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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live/y4AR-PFuN9U?si=DUtAcSr3h7I-JUsL
하나님과 바알 중 누구를 따를 것인가 18:16~21
16 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그에게 말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러 가다가
17 엘리야를 볼 때에 아합이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18 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19 그런즉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
20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로 사람을 보내 선지자들을 갈멜산으로 모으니라
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바알 선지자들과 무능한 바알 18:22~29
22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23 그런즉 송아지 둘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그들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며 나도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고
24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
25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붙이지 말라
26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27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28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29 이같이 하여 정오가 지났고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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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아합이 엘리야에게 그가 이스라엘을 괴롭힌다고 말하자, 엘리야는 하나님 명령을 버리고 바알을 따른 아합과 그 집안이 나라를 괴롭힌다고 말합니다. 바알 선지자들은 제단에 불로 응답하는 신이 하나님이라는 엘리야의 제안에 그들의 몸을 해하며 바알을 부르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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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바알 중 누구를 따를 것인가 18:16~21
불신앙은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하나님을 버린 아합의 눈에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따른 아합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다고 질책합니다. 엘리야는 누가 참신인지 증명하자고 제안합니다. 바알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 그리고 백성이 갈멜산으로 모입니다. 엘리야는 백성을 향해 언제까지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라며 참신이라고 생각하는 신을 따르라고 요구합니다(21절). ‘머뭇거리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싸흐’는 ‘절뚝거리다, 발을 절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께도 바알에게도 신의가 없는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나타냅니다.
● 더 깊은 묵상
갈멜산에서 엘리야는 모든 백성에게 무엇을 요구했나요?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내가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한 적은 없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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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알 선지자들과 무능한 바알 18:22~29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명과 자신이 홀로 대결하겠다고 제안합니다. 대결 내용은 각각 송아지 한 마리씩 잡아 각을 떠서 나무 위에 올려놓고 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 불로 응답하는 신을 참신으로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먼저 송아지를 잡아 놓고 불을 내려 달라며 기도합니다. 그런데 아침부터 낮까지 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들은 절뚝이는 춤을 추며 바알을 흥분시키려 노력합니다. ‘뛰놀다’(26절)와 ‘머뭇거리다’(21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파싸흐’로 같은 단어입니다. 엘리야의 조롱과 제사장의 피 흘리는 행위에도 불구하고 바알은 저녁이 될 때까지 아무 응답이 없습니다. 풍요를 위해 백성이 의지하던 바알이 가짜 신임이 그들 눈앞에 분명히 드러납니다.
● 더 깊은 묵상
바알 선지자들은 불을 내리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요?
응답하지 않는 가짜 신을 두려워하는 이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을 어떻게 전할까요?
한절묵상:열왕기상 18장 28~29절
삶의 모든 승리는 숫자와 규모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450명의 바알 선지자가 몸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기도하지만, 바알은 응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엘리야 한 사람이 기도하자, 하나님이 움직이십니다(18:36~38). 사람의 소원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시 20:4). 우상은 사람이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만든 허상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이 응답하실 것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많은 사람이 주님을 향한 열정을 내세우나 헌신을 결정하는 순간에는 망설이다가 실패하곤 한다. - 톰 마셜
오늘의 기도
하나님, 세상 사람들이 신이라고 말하는 모든 대상은 우상에 불과하며 유일한 신은 여호와 하나님뿐임을 믿습니다. 아무 응답도 반응도 능력도 없는 우상에게 기대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소서. 무능력한 우상의 말이 아니라 능력의 하나님 말씀을 신뢰하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545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응답하시며, 우리의 찬양과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입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오직 주님만을 높이고, 주님만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자
오직 주님만이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찬양과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심을 잊지 말도록 하자
주님과 더 깊은 교제 안에 거하고, 주님의 세밀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도록 하자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 엘리야가 도전 한 말로, 백성들은 양심이 찔렸을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섬겼으며 그들의 조상은 아브라함이기 때문입니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니,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의 위세에 눌려 하나 밖에 없는 목숨 부지하려고 그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한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에 바른 것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바알 선지자가 450명, 아세라 선지자가 400명 합계 850명의 이방 선지자가 아합때 활동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런 이방인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에 들어와 살 수 있었는지, 의아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방인들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정통 선지자들이 아니고 짝퉁 선지자들이지요. 여로보암 때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남 왕국 유다로 내려가자,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왕이 임의로 세운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들은 개종도 쉽게 했을 것입니다. 출세를 위해 못할 것이 없는 그들인데요. 바알과 아세라, 몰록 등은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가나안 신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이방 신들을 섬깁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배신하는 일에 조금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대결방식입니다. 어떻게 그런 방법으로 바알의 선지자들과 대결을 하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그 전날 하나님에게서 청사진을 받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가 정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의 단서가 될 만한 것이 본문에 있습니다. ‘불로 응답하시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입니다. 엘리야는 그동안 수많은 제사를 지냈으니, 그 때마다 불로 임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오늘 엘리야가 외치는 소리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라는 음성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올바른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위기라도 그 신앙이 변절되지 않습니다. 체험의 원동력은 믿음이라고 봅니다. 믿음 없이 체험되면 그 감동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불 받아도 좋습니다. 은사 받아서 능력 발휘하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믿음 위에서 행해져야 할 것입니다.
장차 우리가 갈 나라는 믿음으로 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담대히 따르는 삶
아합의 오해처럼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들었던 부족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있었음을 회개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이 바알 신을 섬기듯 미신을 따르는 광적인 모습이 아닌 참된 신앙을 품고 이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켜 칭찬받는 자들이 되길 원합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이 영광 받는 때가 이르기를 기대합니다.
엘리야의 외침에도 반응하지 않은 백성들을 보면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세상에 정의를 외치는 자인지 되돌아봅니다. 어쩌면 반응하지 않는 백성의 무리에 속해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한 채 살아가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나의 만족을 쫓아 종교활동을 하는 수준에서 벗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엘리야의 용기 있는 행동과 확고한 신앙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 줍니다.
그저 그렇게 살다 불신앙에 빠져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인생이 아닌
엘리야처럼 하나님을 믿고 담대히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내게주시는교훈은무엇입니까?
16-20절 아합은 엘리야를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참조. 수 7:25)라고 부릅니다. 비의 신 바알을 노하게 하여 이스라엘을 괴롭게 만든 주범인 엘리야를 처단해야 비가 내릴 거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가뭄을 초래한 주범은 아합이고, 원인은 그의 우상숭배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이고 대신 세운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처단해야 가뭄이 끝날 것입니다.
20-24절 오래전 아간의 정체가 드러났을 때 이스라엘은 한마음으로 그 문제를 처리했지만(수 7:25),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바알 선지자들이 한데 모였는데도 백성은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서 절뚝거립니다(‘머뭇머뭇하다’의 직역). 이 ‘절뚝거림’은 바알 선지자들의 의식과 동일한 단어로(제단 주위에서 절뚝거림, ‘뛰놀더라’, 26절), 백성이 바알 제단의 춤사위에 동화되어 여호와의 제단을 무너진 채로 방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와 번개의 신 바알에게 유리해 보이는 대결 방식에, 엘리야 홀로 450명을 상대하는 불리한 여건이 제시되고 나서야, 침묵하던 그들은 “옳도다” 대답합니다. 이렇듯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의 세상을 동시에 섬긴다는 것은 허구입니다. 이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믿음 자체가 바알로부터 온 것입니다.
22-25절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이 먼저 제물을 선택하게 하고, 대결 장소도 바알의 주요 성지로 정합니다. 그들의 수적 우세도 활용하게 하고, 바알의 주특기인 불을 대결 종목으로 삼아 무려 약 6시간 동안 기도하도록 선공(先攻)의 기회를 줍니다. 그들은 왕과 백성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사르밧으로 옮겼을 때처럼 엘리야에게 압도적으로 불리한 조건이 조성되고 있지만, 사르밧 과부가 보았던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이제 모든 백성이 볼 것입니다.
26-29절 바알은 응답하지 않습니다. 아우성쳐도 소용없고, 자해하며 졸라봤자 대답하지 않습니다. 대답할 수 없는 신이요, 살아 있는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신 인격이시기에, 물량 공세와 감정적 흥분에 조종당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기도
공동체-머뭇거리고 절뚝거리는 신앙이 아니라, 살아계신 주를 경외하며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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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18:16~29절)
❝오직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
❚ 영적 전투가 벌어지는 세상속에서 믿음의 결단을 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 영적 승리의 삶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 믿음을 수반하는 영적인 전쟁을 치뤄야 합니다(16~20절).
내 자신이 발붙이고 살아가는 세상은 온갖 거짓 우상과 타락한 가치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한 영향으로 인하여 항상 영적 도전에 직면하여 살아갑니다. 이러한 시대를 이겨내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야 하는 사명자로서 영적 전투는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로서의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매일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하겠고, 영적으로 민감해야 하며, 말씀의 무기로 잘 무장되어 있어야 합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과 기도 생활은 내 자신이 지녀야 할 필수적인 영적 무기입니다. 내 자신이 타고 있는 인생이라고 하는 배는 세상을 구경하며 다니는 유람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의 헛된 가치관과 싸우는 영적 전투함이라는 사실을 날마다 자각하여 믿음을 수반하는 영적인 전쟁을 치루어야 하겠습니다.
➲ 믿음을 요구하는 단호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21~25절).
건강하고, 올바른 신앙 생활을 위해서는 분명하고, 단호한 결단이 실천되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누구든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할 것(마 6:24)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녀는 진리만을 향하여 달음질치되 오직 위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진실하시며 자비로우신 분이심을 믿고, 불의와 비겁한 타협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응답하지 않으시지만,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경건한 자들에게는 반드시 응답하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는 불신앙적인 요소들을 깨끗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청산하고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단호하게 결단을 내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믿음을 선포하는 당당한 기개를 가져야 합니다(26~29절).
절대적으로 많은 바알 선지자들 앞에서 엘리야가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기도에 응답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에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세상의 거짓 풍요에 유혹되거나 세상의 위협에 움츠러들지 않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움츠려들지 않고 당당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은 내 자신의 탁월한 능력과 됨됨이 때문이 아니라 내가 믿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전능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헛된 유혹에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당당하게 세상 앞에 복음을 선포하는 믿음의 기개를 갖고 살아가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주님을 배반하고 돌아서라고 유혹해 오는 세상의 달콤한 유혹속에서도 십자가의 믿음만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머뭇거리지 않고 분명하게 하나님 편에 서서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왕상 18:16~29절)...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6~18절 아합은 엘리야를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비난하며 국가 재난의 주범으로 몰아갑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나라를 도탄에 빠뜨린 장본인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숭배한 아합과 그의 가문이라고 지적합니다. 엘리야의 가뭄 예언(17장 1절)이 바알을 노엽게 하여 이런 재앙이 왔으니, 그를 죽임으로써 바알의 진노를 풀려는 아합의 노력(10절)이 가련합니다. 문제의 원인이 ‘나’에게 있는데도, ‘너’에게서 찾으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
19,20절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의 대결을 제안합니다. ‘누가 참 신인지, 누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인지 밝히겠다는 것입니다. 제안을 받아들인 왕은 갈멜산이 바알 숭배의 성지였기에 승리를 확신하고 바알 종교의 위상을 높일 기회로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만한 신념입니다. 인간의 신념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분명히 다릅니다.
21~24절 엘리야는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백성에게 믿음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하지만 백성은 묵묵부답입니다. 그런데 제단에 불을 내리는 신이 참 신임을 인정하자는 엘리야의 제안에는 ‘옳다’고 동의합니다. ‘누가 참 신인지’ 지켜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언제든 도움이 안 되면 버릴 수 있는 우상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나에게 잘해 줘야 하나님 대접하겠다는 불경한 생각이 내게도 없는지 돌아봅시다. 하나님이 내 전부가 되지 않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25~29절 바알 선지자들이 하루 종일 그 이름을 부르며 부르짖어도, 응답 없는 제단 주위에서 춤추며 심지어 자해하면서까지 애원하는데도 바알은 응답하지 않습니다. 광란의 의식 속에 차가운 침묵만 흐를 뿐입니다.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신은 냉정한 신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신입니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허상에 불과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 대결할 수 있는 신이 아닙니다.
돈이 위세를 떨치는 시대에,
신앙을 위협하는 교묘한 세속주의와 혼합주의의 우상을 경계합시다.
기도
공동체-하나님과 세상에 모두 속하려는 어리석은 신앙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뜻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야 할 우리의 인생을 향해 무응답하시거나 변답하실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하고, 부르심에 합당한 삶으로 반응하며, 세상을 향해 보내신 그 사명을 이뤄가는 주님의 증인으로 바로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인생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아시고
그 필요를 채우시기를 기뻐하시며
그 선한 뜻으로 이끌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세상 권세 가운데 억눌려 침체에 빠지지 않고
주신 사명을 넉넉히 감당하도록 성령으로 날마다 충만케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위에 기름 부어 주시고,
부족함 없이 풍성하게 채우시고 동행하여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재해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신음하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거룩한 제사장의 소명을 항상 기억하고
이뤄가도록 아버지의 전신 갑주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