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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달 5月, 또 가정의 달에
~~~소영회 5월례회 및 문화 유적지 탐방하다~~~
언 제 ; 2019년 5월 11일
갔는곳 ; 안동 월영교, 안동민속역사박물관,임청각,하회마을.병산서원
아름다운 5月, 나무잎은 연푸르름에서 더욱 진한색에 물이 오르고
가정에는 효도의 아름다움이 품어져 나오는 달에 따사한 햇살을 벗삼아 그윽한 역사의 고장
안동지역을 소영회원 내외 및 선원 딸내 여섯명이 좋은 분위기를 위하여 동참하여 전체
회원 37명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그리고 회장내외 이하 부회장 내외 총무내외,재무내외의
봉사와 헌신에 정말 유익하고 배움이 있는 여행이 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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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映橋월영교는===
유일무이(唯一無二). “둘이 아니고 오직 하나뿐”이라는 뜻으로
단 하나만 존재하는 것을 칭할 때 사용되는 사자성어다. 경북에도 오직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관광지들이 있다. 독특한 풍경과 색다른 체험으로 여행을 풍성하게 채워줄
경북의 유일무이한 관광지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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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월영교는 국내 최장의 목조다리로 그 길이가 387m에 달한다.
낙동강을 감싸는 산세와 안동댐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만들어낸다.
월영교는 조선시대 그 지역에 살았던 이응태 부부의 숭고한 사랑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을 위해 머리카락으로 만든 한 켤레 미투리 모양을 이 다리의 모습에
담았다. 2003년 건설된 월영교는 그들의 사랑을 영원히 이어주고자 세워졌으며 청춘남녀가 달빛이
비치는 월영교를 건너면 백년해로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일교차가 심한 날이면 낙동강에 안개가
강 위로 내려앉아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가을 단풍 명소로도 유명하고 겨울철 눈이 내리면
이채로운 풍경을 연출해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명소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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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영교 보탬이야기=안동호에서 흘러내리는 낙동강의 이른 아침 물안개 풍경도 멋있는 곳이지만
야경은 더 멋진 곳입니다.
목책교에 조명이 비치는 아름다운 분위기 때문일까요?
사진 찍으러 돌아다니면서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 볼 수 있었어요.
안동이란 도시는 선비 도시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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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문인지 우리나라의 민속문화와 관련된 자료와 문화유산이 많은 곳이에요.
월영교 주변으로 볼거리가 많으니까 낮에는 다른 곳을 구경하고 야간에는 월영교 야경코스를
걸어보는 것도 좋겠네요. 월영교(月映橋)는 한자 그대로 달빛 비추는 다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고시대부터 있던 역사 깊은 다리는 아니고, 2003년에 개통된 길이 387m, 폭 3.6m의 국내에서
가장 긴 목책교입니다.다리 이름을 안동시민들에게 공모하여 짓게 되었는데 안동지역에 달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아 "월영교"로 지었다고 해요.처음 가본 곳이기도 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에
찾아가게 되어서 촬영 포인트 잡기가 힘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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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영교를 건너기 전 입구 왼쪽으로 화장실 건물이 있는데
그곳 어딘가 높은 곳에서 많이들 찍으시더라구요. 안동호 주변으로 안동호반 나들이 길이
잘 정비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월영교부터 남서쪽의 법흥교까지 약 2.1km의
산책로를 걸어보는 것도 좋을 듯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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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운동 삼아 산책하시는 분들과 젊은 대학생처럼 보이는
청년들을 만나게 됐습니다. 이름 모를 청년들의 기타 반주에 멋진 화음을 이뤄 들려주는
선율이 돌처럼 굳어있던 메마른 감성을 녹여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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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도시의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 아니면 버스킹 구경하기 쉽지 않은데
오랜만에 귀를 호강시켰어요..^^
이곳 안동댐 유역은 예전부터 전해오는 명칭이 '달골'이라 불렀으며,
다리를 건너면 엄달골 마을과 연결되고산 중턱에는 선비들이 시를 읊었던 월영대가 옮겨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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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그 당시에는 전기나 조명 따위는 없었겠지만 주변의 풍광은
구시대와 현시대 사람들 모두가 달빛이 감싸 안는 듯한 동일한 아늑함을 느낄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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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매같은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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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들이 다들 즐거운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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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루 랄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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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싸 아싸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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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즐거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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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로 기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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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밝은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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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의 역사가 녹아있는 안동 민속 박물관~~~
월영교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있는 안동시립 민속박물관 사실 지난 번에 갔을 때는
큰 영감을 받지 못해서, 이번에는 거르려다가....스탬프 투어 도장도 찍을 겸 가봤다.
그런데 어릴 때 갔을 때랑은 다르게 새로운 시선에서 볼 수 있었고 잘 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동 민속박물관은 안동문화와 우리 전통 문화가 전시되어 있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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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잊고 살아가는 현대인(=나)들에게도 우리 선조들의 모습을 보고,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게 해준다. 전시되어 있는 것들은 안동의 선사시대 유물부터
안동의 유교 문화까지, 대부분을 망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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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의 연혁.==
삼국시대에는 안동이 "고타야"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1963년 안동읍이 안동시로 승격되었고,
현재 1읍 13면 10동의 도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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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모습을 재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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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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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전통혼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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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례에 대한 설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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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 이상룡 선생 모습이~~
~~~안동 臨淸閣임청각 이상용 역사문화 탐방~~~
임청각은 낙동강 상류의 물줄기와 반변천의 물줄기가 합해지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낙동강이 내려오다가 임청각 앞에 이르러서는 물줄기가 좁아진다.
강 건너의 산 이름이 무산(巫山)이다. 이는 중국 양자강의 삼협(三峽) 가운데 가장 절경이라고
일컬어지는 무산 밑의 무협(巫峽)과 풍광이 비슷하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임청각은 한국의 무협을 집 앞에 두고 감상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던 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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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종손들은 날씨가 좋을 때에 친구들과 함께 집 앞에서 술과 음식을 실은 배를 타고
반변천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주유벽(舟遊癖)을 즐기곤 하였다.
그 낭만적인 뱃놀이 그림이 지금도 전해진다. 99칸 집으로 알려진 이 집은 그 전체적인
건물배치 형태가 쓸 '용(用)' 자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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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주인이 건물배치를 하면서 미학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주술적인 의미까지를 고려했던 것이다
이처럼 화려했던 임청각은 집주인인 종손 3대가 내리 만주에 가서 독립운동을 하는 바람에
일제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았다.
일제는 임청각 바로 앞으로 중앙선 철도를 내버렸다.
임청각 종손 이상룡(李相龍·1858~1932)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것에 대해 보복하기 위해서였다.
이상룡의 아들, 손자까지 모두 만주에서 항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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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가로 임청각 후손인 이항증(70)은 고아원에서 자라야 했다.
청소년 시절에는 양손에 석유통을 들고 다니면서 장사를 했다.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는
안동 일대의 산골을 돌아다니면서 호롱불 켜는 데 필요한 기름 장사를 했던 것이다.
지금도 임청각은 철길 옆이라 쇳가루가 날아와 지붕 색깔이 불그스름하다.
광복절을 맞을 때마다 내 가슴에 슬픔을 주는 집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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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각의 안채에는 '우물방'이라고 불리는 조그만 방이 하나 있다.
방 앞에 바로 우물이 있어서 우물방이다.
이 우물방에서 조선시대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탄생하였다. 왜정(倭政) 때
조선의 명택(名宅)을 조사한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도 '조선의 풍수'에서 이 우물방의 영험을
특별히 소개하고 있다. 우물방 출생자 가운데 한 명이 약봉(藥峯), 서성(徐��·1558~1631)이다.
이 약봉의 후손들이 영·정조 시대를 거치면서 조선 후기에 출세를 많이 하였다.
그래서 나온 말이 '서지약봉(徐之藥峯)이요 홍지모당(洪之慕堂)'이라는 말이다.
"서씨 중에서는 약봉 자손들이 잘되었고, 홍씨 가운데는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의
자손들이 잘되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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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각(臨淸閣)과 이상룡(李相龍) 역사 이야기
광복절을 맞아 모처럼의 휴식인데 비가 쏟아져 밖으로 외출은
엄두도 못내고 사용필 우표에 마운트 인두작업을 하던 중 대통령의 8.15 경축사가흘러 나왔다.
그런데 독립운동가와 참전용사의 예우에 관한 연설 중 안동 임청각(臨淸閣)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임청각은 독립운동가이자 임시정부 국무령을지내신 석주 이상룡(李相龍, 1858~1932) 선생의
생가라고 한다.
듣고보니 임청각은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자조섞인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님을 증명해 주는것 같아 몹시 씁쓸했다.
99칸에 달하는 저택에 일제는 보복으로 임청각을 관통하는 철도를 놓았고, 이 철도는 지금까지
그대로라 하니 놀랐고, 그 자녀들은 고아원 생활을 했다하니정말 기가 막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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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궈진 인두에 연기가 나는 줄도 모르고 연설에 집중했다.
석주 이상룡(石州 李相龍, 1858~1932) 선생
[출처- 국무령 이상룡 기념사업회]
이상룡 선생은 만주 망명길 중 서울에서 양기탁 등을 만나 "나는 오직 한 번 옳게 죽을 땅을 원할 뿐이네"
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어쩌면 이 땅에서 넉넉한 재산으로 편히 살 수 있는 길이 있었음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전 재산과
가문을 바쳐 의병기지를 구축하고 애국계몽운동은 물론 무력투쟁까지 모든 방면에서 독립운동을
실천하신 애국자다.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 후 국권이 상실되자 안동의 이상룡 일가와 김동삼 일가도 만주의
서간도로 떠난다. 여기서 당대 최고의 거부였던 이회영 선생 일가와 만나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무관학교를 세운다. 또 민족의식고취를 위해 대동역사(大東歷史)라는 역사서를
기술해 무관학교 교재로 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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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고성(철승)이씨 탑동문중 마을이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청산리전투 같은 무장투쟁을 전개 했으며,
광복군 활동을 비롯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열단이나 지도자를 많이 배출했다.
임청각(臨淸閣)은 보물 182호로 지정된 문화재일 뿐 아니라
현재 민박도 가능한 곳이라 한다.
이증(李增, 1419~1480)이 건축한 조선 중기의
고성이씨 종택과 그의 아들 중종 때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李洺)이
지은 군자정(君子亭)이 합쳐진 별당형 양반주택이다.
신흥무관학교나 이상룡선생은 들어 봤지만
임청각은 처음 들었고,보복으로 집 가운데 철도가 뚫렸다는
얘기도 금시초문이었다.
관광인으로라도 인영이나왔다면 당연히 찾아보고 했을텐데 ~~
오늘 경축사를 통해 임청각이
노블레스 오블리즈를 실천한 현장이며 독립운동가
9명을 배출한 산실이라는 걸알았다.
잊지 말아야 할 문화적 역사적 유산이니 찾아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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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의 자료가 보이지 않아 그냥 설명으로~~
~~~河回하회마을은~~~
태백산에서 뻗어온 지맥이 화산(花山)과 북애(北厓)를 이루고,
일월산에서 뻗어온 지맥이 남산과 부용대(芙蓉臺)를 이루어 서로 만난 곳을
낙동강이 S자형으로 감싸 돌아가므로, 하회마을을「山太極 水太極 - 산과 물이 태극 모양」
또는「蓮花浮水形-물에 떠있는 연꽃 모양」이라 부른다.
풍수지리에 따른 마을의 주산(主山)을 화산(花山)이라 부르고,
부용대 앞을 흐르는 낙동강을 화천(花川)이라 함은 연화(蓮花)에서 비롯한 이름이라 한다
2010년 7월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개최된 제34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마을주민들에 의해 전승되고 있는 다양한 생활 문화가 이제는 한국을 넘어 세계인들이
지키고 이어가야 할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하며 하회마을을 세계유산으로 등재를 확정지었습니다.
안동하회마을(중요민속자료 제122호)은 풍산류씨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동성마을이며, 와가(瓦家:기와집)와 초가(草家)가 오랜 역사 속에서도 잘 보존 된 곳이다.
특히 조선시대 대 유학자인 겸암 류운룡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 형제가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마을 이름을 하회(河回)라 한 것은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 데서
유래되었다. 하회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태극형·연화부수형·행주형에 일컬어지며,
이미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도 유명하였다. 마을의 동쪽에 태백산에서
뻗어 나온 해발 271m의 화산(花山)이 있고, 이 화산의 줄기가 낮은 구릉지를 형성하면서
마을의 서쪽 끝까지 뻗어있으며, 수령이 600여 년 된 느티나무가 있는 곳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중심부에 해당한다.
하회마을의 집들은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강을 향해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좌향이 일정하지 않다.
한국의 다른 마을의 집들이 정남향 또는 동남향을 하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다.
또한 큰 와가(기와집)를 중심으로 주변의 초가들이 원형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는 것도 특징이라
하겠다. 하회마을에는 서민들이 놀았던 ‘하회별신굿탈놀이’와 선비들의 풍류놀이였던
‘선유줄불놀이’가 현재까지도 전승되고 있고, 우리나라의 전통생활문화와 고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문화유산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하회마을은 풍산류씨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동 성마을이며,
와가와 초가가 오랜 역사 속에서도 잘 보존된 곳이다. 특 히 조선시대 대유학자인
류운룡 선생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류 성룡 형제가 자라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마을 이름을 하회(河回)라고 한 것은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데서
유래되었다. 하회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태극 형·연화부수형·행주형에 해당하며,
이미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도 유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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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屛山書院병산서원은~~~
있는곳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30
낙동강을 굽어보는 서원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1542~1607년)과
그의 셋째 아들 류진을 배향한 사당인 병산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사라지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교 건축물로 꼽힌다.
고려 말 풍산현에 있던 풍산 유씨의 사학(私學)을 류성룡이 이곳으로 옮겨와 제자들을 길러냈고
그의 사후에 제자들이 존덕사를 세우고 류성룡의 위패를 모셨다. 1863년(철종 14년)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많은 학자를 배출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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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앞쪽의 화산이 마치 병풍을 두른 듯하여 병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복례문을 지나 서원 안으로 들어서면 높은 계단 위에 자리 잡은 만대루가 보이고
류성룡과 류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존덕사, 서원의 중심으로 학생들이 강의를 듣던
입교당과 책을 인쇄하던 장판각이 있고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과 학생들의 기숙사로 쓰였던
동재와 서재 등이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하며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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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의 앞쪽에 위치한 만대루는 병산서원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로 대강당 역할을 하던 곳이다.
2층으로 넓게 지어진 만대루에서는 서원 앞에 펼쳐진 낙동강과 너른 백사장, 병풍과 같은 산들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서원의 규모는 크지 않으나 정갈하게 자리 잡은 각 건물들의 조형미가 빼어나
안동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행지라 할 수 있다. 류성룡의 문집을 비롯한 각종 문헌 3,000여 점이
보관되어 있으며 해마다 봄, 가을에는 제향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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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으로 단체 모습을 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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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屛山書院)은 서애 류성룡 선생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있는 서원이다. 1978년 3월 3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었다.
고려 시대부터 사림의 교육기관이었던,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을 1572년
선조5년 서애 류성룡이 이곳으로 옮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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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있는 서원인 병산서원은 유성룡을 배향한 서원인데요
도산서원고 함께 안동의 양대서원이자 우리나라의 10대 서원안에 드는 매우 유명한 서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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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의 세월이 흘렀을까~?
***알뜰한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