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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선교지 구브로(2025년 1월 19일 오후 찬양 예배 설교)
성 경 : 사도행전 13:4-12(신약 209)
안디옥 교회는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인 믿음의 공동체였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인 안디옥 교회는 하나 된 힘을 세계 선교를 향해서 뻗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적극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언제나 새로운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목표가 없는 삶은 무미건조하고 생명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위해서 살아갈 때 우리의 삶에 생명력이 넘치고 힘이 넘치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많은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안디옥 교회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고 기독교 역사 가운데 선교의 첫 장을 열고 세계 선교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서 온 교회가 힘을 모았기 때문입니다.
안디옥 교회와 반대 되는 교회를 꼽는다면 고린도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모든 것이 풍성한 교회였습니다. 고린도라는 지역 자체가 상업 도시로서 상업이 발달했기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도 물질적으로 풍부한 교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를 많이 받은 교회입니다. 고린도서에 나타난 것으로 볼 때 성령의 다양한 은사가 나타나는 교회로서 하나님의 많은 사랑과 축복을 받은 교회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교회입니다. 특별히 같은 도시의 사람들이 모인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파벌이 있는 분쟁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와 안디옥 교회를 비교해 볼 때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안디옥 교회는 선교에 대한 비전을 세우고 선교 지향적인 교회인 반면 고린도 교회는 비전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밖으로 향한 비전이 없기 때문에 내부적으로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밖을 향한 비전과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소극적으로 내부적인 문제만을 생각하는 교회는 발전할 수 없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외부를 향한 비전을 가질 때 하나님의 돕는 역사를 경험하게 되고 우리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외부를 향한 비전과 목표를 갖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성경적 축복의 수학 공식이 적용되는 반면 자신의 문제에 얽매인 사람에게는 마이너스 공식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성경적 축복의 수학 공식이 적용되었는지 아니면 마이너스 공식이 적용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내 삶에 마이너스 공식이 적용되었다면 비전 세우기를 하고 밖을 향한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수학 공식을 적용 받는 비결입니다.
안디옥 교회와 같이 선교 지향적이고 외향적인 목표를 갖는 성도와 교회는 축복의 공식이 적용되고 고린도 교회와 같은 교회와 성도는 마이너스 공식이 적용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참빛교회와 저와 여러분이 마이너스 공식이 아닌 축복 공식의 적용을 받는 교회와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 한 말씀은 바나바와 사울이 세계 선교를 위해서 첫 발을 내딛는 내용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파송한 최초의 세계 선교사인 바나바와 사울이 처음으로 선교를 시작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첫 선교지 구브로” 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성령을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4절에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3절을 보면
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13: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안디옥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성령께서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주를 섬겨 금식할 때 즉 영적인 예배를 드릴 때에 성령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말씀하심을 듣고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웠습니다. 여기서 따로 세웠다는 것을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그들을 세웠다는 것이고 그렇게 따로 세워서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함께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지시하심을 받고 그들을 안수해서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계속해서 바나바와 사울은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서 선교지를 떠났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의 선교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성령의 보내심을 따라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일을 성령의 인도하심과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이 부분을 잊고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뜻에 따라서 무엇인가를 해보려고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뜻대로 하는 것은 언제나 실패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우선순위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최우선 순위로 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따라가면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있습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그런 일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주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순종하기 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무리 지어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모세를 향해서 돌을 들어 치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대다수의 군중들이 원하는대로 하는 것은 언제나 실패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대다수가 원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보내시는 일을 위해서 사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안디옥 교회가 처음 선교사를 파송 할 때 내부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건축도 해야 되고 이런저런 일들도 해야 되기 때문에 선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안디옥 교회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반대하고 안디옥 교회의 내부 사정으로 인해서 어쩔 수없이 다음 기회로 선교를 미루기로 했다고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내부에 반대가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음성에 순종했으며 바나바와 사울도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서 첫 번째 선교지인 구브로 섬으로 가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참빛교회가 성령의 보내심에 순종하는 교회가 되고 우리 성도님들이 성령의 보내심에 순종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는 기도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결정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때로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안디옥 교회처럼 기도하기 보다는 먼저 걱정하고 염려하고 안 될 것을 생각하며 망설인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교회와 성도가 되려면 먼저 기도하고 먼저 성령 충만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2. 첫 선교지 구브로
성령께서는 바나바와 사울의 첫 번째 선교지로 구브로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많고 많은 지역 중에서 첫 번째 선교지로 구브로를 선택해 주셨을까요?
이곳은 사울과 동행한 바나바의 고향입니다. 행 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안디옥 교회 구성원의 일부가 이곳 출신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행 11: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따라서 첫 선교지로 구브로(Cyprus)가 선택된 것은 바나바와 구브로 출신 안디옥 교회의 교인들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브로 섬을 선택하신 것은 바나바와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과 관계가 있다고 추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브로는 바나바라는 믿음의 사람으로 인해서 첫 번째 선교지가 되었고 하나님은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서 구브로에 복음을 전해 주심으로 생명을 얻는 복음을 받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바나바라는 믿음의 사람을 귀하게 여기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나바처럼 귀하게 여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귀하게 여기셔서 우리들의 가족과 우리들의 고향까지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이와 반대되는 경우를 소돔과 고모라 성의 이야기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죄악이 심히 무거운 소돔과 고모라를 보시고 그 성을 멸망시키시기로 작정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를 합니다.
그 성에 “의인 50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로 시작해서 10명의 의인만 있어도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불행하게도 그 성에 10명의 의인이 없어서 멸망을 당했습니다.
반면에 구브로는 의로운 믿음의 사람 바나바로 인해서 그리고 안디옥의 구브로 출신의 성도들로 인해서 하나님은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보내셔서 그들에게 생명을 얻는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바나바와 구브로 출신의 성도들 같은 저와 여러분 때문에 가족이 살고 가정이 살고 고향이 살고 나라가 사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3. 구브로에서 사역
바나바와 바울을 첫 선교를 떠나면서 기도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첫 선교지에 도착을 했습니다. 첫 선교를 떠나면서 바나바와 바울은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습니다. 5절을 보면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여기서 기록한 요한은 사도 요한이 아니라 마가라고 하는 요한입니다.
행 12: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마가 요한은 우리가 마가 다락방이라고 부르는 그 마가입니다.
마가 요한은 바나바의 생질입니다. 골 4: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그런데 우리 개역 개정에서 생질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아넵시오스 (ἀνεψιός) 인데 이 단어의 의미는 사촌이란 의미입니다. 생질은 누나나 여동생의 자녀들을 생질이라고 하는데 원어에 충실하게 번역한다면 생질보다는 사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가 요한은 마가복음의 저자입니다. 마가는 예루살렘 사람이요, 그의 집은 부자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였으며, 예수님의 여 제자로서 그의 집을 예수님과 복음 역사를 위해 제공하였습니다.
마가가 기록한 마가복음은 사 복음서 중에서 가장 짧으면서도, 가장 많은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고 마가복음이 복음서들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마가복음이 공관복음의 자료가 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마가를 ‘나의 아들’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벧전 5:13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초대 전승에 의하면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떠난 후에 베드로의 동역자가 되었다고 하고 마가가 마가복음을 기록할 때 베드로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자신들이 사역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자신들을 돕는 일을 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 선교에 참여했던 마가는 나중에 힘들다고 하면서 선교지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13절에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1차 선교여행을 시작하면서 사울의 이름이 바울로 바뀌게 됩니다. 9절에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사울은 유대식 이름으로 바울은 로마식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이름의 다른 표현이기는 하지만 사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고 바울은 첫 선교사로서 복음의 전달자라고서의 변화된 삶을 사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처음으로 도착한 구브로에서 바보라는 섬에 도착을 해서 사역을 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났습니다. 13:6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
바예수라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가 있었고 바보라는 곳에 도착해서 그를 만났습니다. 유대인의 이름 중에 앞에 ‘바’ 라는 단어가 붙으면 누구누구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바예수 하면 예수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바예수는 마술사라고 되어 있는데 ‘마술사’란 마술적 또는 주술적 치료 행위를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여기에 거짓 선지자라고 덧 불여진 점으로 보아 자칭 하늘의 계시자로 행세하면서 동시에 주술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치료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대인인 그가 그 같은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활동을 지속했다는 사실은 그곳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그의 행동에 미혹되었거나 아니면 총독이 그를 보호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총독이 바울의 전도를 듣고 복음을 듣기 원했는데 바예수가 방해를 했습니다. 그러자 사울이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그를 향해서 저주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8-11절까지를 보면
13:8 “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13: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13:10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13:11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바예수가 사역을 방해했지만 하나님은 구브로에 준비된 사람인 총독 서기오 바울 만나게 하셨습니다. 7절을 보면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서기오 바울은 헬라어로 세르기오스 파울로스(Σέργιος Παῦλος)입니다. 서기오 바울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지혜있다’(쉬네토스)는 맡은 본래 신중하고 지성적이며 자기 주관이 뚜렷한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 이 말은 총독의 통치력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표현으로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누가는 총독으로서 서기오 바울이 공명 정대하면서 분별력이 있는 정치를 한 것을 이 한 단어로 묘사한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그는 종교적인 열심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바울과 바나바를 만나서 복음을 들으려고 했는데 마술사 엘루마가 방해했다는 것은 바울이 오기 전에는 바예수라고 불려진 마술사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서기오 바울에게 복음을 전하자 어떻게 해서든 막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는 바울과 바나바가 전하는 복음을 듣길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서기오 바울을 예비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 선교지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서기오 바울을 만남으로 선교의 첫 결실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는 바예수라는 마술사가 자신이 복음을 듣는 것을 방해할 때 바울에 의해서 그가 볼 수 없게 되자 바울의 능력 전도를 보고 더 확실하게 믿게 되었습니다. 12절을 보면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서 늘 사람들을 준비해 놓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사람을 만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예비하신 사람을 만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바나바와 사울의 첫 선교지에서 준비된 사람을 만나게 하심으로 바나바와 바울이 힘을 얻어 지속적으로 선교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하셨듯이 오늘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고 그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기 위해서 예비해 놓으신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므로 하나님께서 예비한 그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축복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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