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낭만주의로 분류되는 예술 작품을 꾸준히 즐기며 그 사조에 대해서 쉽게 잘 설명할 수 있게 됐을 때, 나에게 새로운 낭만 개념이 들어왔다.
무성애자 담론을 접했을 때였다. 성적끌림과 연애감정을 동일시하는 사람들은 무성애자를 흔히 아무에게도 사랑을 느낄 수 없는 사람으로 오해하곤 하지만, 그 둘은 확실히 구분된다. 상대에게 낭만적인 끌림을 느끼는 무성애자도 있고 느끼지 않는 무성애자도 존재한단 사실을 알았을 때 혼란이 왔다. 로맨틱 에이섹슈얼, 번역하면 낭만적 무성애자.
보통 사람들은 로맨틱한 감정과 섹슈얼한 감정을 동시에 느낀다는 게 충격이었다. 모두가 나처럼 평소에는 온도가 낮은 줄 알았다. 끌림을 느끼는 대상이 나타났을 때 연애로 이어지고 특정한 기념일을 챙기며 데이트 코스를 찾으며 이벤트를 하는 건 미디어에서 그런 모습만 보여줬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스무 살 무렵엔 사람들은 그저 습관적으로 연애하고 싶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 고민했다.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이 저절로 나오듯이, 그냥 무심코. 연애경험이 없는 사람은 매력이 없다고 학습됐기에 퀘스트 쌓듯이 경험하고 싶은 게 분명하다고 여겼다.
로맨틱, 낭만. 나에게는 그저 예술의 한 분류이자, 실체가 명확하지 않으며, 초현실적인 오로라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낭만이 뭐지? 섹슈얼과 별개로 확실한 로맨틱이 존재하는 사람도 있으며 로맨틱이 미약하거나 적은 사람도 있고 애초에 없는 사람도 있다는 건 알겠는데, 일단 그 로맨틱 끌림, 그놈의 낭만이 무언지 속 시원하게 설명한 사람이 없었다. 일단 그 개념부터 자세히 알려줘야 하는 게 아닌가? 도통 어떤 게 낭만적 끌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봄만 되면 지겹게 나오는 노래 가사처럼 봄 바람이 살랑거리고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을 때 누군가와 함께 걷고 싶은 걸까? 여름에는 함께 바다를 보고 가을에는 단풍 놀이를 가며 겨울엔 첫 눈을 함께 밟고 싶은 감정?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누군가 떠오르면 그게 낭만인가? 알콩달콩 사랑의 밀어를 속삭일 대상을 그리워하는 마음? 로맨틱 코미디에서 보여주는 로맨틱 규범 그 자체? 다수자 규범을 따르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 특별한 관계를 맺고 싶은 마음? 낭만적 관계는 결국 일종의 계약과 합의 아닌가? 그나저나 특정한 상대가 없는데 연애 그 자체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게 일반적인가? 또 제자리로 돌아왔다.
흔히 일컫는 연애감정으로 치환되는 낭만적 끌림은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범위가 다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의문이 생겨났다. 정의를 내리기 어려운 개념인 건 확실했다. 그 누구도 낭만적인 감정의 형체를 속 시원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이유도, 과학적인 근거도, 원인과 결과도 없는데 어느 순간 배우고 갈망하는 그 무언가. 어떤 사람은 의심하고, 어떤 사람은 적극적으로 찾아 헤매고, 어떤 사람은 굳이 필요로 하지 않으며, 어떤 사람은 굳이 동경하진 않지만 밀어내지도 않는 것. 항상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진리를 알면서도 대다수가 외면하려 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