를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방카(banca)'는 은행(bank)의 어원이 되었다. 일단 상인에게 돈을 지급하고 다음 포아르(국제 상업 박람회)에서 돈을 받는 유럽 최초의 대출업도 이루어졌다. 메디치 기업의 부는 이런 환전업으로 시작됐다.
당시의 교황청은 전 세계에 산재하는 성당들로부터 거둔 현금 전부를 일단 로마로 보내도록 한 다음, 그 돈을 다시 각 지역의 화패로 환전하여 성당으로 보내 운영비와 성직자들의 봉급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메디치는 어린 나이에 시장통이나 국제무역시장을 돌며 환전하는 법을 배워가면서, 큰돈을 환전하는 곳은 시장이나 포아르가 아니라 교황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교황청을 방문하여 ‘자신의 메디치 은행이 헌금을 환전하게 해 줄 것’을 청하고, ‘전 세계의 헌금을 로마 돈으로 환산해서 메디치 은행에 보관해두었다가 교황청이 필요로 할 때 즉시 지불하겠으며, 타 은행보다 훨씬 싼 환율로 환전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실제로 환전하지 않고 그 나라에서 들어온 돈을 그 나라 성당에 보내면 되므로 환율을 대폭 낮춰도 남는 장사였다. 교황청은 보내온 돈을 로마 돈으로 환전하는 대신, 그 나라의 은행에 보관했다가 바로 지급하면 편하고, 장부상으로만 돈을 바꾸는 것으로 막대한 환차익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교황청에게는 헌금의 현황이 한눈에 파악되는 '계좌'를 만들어줘 보관과 도난에 대한 염려를 덜어주었고, 교황청도 헌금의 환전에 드는 비용을 대폭 줄이고 전체 수익과 지출 현황을 쉽게 파악할 수 있게 만들었다.
메디치 은행이 관리하던 교황청의 초창기 돈은 10만 피오리노(약 4조원)였다. 그의 조카인 조반니 메디치는 오랫동안 은행에서 잠자고 있는 이 돈을 이용할 다른 방법을 찾는다. 당시에 동양과 아랍에서 물건을 사오려면 배가 필요했고, 베네치아에서 무역사업을 하는 피렌체의 상인들이 재산을 선박에 투자해야 했지만, 물건을 팔릴 때까지는 현금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무역업자들은 자금 압박에 시달렸다. 조반니는 자금이 회전되지 않아 애태우는 무역업자들에게 ‘도착하지 않은 배의 물건을 할인된 가격으로 미리 팔라.’는 새로운 제안을 한다.
또 현금 부족으로 고통 받는 무역업자들로부터 10퍼센트 싸게 물건을 산 다음, 배가 도착한 후 그 물건을 팔아서 생긴 이익금을 나누는 방법을 제안했다. 조반니의 이런 새로운 제안은 파산의 위험에 처한 많은 무역업자를 구했을 뿐 아니라, 위험 부담 때문에 무역업에 뛰어들기를 꺼리던 부자들을 투자의 장으로 끌어들었다. 덕분에 피렌체에는 일자리가 늘고 판매 차익이 높은 동양의 도자기와 차, 후추와 향료들이 더 많이 들어오게 있었다.
가업을 이어받은 조반니의 아들인 코시모 메디치는 피렌체를 유럽의 실크 제조업 중심지로 부상시켜 은행가들이 실크 공장에 투자하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실크를 비싼 값에 팔려면 염색을 해야 했는데, 실크는 표면이 미끄러워 염료만으로는 염색이 잘 되지 않고, 명반에서 나온 화공약품을 촉매제로 사용해야 물을 잘 들일 수 있다는 것을 안 코시모는 다른 부자들이 실크 생산에 투자한 반면에, 명반만 독점하면 높은 값을 받을 수 있다는 계산으로 명반 생산에 투자했다. 이렇게 번 돈을 코시모는 다른 명반 광산을 개발하는데 투자하여 항상 명반을 구할 수 있게 된 피렌체의 실크 공장들은 다른 도시의 실크 공장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게 되어 피렌체는 부자도시가 되었다.
교회의 허가 없이는 어떤 사업도 할 수 없었던 르네상스 시대에는 기독교적 윤리관이 유럽을 지배했다. 교회법은 과도한 이익과 노동 없이 돈버는 사업을 엄격히 금지했다. 이자로 돈을 모으는 일은 기도를 열심히 해도 절대 구원받을 수 없는, 7대 죄악 중 하나로 취급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메디치 가문이 환전을 통해 고리대금업을 한다고 의심하면서 메디치 가문이 막대한 부를 이루자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1379년 피렌체 정부는 메디치 가문의 권세가 정치권력을 능가하자 눈엣가시로 여겨, 메디치가의 금융자산을 몰수하고, 몇 년 동안 피렌체 내의 경제활동이 금지시켰다.
메디치가의 금융 스캔들에 연루되는 것을 꺼린 교황청은 메디치 은행에 맡긴 돈을 몽땅 인출해, 메디치의 경쟁자로 신앙심이 깊은 사람인 알베르티가 운영하는 은행으로 옮겼다. 후에 조반니 메디치가 은행을 물려받았을 때, 메디치가의 사업은 거의 다 망했고 피렌체에 남은 것은 몇 개의 가게와 집 한채 뿐이었다. 또한 메디치 은행이 망해 가는 사이에 그와 같은 환전 방식으로 거대한 부를 이룬 대형 은행들이 생겼다.
‘위대한 자’로 불린, 로렌초 메디치
타 은행가들과 경쟁을 피하면서 돈을 버는 방법을 찾아 나선 조반니는, 교황청의 환전 서비스를 포기하고, 도시국가 제노바 상인들이 발명한 새로운 금융상품인 보험업을 들여와 보험 사업으로 다시 큰돈을 번다. 그는 교황청 환전으로 번 돈이 몰수당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사업가는 대중의 질투를 사면 바로 무너질 수도 있다.’는 교훈을 얻어, 그때부터 민심을 얻는 일에 아낌없이 투자하기 시작한다.
600년 전 코시모는 피렌체에 새로 공장을 세우면서 자기 개인 돈으로 5퍼센트, 피렌체의 자기 은행 돈으로 46퍼센트를 투자하고 나머지 지분은 투자자의 투자 자본으로 채운다. 이렇게 공장에 대해 51퍼센트의 지분을 가지고 경영권을 행사하게 된다. 또 사규에 ‘자회사의 대표는 어떤 선물도 받지 못한다.’고 못박아 엄격한 경영을 했으며, 정당한 일을 하는 것을 기업경영의 대원칙으로 삼았다.
장사꾼에서 기업가로 변신한 조반니 메디치는 ‘큰 사업을 하려면 민심을 얻는 것이 첩경’이라는 경험을 아들 코시모에게 가르쳤고, 코시모는 이 교훈에 따라 메디치 가문의 직원 수를 늘리면 가문이 정치적 위기에 처할 때 그들이 원군이 되어줄거라는 계산 하에, 이윤이 박해도 시민들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제조업에 막대한 돈을 투자한다.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화가, 조각가, 철학자들은 메디치 가문의 후원으로. 생활 걱정에서 해방되어 최고의 예술가로 손꼽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보티첼리와 라파엘로 등도 예술적 성과를 이루었다. 왕권 시대에 왕과 귀족들이 독점하던 부를 메디치 가문은 개인의 노력으로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왕과 귀족만이 농민을 착취해 부를 불리던 중세기의 불합리한 사회 구조를 붕괴시키고, 능력과 노력에 따라 누구든 부자가 될 수 있고 권력도 쥘 수 있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메디치 재벌이 탄생하기 이전에도 예술 후원으로 기업 이미지를 높이는 마케팅이 있어, 피렌체의 은행 재벌들은 대부업으로 돈을 번 '죄'를 씻기 위해 성당에 그림이나 조각품을 설치할 돈을 헌금하고 있었다. 그러나 코시모는 이들과 달리 학자와 예술가들에게 대규모 투자를 시작하여 아예 메디치 가문을 홍보해줄 재능 있는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양성하여 가문의 이미지 개선과 관리에도 힘쓰고, 대형 건물도 지어 일반인들이 공용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하였다.
지동설을 주장해 교황청의 탄압을 받았던 갈릴레이 갈릴레오를 후원하여 천문학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근대 정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군주론’을 메디치 가문에 헌정하며, 로렌초를 ‘운명으로부터, 또 신으로부터 최대한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다.’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서양 최초의 공공도서관을 세우고 장학제도를 만든다. 코시모의 지원을 받은 미술가들은 그들의 초상화그리기에 정성을 기울였으며, 조각가들은 교회에 메디치 선조들의 경당을 만들었고, 작가들은 메디치를 찬양하는 글을 썼으며, 자코포 페리의 ‘에우리디체(euridice)가 메디치 가문의 궁정에서 공연된 것이 오페라의 탄생이었다.
이런 문화 투자는 피렌체의 이미지 향상에도 기여하여, ‘메디치가가 최고의 예술가 양성에 투자한다.’는 소문이 유럽에 퍼지자, 유럽의 왕들과 귀족들은 물론 피렌체가의 조각품과 건축물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도 메디치 은행에 돈을 맡겼다. 코시모 메디치는 이런 기회를 살려 피렌체의 음식점과 호텔에 투자해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하여 관광업이라는 새 분야를 개척하고, 메디치가의 통신 인프라를 이용하여 장기 체류자들의 송금과 서신 연락을 위한 통신 서비스도 유상으로 제공했다.
그의 후원으로 성장한 미술가들이 유명해지면, 코시모 메디치는 선매해둔 그들의 작품을 외국의 거부들이나 정치가들에게 엄청난 돈을 받고 되팔았고, 유명한 네덜란드 예술가들에게는 제자들을 기르도록 하여 그들이 제작한 그림들을 미술품에 눈을 뜨기 시작한 이탈리아의 중산층에게 팔아 큰돈을 벌기도 했다.
이처럼, 코시모의 손자 로렌초 메디치는 할아버지의 유업을 이어 도나텔리, 마사초,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등을 후원해 그들을 최고의 미술가로 길러내면서 마키아벨리와 역사가 귀치아르디니를 가문의 대변인으로 고용한다. 당시 예술품들은 메디치 가문이 샀다는 소문만으로도 가격이 올랐고, 로렌초는 '미술 애호가'로서의 명성을 이용해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다.
로렌초 메디치는 직조 사업에서도 수완을 발휘하여, 자신의 공장에서 특별 제작한 카펫을 피렌체 대성당에 걸어 홍보했고, 사회적 공헌과 문화투자로 소비자들이 안목을 몇 계단 올리면서, 고객이 새 상품의 질과 가치를 이해할 수 있어야 공급자의 부도 커질 수 있다는 원리를 이용해 막대한 돈을 벌었다.
하지만, 피렌체에 정치권력의 중요성이 점차로 대두되면서 '부'를 바탕으로 한 메디치가가 정치권력조차 독점화 할 기미가 보이자, 이를 우려한 시민들을 1379년 메디치가를 피렌체에서 추방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시민들은 음모를 꾸민 자들을 물리쳐 새 정부를 세우고, 코시모를 다시 불러들여 '조국의 아버지'로 추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