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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2일(성령강림절 후 열여덟 번째 주일, 순교자 기념 주일)
느헤미야 4:15~23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드리는 기도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네 페이지 설교형식
김규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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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다 보면, 생각지 못한 대적들의 공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산발랏과 도비야를 비롯한 대적들이 행위가 드러나 있습니다.
먼저, 산발랏은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하며 비웃었습니다. 산발랏은 “불탄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 한다”라며 느헤미야를 비난했습니다(2절). 여기에서 “불탄 돌”은 건축에 적합하지 않은 돌을 지칭합니다.
산발랏의 이야기를 들은 도비야는 한술 더 떠서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질 것이다(3절)”라며 비웃었습니다.
과연 산발랏이 누구입니까? 포로기 후기 문서(엘레판틴 파피루스)에 의하면, 산발랏은 주전 407년에 사마리아 총독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주전 445년에 예루살렘에 들어왔을 때, 산발랏은 아마도 사마리아의 총독이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산발랏의 두 아들 이름이 유대 식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이 점을 참조한다면, 산발랏은 여호와를 섬기던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유대의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산발랏에게 사마리아 신전을 세운 책임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한다면, 아마도 산발랏은 여호와도 섬기고, 이방 신도 섬기던 혼합 주의자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또 암몬 사람 도비야는 누구입니까? ‘도비야’라고 하는 이름은 ‘여호와는 선하시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여호하난’(느 6:18)은 ‘여호와는 긍휼하시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름으로만 놓고 본다면, 도비야도 여호와를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6장 18절 이하에서 도비야는 유대인 중에 많은 친구를 두고 있었습니다. 도비야는 신앙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믿는 이들과도 친분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산발랏과 도비야를 보면서 느끼는 점은, 우리의 대적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구분 짓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입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처럼, 우리가 싸워야 할 대적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인의 모습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신앙인들과도 깊은 친분을 나누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대적은 때로는 광명한 천사로, 때로는 친근한 친구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하나님 섬기는 신앙을 포기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이 세상의 지혜와 가치를 추가해서 좀 더 지혜롭게 살라고 우리에게 충고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대적자들은 세속주의와 혼합주의의 가치관으로 무장된 사람들입니다. 만약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다면, 우리는 과연 누구와 맞서 싸워야 할지를 명확하게 구분 짓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느헤미야 4:7~8에 보면, 예루살렘 성벽재건을 대적했던 사람들이 좀 더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그들이었습니다.
유대 땅을 기준으로, 동쪽에는 암몬 사람들이 있었고, 남쪽에는 아라비아 사람들이, 서쪽에는 아스돗 사람들이, 북쪽에는 산발랏과 도비야를 비롯한 사마리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한자성어로, 사면초가(四面楚歌)라고 합니다. ‘사면초가’는 동서남북 사면에서 초나라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는 뜻입니다. 옛 초나라의 임금 항우가 한나라의 임금 유방과 싸움을 벌였는데, 그만 초나라 군사들이 사면으로 한나라 군사들에게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군사들은 점점 줄어들고, 군량미도 점점 바닥을 보이는데, 어느 날 밤 초나라 임금은 적진에서 들려오는 초나라 군사들의 구슬픈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초나라 임금은 벌써 자신의 군사들이 저렇게나 많이 적군에게 포로가 되었는지를 한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술잔을 기울이며, 시 한 편을 짓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출처: 네이버 한자 사전).
여기에서 유래한 한자성어가 ‘사면초가’입니다. 지금 느헤미야가 처한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의 대적들은 함께 힘을 모아 예루살렘으로 가서 치고, 그곳을 요란하게 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8절). 이러한 상황에서 느헤미야를 도와줄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적들의 공격이 점점 거세지자, 성벽 쌓던 일에 마음을 합했던 유다 백성들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흙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짐을 나르는 자의 힘이 다 빠졌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 중에 대적과 가까운 곳에 살던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열 번씩이나 느헤미야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10~12절).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느헤미야는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만약 여러분이 느헤미야라면 여러분은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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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교단이 정한 순교자 기념 주일입니다. 성결교회의 첫 순교자는 박봉진 목사입니다. 박봉진 목사님은 1890년에 평택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박 목사님은 어느 날 수원을 헤매다가 “예수를 믿으라”는 두 청년의 전도를 받고 수원성결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박 목사님은 수원교회 권사 중 한 명이 운영하는 금은세공업 상점에서 견습공으로 들어가 기술을 배우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향에 교회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고향인 평택으로 돌아가 금은방을 차리고 사람들을 전도하여 성결교회를 세웠습니다.
박 목사님은 40세가 넘는 나이에 자신의 몸을 주께 드리기로 결심하고, 1932년에 서울신학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했습니다. 박 목사님은 1938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여주 하리교회를 거쳐 철원교회에 파송되었습니다.
일제 시대에 성결교회는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예수 재림 사상을 고취한다 하여 일제에 큰 박해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1943년 5월 24일에, 일제는 전국에 있는 성결교회 교역자들을 총 검거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박봉진 목사님도 철원교회에서 열심히 목회던 중에 형사들에게 연행되어 극심한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일본 경찰들은 하나님 외에 참 신이 없다는 것을 자백받기 위해 박 목사님을 위협하고 때로는 달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박 목사님은 유치장에서 3개월 동안 일제와 싸웠습니다.
형사가 물었습니다. “너는 무슨 이유로 신사참배를 거절하느냐?”
박 목사님은 대답합니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 외에 참 신이 없기 때문이다.”
형사가 또 묻습니다. “이놈아, 너는 천황의 백성이면서, 천황이 망하라고 기도한다지?”
그러자 박 목사님은 대답했습니다. “오냐, 그렇다.”
“이놈아, 그럼 천황이 크냐, 하나님이 크냐?”
“그런 유치한 질문으로 또 사람을 잡을 생각이구나. 내 대답은 뻔하니 네 마음대로 하려므나.”
일본 경찰은 박 목사님의 주리를 틀고, 코에 고춧가루를 붓고, 천장에 매달아 장작을 패듯 매질을 했습니다. 무려 7시간에 걸친 혹독한 고문이 계속된 후에 박 목사님은 인사불성이 되어 끌려 나왔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벌벌 기면서 유치장으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박 목사님이 일제에 끌려간 다음 해인 1944년 8월 10일 아침에, 일본 경찰은 박 목사님의 사모님을 불러 박 목사를 데려다가 병원에 입원시키라고 했습니다. 이때 박 목사님은 정신을 잃고 사지가 축 늘어져 있었고, 온몸에는 피멍이 들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급히 인력거를 불러 박 목사님을 병원에 입원시켰더니, 일본 경찰은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시키기 위해 박 목사가 ‘장질부사’라는 전염병에 걸렸다고 격리하고, 나중에는 신경쇠약과 빈혈증이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한참 후에야 정신이 든 박 목사님은 사모님에게 “나는 지옥에서 나와서 지금 천당에 왔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출처: 편집실, “일제 치하의 성결교회 첫 순교자 박봉진 목사”, 「활천」, Vol.399, No.0, 22~24 pages, 1982.
여러분은 박 목사님의 일화를 듣고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많은 고난과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과도 영적인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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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가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방법은 무엇일까요?
위기의 상황에서 우리에게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신앙의 힘입니다. 우리는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과연 느헤미야가 성벽재건을 시작하기에 앞서 처음으로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느헤미야는 먼저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4절과 5절에서, 느헤미야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하건대 그들이 욕하는 것을 자기들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주 앞에서 그들의 악을 덮어 두지 마시며 그들의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를 노하시게 하였음이니이다.”
느헤미야는 성벽재건 중반기에도 어려움을 당하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9절). 특별히 느헤미야의 기도는 시편의 탄원(歎願) 시를 닮았습니다. 그는 원수 갚은 것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며, 지금 자기들이 당하는 어려움이 하나님과 관련된 어려움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하기 위해 일하다가 고난을 겪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기억하시고, 환란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기도하면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신앙의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신앙의 담대함은 깊은 기도의 골방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실천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과연 느헤미야는 이 어려움에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느헤미야는 “파수꾼을 두어 주야로 성벽을 방비하였습니다(9절). 또한, 느헤미야는 방위력을 보강하였습니다. 그는 성벽 뒤의 낮고 넓은 곳에 백성들을 세우고, 그들을 칼과 창과 활로 무장시켰습니다(13절).
또한, 느헤미야는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용기를 주고 그들을 격려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대적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고 백성들을 격려했습니다.
또한,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부역과 전투조직을 비상체제로 개편합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수하들을 절반으로 나누어서 절반은 일하고, 나머지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지게 했습니다.
또 느헤미야는 성을 건축하고 짐을 나르는 사람들은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게 하였습니다. 또 느헤미야는 나팔 부는 자를 곁에 두어 유사시에 나팔 소리를 듣고 백성들이 모이도록 했습니다.
느헤미야의 지도력 아래에서, 무리의 절반은 동틀 때부터 별이 나기까지 창을 잡았고, 백성들은 밤에는 파수하고, 낮에는 일했습니다. 이 일에 느헤미야 자신도 모범을 보였습니다. 23절에서, 느헤미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나 내 형제들이나 종자들이나 나를 따라 파수하는 사람들이나 우리가 다 우리의 옷을 벗지 아니하였으며 물을 길으러 갈 때에도 각각 병기를 잡았느니라.”
느헤미야는 유다 총독으로서,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위기의 때에 모범을 보여 부하와 백성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함께 헌신하도록 이끌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백성을 향한 지도력은 함께 가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와 하나님을 향한 최선의 노력이 합쳐질 때, 하나님의 귀한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기도만 하고 땀 흘리지 않으면 소용이 없고, 반대로 기도하지 않고 땀만 흘려도 소용없습니다. 믿음과 행함은 함께 가야 합니다. 이것이 느헤미야의 영적 지도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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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했던 박봉진 목사님은 사모님에게 감사 기도를 드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기도가 끝나자, 박 목사님은 “성결교회 본부는 지금 어떠한가?”를 물었고, 자기의 고통보다는 교단과 동료 동역자들의 안위를 걱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박 목사님은 성결교회 총회와 교역자들을 위해 기도하다가 정신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우리 민족이 그토록 사모하던 민족해방을 일 년 앞둔 1944년 8월 15일 새벽 4시. 박 목사님은 사모님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고, 합동 찬송가 167장을 불러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저 좋은 낙원 이르니 그 쾌락 내 쾌락일세
이 세상 추운 일기가 화창한 춘일되도다
영화롭다, 낙원이여 그 산악에서 보오니
먼바다 건너 있는 집 주 예수 예비하신 곳일세
그 화려하게 지은 집 영원한 내 집이로다
가족들과 신자들이 모여 애끓는 찬송을 부를 때, 박 목사님은 피골이 맞닿은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여보, 저 천국의 음악 소리가 들리지 않소? 지금 천군 천사가 내려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박봉진 목사님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박 목사님은 지극히 평온한 얼굴로 숨소리가 잦아들어, 그토록 사모하던 주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설교자 주(註): 박봉진 목사의 순교 연도에 관해서는 1943년이라는 주장도 있다: 박종현, “불꽃으로 타오르다-박봉진 목사”, 「활천」, No.6, 22~27 pages, 2006.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하며 투쟁하던 박봉진 목사님은 성결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이후 일제 시대 성결교회에는 몇 명의 순교자가 더 나왔고 300여 명이 투옥을 당했습니다.
-출처: 편집실, “일제 치하의 성결교회 첫 순교자 박봉진 목사”, 「활천」, Vol.399, No.0, 22~24 pages, 1982.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여러분이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하기 위해 겪고 있는 어려움은 무엇입니까? 저는 오늘 순교자 기념 주일을 맞아 성결교단의 첫 순교자 박봉진 목사님의 순교 일화를 여러분과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비록 느헤미야나 순교자 박봉진 목사처럼, 하나님을 위해 큰 시련을 겪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 가신 신앙 선배들의 발자취를 기억하고, 그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무엇보다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을 돌아보시고, 반드시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감당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보고 최선을 다해 그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순교자 박봉진 목사의 얼굴 조각상>
-사진 출처: 「활천」, No.9, 38 page,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