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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열왕기 상권의 말씀 19,9ㄱ.11-16
그 무렵 엘리야가 하느님의 산 호렙에
9 있는 동굴에 이르러 그곳에서 밤을 지내는데,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내렸다.
주님께서
11 말씀하셨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12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13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어귀로 나와 섰다.
그러자 그에게 한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야,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14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저는 주 만군의 하느님을 위하여 열정을 다해 일해 왔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당신의 계약을 저버리고 당신의 제단들을 헐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이제 저 혼자 남았는데, 저들은 제 목숨마저 없애려고 저를 찾고 있습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길을 돌려 다마스쿠스 광야로 가거라.
거기에 들어가거든 하자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임금으로 세우고,
16 님시의 손자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워라.
그리고 아벨 므홀라 출신 사팟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워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5,27-3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8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29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30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31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 주어라.’ 하신 말씀이 있다.
3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오늘은 ‘여섯 개의 대당 명제’ 중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새로운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간음’과 ‘이혼’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음욕을 품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눈이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혼’이 불륜을 불러오는 뿌리라고 말씀하시면서, 간음과 불륜의 뿌리를 잘라버리라고 하십니다.
사도 야고보는 <서간>에서 말합니다.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야고 1,15)
그러기에 응징 받아야 할 대상은 육신의 지체 자체가 아니라, 의지와 의지를 부추기는 자발적인 욕구입니다.
그러니 죄의 뿌리를 뽑는 데는 옛 율법의 계명만으로는 막을 수가 없고, 죄를 짓게 하는 내면의 지체를 잘라내는 일이 필요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마태 5,29)
이는 자신의 지체를 잘라버리라는 말씀이 아니라, 죄를 ‘뿌리’에서부터 잘라내라는 강력한 말씀입니다.
죄를 불러오는 ‘마음의 눈과 손’을 잘라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곧 ‘내면의 눈’을 뽑아내고, ‘손’을 잘라내는 일입니다.
‘눈’은 죄를 불러오는 통로요, ‘손’을 죄를 행하는 도구의 표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다.”
(마태 6,22)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마태 5,8)
그러니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자신의 몸을 단련하어 복종”(1코린 9,27)시켜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나쁜 욕망들을 죽이는 것"(콜로 3,5)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나쁜 욕망들을 “그리스도의 바위로 치는 것”(1코린 10,4)입니다.
곧 눈을 돌리는 것입니다.
바라보는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나쁜 욕망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빛’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빛으로 밝아질 것입니다.
이는 ‘회개’라는 ‘마음의 전향’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쁜 생각을 바라보면서 나쁜 생각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바라볼 때 어둠은 물러가게 됩니다.
어둠이 빛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 빛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곧 어둠을 들여다보면서 어둠속에서 빛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어둠을 비추어주고 있는 ‘빛’을 바라보면서 ‘빛’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영적 투쟁은 어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바라보면서 ‘빛의 조명’으로 ‘정화’와 ‘일치의 길’을 갑니다
오늘도 우리는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으로부터 부터 영적 음료를 마시며, ‘의로움의 길’을 갑니다.
이는 빛이신 주님의 인도와 자비로 가는 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은 것이 낫다.”
(마태 5,29)
주님!
겉으로는 가려진 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제 마음속을 들여다봅니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듯”(마태 6,22), 마음의 눈을 맑게 하소서!
마음 속 떠도는 그릇된 생각들을 잘라버리고, 마음 속 깊게 새겨진 사랑의 법을 보게 하소서!
제 마음 항상 당신을 향하게 하시고, 제 행실이 당신의 빛을 받아 밝게 빛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나도 하느님 체험을 원할까?>
오늘 열왕기는 그 유명한 엘리야의 하느님 체험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의 하느님 체험에 앞선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카르멜산에서 거짓 예언자들과 1:450으로 목숨을 건 싸움을 하였고, 이때 엘리야는 그들을 다 쳐 죽였는데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일로 그는 왕비 이제벨에게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그래서 목숨을 건지기 위해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와 동굴에 숨습니다.
그렇게 얼마를 지냈는지 모르지만, 그에게 주님의 말씀이 내립니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1열왕 19,11ㄱ)
동굴 속에는 그만 있으라는 말씀이고, 나와서 산 위로 오르라는 말씀이며, 거기서 하느님을 만나라는 말씀입니다.
동굴은 엘리야가 택한 피신처였습니다.
하느님을 체험한 그에게 피신처는 주님이어야 했는데, 이제벨에게 쫓겨 두려움에 싸인 그는 겨우 동굴을 피신처 삼았던 것입니다.
이 모습은 요즘 모든 사람이 두렵고 자기 가족마저 두려워 자기 방에 콕 박혀있는 은둔형 외톨이 모습인데, 대예언자라는 엘리야가 어떻게 이렇게 초라합니까?
그리고 이것을 어떻게 봐야 합니까?
이제벨에게 쫓기고 두려움 가운데 있는 것입니까?
있어야 할 주님 앞에 있지 않은 것입니까?
주님을 보지 않고 이제벨을 본 것이고, 주님 앞에 있지 않고 두려움 가운데 있었던 것이지요.
주님을 보지 않고 주님 앞에 있지 않으면 다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베드로가 풍랑을 만나서 주님만 보고 물 위를 걸었을 때는 아무 두려움이 없었고, 그래서 아무런 문제 없이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는데, 잠깐 시선을 놓친 순간 그 두려운 물을 보는 순간 물속에 빠진 것과 같은 거지요.
그러니 신앙인에게 두려움은 하느님을 보지 않아 생기는 두려움이고, 힘없는 자기를 보고 자기를 둘러싼 두려운 것들을 보기에 생기는 두려움입니다.
대예언자 엘리야도 이러니 우리는 더 그리고 수시로 이럽니다.
잠깐 하느님을 놓치는 순간 사람들이 다 두렵고 두려움에 숨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그에게 거기서 나와 당신 앞에 서라고 주님 말씀하시는데,
그러나 여전히 동굴 밖은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로 두려운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다 지나고 난 뒤에야 가까스로 나온 엘리야에게 주님께서 “엘리야야,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1열왕 19,13ㄷ)라고 물으십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던지시는 질문이지요.
이에 우리는 ‘무엇을 하긴요?’ ‘아무것도 못 하고 있지요!’ 이렇게밖에 대답 못하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길을 돌려 다마스쿠스 광야로 가거라.”
(1열왕 19,15ㄴ)
“거기에 들어가거든 임금을 세우고 예언자를 세워라.”
(1열왕 19,15ㄷ.16ㄴ)
두려워 도망치던 길에서 돌아서라는 말씀이고, 사명을 수행하러 가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임금들을 세우고 같이 일할 동료와 후계자들을 세우라는 명령입니다.
“가서 무너져가는 내 집을 고쳐라.”라고 프란치스코가 받은 명령과 같습니다.
구세력이 두려운 사람은 도망치고 숨을 것입니다.
구세력이 싫고 미운 사람은 그것을 때려 부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과 공동체를 사랑하는 사람은 공동체 안에 신세력을 형성할 것입니다.
그런데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엄청난 사명을 수행하려면 하느님 체험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을.
그런데 하느님 체험은 좋지만 엄청난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하느님을 체험해야 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원할까요?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끝까지 사랑합시다>
‘여자는 결혼할 때까지만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남자는 전혀 걱정 없이 살다가 결혼하고 나서 걱정이 생긴다.’는 우스갯소리를 합니다.
자기가 베푼 만큼 상대가 해주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이 생깁니다.
상대를 통해서 덕을 보기 위해서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닐진대 살다보면 그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결국 사랑한다고 혼인을 하고서도 서로 성격이 맞지 않는다며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사랑으로 엮어진 혼인계약을 일생 동안 지키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입니다.
부부가 일심동체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동상이몽이 더 많게 느껴집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마음의 관심을 서로 다른 곳에 두면서 화목하고 행복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혼하지 말라’고 강력히 말씀하십니다.
더욱이 마음으로 간음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잘못에서 벗어나기를 강조하시며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네 오른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버려라.”하고 단호한 결단을 촉구하셨습니다.
더 사랑해야 할 것은 덜 사랑하고, 덜 사랑해도 될 것을 더 사랑한다면 사랑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결혼한 사람이 배우자에게 마음을 두어야지 다른 사람에게서 매력을 느끼고 기대한다면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마음속이 지옥이면 멀쩡하게 잘 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죄는 단호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이혼은 갑자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고 또 참다가 더 이상 안 되겠다고 결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빌미를 줄 수 있는 마음 단속을 미리 잘해야 합니다.
원인 제공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동상이몽’이라는 말은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두 마음을 품는 것이 이혼의 전조입니다.
한결같은 사랑의 마음이 지켜지길 희망합니다.
이혼을 금지하는 것은 결국 가정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가정을 지켜 자녀의 출산과 교육을 통해 후손을 이어가야 합니다.
사실 후손의 번성은 하느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이들이 이기적인 마음으로 쉽게 이혼을 생각함으로써 자신은 물론 가정이 불행해지고 자녀 또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제발, 이혼하자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헤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서로의 신뢰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신뢰가 깊어지기 위해서는 마음을 주고받는 대화를 자주 해야 합니다.
‘굳이 말을 해야 알아듣느냐?’하는 분도 있지만 ‘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 힘내라, 수고했다’는 등 상대방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말을 자주 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읽힙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고와 땀 없이 좋은 열매를 얻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화목한 가정을 이룬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목한 가정을 원하는 만큼 서로의 노력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이 만남을 통해 부족함을 채워주고 좋은 점을 키워가며 닮아가고 만들어 가는 것이지, 모두가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기대 때문에 실망하고 좌절하며 불행을 자초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서두르지 말 것이며 충분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또한 부모도 삶의 경륜 안에서 얻어진 가르침을 자녀에게 잘 전해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일생을 함께 살아가야 할 배우자를 선택하면서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성격이나, 경제적인 능력도 중요하지만 하느님 안에서 사는 사람인가, 허물과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채워줄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가를 봤으면 합니다.
준비가 소홀하면 그만큼 힘겨워합니다.
그러므로 준비된 희생을 감당하는 사랑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지금 느끼는 사랑의 감정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내어줌의 마음인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덕을 보려고 하지 말고 서로에게 복이 되어주는 가운데 행복하시길 빕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 마음까지 정결하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 예수 그리스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몸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순결해져야 한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구약은 실천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따라주지 않으면 실천할 수도 없고, 실천하더라도 위선적으로 됩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의 줄거리입니다.
소설의 배경은 19세기 후반 런던입니다.
바질 홀워드(Basil Hallward)는 나이 든 화가입니다.
그는 도리안 그레이(Dorian Gray)의 인상적인 초상화를 그려보고 싶습니다.
도리안은 젊고 아름답고 돈도 많습니다.
그것을 오래 남겨놓고 싶은 것입니다.
그림을 본 헨리 워튼 경은 쾌락주의적인 세계관을 가진 냉소적인 귀족입니다.
그는 도리안에게 아름다움이 사라지기 전에 즐기라고 충고합니다.
도리안은 헨리의 말을 듣고 앞으로 잃어갈 자기 아름다움을 미리 아까워합니다.
그리고 초상화를 질투합니다.
초상화는 늙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상화와 자기가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초상화는 늙어가는데 도리안은 초상화처럼 그대로 젊음을 유지합니다.
도리안은 자기 아름다움을 통해 타락하고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이 와중에 그를 좋아했던 여인이 자살합니다.
그래도 도리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다만 런던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도리안은 자기의 비밀을 알고 초상화를 지닌 화가 바질을 다시 찾아갑니다.
그리고 이 비밀을 감추기 위해 바질을 살해합니다.
초상화까지 없애기 위해 칼을 댔더니 초상화가 원래 그대로 젊어지고 도리안은 그 초상화의 나이 든 추한 모습으로 변합니다.
그가 찌른 것은 자신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도리안은 외모에 집착하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점점 추해지는 그림은 없애고 싶어 합니다.
이는 육체에 반대되는 마음을 상징합니다.
외모에 치중하면 마음이 죽고 마음에 치중하면 육체가 죽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옵니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로마 8,5-6)
“성령의 관심사”로 번역하기보다는 “영의 관심사”로 번역했어야 옳습니다.
영이나 성령이나 다 마음에 관계됩니다.
마음 안에서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예수님은 마음에 믿음을 넣어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제 믿음이 어떻게 마음까지 정결하게 하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면의 정결은 오로지 ‘믿음’으로만 얻어집니다.
만약 내가 욕망하던 여인이 나의 누이동생임을 알게 되었다면 어떨까요?
혹은 ‘엽기적인 그녀’에게서처럼 성전환자라면?
아마 올라오던 욕망이 바로 사라져버릴 수도 있습니다.
영화 ‘더 몽크’(2011)는 매튜 그레고리 루이스(Matthew Gregory Lewis)의 1796년 고딕 소설을 원작으로 도미니크 몰(Dominik Moll)이 감독한 프랑스 영화입니다.
주인공 암브로시오는 어렸을 때 수도원에 버려져 처음부터 수도원에서 자라며 성인으로 추앙 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조금씩 성적인 욕망에 눈을 뜨고 결국엔 처음부터 마음에 두었던 여인을 범합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자기 여동생임이 밝혀집니다.
그러자 그는 곧 회개하고 동생을 위해 기도하고 지옥에 가는 것을 택합니다.
욕망은 정체성에서 나옵니다.
개라고 믿는데 두 발로 서고 싶다는 생각이 생길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정체성은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부모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 자녀라고 하십니다.
그 정체성만 가지면 우리는 모두 피를 나눈 형제자매들이 됩니다
성적인 욕망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정결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의 정결함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성인(聖人)이 될 수 있게 도와주세요!>
돈보스코의 제자 가운데 도미니코 사비오란 성덕이 출중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돈보스코의 오라토리오에 들어와서 그가 제시한 성덕의 길을 충실히 걸어가고 있던 중 안타깝게도 중병을 얻어 1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오래가지 않아 교회는 도미니코 사비오를 성인 반열에 올려놓습니다.
그가 짧은 생애 동안이지만 생명처럼 지켜왔던 모토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죄보다는 죽음을!”이었습니다.
아마도 소년 사비오는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마태오 복음을 눈여겨봤을 것입니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마태 5,29)
1855년 6월 24일 돈보스코가 마흔살 되던 해 영명축일 때의 입니다.
오라토리오 아이들은 성극이나 성가, 합창이나 시 낭송 등, 정성껏 축제를 준비하여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자신을 향한 아이들의 지극한 사랑에 크게 감동을 받은 돈보스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자 받고 싶은 선물을 쪽지에 적어 내게 주세요.
뭐가 됐든 여러분의 기대에 실망을 주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어요.”
수많은 종이 쪽지들을 들고 당신 사무실로 돌아온 돈보스코는 하나 하나 쪽지를 열어봤습니다.
어떤 아이는 작은 성모상을 신청했는가 하면, 어떤 아이는 운동화를 적었습니다.
짓궂은 한 아이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초콜릿 100킬로 그램’
수많은 쪽지들 가운데 유난히 돈보스코의 눈길을 끄는 쪽지가 하나 있었습니다.
도미니코 사비오가 쓴 것이었습니다.
“성인(聖人)이 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깜짝 놀라면서, 다른 한편으로 크게 감동받은 돈보스코는 도미니코 사비오를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비오!
성인이 되는 비결을 네게 선물하고 싶구나.
자, 여기 있다.
첫째 명랑하게 지내는 것이다.
둘째, 네게 지금 가장 중요한 일, 공부와 기도의 의무에 충실한 것이다.
셋째, 친구들에게 선을 베풀거라.
설령 네게 희생이 따르더라도 항상 네 친구들을 도우렴.
이 세 가지만 잘 지켜도 충분히 성인이 될 수 있단다.”
천사표였던 도미니코 사비오는 돈보스코가 선물로 주신 세가지 성화의 비결을 마음 속 깊이 새겼습니다.
그리고 오라토리오 안에서 적극적으로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매일 매일 충실히, 지속적으로, 일상적으로...
그 결과 도미니코 사비오는 오래 지나지 않아 꿈에 그리던 성인의 명부에 자신의 이름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15세였던 1857년 3월 9일 병사(病死)한 그는, 1954년 6월 12일 비오 12세 교황님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한번은 세상을 떠난 도미니코 사비오가 돈보스코의 꿈에 나타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보스코, 보시는 것처럼 저는 지금 행복이 가득한 곳에 서 있습니다.”
이어 도미니코 사비오는 돈보스코에게 장미, 바이올렛, 백합, 용담꽃, 밀이삭이 어우러진 풍성한 꽃다발을 한 아름 건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꽃다발을 신부님의 아들들에게 보여주세요.
장미는 사랑을, 바이올렛은 겸손을, 용담꽃은 회개를, 백합은 순결을, 밀이삭은 성체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답니다.
돈보스코, 그럼 안녕히!”
어떻게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는 세례를 통해 성화의 길로 초대받았습니다.
우리도 ‘죄 보다는 죽음을!’이란 굳은 각오를 세우면 좋겠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나도 성인이 되고야 말겠다는 강한 결심을 세우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신앙생활은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1)
사람들은 흔히 마음과 생각으로 짓는 죄는 행동으로 짓는 죄보다 작은 죄라고 생각하는데, 예수님께서는 마음과 생각으로 짓는 죄도 행동으로 짓는 죄와 똑같이 큰 죄라고 가르치십니다.
여기서 ‘눈’과 ‘손’은 죄짓게 하는 내적 충동이나 욕망을 뜻합니다.
눈을 빼어 던져 버리라는 말씀과 손을 잘라 던져 버리라는 말씀은, 실제로 그렇게 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철저하게 욕망과 욕구를 다스려서 죄를 물리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잘라야 할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입니다.
그런데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마음과 생각을 무슨 수로 자를 수 있는가?
마음과 생각을 자르는 방법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물론 기도 한 번 한다고 해서 금방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꾸준히, 끈질기게 기도해야 합니다.
아마도 평생 기도하면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극기고행’을 말하는 이들이 많은데, ‘극기고행’이 도움이 되는 것은 맞지만, 기도가 먼저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극기고행만 하는 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또 어떤 수련이나 도를 닦는 등의 일도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효과가 있는 것 같다가 금방 무너집니다.
2)
예수님 말씀에서 요한복음 8장의 이야기가 연상됩니다.
'그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요한 8,3-5)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요한 8,7)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요한 8,9-11)
돌을 던지지 않고 그냥 가버린 사람들은 자신들도 죄인이라는 것을 행동으로 고백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도 간음죄를 지은 적이 있거나, 그 죄 속에서 살고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마음으로 간음죄를 지은 적이 있음을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양심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런 상황에서 여자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그 여자 자신 한 명뿐입니다.
회개는 자기가 자기 자신을 꾸짖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만일에 남 탓을 하거나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변명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3)
마음을 깨끗하게 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겉으로만 깨끗하게 하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을 속이는 위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겉만 깨끗하게 하려고 하고, 속을 깨끗하게 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위선자들을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마태 23,25)
이 말씀은 ‘속만’ 씻어도 된다는 가르침이 아니라, 또 ‘속’을 씻으면 ‘겉’은 저절로 깨끗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속과 겉을 똑같이 깨끗하게 씻으라는 가르침입니다.
겉도(몸도) 씻어야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속을, 즉 마음과 생각을 깨끗이 씻어야 합니다.
겉과 속이, 또는 안팎이 똑같이 깨끗해야 합니다.
마음과 생각을 깨끗이 씻는 방법은?
‘기도와 회개’입니다.
4)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곧 여러분이 불륜을 멀리하고, 저마다 자기 아내를 거룩하게 또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할 줄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교인들처럼 색욕으로 아내를 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로 형제에게 잘못을 저지르거나 그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전에 말하고 또 엄숙히 경고한 바와 같이, 주님은 이 모든 일에 보복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더러움 속에서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1테살 4,3-7)
신앙인이 ‘겉’과 ‘속’을 똑같이 깨끗하게 씻는 것은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에서, ‘깨끗함’과 ‘거룩함’은 사실상 뜻이 같은 말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정결에 대한 사랑과 훈련, 습관 - “관상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만남이 답이다”>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
(시편 27,14)
지난 밤에 받은 가톡 메시지에 감동했습니다.
“신부님, 낼 감사미사 부탁드립니다. 50년간 춤출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무려 50년 반세기 동안 춤을 통해 아름다운 하느님을 추구해온 구도적 삶이라면 그 삶 자체가 구원이라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에 이어 두 개의 대당명제가 더해집니다.
제2 대당명제는 “극기하여라”이고, 제3 대당명제는 “아내를 버려서는 안된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극기하여라”는 너무 단순화한 주제이고 내용은 구체적으로 눈으로나 마음으로나 아예 간음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음욕은 모두가 간음에 뿌리내리고 있기에 뿌리부터 뽑아버리라는 격렬한 말씀입니다.
공감합니다.
요즘 성도덕이 얼마나 문란한지 불감증이 걸릴 정도입니다.
야동(野動;야한 동영상, 음란한 내용의 영상물)이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을 오염시키는지, 나라든 개인이든 내부로부터 부패하여 무너지게 하는 성생활의 문란입니다.
에바그리우스의 8개 악덕 중 인간의 우선적 세 욕구와 관련된 악덕입니다.
첫째가 식욕과 관련된 탐식이고, 둘째가 성욕과 관련된 음욕이고, 셋째가 재물(돈)과 관련된 물욕입니다.
식욕, 성욕, 물욕이 문제가 아니라 절제되지 않았을 때 문제가 됩니다.
성욕이 무절제하게 행사될 때 영육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다음 예수님의 말씀이 통쾌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하느님을 대신한 예수님의 전권의식이 잘 드러납니다.
“‘간음해서는 안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 남자들 몇이나 될까요.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음욕을 품고 끈끈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자체가 그대로 간음이라는 것입니다.
시선의 정화에 앞서 음욕을 품은 마음의 정화를 늘 염두에 두라는 말씀입니다.
간음의 죄를 지었을 때 예수님의 처방이 충격적입니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고,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리라고 하십니다.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한다면 천국에는 애꾸들에 한손잡이 남자들로 가득할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여자도 포함될 것입니다.
순진하게 문자 그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죄의 결과가 얼마나 큰 불행을 초래하는지 경각심을 주는 충격요법적 표현입니다.
죄를 짓더라도 젊고 힘있을 때 짓고 가능한 한 속히 끊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성욕은 답이 없습니다.
고백성사를 줄 때 얼마나 힘든 정결의 준수인지 이해하게 됩니다.
성 역시 중독성이라 성에 중독되면 처방은 더욱 힘들어집니다.
어느 수도영성 대가의 “정결은 죽어야 끝나니 정결은 하나의 과정”이라는 말을 잊지 못합니다.
죽을 때까지 평생 정결의 여정을 걸어야 하고, 여기서 절제, 극기, 자제가 힘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결은 비단 육신에만 관계된 육욕만이 아닙니다.
참행복 선언 여섯 번째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항목에 대한 가톨릭교리서의 설명이 명쾌했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이란 주로 사랑, 정결 또는 올바른 성생활, 그리고 진리에 대한 사랑과 정통 신앙, 이 세 측면에서 하느님의 거룩함의 요구에 자기의 지성과 의지를 일치시킨 사람들을 가리킨다.
마음의 깨끗함과 육체의 깨끗함과 신앙의 순수함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가톨릭교리서 2518항)
육신의 정결과 더불어 진리에 대한 사랑, 정통 신앙에 대한 사랑, 즉 하느님 사랑이 근본적 대책임을 봅니다.
또 “간음하지 말라”는 다음 주석내용에 전적으로 공감했습니다.
“사실 이 계명은 단지 성행위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각 사람의 침해할 수 없는 몸에 대해 가져야 할 깊은 존경심에 관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단순히 개인의 쾌락이나 성적욕구를 위해 이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성생활에는 두가지 목적이 있다.
두 사람 사이의 깊고 진정한 사랑의 표현, 그리고 새로운 생명을 출산하는 것이다.”
사부 성 베네딕도의 가르침에 주목합니다.
성인은 착한 일의 도구들에서 말합니다.
“금식을 사랑하라(Jeiunium amare)”: 성규 4,13
“정결을 사랑하라(Castitatem amare): 성규 4,64
답은 사랑뿐입니다.
부작용없이 올바른 전인적 성장과 성숙을 위한 식욕과 성욕의 근본적 해법입니다.
사랑의 수행이요 수행의 훈련과 습관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듯 수도생활을, 일상의 삶을 사랑하는 것이요, 단식을, 순결을, 독서를, 공부를, 순종을, 가난을, 겸손을, 경청을, 침묵을, 고독을, 기도를, 성독을 모든 수행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기도가 답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저절로 기도합니다.
교황님의 말씀입니다.
“기도 없이는 사랑도 없다.
기도가 구체적 행위로 표현되지 않으면 그것은 헛되다.
어떤 활동도 없는 믿음 그 자체로는 죽은 것이다.”
기도에서 나오는 사랑은 수행들의 실천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정말 바른 기도라면, 한결같이 간절하고 충실한 기도라면 사랑의 수행으로 표현될 것입니다.
그러니 정결에 대한 궁극의 답은 관상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일치뿐이라는 확신입니다.
바로 그 좋은 본보기가 제1독서, 기도의 사람, 엘리야입니다.
오늘 복음의 가르침이 예수님의 산상설교에 해당되듯 오늘 엘리야는 호렙 산 동굴밖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엘리야의 내적힘은 물론 내외적 정화와 성화를 이끌었을 주님과의 관상적 만남에서 기인됨을 봅니다.
옛 구도자들이 주님을 만나러 사막에 갔듯이 산을 찾았던 성서의 성인들이요, 엘리야가 하느님의 산 호렙에서 하느님을 만났듯이 우리는 하느님의 산, 불암산 중턱에 위치한 수도원 성전 미사를 통해 주님을 만납니다.
엘리야와 주님과의 만남이 우리에게는 귀한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주님의 명령에 이어, 크고 강한 바람이 지났고 지진이 일어났고 불이 일어났는데, 주님은 바람 가운데에도, 지진 가운데에도, 불 속에서도 계시지 않았다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지 못함은, 관상기도중에 주님을 만나지 못함은 시끄러운 환경, 마음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안팎으로 바람으로 지진으로 불로 상징되는 시끄러운 일상사 속에 묻혀 살다 보면 주님과의 관상적 만남을 불가능합니다.
엘리야는 불이 지나간 뒤에 주님의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를,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엘리아야, 여기에서 무엇을 하느냐?”
“저는 만군의 하느님을 위하여 열정을 다해 일해 왔습니다.”
이어 속 시원히 마음속 답답함을 털어 내자 주님의 자상한 말씀이 뒤따릅니다.
무엇보다 주님은 엘리야의 후계자로 엘리사를 지목하십니다.
참으로 분주한 일상중에도 주님과의 관상적 만남의 시간과 장소를 마련함이 얼마나 중요하고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부족을 채워주시며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십니다.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나도록 너희는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녀라.”
(필리 2;15.16)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발상의 전환>
미국과 한국은 사목회의 임기와 학제가 다릅니다.
한국은 12월 말에 사목회의의 임기를 끝내고 새해가 시작되면 새롭게 시작합니다.
학년도 12월에 방학을 하고, 새해가 시작되면 새 학년이 시작됩니다.
미국은 6월에 사목회의 임기를 마치고 7월부터 새롭게 임기를 시작합니다.
여름 방학을 마치고 가을에 새로운 학년을 시작합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한다고 하듯이, 미국에 있으면 미국의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임기를 마치는 사목회가 7월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사목회에 넘겨줄 ‘예산’을 책정하였습니다.
본당 예산의 30% 이상은 건물 유지와 보수를 위해서 책정되었습니다.
각 분과의 예산은 조금씩 늘기도 하고, 줄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청소년 분과의 예산이 전년에 비해서 많이 늘었습니다.
전년에 비해서 70% 이상이 늘었습니다.
이유는 부주임 신부님이 한국에서 오면서 청소년 분과의 행사가 늘었기 때문입니다.
팬데믹으로 멈추었던 청소년들의 ‘피정과 캠핑’이 다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부주임 신부님이 영어미사를 전담하면서 주일학교 학생들이 많이 늘었고, 청년들의 모임도 늘었습니다.
청년들이 성서공부를 하고, 성가대도 만들고, 성지순례를 가는 계획도 세웠습니다.
청소년 분과를 위해서 신부님을 초대했으면서 청소년을 위한 예산을 줄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성전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가능하면 긴축 예산을 책정했다고 합니다.
교우들이 봉헌한 헌금과 교무금이니 당연히 아껴서 써야 합니다.
그런데 재정평의회를 담당하는 형제님이 새로운 제안을 했습니다.
매월 재정보고를 주보에 공지하는데 수입과 지출에서 지출이 많으면 걱정하는 분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떤 분은 본당에 자산이 너무 많은 것이 아닌지 문의한다고 합니다.
사목회에서 예산을 책정해서 올바르게 집행한다면, 각 분과는 충분한 예산을 책정하면 좋겠다고 합니다.
주일학교 학생들이 캠핑도 가고, 피정도 가면서 행사를 많이 하면 좋겠다고 합니다.
오히려 일을 하지 않으니까 매년 예산이 남는다고 합니다.
사목회에서 충분히 예산을 책정하면 재정평의회에서 검토하고 최종 예산을 본당 신부님께 보고 한다고 합니다.
국가의 예산도 비슷합니다.
경제가 어렵고, 자영업자들의 생계가 어려워지면 개인이 대출을 받는 것보다는 국가에서 추가 경정예산을 책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때 대부분의 나라는 재정을 확대해서 서민들의 어려움을 도와주었습니다.
저도 뉴욕에 있을 때, 정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본당의 유지와 보수를 위한 예산은 점차 늘어날 것입니다.
본당 신축 후 10년 가까이 지났기 때문입니다.
본당 설립 50주년을 위한 준비에도 예산이 필요할 것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사목회에서 공동체를 위한 예산을 효율적으로 책정하고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발상의 전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컵에 남은 물이 반이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반밖에 남지 않았구나!’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직도 반이나 남았구나!’
신앙인은 어쩌면 발상의 전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에 살면서도 영원한 생명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소유와 풍요가 넘쳐나는 세상에 나눔과 희생의 가치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늘 원망과 불평을 하면서도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늘 감사와 기쁨을 표현하면서도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모두 주님께로 가야 할 운명입니다.
어떤 생각과 가치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늘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많습니다.
시인은 봄이 되면 보이지 않는 것들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습니다.
봄처럼 부지런 하라는 말, 봄처럼 꿈을 가지라는 말, 봄처럼 새로워지라는 말입니다.
전에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봄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봄처럼 부지런하다면, 우리가 봄처럼 꿈을 간직한다면, 우리가 봄처럼 늘 새로워진다면 거친 들판에서도, 고독과 절망 중에서도, 시련과 아픔 속에서도 희망을 간직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전 세계 수억 명이 가장 좋아하는 여가 활동은 무엇일까요?
단연 일등은 텔레비전 시청이었습니다.
우리나라 하루 평균 텔레비전 시청 시간은 2021년 통계를 보면 3시간이 넘습니다.
1년 중에서 한 달 이상인 45일을 텔레비전만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텔레비전을 시청하면 긴장이 풀어진다고 합니다.
화면에 집중할수록 사고 활동이 정지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긴장이 풀어진다고 해서 내적 안정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어떤 생각도 들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텔레비전 생각과 이미지를 내 안에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채널을 계속 돌립니다.
무의식적이 되고 수동적이며 내적 에너지가 고갈됩니다.
요즘에는 텔레비전 시청 시간이 많이 줄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에 반해 스마트폰과 동영상 서비스인 OTT(Over The Top)의 이용 시간이 급격하게 늘어난 것입니다.
이는 분명 재미와 흥미를 주지만, 역시 내적 성장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평화와 위로를 주는 내적 성장에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따르는 길이고 주님 안에서 일치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진정한 평화와 기쁨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사람의 모습이 일반 사람들의 모습과 일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남들처럼 해야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굳이 행복하지도 않으면서 남들처럼 살아야 할까요?
참 행복을 찾아 나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남들처럼 사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남들처럼이 아닌 나답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 참 행복을 향해 나아가길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서는 죄를 멀리하고 선을 행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죄의 시작은 행동에서일까요? 아니면 마음에서일까요?
당연히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마음에서 죄를 품고 나서 이를 행동으로 저지르는 잘못된 행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마음으로 저지르는 죄를 경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라면서 오른눈이 죄짓게 하거든 빼어 던져 버리라고, 오른손이 죄짓게 하거든 잘라 던져 버리라고 하십니다.
마음부터 잘 다스려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세상이 주는 가짜 위로와 평화를 찾아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주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평화와 위로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엘리야 예언자에게 주님께서는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앞에 서는 사람은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만 가능했습니다.
우리도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은 과연 어떠한가요?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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