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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rinthians 10:12,13] For we are not bold to class or compare ourselves with some of those who commend themselves; but when they measure themselves by themselves and compare themselves with themselves, they are without understanding. But we will not boast beyond our measure, but within the measure of the sphere which God apportioned to us as a measure, to reach even as far as you. For we are not overextending ourselves, as if we did not reach to you, for we were the first to come even as far as you in the gospel of Christ.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그러나 우리는 분량 밖의 자랑을 하지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눠 주신 그 분량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량 밖에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더할수록 우리의 한계를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위대하여지기를 바라노라
개요
본문의 말씀은 사도바울이 3차 전도여행중 에베소(오늘날 터키 셀추크)를 떠나 마케도냐 빌립보(오늘날 그리스 북부 빌립보)로 건너갔을 때 고린도( 오늘날 그리스 남부 나폴리 바로위에 있는 아크로코린트지역 )에서 온 디도로 부터 고린도 교회가 회개했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 고린도에 보낸 편지인데 당시 고린도 교회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거짓 사도들이 바울의 외모나 언변, 사도직의 정통성을 공격했기에 일부 교인들이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부정해서 사도바울을 마음 아프게했고 또 타락한 항구도시로 음란과 우상숭배, 탐욕, 술취함으로 죄를 지어 바울이 육체와 영의 더러움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도록 촉구했었기에 이런 2가지 죄를 그들이 회개했다는 바울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 그래서 고린도 후서를 쓴 것이다. 특히 위 구절은 거짓 사도들이 자기 자신을 자랑하며 사도바울을 비하했는데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에 대해 설명한 내용이다.
비교의 덫에 걸리지 말자.
인생을 살다보면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생기는 일이 있다. 인생을 행복하게 잘살고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우리 앞에 친구가 새로 뽑은 자동차를 타고 나타난다. 그러면 그 차를 주목해 보면서 문뜩 내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와 비교하게 된다. 그러면 10분전까지만 해도 만족하던 내 차가 갑자기 낡은 정크차 같이 느껴지고 또 다른 새 차를 갖고 싶은 구매의 욕구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선 혼자 말로 말한다. 한번 가서 친구 차 안을 살펴만 봐야겠다. 그리고 다가가서는 차에 타보고 신선한 가죽냄새를 맡으면서 흐음 캬햐~ 좋다!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혼자 생각한다. 수 많은 차들이 있지만 다 같은 것은 아니지.. 지금이 차를 교체할 때인거 같다 라고 생각하며 타당성을 고려하지 않고 새차를 뽑을 것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사실 새차를 뽑을 타당성에 대한 이유는 만들려면 얼마든지 만들 수가 있다. 새차가 일 할 때 필요하다라든가, 아마 아내도 좋아 할거야... 새차를 뽑는게 장기적으론 이득이다. 그동안 내 차를 정비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과 돈을 허비했다. 아마 새 차 비용만큼 앞으로 정비하는 데 더 돈이 들어갈지도 몰라.. 등등... 무슨 이유든 들이댄다. 그리고선 결국 차를 뽑는다. 새차를 뽑고난 이후에 세상에는 수 없이 많은 같은 차종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자신도 그들 중 하나라 생각하며 만족해 한다. 그리고 얼마후, 수개월 또는 1~2년후 아직 할부금을 내고 있을 때 더 좋은 차가 나타나면 동일한 충동을 받게된다. 그렇게 인간의 심리는 더 좋은 것을 추구하는 그 욕망의 사이클을 또 다시 시작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겪는 이것이 우리가 비교의 덫에 빠지는 경로인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들에 대해 서로 비교하며 비교의 덫에 빠지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왜 그랬을까? 그 의미는 무엇일까?
비교의 덫에 빠진다는 의미는?
때때로 우리는 모두 각자가 비슷한 특성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비교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판이다. 상대방과 내가 다름을 보고 공정하지 못하다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각자 다르게 자기만의 특성을 가지게 창조되었고 지금까지 다르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NBA농구선수 신발은 크다. 그와 내 발의 크기를 비교하면 어떨까? 우리는 그들처럼 농구를 잘 못한다. 손흥민하고 축구 실력을 비교하면 어떨까? 내 축구실력이 형편 없을 것이다. 난 어떤 사람이 이런 말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물고기가 새와 비교하여 날지 못하는 것을 한탄한다면 어떨까? 물고기가 자신을 비참하게 생각할까? 아니다. 비참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물고기는 물속에 헤엄치기 잘하는 특성을 가지도록 창조되었고 하늘을 나는 것에는 비참할 수 밖에 없다. 반면 새는 어떤가? 새는 두 날개로 날 수 있도록 창조되어 창공을 시원하게 날지만 물속 수영은 처참하게 못한다. 그렇게 창조되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낙담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고 비하하고 비참하게 생각하는 것이 곧 비교의 덫에 빠지는 것이다. 상대방 만큼 열심히 땀흘려 노력하지 않고 다름을 비판하는 것도 안될 일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그 덫에서 빠져 나오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어쩌면 당신의 재정상태가 당신에게 현실을 인식시킬 것이다. 생각하지 않고 또 다른 새차를 뽑으려 할 때 내 지갑이 더 이상 할 부금을 지불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깨닫게 된다. 그러면 그것들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 버릴 것이다. 어떠한 신차가 출시되는지(rolled by)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사탄은 인간을 속일 때 affordability란 단어를 자주사용한다. 이 말은 '경제적 감당능력, 구매력'이란 말인데 어떤 물건이나 서비스의 가격이 소비자의 소득 수준에 비추어 보았을 때 적절하거나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나타낼 때 사용한다. 그런데 사탄은 모두가 다 affordability 를 갖는 세상에 살게 해주겠다며 우리는 마치 affordability가 없는 것처럼 자주 속이려 한다. 그러나, 아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 자신의 특성과 능력에 맞는 affordability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탄은 있는 것 마저 없는 것처럼 자신을 비하하게 만든다. 다시 말하지만 아니다. 우리는 모두 affordability를 가지고 있고 더욱 개발하여 더 큰 affordability를 누릴 수 가 있다. affordability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묘하지만 분명히 삶에 다른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비교의 덫이란?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러한 것을 통해 무엇을 배워야 할까? 결론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감사하는 순간부터 맘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던 뭔가를 소유하고자 한 욕망은 사라질 것이다. 성경은 그것을 안목의 정욕이라 말한다. 아담과 하와가 보암직하고 먹음직하여 소유하고자 했던 그 욕망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지 않는다. 아담가 하와도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하기 보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더 갖고자 탐했다. 사람들은 종종 상대방과 자신을 비교하며 더 갖고 싶고 더 좋은 것 더 비싼 것을 갈망한다. 그런데 이러한 비교의식은 더 치명적으로 우리를 영적으로 죽이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우리자신을 비교하는 것은 바리세인들이 행했던 태도로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바리세인들은 엄격한 법률을 지켰다. 그들에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계명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들은 또 다른 율법들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을 안다. 하지만 바리세인들은 613개의 또 다른 추가적인 율법을 만들었고 명령으로 그것들을 지키라 강요했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 뉴욕시를 보면 주차규정과 법률이 그곳에 무수하다. 주차를 하려면 모든 표지판을 다 봐야 한다. 표지판에는 화요일 1시부터 3시는 주차금지라고 적혀있다. 다른 표지판에는 금요일에는 12시부터 12시 30분까지는 주차가 안된다 써있다. 토요일에는 주차금지다. 따라서 운전자는 시계를 보고 날짜를 보고 주차시간이 맞는지 수시로 double check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차는 견인되기 때문이다. 바리세인들의 십계명에 추가된 613개 율법, 상상이 가는가? 우리는 그들도 그것을 다지키지 않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의 영(spirit)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은 비판적(critical) 영이다. 지독한(bitter) 영이다. 만약 여러분이 스스로를 누군가와 비교한다면 비판의 영, 지독한 영이 틈타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단지 두가지 옵션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가 나보다 뛰어나던가? 아니면 그가 나보다 열등한가? 이다. 만약 내가 뛰어나다 생각하면 자기자신의 등을 두드리며(pat yourself on the back) 스스로를 칭찬하면서 나는 저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그를 낮게 대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탄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 스스로의 능력으로 가장 높은 수준으로 올라갈수 있다고 믿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바리세인들은 타인에 대해 그렇게 행동했다. 사람들을 판단하고 그들을 비하하면서 자기들은 그러한 무능력한 사람들이 따라야 할 표준이라 생각했다.
예수님 그리고 비교의 덫에 빠진 바리세인들과 서기관들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세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네 이웃의 눈에 있는 가시는 지적하면서 너희 눈속에 있는 2 by 4 크기의 들보는 빼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비교의식은 상대방 뿐만아니라 자신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 교회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가정안에서 직장과 군대와 학교와 그 어떤 조직안에서도 오늘 나는 저 사람 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봐야 한다. 아마 밖으로 그런 말은 안할 지 모르지만 마음속에는 그런 영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교회에서 흠.. 내가 오늘 그들 보다 옷을 잘입었군... 성가대석에 앉아서는... 흠.. 내 목소리가 다른 사람보다 좀 더 아름다웠지...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성가대 단원을 뽑을 때 기준은 뭔가? 목소리인가? ...글쎄다.유명한 성악가처럼은 못 불러도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어떤 이는 난 항상 앞자리에 앉는다. 일찍온다. 더 많이 헌금한다며 속으로 남보다 자신을 낫게 여긴다. 이와반대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목소리가 않좋아. 난 젊지 않아. 난 부자가 아니야, 난 옷도 잘 못입어... 하고 계속 비교하고 판단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교회를 그만 다닌다. 하지만 이런 분들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빈부귀천 남녀노소 모두 동등하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행태를 생각해 보라.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구약성경에 있는 계명들을 다 지킬 수 있는가? 단언컨데 없다. 그것이 율법의 목적이다. 즉, 나는 율법을 내힘으로 온전히 지킬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주님께 나아가는 것 그것이 율법이 존재하는 목적이다. 하지만 바리세인들은 자기 힘으로 지킬수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계속 그렇게 자기 힘으로 율법을 지키고자 노력한다면 결국 당신은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잔인한 영을 소유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태도를 경고하셨다. 생각해 보라. 만일 우리가 계속 바리세인들 처럼 한다면, 외모는 어떻고, 목소리는 저떻고, 학교는 어디 나왔고, 영적인 인식은 나보다 못해... 그는 한손 들고 기도하지만 나는 두손 들고 기도한다...그는 10분 기도하지만 난 3시간 기도한다... 그는 나보다 성경지식이 짧다며 콧대를 높이고 걸어다닐것이다. 자신을 남과 비교하는 순간 그렇게 자신이 남보다 낫다고 자신의 등을 두두리며 자랑하는 것이고 자신은 한없이 높아지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현대판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존재가 되라고 의도하지 않으셨다. 바리세인들과 서기관들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태도보다 더했다. 그들은 항상 다른 사람의 잘못(faults)에 촛점을 맞추고 자신이 낫다고 여겼다. 우리는 다른사람들을 비교하고 비판하고 판단하고 코를 찡그리며 업신여기고 자기 자신을 자랑스러워 하는지 점검해 봐야 한다. 마치 자기만 천국가는 ticket을 가진 자처럼 현대판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행동한다.
비교의 덫에 허덕이는 존재
위 와는 반대로 누군가는 참 넘사벽처럼 나보다는 훨씬 높게 보이는 경우가 있다. 와,, 난 결코 저분처럼 노래할 수 없다 느낀다. 방언도하고 두손 들고 기도를 3시간 한다고.. 와 십일조를 저렇게 많이 했다고?.. 난 못해... 하나님 말씀을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는데 비교의 덫에 걸린 크리스찬들이 의외로 많다.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다른 성도들을 판단하고 가까이 하지 못하고 거부한다. 이처럼 자신을 판단하고 갖은 자를 비난하고 자신을 비하는 것은 바리세인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일반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은 부자를 보고 내 평생 벌어도 저 사람처럼 될 수는 없다. 헐! 저 분 근육에다 식스팩, 에고 난 너무 살쪘어... 저 사람은 얼굴 조각같다... 참 잘생겼다... 난 못생겼어... 와 학력, 스팩이 장난이 아니네... 그렇게 남과 비교하는 순간 절망의 영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들은 상황에 굴복하고 종이 된다. 그리고 종종 가지고 있던 희망을 포기하게 된다. 그러고서는 아..모르겠다... 모든 것을 포기하는게 낫다. 에라 게임이나 하자... 잠이나 자자.. 술이나 마시자... TV나 보자... 하며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낭비하고 자포자기하고 살아간다. 결혼하는 것도 포기, 직장 갖는 것도 포기, 집 사는 것도 포기... 삼포시대, 육포시대, 십포시대... 난 결코 저들 처럼 될 수 없다. 가진자만 잘되는 더러운 세상...이렇게 절망속에 허덕이며 원망하다 결국은 살아 뭐하냐 죽자하며...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를 보충한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나는 빌게이츠도 일론머스크도 아니다. 정주영도, 이병철도 아니다. 나는 나다. 나는 그들 보다 못한 것이 아니라 다르다. 직장의 동료도 나와 다르고 가족도 나와 다르다. 우리 하나님은 각 사람을 다르게 조성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는 존재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난 그가 어떤 분야에서 나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고 나는 그보다 약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어쩌면 다른 면에서는 내가 그보다 더 강점을 가지고 있고 그는 나보다 약한 약점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협력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시는 것들을 성취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비교하기 시작하면 단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그는 머리가 많이 빠졌다. 난 눈이 큰데 동양인은 눈이 찢어졌다.ㅎㅎ 한번 물어보자. 하루 몇시간 기도하는가? 한시간, 두시간, 삼십분, 얼마나 기도해야 충분한가? 난 30분 기도하는데 1시간 하는 사람보고 도전받아 1시간하다가 3시간 하는 사람을 보면 좌절한다. 얼마나 헌금해야 충분한가? 누군가는 과부는 가진 것 전부를 바쳤다고 말한다. 흠.. 맞는 말이다. 그런데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치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것을 다 받으시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하나님은 십일조란 기준을 제시해 주셨다. 젊은이 늙은이 가진자 못가진자 상관없이 동일하다. 그런데 만일 비교한다면, 백만장자는 천만원을 헌금하는데 나는 1만원 험금한다면? 그래서 그가 더 영적으로 위대한가? 만약 10%라는 기준이 충족된다면 그와 나는 다를것이 없다. 달란트 비유를 보면 10달란트 5달란트 1달란트 가진자를 주님은 동일하게 여기셨다. 얼마나 많은 컨퍼런스를 해야 충분한가? 얼마나 많은 음악을 해야 하나? 얼마나 많이 벌어야 하나? ... 끝이 없다. 비교를 하기 시작하면 결국 좌절하게 된다. 따라서 성경은 비교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일한 비교 대상.
우리가 유일하게 우리 자신을 비교해야 할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시다. 아멘.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선하다 라고 한다면 자랑해도 좋다. 주님처럼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처럼 나눠주고 주님처럼 병든 자를 고치고 주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주님처럼 죄인들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던지고 죽은 다음 부활 했다면 자랑해도 좋다. 정말 그런가? 그렇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더러운 거짓말쟁이(filthy liar)다. 누구도 그렇게 살 수 없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본을 보여주신 것은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 그분은 어떻게 사는 것에 대해 본을 보여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삶을 통해 그분의 삶과 우리의 삶이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볼 수 있었고 그분의 완전함, 그분의 무한한 성결, 그분의 공의로움, 그 앞에 서있는 우리의 타락(depravity)을 보면서... 아무도 자랑할 수 없고... 그저 주여, 아버지 하나님, 저를 도와 주세요. 예수님,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저를 떠나소서 했던 베드로의 고백처럼 성령님, 제 힘으로 제 능력으로 제 지식으로 제 경험으로 안됩니다. 성령님 제발... 저를 떠나지 마시고 도와 주세요.. 하며 살아계신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꿇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순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새로운 문이 열리게 된다. 희망의 문이 열린다. 왜냐하면 우리가 나 자신의 능력, 내 지식, 내경험을 의지해서 할 때는 하나님은 도와주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여 도저히 내힘으로 내 지식과 경험으로 안됩니다. 내가 그러면 그럴 수록 나는 무너졌고 내 자신을 잃고 또 잃어 버렸습니다. 주여~ 도와주세요 라고 고백하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희망의 문을 열어 주신다.
도토리 계곡, 주님이 문을 열어주시는 공간....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희망의 문을 열어주시는 비참했지만 아름다운 내용이 요엘서에 나온다. 요엘서 3장 2절에 여호사밧 골짜기가 나온다. 그곳은 다른 말로 도토리 계곡으로 알려지기도 했는데 "도토리 계곡"이란 성경에 언급된 "아코르 계곡"의 음성적 철자오류(영어로 도토리가 에이콘)이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교훈을 얻을 수가 있어야 한다. 이 계곡은 고난과 희망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 계곡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를 정복할 당시 아간의 죄에서 유래되었는데 , 그 죄로 인해 이스라엘은 패배하고 아간은 그곳에서 처형당했다. 본래 "고난"의 장소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계곡은 후에 희망의 상징이 되었고, 죄를 고백하고 처리하여 구원과 하나님의 은혜로 이어지는 곳이 되었다. 아간이란 사람은 여리고를 정복하는 동안 금지된 물건을 훔쳤다. 그의 탐심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보잘것없이 작아 보이는 아이성을 함락시키려고 첫번째 공격을 하다 패했고 이스라엘 병사 36명이 죽임을 당했다. 여호수아가 아이성 공략의 패배원인을 조사하던 중 이것이 아간의 죄로 인한 것임이 드러났다. 그로인해 아간과 그의 가족등 7명은 돌에 맞아 죽게되는데 그가 죽은 곳을 '아골 계곡(Velly of Achor)', 또는 '고난의 계곡'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 한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지울 수 없는 실패, 지울 수 없는(indelible) 상처,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을 맞게 된 것이다.
과거 일본의 진주만 공습 당시 침몰한 USS아리조나(BB-39)를 기억하는가?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격 당시 애리조나호 는 폭탄 공격을 받았다. 폭탄 하나가 앞쪽 탄약고를 폭발시켜 큰 폭발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애리조나호는 금세 침몰했고 이틀 이상 화재가 발생했다. 그날 하루만에 1,177명의 승조원이 사망했다. 지금도 그날을 추모하며 박물관을 짓고 그날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2014년 4월 18일 세월호 침몰로 단원고 교사 11명과 학생 248명이 사망했다. 1995년 6월29일엔 서울 서초구 삼풍백화점 붕괴로는 502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우리는 인생을 살다가 도토리계곡에 설때가 있는데 사고를 보고 죽음을 보고 많은 슬픔과 번뇌에 사로잡히게 된다. 어떤이는 이를 가지고 화살을 돌려 정부를 비난하고 선동하며 정치질의 도구로 사용한다. 또 어떤이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이런 일이 일어났겠냐 하며 심지어 하나님을 의심한다. 또 어떤이는 좌절한다. 비통해 한다. 낙담한다. 실패, 좌절, 죽음을 바라보게 된다. 과연 그런 처참하고 비통한 상황속에서 과연 새로운 희망이 떠오를 수 있을까? 있다!!!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깊은 절망 가운데 사로 잡힌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죄짐을 대신 지시고 죄의 삯이란 사망의 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셨다. 주님은 사망의 덫에 걸린 인간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주셨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부터 비참하게 떨어져 사망의 늪, 절망의 깊은 감옥에 갖힌 인간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 주셨다. 오늘날도 주님은 내가 문을 열어 주리라. 내가 네게 희망의 문을 열어주리라. 내가 비교의 덫에 빠진 너에게 희망의 문을 열어 주리라 말씀하신다. 그자리에 그냥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만약 너희가 너희 죄를 자백하고 너희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부터 떨어진 존재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내가 희망의 문을 열어주고 내가 너를 위해 새 일을 행할 수 있다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의 기쁨
우리의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를 서로 간증하는 것이다. 절망의 골짜기, 사망의 골짜기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새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이혼직전에 있던 가정이 주 앞에 나와 찬양하며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는 것이다. 마약과 섹스과 동성애와 술취함속에서 세상에 뒹굴던 젊은이들이 주 앞에 나와 두 손들고 찬양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지옥 삶에서 천국의 삶으로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이다. 내 생에 가장 기쁜 것은 이글을 혹 읽는 여러분들이 주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사는 소식을 듣는 것이다. 아마도 여러분의 가정에 어떤 사람이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데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가가 그녀를 감싸 주고 "주님이 자매를 사랑하신다" 전해주며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삶을 본다면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셨다. 우리도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한다. 주님은 고난의 골짜기에서 희망의 문을 열어 주신다. 솔직히 말해보자. 나는 어떤 고난의 골짜기에 있는가? 경제적 고난의 골짜기에 있지는 않은가? 가족간에 다툼(contention)은 없는가? 이혼 직전(in the verge of divorce)에 있지는 않은가? 자녀들이 방황(wayward)하고 있지는 않은가? 주여 나는 천국가는데 내 자녀들은 지옥에 가려고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나이까? 한탄섞인 기도를 하지는 않는가? 아파트 월세도 내야 할 돈 도 없습니다. 음란 동영상 때문에 미치겠습니다. 주여! 내속에 분노를 못 참겠습니다. 정말 이 분노를 이겨내고 싶습니다.... 시기 질투가 나서 미치겠습니다. 교회를 오랬동안 다니면서도 술을 마시고 담배를 숨어서 피고 도박을 하고 있습니다... 주여 어떤이는 교회에서는 형제 자매라 목사 장로라 불리는데 실상은 내연남(side chuk) 내연녀(side chik)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절망의 골짜기에서도 희망의 문을 여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더럽고 추하고 실패하고 좌절하고 낙담한 그 곳에서 희망의 문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여러분은 변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변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당신의 과거를 본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과거를 보지 않으신다. 주님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셨다 말씀하신다. 당신이 지금 절망의 계곡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상황을 바라보고 낙담하고 있다면 주님을 바라보자. 주님.. 창자가 끊어지는 단장의 심정으로 주님을 갈망합니다. 주님 내게 희망의 문이 필요합니다. 주여.. 라고 고백하자. 주여 내 삶에 들어오소서.. 제발... 그렇게 기도하면 주님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나를 들어 올리신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위해 고난을 받았다. 내가 너를 위해 죽었다. 그토록 내가 너를 사랑한다. 자기 이름을 부르며 말해 보라. 아무개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내 이름을 부르시고 나를 구해주신다. 주님은 더 이상 내 과거를 보시지 않으신다. 과거의 도박꾼, 술주정뱅이, 도둑놈, 음행자, 저주하는 인간으로 보시지 않으신다. 너는 달라졌다. 너는 구원을 받았다. 너는 거듭났다. 과거의 너가 아니다. 선언해주시고 과거를 묻지 않으신다. 보혈의 피로 씻어 주시고 성령의 기름을 부어 우리를 빛나게 하신다. 이제 이혼할 필요가 없다. 이제 자살하지지 않아도 된다. 이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도토리계곡, 고난의 골짜기 가운데 희망의 문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니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더이상 우리가 사탄의 속임수에 속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주님은 우리가 더 이상 이 세상의 풍조에 굴복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주님은 우리의 삶가운데 위대한 것을 원하신다. 난 동성애자인데 하나님이 나도 구원하실까요? yes. He can. 아무도 모르는데 난 사실 마약 중독자인데 하나님이 나도 도와주실까요? Yes He can. Set you Free. 난 어렸을 때 엄청난 상처를 받아 지금도 트라우마가 있는데... 지금도 밤낮으로 고통받고 악몽도 꾸기 때문에 아직도 그들을 절대 용서 못하는데... ㅠㅠ 사랑하는 아들아, 딸아 내가 너를 이해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위해 하신 일을 묵상하라. 그리고 주님 내가 빠진 이 덫을 주님께 있는 그대로 올려드립니다. 라고 기도하자. 주님은 바로 그 때문에 이세상에 오셨다. 주님은 절망의 골짜기에서 희망의 문을 열어 주신다. 주앞에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 기도하며 모셔드리자. 진실한 맘으로 주 앞에 나아가자. 사랑의 하나님께 나아가 그 분의 은혜를 구하자. 주님을 바라보자. 인자한 그분의 눈동자를 바라보자. 주께서 내게 힘을 주신다. 능력을 주신다. 새롭게 하신다. 거듭남을 체험케 하신다. 오 사랑의 주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영원히 영광 받으소서. 아멘
[참고 신약교회 브라운 친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