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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민수기 제4강
속죄소 위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말씀/민7:1-8:26
요절/민7:8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
민수기의 핵심 주제는 ‘거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거룩한 백성’으로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또 성막을 관리하도록 제사장과 레위인을 거룩하게 구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영까지도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진군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민수기 저자가 빼놓을 수 없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막 봉헌식입니다. 그래서 민수기 1장의 인구조사 이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그것은 성막 완공 후 백성들의 헌물과 봉헌식, 또 레위인의 헌신 예식입니다. 이 의식들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 시간 말씀을 통해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7장 1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모세의 지휘 아래 성막이 완성되었습니다. 성막과 모든 기구에 기름을 발라 거룩하게 구별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지휘관들이 두 차례에 걸쳐 자발적으로 헌물을 드렸습니다. 1차로 수레 여섯 대와 소 열두 마리를 드렸습니다(1-9). 이 헌물들은 레위인들에게 주어져 성막 봉사에 쓰도록 했습니다. 또 2차로 제사에 드릴 제물들을 드렸습니다. 7장 1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지휘관들은 하루 한 사람씩 제단의 봉헌물을 드릴지니라 하셨더라.” 하나님은 각 지파의 지휘관들로 하여금 봉헌물을 드리도록 하십니다. 여기 ‘봉헌물’은 엉어성경을 보면 “offering for the dedication”으로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헌신의 제물입니다. 자신들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구원하시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 삼아주신 은혜에 감사하므로 드리는 헌물입니다. 봉헌물은 소제, 번제, 속죄제, 화목제로 드려지게 됩니다. 소제는 곡식을 밀가루처럼 곱게 갈아 드립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헌신을 의미합니다. 번제는 제물을 온전히 태워 드립니다. 죄를 회개하고 내 인생을 온전히 불태워 헌신하여 주님께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속죄제는 죄를 회개하고 용서함 받기 위한 제사입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를 화목하게 하는 제사입니다. 이 모든 제사는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고 죄 사함을 위한 제사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헌신을 다짐한 봉헌물들이 얼마나 귀하든지 저자는 열두 지파 지휘관들이 드린 봉헌물을 각각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날 유다 지파가 드린 봉헌물로부터 시작해서 열두 번째 날의 납달리 지파가 드린 봉헌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봉헌물을 다 똑같이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민수기 7장이 성경에서 두 번째로 긴 ‘장’이 되었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맨 처음의 유다 지파가 드린 제물들만 기록하고 그 뒤에는 ‘이하동문’이라고 써도 될 것 같은데 토씨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은 제물들을 다 그대로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각 지파가 드린 헌물 하나하나를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받으시고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억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함입니다. 히브리서 6장 10절에 보면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은혜에 감사하므로 드린 헌물이나 헌신과 수고를 잊지 않고 다 기억하십니다.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나라 생명책에 기록해 놓으십니다. 사무엘하 23장에도 보면 다윗의 용사들 37명의 이름이 그 행적과 함께 일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또한 내 인생을 온전히 불태워 하나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나의 젊은 날의 시간과 물질, 꿈과 소망까지 불태워 주님께 바치고 싶습니다. 온 맘 다해 하나님 한분만을 찬양하며 사랑하고 싶습니다. 소중한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부어드리고 싶습니다. 이것들은 결코 없어지는 것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가 주님께 드린 감사와 헌신과 수고를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나 한 사람의 진심이 담긴 헌신을 기뻐 받으시고 다 기억하시고 때가 되면 반드시 상으로 갚아 주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캠퍼스 목자의 삶을 살아갈 때에 고난과 희생이 따릅니다.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것 같고 복음을 멀리하는 캠퍼스 분위기 속에서 목자로 산다는 것은 무거운 짐을 지는 삶과도 같습니다. 코로나 시대 속에 복음역사를 섬기는 우리의 운신의 폭이 좁아져 마음의 부담감이 커져만 갑니다. 개인주의적이고 편리함을 추구하는 이 시대에 목자의 삶은 인기가 없어 보입니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양들 돌보는 일에 헌신하기보다는 뒤로 물러서기를 잘 합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부담스럽게만 느껴지고 편안히 은혜만 받고 싶어집니다. 양들을 섬길 때에도 쉽지 않은 양들을 섬기면서 불평이 나옵니다. 사명인으로 부름 받았지만 잘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자괴감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명을 감당하고 섬기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명을 감당하고 여러 모로 봉사하고 양들을 섬기면서 예수님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은혜를 맛보게 되고 주님의 형상이 점차 우리 내면에 새겨집니다. 믿음이 더욱 견고하게 되어갑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고 우리 안에 영적인 생명이 함께 합니다. 주의 사명을 감당하면 감당할수록, 십자가를 짊어지면 짊어질수록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많은 영적 비밀들이 쌓여 갑니다. 이 얼마나 큰 복인지요? 그래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부담스럽지만 역설적이게도 십자가 지는 삶이 진정 복된 삶입니다. 찬송 461장을 함께 불러보겠습니다.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주가 물어 보실 때 죽기까지 따르오리 성도 대답하였다. 우리의 심령 주의 것이니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주 인도 따라 살아갈 동안 사랑과 충성 늘 바치오리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신되어질 때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을 모두 기억하시고 반드시 축복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헌신에 주저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사명의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지휘관들은 각 지파를 대표합니다. 그들의 헌신은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의 헌신을 나타냅니다. 열두 지파의 지휘관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당시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교회 공동체 전체를 관심가지고 살피기도 하시지만 교회 공동체를 구성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관계성 맺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UBF라는 교회를 사랑하시지만 UBF 교회 공동체에 소속된 나 한 사람에게 깊이 주목하십니다. 나 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헌신된 삶을 살 때에 하나님은 심히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께 헌신된 자로 드려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이들의 헌신된 예물을 보신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십니까? 7장 8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 하나님은 지휘관들이 드리는 헌물을 받으시고 성막에서 말씀하심으로 임재하셨습니다. 이는 새로운 역사입니다. 이전까지 하나님은 시내 산 정상에서 빽빽한 구름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에도 모세를 시내 산으로 올라오게 했습니다. 그러나 성막이 완성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헌물을 드리며 헌신하여 나아왔을 때 하나님은 백성들 가운데 있는 성막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거룩하고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만든 성막으로 내려와 그곳에 거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성막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말씀하셨습니까?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증거궤’는 십계명 두 돌 판이 있는 궤입니다. 또 ‘속죄소’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속죄소를 영어로 ‘mercy seat, 자비의 자리(시은소, 시은좌)’라고 합니다.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죄를 회개하며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시고 우리와 만나 주십니다. 이 속죄소는 신약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진실하게 죄를 회개할 때에 주님은 긍휼을 베푸셔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죽은 영혼들이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무기력한 자가 독수리 날개 치며 올라가는 새 힘을 덧입고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말씀으로 함께 하시고 만나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을 날마다 경험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8장 1,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아론에게 방향을 주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성막에서 해야 할 일을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본문에 그 중 한 가지가 언급됩니다. “등불을 켤 때에는 일곱 등잔을 등잔대 앞으로 비추게 할지니라(2).” 성막 안은 천막으로 덮여 있고 창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등불이 없으면 매우 깜깜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 아론에게 이곳 일곱 등잔에 불을 켜서 앞을 향해 비추도록 했습니다. 등불은 빛이신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그러면 등잔대 앞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덩어리의 진설병이 놓인 떡 상이 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빛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항상 비추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나서 가장 먼저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빛으로 어둠을 몰아내시고 빛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그 속성이 빛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어둠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빛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내면의 모든 어둠을 몰아내시고 생명의 빛을 주십니다. 사람들 마음에는 각종 어둠의 세력이 존재합니다. 미움, 시기, 교만, 열등감, 슬픔, 음란 등 어둠의 죄성들이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 마음을 한사코 어둡게 해서 절망하게 만듭니다. 자꾸만 부정적인 생각을 심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탄에게 무릎 꿇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소망의 등불을 밝히 비추어 주십니다. 또 우리 내면은 과거에 받았던 온갖 상처들로 어둠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과거에 받은 상처들로 인해 상처 받았던 내용들을 말하고 또 하고 반복해서 또 하는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빛은 치료의 광선이 되어 이런 상처 난 내면을 환하게 치료해 주십니다. 이때 우리는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가 뛰는 것처럼 기뻐하며 뛰놀게 될 것입니다(말4:2). 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의 빛으로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어 주신다고 했습니다(고전4:6). 이 예수님의 생명의 빛을 받고 살아갈 때에 우리가 다시는 어둠에 다니지 않고 날마다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요8:12).
아울러 이 말씀은 우리 신자들이 어떤 일에 헌신해야 하는지 깨닫게 합니다. 즉 왕 같은 제사장인 우리 신자들은 빛을 밝혀 어둔 세상을 비추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4).”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둔 세상을 비추는 자들임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의 헌신은 교회에 헌물을 드리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어둔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추는 빛의 사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세상을 향해 어떻게 빛을 비출 수 있을까요? 우리가 비춰야 할 빛은 예수님의 빛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예수님의 빛을 영접하고 우리 안에 비추인 그 빛을 세상을 향해 반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말씀을 영접하여 빛이 꺼지지 않도록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 묵상, 주일 메시지와 일용할 양식 말씀을 통해 내 안에 예수님의 빛이 지속적으로 비춰지도록 해야겠습니다. 더 나아가 내 안에 있는 예수님의 빛을 세상에 비추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시편 119편 130절에 보면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했습니다. 우리가 말씀의 등불을 밝혀야겠습니다. 요즘 코로나로 인해 캠퍼스 학생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빛을 비추지 않으면 세상이 어둠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코로나 상황에서도 말씀의 빛을 덧입고 전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감당해야겠습니다. ‘위드 코로나’ 체계로 바뀌어가는 시점에서 이제는 우리가 좀 더 적극적으로 캠퍼스에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어둔 우리의 내면과 어둔 세상을 밝히 비추어주실 것입니다.
8장 5절 이하의 내용은 레위인의 정결예식, 헌신예식이 소개됩니다. 정결예식은 세 단계로 진행됩니다. 첫째, 속죄의 물로 그들에게 뿌리게 했습니다(7a). 그리하여 그들이 정결하게 됨을 선포했습니다. 둘째, 그들의 전신을 삭도로 밀게 했습니다(7b). 그리하여 몸을 깨끗하게 했습니다. 셋째, 그 의복을 빨게 했습니다(7c). 겉모양과 옷차림도 깨끗하게 했습니다. 이는 레위인의 정결예식의 시작 단계에 불과했습니다. 그 후에는 레위인의 내면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 번제물, 소제물, 속죄제물을 드리게 했습니다. 번제와 소제를 드리면서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마음을 가지게 했습니다. 속죄제를 드리면서는 죄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께 봉사하도록 준비되어지게 했습니다(8).
그리고 난 후,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모으고 레위인을 앞으로 나아오게 한 후, 안수하게 했습니다(9,10). 레위인들이 회중 앞으로 나아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길 것에 대한 결단을 공동체 앞에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 회중이 레위인들을 안수하는 것은 레위인들에게 자신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하는 권한을 위임하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해서 레위인들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권위와 헌신을 인정받게 됩니다. 그리고 난 후 아론은 레위인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요제를 행했습니다. 요제는 좌우로 흔들어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 역시 레위인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대표해 하나님 앞에 제물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레위인들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공동체 앞에서 공인을 받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예식 절차를 통해 레위인들이 성막 봉사를 하게 했을까요? 그것은 레위인들의 성막을 섬기는 일이 모든 백성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동시에 레위인들은 이 예식들을 통해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는 자임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도 누군가를 직분자나 리더, 목동, 목자로 세울 때에 공동체 전체가 이들을 세워주는데 적극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세움 받은 사람은 자신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고자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또한 우리 모두가 헌신예식을 하지는 않더라도 레위인의 자세를 가져야겠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 믿고 구원 받은 자로 끝날 것이 아닙니다. 신구약 성경 어딜 봐도 단순히 구원받은 것으로 끝난 대목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말씀합니다. 로마서 12장 1,2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는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레위인들의 섬김과 희생 없이는 결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막이 유지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레위인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며, 예배를 위해 헌신하며, 주님의 양무리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모든 분들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이 같은 섬김과 희생이 있기 때문에 우리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고, 우리가 오늘처럼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것이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개인주의, 실용주의, 편안함과 편리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교회에까지 파고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신자들도 자기에게 실제적인 유익이 없으면 헌신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신앙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후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일들과 직장으로 바쁘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에 전적으로 헌신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헌신하고자하는 마음을 하나님께 드릴 때 구체적으로 헌신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마음을 기뻐하시고 함께 하시며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8장 2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레위인들의 복무할 나이를 정해 주십니다. 그런데 4장에서는 30세부터 봉사하라고 했는데 본문에는 25세부터 봉사하라고 합니다. 이는 5년 동안 인턴으로 준비기간을 갖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50세부터는 일을 쉬어 봉사하지 않도록 하십니다. 일의 효율 면에서나 체력적인 면을 고려한 조치입니다. 그러나 26절에 보면 형제들을 돕는 일은 계속하도록 말씀하십니다. 사회 직장에서도 퇴직 나이가 있습니다. 공무원들도 정년퇴임 연한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직분에도 ‘은퇴’가 있습니다. 몸이 쇠퇴되어 가고 체력적으로도 한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한계 상황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때가 되면 후배들에게 전수하고 계승해야 그들이 이어서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교회의 직책도 은퇴 연한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직책에는 은퇴가 있지만 하나님의 일을 섬기는 것에는 은퇴가 없습니다. 한번 레위인은 죽을 때까지 레위인인 것처럼 직책에서는 떠나가더라도 자연인으로 돌아가 형제들과 함께 성막에서 돕는 직무는 끝까지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도 교회에서 맡겨진 직책이 있든, 직책이 없든 서로 돕는 직무를 감당하므로 동역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젊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들에 헌신해야겠습니다. 한번 목자는 영원한 목자라는 인식 가운데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양들을 섬기고,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섬기고, 돕는 직무를 감당하는 아름다운 신앙 여정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자원하여 헌신하고자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친히 다가오시고 말씀과 빛으로 역사하여 주심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살다보면 하나님께 헌신하고자하는 소원이 식어질 때입니다. 하나님께 헌신하기보다 육신의 안일과 정욕, 편안함, 세상 즐거움만을 쫓아 살아가고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고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 말씀의 자리, 십자가의 자리, 헌신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에게 말씀과 빛으로 다가오셔서 모든 광야의 삶의 어려움을 이겨내게 하시고 우리를 진정 복된 삶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더불어 우리가 이 시대의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비추어 어둔 세상을 밝히는 삶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삶들 가운데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인도하시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