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먹거리와 역사를 바꾼 오렌지ㅡ (2016년 1월 23일 이연실)
서유럽에서는 민머리 중년 남자들이 흔하게 보입니다 유전적 영향도 있지만 음식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매일 고기 빵 햄 베이컨 등을 먹어서 뚱뚱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국 음식은 피스 앤 칩스 같이 대체로 서민적이지만 런던 중심가인 트라팔가 광장의 대로변에 가면 유리창 안으로 보이는 실내 장식이 버킹엄궁을 옮겨 놓은 듯 화려한 곳도 있습니다 앉아있는 사람들의 차림새와 찻잔이 쉽게 들어가서는 안 될 곳이라는 걸 알려줍니다 영국제 명품 고급 찻잔에 비스킷을 곁들여 놓은 차 한 잔 값이 한국 돈으로 15만원 정도 적혀 있습니다
세상에는 '위로도 끝이 없고 아래로도 끝이 없다'는 말이 이럴 때 해당되나 봅니다 지구촌 어느 곳에서는 햄버거 1개에 5백만 원, 포도 한 송이에 70만원, 차 한 잔에 15만원, 아이스크림 1개에 100만 원짜리를 먹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반인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음식 문화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합니다
런던의 어느 거리에는 유명한 일본 라면 가게가 있습니다 좁은 점포에 작은 의자가 오밀조밀 놓인 가게 앞에는 줄이 길게 서 있습니다 비싼 값을 받으며 돼지고기를 넣은 특이한 라면을 팔고 있습니다 느끼하고 진한 육수 맛이어서 다시 먹고 싶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고급화 이미지를 추구하는 일본인 특유의 전략으로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인에게 라면은 간식 수준이지만 그들은 전략적인 마인드로 외국에서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줄을 서게 만들고 있습니다
버밍엄 중심가나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에서는 뮬드 와인을 파는 가게가 많습니다 젊은이들이나 오가는 관광객들이 길을 걸으며 끓인 와인을 마시며 대화를 나눕니다 키가 크고 좁은 파라솔에서는 많은 이들이 서서 맥주를 마십니다 선술집 느낌이 나기도 합니다 그들은 매우 다양한 맥주를 취향대로 선택해서 마십니다 여자들도 술을 많이 마시며 즐기는 모습이 낯설기도 하고 인상적이기도 합니다
중국인들은 어느 나라에서나 차이나타운을 형성하고 먹거리 상점을 대형으로 운영합니다 런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즐겨먹는 향채나 칠리 깡콩, 청경채, 또는 죽순 같은 것들이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곳에 한국의 김과 컵라면 등을 비치해서 쏠쏠하게 사업 수완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친 역사가 있습니다 빵이나 밥은 인류 역사를 이어 오게 한 원동력입니다 인간이 수천 년 간 육상 실크로드로 문화와 문명을 교류하다가 해상 실크로드로 접어들 즈음에 문화와 문명의 중심축이 서유럽으로 옮겨갔습니다 문화의 태동이나 이동의 중심에는 반드시 먹거리가 있습니다 오렌지가 인류 역사를 바꾸기도 했습니다
일례로 15세기에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는 오렌지 덕분에 살아났습니다 그가 배를 타고 오랜 탐험길에 올랐을 때 주로 비스킷이나 소금에 절인 소고기를 먹던 선원들이 괴혈병으로 쓰러져 항해를 포기하고 바다에서 떼죽음을 당할 뻔 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북아프리카에 당도해 오렌지를 먹고 기적같이 살 수 있었습니다 당시 괴혈병은 잇몸에 피가 나기 시작하면서 온몸의 시스템이 오작동 돼서 몸이 까맣게 변하며 수일 내로 죽는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중국은 실크로드 덕분에 문명과 문화가 발전했습니다 아랍 상인들이 중국의 오렌지나 나침반을 유럽에 전했습니다 역설적으로 육상 실크로드에서 해상 실크로드로 세계사의 중심이 옮겨갈 때 바다를 통해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숨은 공신이 바로 오렌지와 나침반이었습니다 거꾸로 19세기에 중국은 영국과의 아편전쟁으로 굴욕을 겪었습니다 그런 중국이 21세기 들어 힘이 보다 점점 강력해지고 있으니 문명과 문화의 흐름도 돌고도는가 봅니다
프랑스의 경우 17세기에 이미 베르사유 궁전에 대형 온실을 갖추고 오렌지 나무를 키웠습니다 궁전에 가면 온통 오렌지 향이 풍길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으며 생산량을 높였습니다 그 오렌지 덕분에 망망대해를 거쳐 수많은 식민지를 개척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그라스 지방에서 향수 원료로 오렌지도 사용했습니다 그라스는 오늘날 세계 향수 산업의 심장부입니다
프랑스는 모든 식재료의 종류가 다양하고 다채롭습니다 까르푸나 대형마트에는 온갖 농수산물이 가득하고 검은색 무 등 한국에서 못 본 과일 야채들이 수두룩합니다 산더미처럼 쌓인 각종 먹거리가 지천인 것을 보며 과연 풍요로운 나라구나 감탄하고 맙니다 글로벌 경제 위기 속에서도 거리의 카페마다 와인을 곁들인 식사를 하는 그들의 모습이 다른 세상 같아 보입니다
프랑스는 남한의 7배나 되는 큰 면적의 나라입니다 알프스 산이 있는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평지이며 유럽에서 가장 기름진 평야를 가진 나라입니다 영국 중앙역에서 유로스타 기차를 타고 프랑스 파리로 오는 내내 끝없이 펼쳐진 들판이 기찻길 양 옆으로 펼쳐집니다 양떼와 말과 소들의 목장들과 중세풍 농가들을 스쳐갑니다 정사각형 또는 직사각형으로 보이는 밭마다 농기계들이 지나간 흔적이 영화 장면 속의 먼 길처럼 보입니다 가끔 호수나 평평한 나무숲들을 지나가고 오랜 세월 말발굽들이 다져놓은 듯한 길로 자동차들이 달리곤 합니다 이 여정은 마치 풍경화 속으로 살며시 빠져들게 합니다
양떼 목장에서는 치즈나 요거트를 생산합니다 치즈의 종류는 수천 가지나 되어 일일이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한국에도 벨기에 신부에 의해 치즈가 생산되었습니다 그분은 전쟁으로 먹고 살기 어려운 한국의 난민들을 위해 유럽에서 양 두 마리를 배에 싣고 왔습니다 전북 임실에 성당을 세우고 직접 치즈를 생산하는 방법을 알려준 것이 임실 치즈의 기원입니다
빵과 고기 문화권에 머물다가 밥과 김치 문화권에 돌아오니 살 것 같습니다 김치와 컵라면을 인천공항에서 사갔다가 다 먹고 중국인 마켓에서 컵라면을 더 사서 끓여먹기까지 했습니다 귀국하자마자 김치에 얼큰한 라면을 먹으니 숨통이 트였습니다 어쩔수 없이 뼛속까지 한국인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에 음식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일까요?
밥 한 끼를 앞에 두고 생각합니다
한국인의 식탁에도 세계 역사의 일부가 숨쉬고 있습니다 멀고 먼 영국과 프랑스의 서유럽 역사까지 녹아 있습니다 그 음식들의 긴 여정을 떠먹습니다 지구촌에서 생산을 위해 수고한 사람들과 태양, 바람, 물, 흙 등의 생태 활동이 고맙기만 합니다 지구촌에서 부디 식량으로 빚어지는 탐욕의 전쟁이 멈추고 어느 거리에서나 좀더 공평하게 먹고 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