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유희(원제:<사망적유희)>는 '세계 무술왕'이라는 주제로 동양무술의 정수를 보여주고자 <정무문> 이후 일찍이 기획되었다. 그러나 <맹룡과강>이 선 제작되며 제작이 연기되었다가 1972년 9월 <맹룡과강>이 개봉되고 바로 제작에 착수하여 9월 말부터 촬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1월 초까지 촬영을 하다가 갑자기 <용쟁호투>의 합작 제의가 들어와 촬영이 중단되었다. 그것이 결국 재개되지 못했는데 이소룡 사후 재개가 추진되었지만 나유나 정창화 감독 모두 감독을 맡기를 거절하였고 결국 로버트 클로우즈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나유 감독은 이소룡과의 불화 앙금이 있었고 정창화 감독은 누군가 찍다만 영화를 잘 만들 자신이 없다는 것이 거절 이유였다.
1978년 3월 완성되어 개봉될 때까지 과연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그 사이 이우석 회장의 활동상을 알아보자. 일단 이 회장은 국내에서 태권도의 가는길(유현목, 1970), 일대영웅(팽장귀,강범구, 1973), 황사진(김시현, 1973), 위험한 영웅(오우삼,김명용, 1974), 마지막 다섯손가락(김선경, 1974), 등을 제작했던 참이다. 그와 태권도와의 인연은 국기원을 설립한 김운용 대한태권도협회 회장과의 친분으로 초대 국기원 이사를 겸직하였다.
그의 이러한 태권도 사랑은 훗날 최배달과의 교류로 이어지며 그의 일대기를 영화화 추진하기도 헀다. 결국 최배달과 방학기 화백과의 만남도 주선해 <바람의 파이터>가 극화되기도 했는데 영화화는 다른 영화사에서 추진되었다. 이 회장 자신이 태권도 수련을 하지는 않았지만 애정만큼은 김운용 회장 이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에게 훗날 당룡이라는 예명이 붙은 김태정이 포착되었다. 당초에 김태정은 황영실 사장의 국제영화사에 픽업되어 전속계약을 하고 데뷔작을 준비 중이었는데 황 사장은 차일피일 미루며 싯간을 끌기만 했다. 그로서도 이소룡을 빼닮은 김태정의 상품성을 알아보고 좋은 시나리오를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태정의 마음은 바쁘기만 했다. 제2의 이소룡의 한국 이소룡으로 스크린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인데 제 마음처럼 되어가질 않고 시간만 흘러갈 뿐이었다. 그에게 이소룡의 유작인 <사망적유희> 이소룡의 대역을 선발한다는 소식은 그의 마음을 더욱 들뜨게 하였다. 그는 황영실 사장에게 전속계약 파기를 선언하고 동아수출공사를 찾아와 이우석 회장을 만난다.
이 회장은 국제영화사와의 전속금 문제를 해결하고 김태정을 국제적인 스타로 키우기 위해 전력투구한다. 그에게 운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고 평소에 친분이 있었던 레이몬드 초우에게 연락해 오디션을 봐줄 것을 요청한다. 김태정은 홍콩으로 건너가서 갈고닦은 솜씨를 보여주며 무난히 오디션을 통과해 드디어 제2의 이소룡으로서 <사망유희>에서 이소룡이 못찍은 장면에서 대역을 맡게 된다. 이우석 회장의 노력이 뒷받침하였던 것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이 회장은 당룡의 매니저로서 "집을 사줄까? 아니면 호텔에 있을래?"를 물었고 당룡은 호텔에 있겠다고 대답했다. 집을 샀더라면 부동산 투자 소득까지 컸겠지만 김태정으로서는 우선 편안한 생활을 희만했었고 곧 펼쳐질 글로벌 스타로서의 자만심도 컸을 것이다.
그렇게 2년여 간 홍콩에 체류하며 <사망적유희>의 촬영은 진행되었고 1978년 3월 23일 드디어 <사망유희>란 제목으로 홍콩에서 개봉된다. 한국 판권은 당연히 동아수출공사가 갖고 있었고 검열 등 여러 행정 절차를 거쳐 5월 18일 스카라극장에서 개봉된다.
김태정은 당룡이란 예명으로 스카라극장에서 팬 사인회를 가졌다. 영화는 비록 추문회, 이소룡 두 사람의 제작으로 되었지만 이우석 회장이 김태정을 캐스팅해 추천하였고 막후에서 여러 지원을 아끼지 않았기에 공동제작자나 진배없다. 이우석 회장이 있었기에 <사망유희>는 그나마 1978년에 완성될 수 있었다.
촬영과정에서의 우여곡절은 책 한 권거리이다. 자세한 내막은 졸저 '이소룡 평전'에 일부 소개되었고 향후 발간될 이우석 회장 평전에 실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