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여행
이옥 주
아침 일찍 청주 역에 도착했다.
새해를 앞두고 지난해의 즐거웠던 일 보다 마음을 아프게 했던 일들이 무
겁게 가슴을 누르는 건 어떤 이유일까? 즐거웠던 미소보다 아픈 마음이
크기 때문은 아닐까? 기차를 타기 전 다사다난했던 2002년을 이틀 남겨
놓고 무엇인가 정리를 해야만 할 것 같은 반성의 기회를 가지고 싶었다.
자판기 커피를 한잔 뽑아 들었다. 이런 저런 상념에 커피 잔이 비었는지도
모른 채 빈 잔을 입에 대기도 몇 번.
기차를 탔다 시원스럽게 달리는 기차 안에서 문인들과 간식을 먹으며 도
란도란 정담이 오고 가는 것도 잠시 제천 역에 도착했다. 조용한 사색의
시간이 없어 조금은 아쉽기도 했다. 제천 역 앞의 군밤을 굽는 할머니의
모습이 시선을 끌고 자잔하게 피어오르는 군밤의 연기가 후각을 자극했
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골이 깊은 주름은 노곤한 할머니의 삶을 볼 수 있
었다.
군밤을 한 봉지 팔아 주고 싶었지만, 후회하고 있을 땐 이미 버스 안!
아쉽지만 군밤 할머니를 뒤로 한 채 의림지에 도착했다.
큰 호수는 살얼음만 살짝 얼어 있었다. 노송 사이로 휘이익' 불어오는
바람이 목 둘레를 휘어 감으며 몸을 움츠리게 하고 솔 향 그윽한 차가운
바람에 코끝은 맵기까지 했다. 의림지 옆 작은 호수는 꽁꽁 얼어 있었다.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고 (게걸스런) 개구쟁이 (어린)아이들이 공놀이를
하며 한바탕 웃음을 쏟아내고 있다 어린이들을 바라보며 나의 어릴 적 동
심의 그림과 너무나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나무로 썰매를 만들고 스케이
트도 타고 비닐봉지로 2인 1조 썰매를 타던 모습들이 먼 꿈 속 이야기만
같다.
격세지감을 느끼며 문인들과 사진도 찍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저들의
맑은 마음도 카메라에 가득 담아 작은 선물로 주고 싶었다. 찬바람에 어깨
를 움츠리며 얼음 위를 걸었다.
지난해를 되새기며 맑은 하늘을 보니, 세속에 물들고 얽매이며 사는 내
자신이 얼마만큼 찌들고 때가 묻어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살았다.
눈부신 얼음을 바라보며 쫓기듯 살아온 내 자신을 위로 해 본다. 그때 ‘우지
직' 하며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무엇이 그
리도 두려웠는지 빨리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불안해하는 내 모습은 얼음과
함께 얼어 있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죽음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단단해 보이는 얼음 위였지만 호수의 살얼음처럼 위험한 곳이 있을 것이
며, 우리의 인생도 호수의 살얼음과 같지 않을까 생각을 했다 인생을 살면
서 미끄러질 수도 있을 것이고 물길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인생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늘 위험과 살얼음 같은 인생길에서, 끝
없는 욕심을 부리며 살아가는 인간들이 얼음 밑 작은 물고기만도 못하게
느껴 질 때가 있다.
얼음이 갈라지듯 인생의 도약에서 좌절이 없을 수 있으랴! 얼음판 같은
어려운 삶에서 두껍고 탄탄한 얼음길을 찾아 나가야 할 것이다. 호수의 한
가운데 서서 잠시 내 자신을 뒤돌아보게 되었다.
그렇다! 건강하고 올바른 정신만 있다면 겁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위
험한 얼음 위를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내 딛듯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 나
갈 것이다. 설령 한쪽다리가 얼음 밑으로 빠진다 해도 다른 한쪽다리와 손
이 있지 않은가….
의림지의 고고한 노송과 눈이 부시도록 하얀 얼음판이 더욱 가깝게 다가
오고 상큼하게 불어오는 바람 속에 우륵의 풀피리 소리와 가야금 선율이
들리는 듯 하다. 차디찬 얼음 위에서 솔 향과 가야금 선율이 따뜻하게 가
슴을 녹이듯, 우리의 마음속은 아직 욕심과 욕망보다는 따뜻하고 건강한
희망이 있지 않은가!
꽁꽁 얼어붙은 의림지는 따뜻한 봄볕이 희망일 것이고, 험난한 인생길을
걸어야 하는 현대인들은 사랑만이 희망일 것이다.
2003 15집
첫댓글 차디찬 얼음 위에서 솔 향과 가야금 선율이 따뜻하게 가슴을 녹이듯, 우리의 마음속은 아직 욕심과 욕망보다는 따뜻하고 건강한 희망이 있지 않은가!
꽁꽁 얼어붙은 의림지는 따뜻한 봄볕이 희망일 것이고, 험난한 인생길을 걸어야 하는 현대인들은 사랑만이 희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