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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자나 불상은
양손으로 직권인을 맺고 계신 모습이 특징입니다.
왼손에 검지를 세우고 오른손으로 감싸 쥐는 이 손 모양은
이치와 지혜가 둘이 아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중생의 문명을
지혜의 빛으로 감싸 안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왼손에 검지가 중생을 상징하고
그것을 감싸쥔 오른손이 부처의 지혜를 상징한다고
해석하는 스님들도 계십니다.
어느 해석을 따르든
중생과 부처가 하나로 만나는 자리를
손 모양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같습니다.
통도사의 금강 계단
해인사의 대적 광전
석굴암의 본존불
이 모두가 비로자나 불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특히 석굴암의 본존불은
항마촉지인을 맺고 계시지만
그 안에 담긴 사상적 배경이 화엄경에 비로자나 불 세계관과 닿아 있다고 보는 견해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국 불교에서 비로자나 불은 단순히 화엄경 안에만 머무르는 존재가 아니라 사찰 건축과 불상 조성의 근본에 자리하고 있는 부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다음에 사찰을 찾으실 때 비로전이나 대적광전 앞에 서 보십시오. 직권인을 맺고 계신 비로자나불의 모습 속에서
화엄경의 가르침이 살아 있음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화엄경에서 비로자나불이 설법의 중심이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앞서 살펴본 대로 화엄경에서 비로자나 불은 직접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침묵 가운데 앉아 계시되 그 몸에서 나오는 광명이 온 법기를 비추고
그 광명을 받은 보살들이 법을 전하는 구조입니다.
보리수 아래 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으시면서도 온 법계의 가르침이 퍼져 나가는 것
이것이 법신불만이 할 수 있는 설법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깊이 새겨보십시오.
진리는 본래 말로 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언어와 문자를 넘어선 자리에 있습니다.
비로자나 불이 침묵 속에서
광명으로 설법하시는 모습은
바로 이 가르침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말씀이 없되 가르침이 있고
소리가 없되 법이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고요한 밤
법당에 홀로 앉아 묵묵히 염불하실 때
그 고요함 속에서 무언가를 느끼셨던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마음을 감싸오는 듯한 느낌
그것이 비로자나불의 광명이 닿는 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로자나불의 빛은 특별한 수행을 한 사람에게만 비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모두에게 쉼없이 비치고 있습니다.
다만 그 빛을 알아차리느냐
알아차리지 못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따름입니다.
화엄경은 이 비로자나불의 세계를 연화장 세계라 부르고 있습니다.
연화장세계란
연꽃 위에 장엄하게 펼쳐진 세계라는 뜻입니다.
이 세계는 비로자나 불의
과거 수행 공덕으로 이루어진 불국토로서 한량 없는 세계가 겹겹이 포개져 있습니다.
하나의 세계 속에 또 다른 세계가 있고
그 세계 속에 또 다른 세계가 끝없이 펼쳐지는 구조입니다.
법계 연기에서 살펴본
상직상입의 원리가
이 연화장 세계의 구조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화엄경은 이 연화장 세계를 묘사하면서
이 세계가 먼 곳에 따로 있지 않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곧 연화장 세계의 일부입니다.
마음이 맑아지는 만큼
지금 이 자리가 연화장 세계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일체유심조의 가르침과 같은 맥락입니다.
마음이 청정하면 세계가 청정하다는 화엄경의 가르침이
연화장 세계를 통해 구체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비로자나 불은 일체유심조의 가르침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고 설하셨는데
그 마음의 가장 깊은 곳
가장 근원적인 자리에
비로자나불의 광명이 자리하고 있다고 화엄경은 전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본래 청정하다는 여래출현품의 가르침과
비로자나불이
온 우주를 비추는 빛이라는
가르침은 하나로 통합니다.
결국 같은 진실을 서로 다른 방향에서 비추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본래 모습이 곧 비로자나불의 광명이라는 뜻입니다.
화엄경이 설하는 비로자나불은
먼 하늘 위에 계신 분이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한순간도 쉬지 않고 빛나고 계신 부처님이십니다.
그 빛을 향해 걸어가는 길이 곧 보살의 수행입니다.
화엄경은 그 수행의 구체적인 단계를 10지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10지품 화음경 가운데에서도 보살이 걸어가야 할 수행의 길을 가장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깨달음 이란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계를 밟아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화엄경은이 십지품을 통해 전하고 있습니다.
보살이 처음 발심하여
마침내 부처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열 가지 단계를 거치게 되며
이것을 10지라 합니다.
첫째는 환희지로
보살이 처음으로 보리심을 일으킨 자리입니다. 깨달음을 향한 뜻을 세우는 순간 크나큰 기쁨이 일어나기에 환희지라. 이름합니다.
오랜 어둠 속을 걸어 오다가 처음으로 빛이 비치는 방향을 발견한 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2단계에서 보살은 보시바라미를 주된 수행으로 삼습니다.
둘째는 이구지로
때를 여인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거친 번뇌가 가라앉는 단계이며 계율을 지키는 수행 곧 지게 바람일이 2단계의 중심이 됩니다.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허비 점차 청정해지기 시작합니다.
셋째는 발광지입니다.
지혜 빛이 밝아지는 단계로 인육 바람이를 통해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기릅니다. 수행 가운데 겪게 되는 시련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힘이 2단계에서 길러집니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억울함이나 분노도 이 발광지의 눈으로 보면 인욕 수행의 인연이 될 수 있습니다.
넷째는 염해지로
지혜 불꽃이 타오르는 단계입니다. 정진 바람일을 주된 수행으로 삼으며 게으름을 벗어나 쉬지 않고 수행에 힘쓰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화음경은 이단계에서 37 가지 깨달음의 요소인 37도품을 닦아야 한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이전 단계에서 발견한 빛을 꺼뜨리지 않고 끊임없이 살려 나가는 것이 이 단계의 과제입니다.
다섯째는 난승지로
이기기 어려운 것을 이긴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선정 바람일이 이 단계의 중심이 됩니다. 세간의 지혜와 출세 간의 지혜를 함께 갖추어야 하기에 쉽게 오를 수 없는 경지라 하여 난승이라 이름합니다. 2단계에서 보살은 사성제의 이치를 완전히 체득하게 됩니다.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에 끌려가지 않는 힘이 이난승지에서 갖추어집니다.
여섯째는 현전지입니다.
진리가 눈앞에 나타나는 단계로 반야바라미를 주된 수행으로 삼습니다. 공의 이치가 머리로 아는 것을 넘어 마음으로 직접 체험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바냐심경에서 설하시는 색즉시00즉시색의 이치가 이 현전지에서 비로소 살아 있는 체험이 됩니다.
일곱째는 원행지입니다.
수행의 범위가 한없이 넓어지는 단계로 방편 바람이를 통해 중생을 제도하는 다양한 방법을 익힙니다. 자기 수행만으로 그치지 않고 다른 중생을 이끌어 주는 힘이 이 단계에서 무르익습니다.
여덟째는 부동지로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경지를 가리킵니다. 원바람일이 이 단계의 중심이며 모든 번뇌가 더 이상 보살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게 됩니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자연스럽게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자리입니다. 화엄경에서는 이 부동지를
보살수행의 가장 큰 전환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이르면
수행이 더 이상 애쓰는 것으로
느껴지지 않고
저절로 흘러가게 됩니다.
아홉 째는 선혜지입니다.
뛰어난 지혜의 단계로 럭바라미를 통해 중생의 근기를 살피고 각각에 맞는 법을 설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하나의 가르침으로 모든 중생을 제도하려 하지 않고 중생의 형편에 따라
무한한 방편을 펼치는 것이
이 단계의 특징입니다.
부처님께서 중생의 눈높이에 맞추어 다양한 경전을 설하신 것도 바로 이 선혜지의 지혜와 통하는
이치라 할 수 있습니다.
열째는 법운지로
구름이 비를 내려 대지를 적시듯 보살의 가르침이 모든 중생에게 두루 내리는 단계입니다.
智바라밀
미리 원만해지며 부처의 경제에 가장 가까운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이 단계에 이른 보살은 한량 없는 삼매에 들어 한량 없는 부처님을 뵈고 한량 없는 중생을 좋아합니다.
법운지의 보살은
비로자나 불의 광명을 받아온 법계에
비를 내리는 구름과 같은 존재입니다.
이 10 가지 단계를 살펴보면 한 가지 흐름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처음에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닦는 수행에서 시작하여
점차 다른 중생을 위한 수행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보시에서 출발하여
지혜에 이르고
지혜에서 다시 방편과 서원으로 나아가는 이 흐름은
보살도의 핵심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지의 각 단계에는 10바람일이 하나씩 대응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보시 지게 인욕 정진 선정 반야 방편 원 력지. 이 열 가지 바람일은 우리가 일상에서도 실천할 수 있는 수행 덕목입니다.
십지가 보살의 경지라 하여
먼 이야기처럼 느껴지실 수 있으나
그 출발점인
보시는 지금 이 자리에서도 시작할 수 있는 수행입니다.
이웃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도 보시이며
분노를 참고. 상대방을 이해하려 하는 것도 인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전을 읽고 범문을 듣는 이 시간 자체도 정진 바람이래 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람일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 파라미터에서 온 것으로 피안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괴로움의 이 언덕에서
깨달음의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10바람 일은 그 건너감을 위한 10 가지 수행 방편인 것입니다.
수행을 오래 하셨어도 내가 과연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드셨던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십지의 가르침은 깨달음이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전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한 단계 한 단계 밟아 나가는 과정 자체가 곧 깨달음이라고. 화엄경은 설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이든 그 자리가 십지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 까닭입니다.
또한 십지에서 주목할 점은 각 단계가 이전 단계를 부정하거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전 단계를 포함하면서 더 넓어진다는 것입니다.
환희지의 기쁨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기쁨 위에
이구지의 청정함이 더해지고 그 위에 발광지의 지혜가 더해집니다. 이것은 법계 연기의 원리와 같은 구조입니다. 하나의 단계가 다른 단계를 품고 있고 전체가 하나 안에 담겨 있습니다.
화엄경의 10지는 점진적 수행과 본래 갖추어진 지혜의 관계에 대해서도 깊은 시사점을 전하십니다.
여래출현품에서는
모든 중생이 본래 부처의 지혜를 갖추고 있다
고 설하셨습니다. 그런데 십지품에서는 그 지혜를 드러내기 위해 열 단계의 수행이 필요하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본래 갖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는 데에도 단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씨앗이 이미 땅속에 있다 하여 꽃이 저절로 피지는 않습니다.
물을 주고 햇빛을 쐬고. 바람을 맞아야 비로소 꽃이 핍니다.
십지의 수행이 바로 그 물과 햇빛과 바람의 역할을 하는 까닭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십지의 수행이 부처의 지혜를 새로 만들어내는 과정은 아닙니다.
본래 있는 지혜 위에 겹겹이 쌓인 무명을 한 겹 한 겹 벗겨내는 과정이라 보아야 합니다.
환희지에서 한 겹을 벗기고
이구지에서 또 한 겹을 벗기며
법운지에 이르러 마지막 가림마까지 걷어냅니다.
이것이 화엄경이 설하는
수행에 참된 의미입니다. 이 10지의 수행이 혼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산을 오르는 이에게 길을 아는 안내자가 필요하듯
보살의 수행에도 스승의 인도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화엄경은 이 스승과의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를 함께 담고 있습니다.
선제동자라는 한 구도자가 53명의 스승을 찾아 떠난 위대한 순례 그 이야기를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입법 계품 허음경의 마지막 품이자 가장 긴 대목입니다. 80권 본 전체 39 품 가운데 이 입법계품 하나가 전체 분량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함경이 이토록 많은 분량을 이한품에 할애한 까닭은 이 이야기가 화음경의 가르침을 하나로 묶어내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선제동자라는 한 소년에서 시작됩니다. 선제동자는 문수보살의 가르침을 받고 발심한 뒤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문수보살은 선제동자에게 남쪽으로 가서 선지식을 찾아뵈라고 일러주셨습니다. 선지식이란 다른 길로 이끌어주는 스승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선제동자는 이 말씀에 따라 첫 번째 선지식을 찾아갑니다. 그 첫 번째 스승은 더군다라는 수행자였습니다. 더군비구는 선제동자에게 보살이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해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르침을 마친 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이 한 가지 법문밖에 모른다. 더 깊은 가르침을 구하려면 다음 선지식을 찾아가라고 전하셨습니다. 이 구조가 53명의 선지식을 만날 때까지 반복됩니다. 선제동자가 한 스승을 만나면 그 스승은 자기가 아는 가르침을 전해 준 뒤 반드시 다음 스승을 소개해줍니다. 한 분의 스승에게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다음 스승을 찾아 나서는 것이 선제동자의 구도 여정 전체를 관통하는 구조입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이 드러납니다. 53명의 선지식 가운데에는 비구나 비군이 같은 출가 수행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장자 바람은 의사 선인 등 다양한 이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스밀다라는 이름의 기녀도 선지식으로 등장하고 덕생동자와 유덕동녀라는 어린이도 선제동자의 스승이 되어 줍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잠시 되새겨 보십시오. 깨달음의 스승은 절 안에만 계신 분이 아닙니다.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 속에도 병을 고치는 의사 속에도 깨달음의 씨앗이 있을 수 있습니다. 길가에서 노래하는 이 속에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화음경은 전하십니다. 법계 연기의 세계에서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듯이 깨달음 역시 어느 한 곳에만 머무르지 않고 온 세상에 두루 퍼져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53명의 선지식 가운데 몇 분의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선지식인 덕운비군은 선제동자에게 염불산매의 법문을 전해주었습니다. 부처님을 한결같이 생각하며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 경지에 대해 설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르침을 마치신 뒤 다음 스승인 해운비구를 찾아가라고 일러주신 것입니다. 해운비구는 선제동자에게 보살의 대비심에 대해 가르쳐 주었습니다. 바다가 모든 강물을 받아들이듯 보살은 모든 중생의 괴로움을 자기 일처럼 품어안아야 한다고 전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한 스승의 가르침이 끝나면 다음 스승에게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선제동자의 구도 방식이었습니다. 선지식 가운데 자행동녀라는 어린 소년은 무생법인의 지혜를 선제동자에게 전해주었으며 이 가르침의 깊이는 실로 놀라웠습니다. 모든 존재는 본래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는 이치를 이 어린 소녀가 선제동자에게 가르쳐준 것입니다. 나이가 어리다고 하여 가르침이 얕은 것이 아니며 수행의 깊이는 겉모습으로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또 다른 선지식으로는 선견비구가 등장합니다. 선견 비구는 경행 삼매를 닦으시는 분으로 걸음걸음마다 깨달음이 열리는 수행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법당에서 포행을 할 때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곧 수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선지식의 가르침을 통해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바스밀다라는 선지 식은 기녀의 모습으로 선제동자 앞에 나타났습니다. 세간의 눈으로 보면 가장 세속적인 직업을 가진 이가 보살의 지혜를 전하는 스승이 되는 것입니다. 바스밀다는 중생이 자신을 찾아올 때 각각의 근기에 맞는 방편으로 법을 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형상에 얽매이지 않고 본질을 바라보라는 화음경의 가르침이 이 선지식의 모습 속에 살아 있습니다. 미륵보살을 만났을 때 선제동자는 비로자나장엄장이라는 거대한 누각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누가 가내는 한량 없는 누각이 또 들어 있었고 각각의 누가 간에 또 한량 없는 세계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법계 연기의 상직상입을 직접 눈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제동자는 이 광경을 통해 그동안 배워온 화음경의 가르침이 단순한 이론이 아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미륵보살을 뺀 뒤 선제동자는 다시 문수보살을 찾아갑니다. 처음 출발했던 그 자리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쉰 세 번째 선지식으로 보현보살을 만나며 순례에 대장정이 마무리됩니다. 그치 다시 시작으로 돌아오고 시작이 곧 끝과 만나는 이 구조는 화음경의 원형무에한 세계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선제동자의 여정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할 점이 드러납니다. 53명의 선지식은 모두 서로 다른 가르침을 전해 주었습니다. 같은 가르침을 반복한 분은 한 분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모시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있고 인욕을 통해 이르는 길도 있습니다. 선전과 반야와 방편을 통해 이르는 길 또한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살펴본 짓발암일이 이 선지식들의 가르침 속에 하나하나 구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한 매 선지식이 가르침을 마친 뒤 나는 이 한 가지밖에 모른다고 말씀하시는 것도 깊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스승이라 하여도 진리의 전부를 혼자 품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한 사람의 가르침 안에 완결되지 않으며 끊임없이 다른 스승을 찾아가는 구도의 과정 자체가 곧 수행이라는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겸손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른 보살도 자기 가르침이 전부라 말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스승은 배움의 끝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의 겸향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선제동자에 53 선 지식 순례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구도의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멈추지 않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선제동자는 한 스승에게 배운 뒤 만족하여 머물지 않았습니다. 한 스승을 만나면 다시 길을 나서고 또 다시 다음 스승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53번을 쉬지 않고 걸었습니다. 수행이 더디게 느껴지는 날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경전을 읽어도 마음이 예전과 다를 바 없다고 느끼셨을 수도 있습니다. 선제동자의 이야기는 그런 우리에게 멈추지 않는 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우리의 수행 역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한 분의 스승에게만 의지하여 모든 것을 얻으려 하기보다 삶 속에서 만나는 모든 인연을 스스로 삼아 보십시오. 이웃의 한마디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고 자연의 모습에서 범문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눈이 열리면 온 세상이 선지식이 됩니다. 선제동자의 순례가 마침내 보현보살에 이르렀을 때 보현보살은 선제동자에게 열 가지 큰 서원을 전하셨습니다. 이 열 가지 서원은 화음경 전체의 가르침을 실천으로 옮기는 구체적인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선제동자가 걸어온 긴 여정의 끝에서 마침내 실천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험경이 서라는 깨달음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선제동자처럼 직접 걸어가고 직접 만나고 직접 배우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살아있는 깨달음이 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일체 USIM조 법계 연기 연애출현품 비로자나불 십지의 가르침을 되새겨 보겠습니다. 이 가르침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실천될 수 있는지 이어서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험경에 가르침은 경전 안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일체유심조 법계 연기 열외출현품의 뜻이 우리의 일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움직이는지 이제 그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우리의 마음은 세계를 짓기 시작합니다. 오늘도 무거운 하루가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면 그 생각이 하루의 빛깔을 만들어냅니다. 반대로 오늘 하루도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같은 아침이 전혀 다른 아침이 됩니다. 바깥 세상이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달라진 것은 오직 마음뿐입니다. 이것이 일체유심조가 일상에서 작용하는 가장 가까운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족 사이에서도 이 가르침은 그대로 적용됩니다. 오래 함께 살아온 가족이기에 서로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주고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식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생각 배우자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서운함. 이러한 감정이 쌓이면 같은 집에 살면서도 마음은 멀어집니다. 그런데 화음경에 눈으로 바라보면 그 감정을 만들어낸 것은 상대방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말과 행동은 인연이 되었을 뿐 서운함이라는 감정을 지어낸 것은 나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관계의 매듭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이웃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때문에 내가 괴롭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그러나 화음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 괴로움을 지어내는 것은 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상대방을 바꾸려 하면 괴로움이 커지지만 내 마음의 작용을 알아차리면 괴로움이 스스로 엷어지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만든 것이기에 마음을 돌리면 세상도 함께 돌아갑니다. 덥게 연기의 가르침도 일상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를 살아가는 데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연이 얽혀 있습니다. 아침에 먹는 밥 한 그릇 속에도 농부의 땀과 비와 햇빛과 흙의 힘이 함께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길에서 마주치는 이웃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 스쳐 지나가는 바람 한 줄기까지 모든 것이 인연의 그물 안에서 서로를 떠받치고 있습니다. 인드라망의 구슬이 서로의 빛을 비추듯 우리의 삶 삶 또 수많은 인연의 빛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자각이 깊어지면 원망이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나에게 괴로움을 준 사람도 법계 연기에 눈으로 보면 나와 분리될 수 없는 인연입니다. 그 사람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원망의 대상으로 보이던 이가 사실은 나의 수행을 키워준 선지식이었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화음경이 일상에 전하는 깊은 지혜입니다. 이것은 억지로 용서하라는 뜻과는 다릅니다. 상처를 받은 마음을 무시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상처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한번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상처를 준 사람을 향해 있던 눈길을 잠시 내 마음속으로 돌려보십시오. 그 순간 원망의 무게가 조금이나마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느끼시는 외로움에 대해서도 화음경은 다른 눈을 열어줍니다. 자녀가 곁을 떠나고 벗들이 하나둘 멀어지며 몸도 예전 같지 않은 날이 많아지셨을 것입니다. 홀로 남겨진 듯한 그 막막함을 견디기 어려우셨던 밤이 있으셨을 줄 압니다. 그러나 법계 연기의 세계에서는 진정으로 홀로인 존재란 없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한한 인연의 그물 속에 지금 이 순간에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혼자라고 느껴지는 그 순간에도 비로자나불의 광명은 쉬지 않고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떠난 가족을 그리워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분과 나 사이의 인연은 욕심이 떠났다. 하여 끊어지지 않습니다. 법계 연기의 세계에서는 한 번 맺어진 인연의 빛이 영원히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위해 올리는 기도 한번 마음속으로 전하는 회향 한마디가 소중합니다. 빈드라망의 구슬을 통해 그 마음이 그분에게 닿아 있다고 화음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돌리면 세상이 달라진다는 화엄경의 가르침을 구체적인 수행으로 옮기는 방법도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첫째 아침에 일어나서 합장 한번 하시고 오늘 하루 만나는 모든 이가 나의 선지식이라고 마음속으로 되뇌어 보십시오. 선제동자가 53명의 스승을 찾아 나섰듯 우리의 하루도 그렇게 시작될 수 있습니다. 둘째 누군가에게 서운함이 올라올 때 잠시 멈추고 이 감정은 내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고 한 번만 알아차려 보십시오. 알아차림 하나가 업의 순환을 멈추는 첫 걸음이 됩니다. 감정을 억누르라는 뜻과는 다릅니다. 서운함을 느끼되 그 서운함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셋째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 오늘 하루 만난 인연들을 떠올리며 잠시 회항해 보십시오. 나의 수행과 공덕이 모든 존재에게 두루 미치기를 바라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짧은 회향이라도 그 마음 하나가 법계에 퍼져나간다고 화음경은 전하십니다. 넷째 화음경의 가르침을 더 깊이 체득하고 싶으신 분은 법성계를 매일 한 번씩 독성해 보십시오. 법성원 용무이사 이 첫 구절에 화음경의 모든 이치가 담겨 있습니다. 의상 대사께서 화음경에 방대한 세계를 210자에 압축하신 이 계송을 날마다 한번 외워보십시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일체 USIM조 네 글자를 사경으로 써 보시는 것도 마음 공부에 좋은 방편이 됩니다. 글씨를 쓰는 동안 마음이 자연스럽게 한 곳에 모이기 때문입니다. 이 네 가지 실천은 특별한 시간을 내지 않아도 일상 속에서 바로 할 수 있는 수행입니다. 절에 가야만 수행이 되고 경전을 펼쳐야만 법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제동자의 선지실이 절 밖에도 계셨듯이 우리의 수행 역시 삶의 모든 순간 속에 열려 있습니다. 허음경의 가르침을 일상에 가져오면 세 가지가 달라집니다. 마음이 세상을 만든다는 것을 알면 바깥을 원망하는 마음이 줄어듭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 외로움의 무게가 가벼워집니다. 내 안에 부처의 지혜가 있다는 것을 알면 스스로를 탓하는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됩니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이 가르침은 더 깊이 와닿으실 수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밖으로 향하던 눈이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 안을 들여다볼 때 화음경의 가르침이 길잡이가 되어 줍니다. 마음 안에 이미 부처의 지혜가 갖추어져 있기에 밖에서 무엇을 더 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한 가지만 마음의 품어도 남은 세월이 훨씬 가벼워질 수 있습니다. 물론 아는 것과 체득하는 것 사이에는 거리가 있기 마련입니다. 오늘 이 법문을 듣고 마음이 움직였다 하여 내일부터 삶이 완전히 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언젠가 반드시 싹을 틔우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 떨어진 화음경의 씨앗이 내일의 삶을 조금씩 바꾸어 나갈 것입니다. 십지의 가르침에서 살펴보았듯이 깨달음은 한순간에 찾아오지 않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오늘의 알아차림이 내일의 수행으로 이어지고 그 수행이 또 다른 알아차림을 불러오는 과정 속에서 점차 밝아지는 것입니다. 함경은 이 모든 가르침의 끝에서 한 가지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론으로 그치지 않고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수행의 길 보현 보살의 열가지 큰 서원이 바로 그것입니다. 보현의 원품 함경의 모든 가르침이 마침내 실천으로 귀결되는 자리입니다. 보현보살은 선제동자에게 그리고 이 법문을 듣고 계신 모든 이에게 열 가지 큰 서원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10 가지 서원을 보현 시범이라 하며 부처로 가는 길에 구체적인 이정표가 되는 가르침입니다. 첫째는 예경제불로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하라는 서원입니다. 여기서 모든 부처님이란 불단에 모셔진 부처님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법계 연기의 세계에서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듯이 모든 존재 안에 깃든 불성에 이해를 올리라는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 합장하며 선배를 올리는 그 절 한 번이 이미 예경제불의 실천이 되고 있는 까닭입니다. 둘째는 칭찬 여래입니다.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라는 서원이며 입으로 짓는 선업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염부를 하거나 경전을 독성할 때 그것이 바로 칭찬 열애의 수행이 됩니다. 셋째는 광수 공양으로 널리 공향을 올리라는 서원입니다. 보현보살은 물질적인 공양보다 법공약 곧 수행으로 올리는 공양이 가장 으뜸이라고 전하십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그 가르침을 다른 이에게 전하는 것이 최상의 공약이라는 뜻입니다. 넷째는 참외업장으로 과거에 지은 업장을 참회하라는 서원입니다. 일체유심조의 가르침에서 살펴보았듯 우리의 마음이 업을 짓고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참외란 그 업의 뿌리를 돌아보고 마음을 바로잡는 수행입니다. 보현 보살은 이 참회를 행할 때 끊임없이 쉬지 않고 몸과 입과 뜻으로 지은 모든 업을 낱낱이 돌아보아야 한다고 전하십니다. 오늘 밤 잠자리에 들기 전 하루를 돌아보며 잠시 참외의 시간을 가져보십시오. 이것도 이 서원의 실천이 될 수 있습니다. 다섯째는 수의공덕으로 다른 이의 공덕을 기뻐하라는 서원입니다. 남의 수행과 선행을 시기하지 않고 함께 기뻐하는 마음. 이것만으로도 큰 공덕이 쌓인다고. 화음경은 설하고 있습니다. 이웃이 좋은 일을 하면 진심으로 기뻐해 주고 다른 분이 수행에 진전이 있으면 함께 경하해 주는 것 이러한 마음 하나가 보살의 수행이 됩니다. 여섯째는 청전법륜으로 부처님께 법을 설해 주시기를 청하라는 서원입니다. 우리가 법당에서 법문을 청해 듣고 이렇게 화음경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는 이 시간도 청전 법륜의 실천에 해당합니다. 일곱째는 천불주사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래 머무르시기를 청하라는 서원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 사원은 부처님의 법을 배우고 전하는 모든 이가 함께 세우는 원력이기도 합니다. 여덟째는 상수부락 항상 부처님을 따라 배우라는 서원입니다. 선제동자가 53명의 선지식을 찾아 쉬지 않고 걸어간 것과 같은 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 억제는 항순중생으로 항상 중생에게 순응하라는 서원입니다. 보살은 자기 수행만으로 그치지 않고 중생의 형편에 맞추어 함께 나아가는 존재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열재는 복의 회향으로 지금까지 쌓은 모든 공덕을 남김없이 모든 중생에게 돌리라는 서원입니다. 나 혼자의 깨달음으로 끝내지 않고 모든 존재와 함께 부처의 길로 나아가겠다는 보살의 서원이 이 마지막 대원에 담겨 있습니다. 인드라망의 구슬 하나가 밝아지면 온법계의 구슬이 함께 밝아집니다. 나의 공덕이 곧 모든 존재의 공덕으로 이어진다는 법계 연기의 이치가 이 회향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 열 가지 서원을 살펴보면 하나의 흐름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부처님께 대한 공경에서 시작하여 자기 업장을 참회하고 남의 공덕을 기뻐하며 마침내 모든 공덕을 중생에게 돌리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나에서 시작하여 남으로 나아가고 끝내는 모든 존재를 품는 것 이것이 보현행원이 보여주는 보살도의 완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습지에서 살펴본 보살수행의 흐름과 같은 구조입니다. 자기 수행에서 출발하여 점차 다른 중생을 위한 수행으로 나아가는 길 보현 시보는 그 길의 가장 구체적인 지도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제목이 약속한 것을 다시 되새겨보겠습니다. 누구나 부처로 가는 길 험경은 이길 보현 보살의 열 가지 서원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능력이 필요한 것도 깊은 산중에 들어가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덕을 찬탄하며 공양을 올리고 업장을 참회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시작할 수 있는 수행입니다. 열애 출연품에서 밝혀주셨듯이 우리의 마음속에는 이미 부처의 지혜가 온전히 갖추어져 있습니다. 보현 시범은 그 지혜를 드러내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의 길입니다. 보현보살의 서원이 특별한 까닭은 한번 세우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함이 없는 원력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보현보살은 허공이 다 하고 중생이 다 하며 번뇌가 다 하여도 나의 서원은 다 하지 않으리라고 전하십니다. 이서원의 크기가 곧 화음경이 바라보는 세계의 크기이기도 합니다. 끝이 없기에 지금 이 순간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이 법문을 통해 화음경의 세계를 함께 걸어왔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직후 가장 먼저 여신 말씀 대승경전의 왕이라 불리는 이 경전 속에서 우리는 일체유심조의 뜻을 살펴보았고 법계 연기의 세계를 만났습니다. 모든 중생 안에 부처의 지혜가 갖추어져 있다는 놀라운 선언을 들었으며 비로자나불의 광명이 온 우주를 비추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십지의 수행 단계와 선제동자의 순례를 함께 걸으며 이 가르침을 우리의 일상에 가져오는 방법까지 나누어 보았습니다. 이 모든 가르침을 한마디로 모아 보겠습니다.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고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이미 부처의 지혜가 갖추어져 있으며 그 지혜를 드러내는 길이 보현보살의 열 가지 서원으로 열려 있는 것입니다. 90분 가까운 이 긴 시간 동안 화음경에 방대한 세계를 함께 걸어오셨습니다. 쉽지 않은 가르침도 있었고 마음의 깊이 와닿는 대목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단 한 구절이라도 마음에 남으셨다면 오늘 이 범문은 그 한 구절로 충분합니다. 화음경의 씨앗은 이미 여러분의 마음속에 떨어졌습니다.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것은 오늘 이후 여러분의 하루하루 속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처음 이 법문을 시작할 때 모든 것은 마음에서 시작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이 법문의 끝에서 같은 말씀을 한 번 더 전합니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본래 부처의 마음입니다. 이 범문이 오늘 밤 우리의 마음에 한 줄기 빛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무 대방광 물허음경 나무 비로자나 불 나무 보연 보살마살 원컨대 이 법문을 들으신 모든 분이 화음경의 가르침을 마음에 품으시기를 바랍니다. 일체유심조의 지혜로운 날마다 새로운 세계를 여시며 보현보살의 서원을 따라 부처로 가는 길 위에 한 걸음 한걸음 나아가시기를 바란합니다. 오늘 이긴 범문을 끝까지 함께 해 주셨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법문이 도움이 되셨다면 주변의 불자님들께도 함께 나누어 주십시오. 구독과 좋아요를 눌러 주시면 더 많은 분께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해질 수 있습니다. 불교등대는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 함께 걸어가는 길동무가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살면서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내가 듣고 있는 이 가르침이 정말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일까? 2600년이라는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치고 수많은 나라의 말로 옮겨지면서 원래의 뜻이 달라진 것은 아닐까?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처음 입을 여셨을 때 그 목소리는 어떤 것이었을까? 절에 다니시면서 기도하고 경전을 읽고 법문을 들으시면서도 마음 한 편에 이런 갈증이 남아 있으셨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더 가까이 가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갈증을 오늘 밤 풀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오늘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되는 경전을 만나게 됩니다. 숱하니 파타입니다. 이 이름이 낯설게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처럼 우리 귀에 익은 경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숱한이 파타는 우리가 아는 그 모든 경전의 씨앗이 담겨 있는 가르침입니다. 숱하는 경이라는 뜻이고 니파탄은 모음이라는 뜻이니 부처님 말씀을 모아 놓은 가장 오래된 경전 모음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인멸하신 뒤 제자들이 모여 스승의 말씀을 기억해 냈습니다. 한 사람이 기억하고 또 한 사람이 이어받으며 부처님의 육성에 가장 가까운 말씀을 시와 노래의 형태로 엮어 둔 것입니다. 그것이 수타니 파타이며 현존하는 불교 경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경전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응문의 형태로 전해졌기에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도 변형되지 않았으며 다른 어떤 경전보다 부처님의 원래 목소리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금강경이 성립되기 수백 년 전 반야심경이 세상에 나오기 훨씬 전부터 이 경전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후대의 경전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정교하게 체계화한 것이라면 수타니 파타는 그 체계와 이전의 날것 그대로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식도 없고 포장도 없이 부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직접 하신 말씀이 그대로 숨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절에서 매일 독성하는 경전들은 대부분 대승경전이기에 이 수타니 파타를 접하지 못하신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대승의 거대한 가르침도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이 경전에 닿게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입을 여신 그 자리 그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 바로 숱하니 파타입니다. 이 경전의 말씀은 놀라울 정도로 직접적이고 꾸밈이 없습니다. 어려운 철학을 앞세우지 않으시고 지금 이 자리에서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를 곧바로 말씀하십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 구절을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소설 제목으로도 쓰였고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명구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수타니 파타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이 구절의 뜻은 본래의 뜻과 다를 수 있습니다. 혼자서 가라는 것이 외롭게 살라는 뜻이 아니었고 사람을 멀리하고 세상을 등질하는 뜻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혼자서 간다는 것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스스로의 등불을 밝히라는 뜻이었으며 세상 한가운데를 걸으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나아가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평생 가족을 위해 자녀를 위해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오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 삶이 잘못된 것은 아니되 이제는 나 자신의 마음을 돌아볼 때가 된 것이기도 합니다. 이 경전에는 뱀이 묵은 허물을 벗는 이야기가 담겨 있으며 사자가 소리에 놀라지 않듯 바람이 그물에 걸리지 않듯 흔들림 없이 살아가는 법을 전하고 있습니다. 작년 듣다가 완공을 떠나 거린이 되는 장면도 나오며 카스트를 부정하고 모든 사람은 행위로 결정된다고 선언하시는 대목도 나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제자들이 부처님께 묻습니다. 이 괴로움의 강을 어떻게 건너갑니까? 여러분 이 질문은 2600년 전 제자들의 질문이면서 동시에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우리 모두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 그 물음에 어떻게 답하셨는지 오늘 끝까지 들으시면 알게 되실 것입니다. 숱한 파타 일장부터 5장까지 부처님의 가장 오래된 육성을 따라 걸어가겠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2600년 전 부처님 앞에 앉아 직접 말씀을 듣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말씀이 끝날 무렵 우리의 마음에도 뱀이 묵은 허물을 벗듯 오래된 짐 하나가 조용히 내려지게 될 것입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이제 숱한 이 파타의 첫 번째 가르침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수타니 파타 일장의 이름은 사품입니다. 상품에 사는 뱀 사자이며 첫 번째 경의 이름 역시 뱀의 경이라 하였습니다. 2600년 전 가장 오래된 경전의 첫 장 첫 번째 가르침이 다름 아닌 뱀의 이야기로 시작된다는 것은 깊이 생각해 볼 대목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듯이 수행자는 분노를 벗어야 한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듯이 수행자는 탐욕을 벗어야 한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듯이 수행자는 집착을 벗어야 한다. 그다음에 구절이 끝날 때마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듯이라는 같은 후렴이 되풀이 됩니다. 왜 하필 뱀이었을까? 부처님께서 수많은 생명 가운데 뱀을 고르신 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뱀은 허물을 벗지 않으면 자라지 못하는 생명이며 묵은 껍질이 몸에 붙어 있는 한 새로운 몸이 나올 수 없습니다. 허물을 벗는 것이 괴롭다고 하여 벗지 않으면 결국 그 껍질 안에서 죽게 되니 벗어야 비로소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뱀을 비유로 드신 까닭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분노가 허물이고 탐욕이 허물이며 집착이 허물입니다. 이 허물들이 마음의 단단히 붙어 있는 한 우리는 자라지 못하게 됩니다. 벗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으되 막상 벗으려 하면 그것이 내 일부처럼 느껴져 놓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분노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분노를 가장 먼저 언급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분노는 모든 번뇌 가운데 가장 빠르게 타오르며 가장 크게 자신을 해치는 불이기 때문입니다. 분노는 상대를 향해 타오르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마음을 가장 먼저 태우게 됩니다. 여러분 살면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던 순간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분노가 지나간 뒤에 남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돌아보시면 상대가 달라지지도 않았고 상황이 나아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대부분은 후회만 남았을 것이며 관계만 상했을 것입니다. 분노는 불을 지르고 떠나는 방아범과 같아서 지른 사람의 집까지 함께 태워 버립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분노를 벗으라고 하십니다. 버스라는 것은 참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참는 것은 허물을 안에 품고 있는 것이지. 벗는 것과는 다릅니다. 벗는다는 것은 분노가 올라올 때 그것을 알아차리되 따라가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뱀이 허물을 벗을 때 아무런 미련 없이 벗어두고 가듯이 분노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그저 지켜보는 수행입니다. 경전의 표현을 빌리면 풀 속에 퍼진 독을 약의 힘으로 다스리듯이 분노가 일어날 때마다 알아차림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부처님께서 설하십니다. 분노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아 지금 내 안에 분노가 올라오고 있구나 하고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분노와 내가 하나가 되어 버리면 불길에 휩싸이게 되지만 분노를 바라보는 나를 의식하는 순간 불길과 거리가 생기게 됩니다. 그 거리가 지의 시작이며 허물을 벗는 첫 틈이 열리게 됩니다. 그다음 다음으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탐욕입니다. 경전에서는 이렇게 전하십니다. 욕망이 끝까지 자라나면 홍수처럼 범람하여 연꽃을 떠내려 보내듯 그 사람을 휩쓸어 간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듯이 수행자는 이 탐욕을 벗어야 한다. 탐욕은 분노와 성격이 다릅니다. 분노가 한순간에 타오르는 불이라면 탐욕은 서서히 차오르는 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발목까지 오고 다음에는 무릎까지 차며 나중에는 목까지 차올라 숨을 쉴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런데 서서히 차오르기에 자기가 물에 잠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만 더 이것만 더 하나만 더
이 마음이 탐욕의 무리며 가진 것으로 충분한데도 더 채우려 하고 이미 넘치는데도 모자란
느끼는 마음이 서서히 차오르는 홍수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물이 차오르기 전에 벗어나라고 하십니다.
연꽃이 떠내려가기 전에 뱀이 허물을 벗듯
이 미련 없이 놓으라는 가르침입니다 세 번째로 부처님께서 벗으라고 하시는 것은 집착입니다 그런데
경전의 표현이 주목할 만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대한 집착뿐만 아니라 저 세상에 대한 집착도 함께 벗으라고 말씀하십니다. 2.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이것이. 뱀의 경에 나오는 핵심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세상을 버린다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
사람에 대한 욕심 이런 것들을 내려놓는 것이라 받아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 세상까지 버리라는 말씀은 쉽게 다가오지 않으실 것입니다. 불자로서. 극락왕생을 바
좋은 곳에 다시 태어나기를 원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내세에 좋은 곳에 태어나겠다는
그것이 집착이 되면 또 하나의 허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수행의. 목적이 좋은 곳에 태어나는 것에 머물러 있으면
그것은 탐욕의 방향만 바꾼 것이지 탐욕을 벗은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즐거움을 붙잡는 것이나 저 세상의 즐거움을 붙잡는 것이나 붙잡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은
이것은. 매우 깊은 가르침입니다. 숱한 이. 파타가 다른 경전과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후대의 경전들이. 극락이나 정토를 상세히 묘사하며 그곳에 태어나는 방법을 설하신 것과 달리 수타니 파타의 부처님은 그마저도 놓으라고 하십니다. 노아야 비로소. 자유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뱀이. 허물을 벗는 모습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뱀은 허물을 벗을 때 벗겨진
허물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아깝다고 다시 입지 않으며
혹시 쓸모가 있을까 하고 가지고 다니지도 않습니다. 벗은 것은 그대로 두
앞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우리가. 벗지 못하는 까닭은 벗을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벗은 것을 자꾸 돌아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받은 상처를 꺼내어 보고 이미 지나간 일을 되새기.
벗어 놓은 분노를 다시 주어 입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뱀의 비유를 드신 것은 버섯으면 돌아보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짓지 않는다. 경애는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빨리 달리는. 사람이 홍수를 건너듯 이 언덕을 건넌 자는 더 이상 집을 짓지 않는다. 여기서 집이란. 번뇌의 보금자리를 뜻합니다 분노라는 집. 탐욕이라는 집 집착이라는 집을 짓고 그 안에 편안.
머물러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집을 허물고 나오라 하시며 나온 뒤에는 다시 짓지 말라고 하십니다.
짓지 않는다는 것은 허무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집. 없이 사는 것이 두려우실 수 있으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집 없음은 텅 빈 허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를 뜻합니다. 바람이 어디에도. 머물지 않으되 온 세상을 감싸듯 마음이 어디에도 머물지 않으되 모든 것과 함께하는 것 이것이 허물을 벗은 뒤의 경지입니다. 우리가 짓는. 마음의 집은 처음에는 나를 보호해주는 듯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나를 가두는 감옥이 되기도 합니다. 익숙한 분노의 패턴 오
래된 원망의 습관 놓지 못하는 아쉬움의 방 이런 것들이 우리가 짓고
사는 마음의 집이며 부처님께서는 그 집을 나오라 하십니다. 배매경 마지막 구절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설하십니다.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으며
선과 악을 다 넘어서고 깨끗하게 된 자는 뱀이 묵은 허물을 벗듯이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선과 악을 넘어선다는 말씀에 놀라실 수 있습니다. 악을 버리는 것은 당연하되 섬마저 넘어서라니 무슨 뜻인지 의아.
이것은 선행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선을 행하되 내가. 선을 행했다는 생각에 머물지 말라는 뜻입니다. 선한 일을 하고서. 그 공덕을 붙잡고 있으면 그것도 하나의 허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절에 가서 보시를. 하고 내가 얼마를 냈다는 것을 마음에 두고 있으면 그 보시는 공덕이 아니라 새로운 집착의 씨앗이 됩니다. 남몰래
베풀고 잊어버리는 것 그래서 베푼 자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 이것이 부처님께서 말씀
선을 넘어서는 경지입니다. 이후에. 금강경에서 설하시는 무주상보시의 뿌리가 이미 이 가장 오래된 경전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수타니 파타 첫 번째 경이 전하는 가르
벗어라 분노를. 벗고. 탐욕을 벗고 집착을 벗되 벗었다는 생각마저 벗으라. 뱀이 허물을 벗고. 돌아보지 않듯 우리도 마음의 허물을 벗고 앞으로 나아가라. 이 단순하고 직접적인. 말씀 안에 부처님 가르침의 뿌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분노라는 허물 탐욕이라는. 허물 집착이라는 허물 지금 우리 마음에는 어떤 허물이 붙어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오래되어 딱딱하게 굳은. 허물일수록 벗을 때 불편하고 아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벗지 않으면. 새 삶이 올 수 없습니다. 뱀이 허무를 벗은. 뒤 더 선명한 무늬를 가지듯 우리도 허물을 벗은 뒤에야 비로소 본래의 마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화물 벗기는 한꺼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뱀도 한번에 훌렁 벗는 것이 아니라 좁은 바위틈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면서 조금씩 벗겨냅니다. 우리의 수행도 이와 같아서 매일의 삶 속에서 부딪히고 비비면서 조금씩 벗겨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분노가 올라왔을 때 한번 알아차렸다면 그것이 허물벗기의 시작이 되며 매일 또 한 번 알아차린다면 허물은 그만큼 더 벗겨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수타니 파타가 첫 경으로 뱀의 비유를 놓은 이유입니다. 이 경전 전체의 여정은 허물을 벗는 것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허물을 벗는 것이 시작이었다면 그 다음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수탄이 파타 일장 세 번째 경 네 크기를 알려줍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것이 경의 이름이며 2 한 9절이 경전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무소란 코뿔소를 말합니다. 인도 코뿔소는 뿌리 하나뿐입니다. 두 개가 아니라 하나이며 그 하나의 뿔이 우직하게 앞을 향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모습을 들어 수행자의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코뿔소의 뿔처럼 오직 한 방향을 보고 흔들리지 않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뿌리 둘이면 이쪽과 저쪽 사이에서 갈라지게 되지만 판화의 기에 온 힘이 한곳으로 모입니다. 세상의 평판과 내 마음의 소리 이 두 갈래.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하나를 향해 가는 것 이것이 무소의 뿌리 상징하는 바입니다. 경전의 구절을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설하십니다. 서로 사귄 사람에게는 사랑과 그리움이 생기고 사랑과 그리움에는 괴로움이 따른다. 연정에서 우한이 생기는 것임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걸어가라. 사랑이 괴로움을 낳는다는 말씀은 처음 들으면 냉정하게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사랑인데 그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라니 받아들이기 어려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부정하시는 것은 사랑 자체가 아닙니다. 사랑에 매달려 상대를 붙잡으려 하는 마음 그것을 경계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되 붙잡지 않는 것과 사랑하면서 붙잡는 것은 전혀 다른 길입니다. 이어서 부처님께서는 대나무의 비유를 드십니다. 자식이나 아내에 대한 애착은 무성한 대나무 가지가 서로 엉킨 것과 같다. 축순이 다른 것에 달라붙지 않도록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걸어가라. 대나무 숲에 들어가 보신 분은 아실 것입니다. 대나무는 위로 자라면서 가지가 사방으로 뻗고 이웃한 대나무와 서로 엉켜붙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습니다. 한 대를 뽑으려 하면 옆의 것까지 따라 흔들리며 하나를 잡으면 10개가 함께 딸려 나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모습이 우리의 인간관계와 같다고 하십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되 그 사랑이 집착이 되면 대나무처럼 서로를 옥죄게 됩니다. 자녀를 사랑하면서도 자녀가 내 뜻대로 살기를 바라고 배우자를 아끼면서도 배우자가 내 곁을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이것이 대나무의 엉킴입니다. 사랑이 아니라 묶임이며 보살핌이 아니라 붙잡음이 되어 버렸습니다. 자녀가 장성하여 제 앞길을 찾아 떠났는데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잘 먹고 있는지 건강한지. 직장에서 힘들지는 않은지 이 걱정이 사랑에서 비롯된 것은 마주돼. 끊이지 않는다면 이미 대나무가 엉키기 시작한 것이라 보아야 합니다. 걱정의 끝에는 언제나 간섭이 따라오고 간섭은 다시 다툼을 부르게 되니 사랑이 괴로움으로 바뀌는 과정은 이렇게 조용히 시작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죽순을 말씀하십니다. 축수는 어린 대나무입니다. 죽순이 처음 땅을 뚫고 나올 때는 홀로 곱게 올라옵니다. 아직 다른 것에 달라붙지 않았기에 자유롭고 어디에도 엉키지 않았기에 굳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죽순처럼 살라고 하십니다. 관계를 끊으라는 뜻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도 엉키지 않는 마음을 갖추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평생의 가족을 위해 살아오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자녀를 키우느라 젊음을 보내셨고 살림을 꾸리느라 하고 싶은 것을 접으셨으며 한평생 누군가를 위해 사셨을 것입니다. 그 삶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그 사랑의 방식을 돌아보실 때가 되었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위해 살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 사람이 내 곁에 있어야만 내가 편한 건지 그 경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숲속에서 묶여 있지 않는 사슴이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다니듯이 지혜로운 이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걸어가라. 숲속의 사슴은 울타리가 없습니다. 어디든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으며 머물고 싶은 곳에 머물다가 떠나고 싶을 때 떠납니다. 누가 붙잡지도 않고 스스로도 어디에 메이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사슴의 모습을 수행자의 이상으로 삼으셨습니다. 이어서 부처님께서는 만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남을 해치려는 생각 없이 무엇이나 얻은 것으로 만족하고 온갖 고난을 이겨 두려움 없이 무서히 뿔처럼 혼자서 걸어가라. 무엇이나 얻은 것으로 만족한다는 이 말씀을 깊이 새겨 보십시오. 더 가지려 하지 않고 지금 주어진 것으로 충분하다고 느끼는 마음. 이것이 혼자서 갈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됩니다. 만족하지 못하면 끊임없이 밖을 향하게 되고 밖을 향하면 남에게 기대게 되며 기대는 순간 다시 엉키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슴이 숲을 떠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슴은 여전히 수반해 있습니다. 다른 사슴들과 함께 풀을 뜯고 물을 마시며 같은 숲에서 살아갑니다. 다만 묶여 있지 않을 뿐입니다. 함께하되 메이지 않고 가까이 하되 기대지 않는 것 이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혼자서 간다에 참뜻입니다. 동반자들 속에 끼면 쉬거나 가거나 서 있거나 여행하는 데도 항상 간섭을 받게 된다. 남이 원치 않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걸어가라. 이 구절에서 부처님께서는 간섭이라는 말을 쓰십니다. 함께 있으면 서로 영향을 주고받게 되고 상대의 기분에 따라 내 마음이 흔들리며 상대의 판단에 따라 내 결정이 바뀌게 됩니다. 이것이 간섭이며 이 간섭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혼자서 가는 길입니다. 경전에서는 또 이런 구절을 전하고 있습니다. 동반자들 속에 끼면 유희와 환락이 있고 자녀들에 대한 애정은 매우 크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은 싫지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걸어가라. 부처님께서는 함께하는 기쁨을 모르신 것이 아닙니다. 자녀에 대한 사랑이 크다는 것도 아시며 헤어짐이 싫다는 것도 아쉽니다. 다 아시면서 그럼에도 혼자서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이 경전의 무게입니다. 모르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다 하신 위에서 하신 말씀이기에 더욱 깊이 와닿게 됩니다. 이것은 사람을 멀리하라는 뜻이 아니라 사람 사이에 있으면서도 내 마음의 중심을 잃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누군가의 칭찬에 우쭐하지 않고 누군가의 비난에 무너지지 않으며 남의 시선에 끌려다니지 않는 삶입니다. 고뿔소의 뿔처럼 오직 한 방향 자기 안에 진실을 향해 걸어가는 수행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 가운데 하나는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입니다. 착한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 좋은 부모여야 한다는 아빠. 이 짐들은 대부분 밖에서 온 것이지. 내 안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혼자서 가라고 하신 것은 이밖에서 온 짐을 한 번 내려놓고 정말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경전의 마지막 부분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마무리하십니다. 자비와 고요와 동전과 혜탈과 기쁨을 적당한 때에 따라 익히고 모든 세상을 저버림 없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강문을 닫고 마음을 안정시켜 이치를 분명히 알며 자제하고 노력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탐욕과 혐오와 헤먴을 버리고 속박을 끊어 목숨을 잃어도 두려워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여기서 눈여겨 볼 대목은 모든 세상을 저버림 없이라는 구절입니다. 혼자서 가되 세상을 저버리지는 말라는 뜻이며 세상 안에 있으면서도 세상에 끌려다니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세상 안에 머물면서도 세상에 끌려가지 않는 것 이것이 무소의 뿌리 가리키는 길의 전체 모습입니다. 목숨을 잃어도 두려워하지 말라. 이 말씀은 죽음조차 나를 흔들 수 없는 마음의 자유를 갖추라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두려움인 죽음까지도 놓을 수 있다면 그보다 작은 것들은 저절로 놓이게 됩니다. 남의 시선이 두렵고 체면이 걱정되며 손해 보는 것이 아까운 마음. 이 모든 두려움은 죽음에 비하면 참으로 작은 것이기에 가장 큰 것을 놓으면 나머지는 따라서 내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 죽음이 가까이 느껴지실수록 이 구절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실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오히려 삶의 매 순간이 더 충만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간다는 것은 결국 내 안에 등불을 밝히는 일입니다. 밖에서 빌려온 빛이 아니라 내 안에서 피어나는 빛으로 길을 비추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전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도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자등명 법등명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가르침을 등불로 삼으라. 숱한 이 파타의 이 오래된 구절과 부처님의 마지막 유혼이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가장 오래된 가르침이 가장 마지막 가르침과 같다는 것은 그만큼 이 진리가 변하지 않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았습니다. 내 안에 답이 있다. 밖에서 찾지 마라. 스스로를 등불로 삼아라. 이것이 수타니 파타가 우리에게 전하는 코뿔소의 길입니다. 혼자서 간다는 것이 외로운 길이라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코뿔소는 외롭지 않습니다. 방향을 향해 오직 하게 나아가는 존재는 외로운 것이 아니라 고유한 것이며 고유한 가운데 참된 힘이 피어나게 됩니다. 지금까지 남을 위해 살아오신 분들이 이제 자기 안에 고요을 찾아 걸어가실 때입니다. 코뿔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그 길 위에서 부처님께서는 세 가지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에 뿔처럼 혼자서 가라. 혼자서 간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를 세 가지 비U로 보여주시는 대목입니다. 먼저 사자를 살펴보겠습니다. 사자는 숲속에서 온갖 소리를 듣되 그 어떤 소리에도 놀라지 않습니다. 그때 흔들리지 않으며 알대 반응하지 않는 것이 사자의 힘입니다. 소리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소리에 끌려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소리란 남이 하는 말이고 세상의 평가이며 칭찬과 비난이고 소문과 오해입니다. 이 모든 것이 귀로 들어와 마음을 흔드는 소리입니다.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비난을 들으면 마음이 무너지며 소문이 돌면 밤잠을 설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소리에 흔들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자처럼 들어도 놀라지 않는 마음을 갖추라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마음을 흔드는 소리는 더 다양해집니다. 건강에 대한 걱정스러운 이야기 경제가 어렵다는 뉴스 자녀 집안에서 들려오는 크고 작은 소식들 이런 것들이 밤마다 귀를 울립니다. 하나하나에 반응하며 마음을 뺏기면 하루가 끝날 때 남는 것은 탈진뿐입니다. 사자가 모든 소리를 듣되 하나도 따라가지 않듯이 우리도 소식을 듣되 그것에 끌려가지 않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놀라지 않는다는 것은 소리를 듣되 그 소리가 나의 중심을 옮기지 못하게 하는 것이며 밖에서 어떤 바람이 불어와도 안에 불꽃이 꺼지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사자가 백수의 왕인 까닭은 힘이 새서가 아니라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바람입니다. 바람은 그물에 걸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촘촘한 그물을 쳐도 바람은 빠져나가며 아무리 단단한 벽을 세워도 바람은 돌아갑니다. 붙잡을 수도 없고 가둘 수도 없으며 어디에도 메이지 않는 존재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자의 마음이 이 바람과 같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물이란 세상에 얽매임을 뜻합니다. 돈에 묶이고 관계에 묶이며 명예에 묶이고 습관에 묶여 사는 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한 가지를 풀면 다른 것이 엉키고 하나를 벗어나면 또 다른 것에 걸리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금을 자체를 끊으라 하시지 않습니다. 바람처럼 그물 사이를 지나가되 걸리지 않는 마음을 갖추라 하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연꽃입니다. 연꽃은 흙탕물 속에서 피어나되 흙탕물에 물들지 않습니다. 깨끗한 물에서 피는 것이 아니라 더러운 진흙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올라옵니다. 그런데도 꽃잎에는 흙 한 잔 못지 않으며 물방울조차 머물지 않고 굴러 떨어집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수행자의 경지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깨끗한 곳에 가야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연꽃은 깨끗한 곳에서 피지 않았습니다. 진흙이 깊을수록 더 크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냈으며 번뇌가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수행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세 가지 비유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사자는 소리가 있는 숲에서 살고 바람은 그물이 있는 세상을 지나가며 연꽃은 흙탕물 속에서 피어납니다. 세탁 깨끗한 곳으로 도망간 것이 아닙니다. 더러운 곳 시끄러운 곳 얽매인 곳 한가운데에서 흔들리지 않고 걸리지 않으며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수행자의 삶이며 숱한 입 파타가 가리키는 참된 도의 모습입니다. 숱한 이파 일장에는 이 가르침을 한층 더 깊이 펼치는 경이 있습니다. 자비경 메따 수따라 불리는 이 경전은 상자부 불교 국가에서 매일 독성되는 가장 중요한 경 가운데 하나입니다. 전에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비구들을 숲속으로 보내 수행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비구들이 숲의 나무 신들에게 위협을 받아 두려움에 떨며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다시 숲으로 돌아가되 이 자비의 가르침을 지니고 가라하셨습니다. 비구들이 자비경을 외우며 숲에 머물자 나무 신들이 자비심에 가마되어 더 이상 해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힘이 무력이 아니라 자비에 있었다는 것을 이 이야기가 보여줍니다. 자비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설하십니다. 일체 살아있는 것들이 행복하기를 눈에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먼 곳에 있든 가까운 곳에 있든 모든 생명이 행복하기를 한 존재도 빠짐없이 모든 생명의 행복을 비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나를 미워하는 사람까지 포함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까지 아우르는 자비입니다. 감정이 아니라 수행이며 좋아서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닦아서 이루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치 어머니가 외아들을 목숨을 걸어 보호하듯이 일체 살아 있는 것에 대하여 한량 없는 자비의 마음을 닦으라. 어머니가 외아들을 지키는 마음 이 비유를 들으시면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