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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도 정작 의식이 무엇인지 단 한 번도 정확히 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놓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무엇을 의식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일까요? 생각이 일어나면 나는 생각한다고 말하고 감정이 올라오면 나는 느낀다고 말하며 어떤 경험이 펼쳐지면 나는 그것을 경험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생각은 나타났다가 사라집니다. 감정도 올라왔다가 사라집니다. 감각도 끊임없이 변하고 경험도 계속해서 바뀝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변하는 동안에도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생각이 바뀌어도 그것을 알고 있고 감정이 변해도 그것을 알고 있으며 경험이 달라져도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어떤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가 바로 의식입니다. 의식은 어떤 대상이 아닙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생각처럼 떠오르는 것도 아닙니다. 의식은 그 모든 것이 나타나는 자리입니다. 생각이 나타나는 자리 감정이 드러나는 자리 감각이 펼쳐지는 자리 그리고 우리가 세계라고 부르는 이 모든 경험이 드러나는 바탕 그것이 의식입니다. 그래서 의식은 어떤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모든 대상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조건입니다. 의식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대상을 드러내는 힘입니다. 사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의식이 그것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의식이 없다면 어떤 대상도 대상으로 나타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는 의식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의식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힘입니다. 의식 없이는 어떤 경험도 시작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사실이 하나 드러납니다. 의식은 단순히 비어 있는 공간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내용과 함께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생각이 없으면 생각 없는 상태가 드러나고 감정이 없으면 감정 없는 상태가 드러나며 어떤 형태로든 항상 무언가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식에는 두 가지로 보이는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바탕으로서 의식 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거기에 나타나는 모든 내용입니다. 생각 감정 감각 세계 이 모든 것은 내용이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의식 자체입니다. 그러나 이 둘은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은 의식 자체와 내용으로 구성된 모든 것입니다. 의식은 스스로를 자신과 세계로 나누어 드러냅니다. 주체와 객체 내부와 외부도 의식에서 나타난 구분입니다. 정신과 물질 또한 다른 것이 아니라 의식의 두 측면입니다. 내면과 외부 세계 역시 의식 안에서 함께 드러납니다. 외부와 내부를 연결하는 것도 바로 의식입니다. 의식은 하나이지만 나와 세계로 나뉘어 보입니다. 보는 나와 보이는 대상이 분리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 둘은 실제로 나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이 스스로를 나누어 그렇게 드러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드러낸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대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 사실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분리를 실제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갈등과 고통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이 구조를 보게 되면 분리는 더 이상 실제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모든 경험은 하나의 의식에서 전개되는 흐름으로 이해됩니다. 이 구조를 보지 못하면 분리를 실제라고 믿게 됩니다. 우리는 나와 세계를 나누어 보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움직임입니다. 마치 스크린과 영상이 분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인 것과 같습니다. 의식 자체와 내용이 하나의 흐름으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의식은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초점의 위치에 따라 내용이 되기도 하고 의식 자체가 되기도 합니다. 또한 의식 상태에 따라 세계는 전혀 다르게 드러납니다. 같은 상황에서도 누군가는 고통을 느끼고 흔들립니다. 또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게 그 상황을 지나갑니다. 이 차이는 대상이 아니라 의식 상태의 차이입니다. 의식은 단순히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규정하기도 합니다. 불안한 의식은 불안을 드러내고 평온한 의식은 평온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 상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내용에 초점을 두면 우리는 생각이 되고 감정이 되며 그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아는 의식 자체로 돌아오면 우리는 더 이상 내용이 아니라 의식 자체가 됩니다. 이 차이가 삶 전체를 바꾸는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이번 탐구에서는 이 의식이라는 것을 단순한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방식으로 끝까지 따라가 보겠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계가 어디에서 드러나고 있는지 생각과 감정과 감각이 어디에서 나타나고 있는지 그 가장 근원적인 자리까지 함께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하나의 사실이 점점 분명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세상을 보고 있다고 믿어 왔지만 실제로는 의식에서 드러나는 것을 경험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사실이 분명해질수록 하나의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의식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일까요? 왜 항상 의식에서 살아가면서도 정작 의식 자체는 놓치고 있는 것일까요? 이제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자각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의식에서 살아가면서도 정작 의식을 보지 못합니다. 의식은 항상 드러나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구조입니다. 의식은 스스로를 내용의 형태로 드러냅니다. 생각으로 드러나고 감정으로 나타나며 감각으로 펼쳐집니다. 그런데 이 드러남과 동시에 아주 중요한 변화가 함께 일어납니다. 의식은 하나로 드러나지만 그 순간 주체와 객체라는 구분이 동시에 드러납니다. 오른쪽과 보이는 것이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때 주체가 바로 자아입니다. 자아는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 분화 과정에서 드러난 주체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핵심적인 작용이 일어납니다. 의식이 이 주체를 자신이라고 믿게 됩니다. 이것이 동일시입니다. 이 동의 씨는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 현실을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오류입니다. 왜냐하면 의식이 자신의 본질을 잊고 주체와 동일시하는 오류이기 때문입니다. 의식은 스스로를 주체로 드러내지만 그 주체를 나라고 믿는 순간 하나였던 흐름은 주체와 객체로 분리되고 그 분리 위에서 모든 경험이 해석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우리는 믿는 그대로의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기준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문제는 생각이나 감정이 아니라 그것들을 나라고 믿는 동일시 구조에 있습니다. 이 구조가 유지되는 한 우리는 어떤 경험을 하더라도 그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생각이 일어나면 내가 생각한다고 믿고 감정이 올라오면 내가 느낀다고 믿으며 경험이 펼쳐지면 그 경험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렇게 의식은 자신의 본질을 잊고 내용과 동일시하게 됩니다. 이동해 씨는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깊은 구조입니다. 그래서 의식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고 항상 나라고 형성된 정보에 따라 대상을 인식하게 됩니다. 과거의 경험과 기억 반복된 감정과 해석이 지금의 대상을 규정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상을 직접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방식으로 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자아는 반응의 중심으로 작동합니다. 자아는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반응의 흐름입니다. 좋고 싫음에 따라 반응하고 그 반응을 나라고 믿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같은 방식으로 반응합니다. 같은 상황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비슷한 해석을 하며 비슷한 선택을 반복합니다. 이 반복은 우연이 아니라 저장된 정보의 작용입니다. 이미 형성된 틀과 기준이 새로운 경험을 다시 해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과거를 통해 현재를 봅니다. 지금 보고 있는 대상은 순수한 대상이 아니라 이미 의미가 덧붙여진 해석입니다. 이 지점에서 하나를 더 분명하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의식이 주체와 동일시되는 순간 하나의 틀이 형성됩니다. 우리는 이 주체라는 틀을 통해 세상을 보게 됩니다. 마치 안경을 쓰고 보는 것처럼 모든 경험은 이 틀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는 그대로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해석된 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펼쳐진 세계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아니라 주체라는 틀을 통해 구성된 이차적인 현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해석된 세계를 실제라고 믿어 버리는 데 있습니다. 안경을 쓰고 보면서도 그 안경을 인식하지 못하고 실제라고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석된 세계를 현실로 믿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의식의 자기 분화 과정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저절로 일어나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이것은 의식이 스스로를 경험하는 방식이고 흐름이고 과정이며 하나의 일원함입니다. 이 분화 과정으로 드러난 세계는 조건을 통해 드러난 이 차적인 현실입니다. 이때 조건이 되는 것이 몸과 저장된 정보입니다. 유전된 정보와 형성된 틀이 이 드러남을 제한하고 특정한 형태로 나타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구조 안에서 반복적으로 비슷한 방식으로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업의 구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전체를 보지 못하고 주체에만 머물러 나라고 믿고 살아갑니다. 이때부터 세계는 제한되고 삶은 고정된 패턴에 따라 그 세계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심리학에서 보는 투자 구조도 이와 같이 작용합니다. 그래서 현실이 있는 것이 아니라 투사된 현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믿는 그대로 보지 않고 기억과 기대를 덧붙여 봅니다. 그래서 관계는 충돌이 되고 갈등은 반복됩니다. 사람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몸도 이 투사 구조에 반응합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은 서로를 강화합니다. 불안은 심장을 빠르게 하고 긴장은 근육을 수축시키며 반응은 다시 불안과 긴장을 강화합니다. 이렇게 마음과 몸도 하나의 흐름으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투사 구조는 전체를 보지 못하고 단지 결과만을 봅니다. 따라서 갈등의 원인을 외부라고 믿습니다. 상대가 나를 화나게 했고 상황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내면이 반응한 것뿐입니다. 투사를 보지 못하고 문제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것입니다. 자신은 돌아보지 않고 사람을 바꾸고 상황을 바꾸고 환경을 바꾸려고 합니다. 이것이 일종의 정가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신이 만든 투사된 현실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불교 유식에서도 이 구조를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업력에 따라 대상을 비슷하게 인식합니다. 이미 형성된 인식의 틀이 대상을 규정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방식으로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류가 발생합니다. 해석된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현실로 확정합니다. 이것이 근본적인 오류입니다. 그래서 현실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해석된 구조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같은 감정이 반복되고 같은 관계가 반복되며 같은 문제가 계속 나타납니다. 문제는 외부가 아니라 내면의 업력에 있습니다. 이 구조를 보지 못하는 한 계속해서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구조를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의식을 자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소리가 들리면 그 소리를 아는 자각이 있고 감정이 올라오면 그 감정을 아는 자각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의식 속에 있지만 의식을 자각하지 못하고 그 내용만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조를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각도 확인해야 합니다. 지금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이자각이 바로 의식입니다. 이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지금 바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의식을 자각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이 자각을 가리는 내용과의 동일시입니다. 그래서 의식을 자각하지 못하는 그 본 언니는 나라는 동일 시입니다. 의식에 대한 자각 우리는 지금까지 의식으로 살아가면서도 정작 의식을 보지 못한 채 내용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생각이 나라고 믿고 감정이 나라고 믿으며 그 안에서 끊임없이 반응하고 흔들리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의 전환이 가능합니다. 그 전화는 무언가를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것을 얻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도 아닙니다. 일어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을 그대로 보고 감정이 올라오면 감정을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환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생각 속에 살아왔지만 이제는 생각을 따라가지 않고 그대로 보기 시작합니다. 생각을 그냥 흐름으로 바라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억지로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을 없애려 하거나 감정을 통제하거나 반응을 억누르지 않고 그대로 바라봅니다. 이러한 전화는 통제가 아니라 자각입니다. 이러한 자각이 깊어질수록 하나의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나는 생각이 아니라 생각을 보고 있습니다. 나는 감정이 아니라 감정을 보고 있습니다. 나는 반응이 아니라 반응을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분명해지는 순간 생각과의 동일 씨는 점점 풀리기 시작합니다. 생각은 계속 일어나지만 그것에 붙잡히지 않고 감정은 계속 올라오지만 그것에 휩쓸리지 않으며 반응은 일어나지만 그것에 끌려가지 않습니다. 화를 느끼는 순간에도 화를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화를 통해 의식을 확인합니다. 화는 문제가 아니라 의식이 드러나는 하나의 형태입니다. 그래서 거부할 필요도 없고 밀어낼 필요도 없으며 바꿀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의식에서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식 자체는 좋고 싫음의 구분도 없고 붙잡고 밀어낼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완전해 보입니다. 이것이 의식에 대한 자각입니다. 이 자각이 깊어질수록 하나의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일체는 의식이 의미이며 따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도 하나로 드러납니다. 이것이 통각의 바라봄입니다. 모든 것이 의식에서 드러난 흐름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자각 상태에서는 스스로 드러나는 것을 그대로 확인합니다. 그러나 의식은 대상이 아니기에 생각으로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알 때 항상 대상처럼 바라보고 이해하고 규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의식은 그렇게 대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의식은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아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식은 이것이라고 규정할 수 없고 개념으로 붙잡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의식은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습니다. 소리가 들리는 순간에도 감각이 느껴지는 순간에도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에도 그것들은 의식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식은 대상으로 알 수 없지만 확인할 수는 있습니다.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감각입니다. 팔을 잃었을 때에도 감각이 그대로 느껴지는 현상은 감각이 신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에서 드러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감각을 통해 몸을 확인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의식에서 드러난 감각을 몸이라고 해석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감각은 의식이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아는 몸도 사실은 몸 자체가 아니라 몸 감각입니다. 촉감이 느껴지고 압박이 느껴지고 위치감이 느껴질 뿐입니다. 우리는 이 감각의 묶음을 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계는 어떨까요? 눈에 보이는 색과 형태 귀에 들리는 소리 공간의 거리감과 방향감 이 또한 모두 감각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즉 몸과 세계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감각이 다르게 해석된 것입니다. 가까운 감각의 묶음은 몸이 되고 멀리 있는 것으로 해석된 감각은 세계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식에서 드러난 감각을 몸과 세계로 나누어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조가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몸과 세계를 분리된 것으로 믿습니다. 그러나 이 구조가 보이면 몸과 세계의 경계는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의식에서 드러난 하나의 흐름입니다. 그래서 의식에서 드러난 감각을 몸과 세계로 나누어 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보이면 우리는 더 이상 감각에 집착하지 않고 감각을 통해 의식을 확인하게 됩니다. 의식은 찾을 것이 아니라 감각으로 드러나니 매 순간 자각할 수 있습니다. 이 자각은 항상 있는 의식을 분명하게 보는 것입니다. 의식은 대상이 아니기에 알 수 없지만 언제나 감각으로 확인할 수는 있습니다. 보고 있고 듣고 있고 느끼고 있는 이 모든 경험이 의식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 감각과 경험이 의식의 작용임을 보여줍니다. 이 작용을 보지 못하면 생각을 따라가고 작용임을 보게 되면 모든 경험이 의식에 드러남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어떤 상태가 아닙니다. 고요해지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감정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생각이 일어나도 감정이 일어나도 의식에 대한 자각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생각을 따라가지 않고 자각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경험하는 세계가 의식으로 경험됩니다. 세상은 더 이상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의식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나와 세계의 구분은 사라지고 내부와 외부의 경기 또한 감각임이 분명해집니다. 이것이 의식에 대한 자각입니다. 그러므로 의식은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드러나고 있는 모든 경험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의식으로 보고 있고 의식으로 느끼고 있으며 의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단지 그것을 의식으로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전하는 새로운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드러나 있는 의식을 그대로 아는 것입니다. 소리가 들리는 순간 그 소리를 아는 자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소리 자체가 의식의 드러남입니다. 느낌이 일어나는 순간에도 의식은 드러나 있습니다. 이것이 분명해지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생각 속에 길을 잃지 않고 모든 경험이 일어나는 자리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때 삶은 더 이상 경험에 끌려가지 않고 흐름으로 이해됩니다. 고통마저 의식의 작용으로 보입니다. 의식에 대한 자각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는 높은 수준의 자비심과 지혜를 바탕으로 하는 의식적인 결단이다. 인간은 나의 가르침을 언어로 듣고 문자로 읽고 그 의미를 이해하며 그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삶을 바꾸어 체계적인 수행을 할 수 있다. 화엄경의 선제동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5세명의 스승을 찾으라. 길을 나섰던 것처럼 인간은 깨달음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향해 의지적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동물들은 이러한 보리심을 내거나 의식적인 수행을 선택할 기회와 능력이 극히 제한적이다. 셋째 인간의 마음은 세계를 창조하는 힘을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는 일체유심조의 이치에 따라 모든 존재는 자신의 마음으로 세계를 창조하지만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하늘과 땅처럼 달라진다. 인간은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고 훈련함으로써 탐욕과 분노라는 파괴적인 에너지를 자비와 지혜라는 창조적인 에너지로 변화시킬 잠재력이 있다. 우측 고통으로 가득 찬 세계를 스스로의 의지로 평화와 행복이 가득한 부처님의 세계로 바꾸어 나갈 힘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마음과 세계를 의식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조건이 가진 희소하고 소중한 가치이다. 그러므로 이 귀한 사람의 몸을 받았을 때 부지런히 정진하여 자신과 모든 존재의 행복을 위해 힘써야 한다. 세존이 시여 모든 존재가 본래 부처의 성품을 지녔고 특히 저희 인간에게는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귀하고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겼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저희는 그토록 존귀한 본성을 지녔음에도 이토록 많은 고통과 번뇌 속에서 허덕이며 살아가는 것입니까? 부처가 될 수 있는 존재가 왜 스스로를 괴로움의 구렁텅이로 끊임없이 밀어넣는 것인지 그 근본적인 이유를 가르쳐 주십시오. 그대의 물음이 바로 모든 수에게 시작점이다. 살이자여 그 존귀한 불성을 지니고도 우리가 고통 속에서 헤매는 근본 원인은 바로 우리가 의도를 가지고 짓는 모든 행위 즉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업이란 산스크리트어 카르마를 번역한 말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나 정해진 숙명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엄밀한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짓는 모든 의도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나는 일찍이 분명하게 말한 바 있다. 주행스들이여. 나는 의도야말로 어비라고 말한다. 의도를 가지고 몸과 말과 생각으로 업을 짓는다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지은 업의 주인이자 그 결과를 고스란히 물려받는 상속자인 것이다. 어업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선한 어마어마한 악한 어미다. 선한 업이란 자비심 베풀 너 그럼 지혜와 같이 긍정적이고 이로운 마음에서 비롯된 모든 행동을 말한다. 반대로 악한 어비란 탐욕 분노 어리석음과 같이 부정적이고 해로운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을 말한다.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가 지은 업의 에너지는 결코 저절로 사라지지 않고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이다. 마치 땅에 심은 씨앗이 적절한 햇빛과 물을 만나면 반드시 싹을 틔우듯 우리가 지은 업은 언젠가 반드시 그 과보 즉 결과를 가져온다. 선한 업은 즐겁고 평화로운 결과를 가져오고 악한 업은 괴롭고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세존이 시여 저희가 짓는 의도적인 행위가 바로 업이 되어 행복과 고통을 결정한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저희로 하여금 스스로 고통을 불러올 해로운 너 즉 악업을 끊임없이 짓도록 부추기는 것입니까? 그 어둡고 파괴적인 마음은 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요. 바로 그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사리자여. 우리로 하여금 고통스러운 악업을 끊임없이 쌓게 하는 근원은 바로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세 가지. 근본적인 독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탐욕과 성렘 그리고 어리석음이라 부르며 이 셋을 합하여 삼독이라고 일컫는다. 탐욕이란 끝없는 갈증과 같아서 아무리 가지고 있어도 더 가지려 하고 결코 만족할 줄을 모르는 마음이다. 재물에 대한 집착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욕망 감각적인 쾌락에 대한 갈망이 모두 이 탐욕에 해당한다. 정렘이란 맹렬한 불과 같았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밀어내고 미워하며 파괴하려는 공격적인 마음이다. 미움 분노 질투 증오 같은 모든 감정이 이 성렘에 속하는 것이다. 탐욕의 갈증과 성냄의 불길이 제 마음속에서도 쉴 새 없이 일어나는 것을 저 스스로도 봅니다. 세존이 시여 듣고 보니 이 두 가지 독이 참으로 무섭습니다. 그렇다면 이 둘보다 더 깊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독이 또 있는 것입니까? 그렇다. 탐욕과 성냄보다 더 근원적이고 무서운 독이 있으니 바로 어리석음이다. 나는 이것을 무명 즉 밟지 못함이라고 부른다. 무명이란 이 세상과 자기 자신이 연기법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상한 존재이며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홀로 존재하는 독립적인 실체가 없는 무화의 존재임을 깨닫지 못하는 근본적인 무지를 말한다. 바로 이 어리석음 때문에 이 무명 때문에 나라고 하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착각이 생겨난다. 우리는 이것을 아상 즉 나라는 생각이라 부른다. 일단 이기적인 나가 확고하게 자리 잡으면 그 나를 위해 좋은 것은 어떻게든 끌어당기려는 탐욕이 일어나고 그 나에게 해가 되거나 싫은 것은 어떻게든 밀어내려는 성렘이 치솟는다. 결국 그 담욕과 성렘에 이끌린 몸짓과 말과 생각이 우리 자신과 다른 존재들에게 깊은 고통을 주는 악언을 쌓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리자여 모든 고통의 가장 깊은 뿌리는 바로 무명 즉 진리에 대한 무지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무명의 어둠을 걷어낼 때 비로소 탐욕과 성렘의 불길이 잦아들고 모든 유네의 고통이 멈추게 되느니라. 세존이 시여 모든 고통의 뿌리가 진리를 보지 못하는 무명의 마음에 있다는 가르침을 들으니 마음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탐욕과 성렘으로 악업을 짓는 주체 또한 마음이니 결국 모든 것은 마음으로 귀결되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세존이시여 저희가 경험하는 이 세상 즉 저희가 겪는 기쁨과 슬픔 만나는 사람과 사건들 모두가 결국 이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까? 세상이 마음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인지 그 깊은 이치를 가르쳐 주십시오. 바로 그러하다 사리자여. 그대는 이제 화음의 가장 깊은 가르침을 들을 준비가 되었다. 화음의 또 다른 핵심은 바로 일체 USIM조라는 내 글자에 모두 담겨 있다. 이는 글자 그대로 세상의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는 뜻이다. 이 가르침은 세상이 내 마음이다.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저밖에 없다. 밖에 존재하고 나는 그것을 그저 수동적으로 경험할 뿐이라는 너희의 일반적인 통념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계가 바로 우리 마음의 상태와 그동안 쌓아온 업의 반영이라고 화엄경은 선언한다. 세존이 시어 세상이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는 말씀은 저희 오랜 생각을 완전히 뒤흔드는 가르침입니다. 참으로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같은 장소에 함께 있더라도 사람마다 느끼고 경험하는 바가 전혀 다른 것이 바로 그 때문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엔푸딩 저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시옵소서. 좋은 질문이다. 비유를 들어 설명하겠다. 지금 두 사람이 함께 아름다운 숲길을 걷고 있다고 상상해 보아라. 한 사람은 숲의 생태를 연구하는 학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 땅을 개발하여 이익을 얻으려는 사업가이다. 생태학자인 눈에는 숲이 온갖 나무와 풀 새와 곤충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경이로운 생명의 터전으로 보인다. 그는 나무의 이름을 해야 하리고 맑은 새소리에 귀 기울이며 흙의 기운 속에서 기쁨과 평화를 느낀다. 그러나 똑같은 숲을 걷는 개발업자의 눈에는 숲이 온통 돈으로 보인다. 저 나무를 베어 팔면 얼마를 벌고 이 땅을 밀어 건물을 지으면 얼마의 이익이 남을까 하는 계산만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는 새 소리를 소음으로 여기고 우거진 나무를 개발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느낄 뿐이다. 보아라. 살이 자여 숲은 같은 숲이지만 두 사람이 경험하는 세계는 전혀 다르다. 이 차이는 숲이라는 대상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숲을 바라보는 그들의 마음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체유심조입니다. 명백한 예이다. 참으로 명백한 비유eSIM이다. 한 사람의 마음이 그러할친데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모이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저희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시대의 전쟁과 다툼 혹은 평화와 상생 또한 저희 모두의 마음이 함께 만들어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