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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좋은 우리절(I Love Budd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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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절주절잡담 스크랩 부산에 살면서 처음 다녀온 범어사
수일화 추천 0 조회 91 08.11.14 12:36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여행지
부산에 살면서 처음 다녀온 범어사
여행기간
2008. 1. 26
비용
20,000( 교통비 /식대/간식)
나의 평가
꽤 괜찮아요꽤 괜찮아요꽤 괜찮아요꽤 괜찮아요꽤 괜찮아요
나의 여행 스토리

1.일주문  2.천왕문   3.불이문,   4.보제루   5.종각   6.안심료   7.원응료  8.서지전  

9.휴휴정사  10.지장전  11.팔상전, 독성전, 나한전    12.대웅전  13.관음전  14.일료향 

15.비로전  16.미륵전  17금어선원    18.종각    19.설법전   20.성보박물관

범어사

 

대한불교 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선찰대본산 금정산 범어사(禪刹大本山 金井山梵魚寺)는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46번지, 금정산 기슭에 자리잡은 대사찰이며, 해인사, 통도사와 더불어 영남의 3대사찰로서 영남 불교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다.

범어사는 지금으로부터 약1,300년 전인 신라 문무왕 18년(678년)에 의상(義湘)대사가 해동의 화엄십찰 중의 하나로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창건설화에서 알 수 있듯이 유서깊은 호국사찰이기도 하다.

 
 
범어사는 오랜 역사와 더불어 수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였으며, 삼층석탑(보물 제250호), 대웅전(보물 제434호), 일주문(지방유형문화재 제2호), 당간지주(지방유형문화재 제15호), 석등(지방유형문화재 제16호)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한국의 명찰이다.
 

범어사의 유례

 

'범어사'라는 절 이름의 유래를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금정산은 동래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금정산 산마루에 세 길 정도 높이의 돌이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다. 그 둘레는 10여 척이며 깊이는 7촌쯤 된다. 물이 항상 가득 차 있어서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그 빛은 황금색이다.

세상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한 마리의 금빛 나는 물고기가 오색 구름을 타고 하늘(梵天)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고 하여 '금샘(金井)'이라는 산 이름과 '하늘 나라의 고기(梵魚)'
라고 하는 절 이름을 지었다."

스님은 화엄사상을 신라에 널리 펴기 위해 화엄종의 십대사찰을 지었으니, 태백산 부석사, 원주 비마라사, 가야산 해인사, 비슬산 옥천사, 금정산 범어사, 지리산 화엄사 그리고 공산 미리사, 가야협 보원사, 계룡산 갑사, 계람산 화산사, 모산 국신사, 부아산 청담사 등이었다.

지리산 화엄사, 공산 미리사, 가야협 보원사, 계룡산 갑사, 계람산 화산사, 모산 국신사, 부아산 청담사 등이었다.

 
 
의상스님의 저서로 {법성게}라고 불리우는 {화엄일승법계도}와 {법계품초기}, {대화엄십문간법관}, {괄진일승추요}, {천세구경}, {백화도량발원문} 등이 있다.

스님은 화엄사상을 신라에 널리 펴기 위해 화엄종의 십대사찰을 지었으니, 태백산 부석사, 원주 비마라사, 가야산 해인사, 비슬산 옥천사, 금정산 범어사, 지리산 화엄사 그리고 공산 미리사, 가야협 보원사, 계룡산 갑사, 계람산 화산사, 모산 국신사, 부아산 청담사 등이었다.

지리산 화엄사, 공산 미리사, 가야협 보원사, 계룡산 갑사, 계람산 화산사, 모산 국신사, 부아산 청담사 등이었다.

의상스님의 저서로 {법성게}라고 불리우는 {화엄일승법계도}와 {법계품초기}, {대화엄십문간법관}, {괄진일승추요}, {천세구경}, {백화도량발원문} 등이 있다.

신라 성덕왕 1년(702) 78세를 일기로 입적하시고, 해동 화엄종의 초조로서 수많은 도제가 있었는데 특히 오진(悟眞), 지통(智通), 표훈(表訓), 진정(眞定), 진장(眞藏), 도융(道融), 양원(良圓), 상원(相源), 능인(能仁), 의적(義寂) 등이 유명한 분으로 전해지고 있다.

범어사 당간지주

부산광역시유형문화재 제15호


함홍당(含弘堂) 아래의 송림 속에 있으며, 간석(竿石)과 기단부(基壇部)는 없어졌다. 지주는 좌우기둥 모두 가로 50cm, 세로 87cm에 높이가 4.5m이고, 양쪽 기둥의 간격은 79cm이다.
당간지주는 당간을 세우기 위하여 좌우에 당간이 지탱할 수 있게 세운 기둥이다. 당간은 당(幢)을 달아매는 장대이고 지주는 돌로 만들었는데, 당간은 돌이나 쇠, 나무로 만들었다. 당이란 절의 문 앞에 꽂는 기(旗)인데, 이것을 법회나 의식이 있을 때 걸기 위하여 당간과 당간지주로 제작되었는데, 통일신라시대부터 행하여졌다고 전해진다.
범어사에 있는 당간지주는 지금 지주만 남아 있는데, 지주의 상단 안쪽에는 직사각형의 간구(杆溝)가 있어 당간을 고정시켰다. 지주 위쪽 머리는 약간의 원호(圓弧)를 이루고, 지주에는 문양이 새겨져 있지 않다. 돌 다듬기가 고르지 않아 둔중한 느낌을 주는데 장식이 전혀 없어 검소하고 소박해 보인다.

관음전은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을 모셔놓은 법당이다. 관세음보살을 주존으로 봉안한 경우에는 원통전(圓通殿) 또는 원통보전(圓通寶殿)이라고 하고, 부불전의 성격을 띨 경우 관음전, 대비전(大悲殿)이라고 한다. 좌우보처로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을 모시기도 하며 후불탱화로는 관음탱화, 42수 천수관음도 등을 모신다.

관세음보살은 관자재(觀自在), 광세음(光世音), 관세자재(觀世自在), 관세음자재(觀世音自在)라고도 불리며, 줄여서 관음(觀音)보살이라고 한다. 또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갖추고 중생들의 괴로움을 전부 보시고 그들을 구원한다고 하는 대자대비(大慈大悲)를 근본 서원(誓願)으로 하는 천수천안관자재보살(千手千眼觀自在菩薩)을 말한다. 미타삼존(彌陀三尊)의 하나로 아미타불의 왼쪽 보처(補處)이다. 관세음(觀世音)이란 '세간(世間)의 음성을 관(觀)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관자재(觀自在)라 함은 '지혜로 관조(觀照)하므로 자재(自在)한 묘과(妙果)를 얻은'이란 뜻이다. 또 중생에게 온갖 두려움이 없는 무외심(無畏心)을 베푼다는 뜻으로 시무외자(施無畏者)라고 하고, 자비를 위주로 하므로 대비성자(大悲聖者)라하며, 세상을 구제하므로 구세대왕(救世大王)이라고도 한다. 이에 정토계통의 종파에서는 극락세계의 아미타 부처님과 구세대왕인 관세음보살에 의지하여 극락세계에 태어나 성불하기를 발원하며, 현세에서의 고통에서도 벗어나기를 희구한다. 비단 정토종이 아니더라도 관세음보살님은 정 많은 우리민족에게 가장 친근한 보살이 아닌가 한다.

관세음 보살이 세상을 교화함에는 중생의 근기(根機)에 맞추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이를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고 하며 33신(身)이 있다고 한다. 경(經)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나 유독 관세음 보살님은 보살이면서도 부처님의 몸으로도 나타나 교화의 방편을 설하시는 실로 불가사의한 신통력을 발하시는 자비의 보살이시다. 머리에 보관(寶冠)을 쓰고 보관의 정수리에 아미타불의 화현(化現)을 모시고 계시다. 왼손에는 연꽃, 감로수병을 들고 계신다. 왼손에 든 연꽃은 중생이 본래 갖춘 불성을 표시하고, 그 꽃이 핀 것은 불성이 드러나서 성불한다는 뜻을, 그 봉오리는 불성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장차 필 것을 나타낸다. 관세음 보살은 보통 6관음(성, 천수, 마두, 십일면, 준제, 여의륜)을 일컫는 경우가 많다. 그 중 성(聖)관음이 본신이고 다른 것은 보문시현의 변화신이다. 그 정토(淨土) 또는 계신 곳을 보타락가(Potalaka)라 하나 원래 {화엄경}에 남인도 마뢰구타국의 보타락가라 한 것이 처음이고, 중국에서는 절강성의 주산도(舟山島), 우리나라의 낙산사 홍련암을 보타락가라 한다.

범어사 관음전은 원래 대웅전 바로 왼쪽에 있었으나 지금의 자리에 있던 옛 금어선원(金魚禪院)을 옮기고 대웅전 오른쪽에 자리하게 되었다. 본래 관세음보살은 자비의 상징이고 일체 중생을 사랑으로 감싸주는 보살이므로 반대쪽의 지장전(地藏殿)과 함께 대웅전을 협시하는 식으로 세워진 것이다.

범어사의 관음전은 사중의 유일한 청기와 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화려하고도 우아한 단청으로 꾸민 건물이다. 청기와 단청에는 특이한 조각을 용마루와 귀마루 네 곳에 두 개씩 전부 열 개를 붙였으며 내부에는 단아한 관음보살상과 동자상을 조화롭게 배치한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관음전의 초장 연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대웅전과 함께 광해군 5년(1613)에 묘전 화상이 중창하였으며 1721년에 흥보 스님이 다시 중건하였다고 한다. 주심포(柱心包)를 짜올린 소규모의 건물이면서도 장식과 초각이 과다할 정도이며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말기적 양식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렇게 오래 전에 건립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1613년의 건물이 아닌 것은 물론이고 1721년의 중건 뒤에 크게 개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평면은 정면 다섯 칸, 측면 세 칸의 규모에 도리통은 주칸이 동일하며 전면은 모두 문얼굴을 열고 각 칸에 3분합의 빗살문을, 양측면 첫째 칸에 각기 외짝 빗살문을 달았다. 지붕은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얹고 측면으로 뺄목이 짧은 탓에 풍판을 달았으며 내부에 관음상(觀音像)과 장경(藏經)을 봉안하였다. 주심에만 포작(包作)한 주심포식이지만 1출목을 짧게 내어서 행공 첨차를 걸고 그 위에 장혀와 보뺄목을 결구하여 외목도리를 받쳤다. 덤벙 초석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연꽃이 달린 파련 초각의 익공(翼工)을 창방과 교차시켜서 주두를 받치고 다시 그 위에 파련 초각한 익공과 봉두(鳳頭)를 초각한 보뺄목을 받게 하였다. 둘째, 셋째, 넷째 기둥에는 용두(龍頭)를 초각하여 익공을 받게 하였다. 이러한 가구 수법은 다른 건물에서도 확인되는데 특히 팔상, 독성, 나한 삼전의 경우와 거의 흡사하다. 따라서 두 건물이 같은 시기에 같은 장인의 손에 의해서 지어졌거나 본떠서 지은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범어사 자료에서 -

관음전은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을 모셔놓은 법당이다. 관세음보살을 주존으로 봉안한 경우에는 원통전(圓通殿) 또는 원통보전(圓通寶殿)이라고 하고, 부불전의 성격을 띨 경우 관음전, 대비전(大悲殿)이라고 한다. 좌우보처로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을 모시기도 하며 후불탱화로는 관음탱화, 42수 천수관음도 등을 모신다.

관세음보살은 관자재(觀自在), 광세음(光世音), 관세자재(觀世自在), 관세음자재(觀世音自在)라고도 불리며, 줄여서 관음(觀音)보살이라고 한다. 또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갖추고 중생들의 괴로움을 전부 보시고 그들을 구원한다고 하는 대자대비(大慈大悲)를 근본 서원(誓願)으로 하는 천수천안관자재보살(千手千眼觀自在菩薩)을 말한다. 미타삼존(彌陀三尊)의 하나로 아미타불의 왼쪽 보처(補處)이다. 관세음(觀世音)이란 '세간(世間)의 음성을 관(觀)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관자재(觀自在)라 함은 '지혜로 관조(觀照)하므로 자재(自在)한 묘과(妙果)를 얻은'이란 뜻이다. 또 중생에게 온갖 두려움이 없는 무외심(無畏心)을 베푼다는 뜻으로 시무외자(施無畏者)라고 하고, 자비를 위주로 하므로 대비성자(大悲聖者)라하며, 세상을 구제하므로 구세대왕(救世大王)이라고도 한다. 이에 정토계통의 종파에서는 극락세계의 아미타 부처님과 구세대왕인 관세음보살에 의지하여 극락세계에 태어나 성불하기를 발원하며, 현세에서의 고통에서도 벗어나기를 희구한다. 비단 정토종이 아니더라도 관세음보살님은 정 많은 우리민족에게 가장 친근한 보살이 아닌가 한다.

관세음 보살이 세상을 교화함에는 중생의 근기(根機)에 맞추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이를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고 하며 33신(身)이 있다고 한다. 경(經)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나 유독 관세음 보살님은 보살이면서도 부처님의 몸으로도 나타나 교화의 방편을 설하시는 실로 불가사의한 신통력을 발하시는 자비의 보살이시다. 머리에 보관(寶冠)을 쓰고 보관의 정수리에 아미타불의 화현(化現)을 모시고 계시다. 왼손에는 연꽃, 감로수병을 들고 계신다. 왼손에 든 연꽃은 중생이 본래 갖춘 불성을 표시하고, 그 꽃이 핀 것은 불성이 드러나서 성불한다는 뜻을, 그 봉오리는 불성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장차 필 것을 나타낸다. 관세음 보살은 보통 6관음(성, 천수, 마두, 십일면, 준제, 여의륜)을 일컫는 경우가 많다. 그 중 성(聖)관음이 본신이고 다른 것은 보문시현의 변화신이다. 그 정토(淨土) 또는 계신 곳을 보타락가(Potalaka)라 하나 원래 {화엄경}에 남인도 마뢰구타국의 보타락가라 한 것이 처음이고, 중국에서는 절강성의 주산도(舟山島), 우리나라의 낙산사 홍련암을 보타락가라 한다.

범어사 관음전은 원래 대웅전 바로 왼쪽에 있었으나 지금의 자리에 있던 옛 금어선원(金魚禪院)을 옮기고 대웅전 오른쪽에 자리하게 되었다. 본래 관세음보살은 자비의 상징이고 일체 중생을 사랑으로 감싸주는 보살이므로 반대쪽의 지장전(地藏殿)과 함께 대웅전을 협시하는 식으로 세워진 것이다.

범어사의 관음전은 사중의 유일한 청기와 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화려하고도 우아한 단청으로 꾸민 건물이다. 청기와 단청에는 특이한 조각을 용마루와 귀마루 네 곳에 두 개씩 전부 열 개를 붙였으며 내부에는 단아한 관음보살상과 동자상을 조화롭게 배치한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관음전의 초장 연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대웅전과 함께 광해군 5년(1613)에 묘전 화상이 중창하였으며 1721년에 흥보 스님이 다시 중건하였다고 한다. 주심포(柱心包)를 짜올린 소규모의 건물이면서도 장식과 초각이 과다할 정도이며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말기적 양식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렇게 오래 전에 건립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1613년의 건물이 아닌 것은 물론이고 1721년의 중건 뒤에 크게 개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평면은 정면 다섯 칸, 측면 세 칸의 규모에 도리통은 주칸이 동일하며 전면은 모두 문얼굴을 열고 각 칸에 3분합의 빗살문을, 양측면 첫째 칸에 각기 외짝 빗살문을 달았다. 지붕은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얹고 측면으로 뺄목이 짧은 탓에 풍판을 달았으며 내부에 관음상(觀音像)과 장경(藏經)을 봉안하였다. 주심에만 포작(包作)한 주심포식이지만 1출목을 짧게 내어서 행공 첨차를 걸고 그 위에 장혀와 보뺄목을 결구하여 외목도리를 받쳤다. 덤벙 초석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연꽃이 달린 파련 초각의 익공(翼工)을 창방과 교차시켜서 주두를 받치고 다시 그 위에 파련 초각한 익공과 봉두(鳳頭)를 초각한 보뺄목을 받게 하였다. 둘째, 셋째, 넷째 기둥에는 용두(龍頭)를 초각하여 익공을 받게 하였다. 이러한 가구 수법은 다른 건물에서도 확인되는데 특히 팔상, 독성, 나한 삼전의 경우와 거의 흡사하다. 따라서 두 건물이 같은 시기에 같은 장인의 손에 의해서 지어졌거나 본떠서 지은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범어사 자료에서 -

 

관음전은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을 모셔놓은 법당이다. 관세음보살을 주존으로 봉안한 경우에는 원통전(圓通殿) 또는 원통보전(圓通寶殿)이라고 하고, 부불전의 성격을 띨 경우 관음전, 대비전(大悲殿)이라고 한다. 좌우보처로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을 모시기도 하며 후불탱화로는 관음탱화, 42수 천수관음도 등을 모신다.

관세음보살은 관자재(觀自在), 광세음(光世音), 관세자재(觀世自在), 관세음자재(觀世音自在)라고도 불리며, 줄여서 관음(觀音)보살이라고 한다. 또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갖추고 중생들의 괴로움을 전부 보시고 그들을 구원한다고 하는 대자대비(大慈大悲)를 근본 서원(誓願)으로 하는 천수천안관자재보살(千手千眼觀自在菩薩)을 말한다. 미타삼존(彌陀三尊)의 하나로 아미타불의 왼쪽 보처(補處)이다. 관세음(觀世音)이란 '세간(世間)의 음성을 관(觀)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관자재(觀自在)라 함은 '지혜로 관조(觀照)하므로 자재(自在)한 묘과(妙果)를 얻은'이란 뜻이다. 또 중생에게 온갖 두려움이 없는 무외심(無畏心)을 베푼다는 뜻으로 시무외자(施無畏者)라고 하고, 자비를 위주로 하므로 대비성자(大悲聖者)라하며, 세상을 구제하므로 구세대왕(救世大王)이라고도 한다. 이에 정토계통의 종파에서는 극락세계의 아미타 부처님과 구세대왕인 관세음보살에 의지하여 극락세계에 태어나 성불하기를 발원하며, 현세에서의 고통에서도 벗어나기를 희구한다. 비단 정토종이 아니더라도 관세음보살님은 정 많은 우리민족에게 가장 친근한 보살이 아닌가 한다.

관세음 보살이 세상을 교화함에는 중생의 근기(根機)에 맞추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이를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고 하며 33신(身)이 있다고 한다. 경(經)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나 유독 관세음 보살님은 보살이면서도 부처님의 몸으로도 나타나 교화의 방편을 설하시는 실로 불가사의한 신통력을 발하시는 자비의 보살이시다. 머리에 보관(寶冠)을 쓰고 보관의 정수리에 아미타불의 화현(化現)을 모시고 계시다. 왼손에는 연꽃, 감로수병을 들고 계신다. 왼손에 든 연꽃은 중생이 본래 갖춘 불성을 표시하고, 그 꽃이 핀 것은 불성이 드러나서 성불한다는 뜻을, 그 봉오리는 불성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장차 필 것을 나타낸다. 관세음 보살은 보통 6관음(성, 천수, 마두, 십일면, 준제, 여의륜)을 일컫는 경우가 많다. 그 중 성(聖)관음이 본신이고 다른 것은 보문시현의 변화신이다. 그 정토(淨土) 또는 계신 곳을 보타락가(Potalaka)라 하나 원래 {화엄경}에 남인도 마뢰구타국의 보타락가라 한 것이 처음이고, 중국에서는 절강성의 주산도(舟山島), 우리나라의 낙산사 홍련암을 보타락가라 한다.

범어사 관음전은 원래 대웅전 바로 왼쪽에 있었으나 지금의 자리에 있던 옛 금어선원(金魚禪院)을 옮기고 대웅전 오른쪽에 자리하게 되었다. 본래 관세음보살은 자비의 상징이고 일체 중생을 사랑으로 감싸주는 보살이므로 반대쪽의 지장전(地藏殿)과 함께 대웅전을 협시하는 식으로 세워진 것이다.

범어사의 관음전은 사중의 유일한 청기와 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화려하고도 우아한 단청으로 꾸민 건물이다. 청기와 단청에는 특이한 조각을 용마루와 귀마루 네 곳에 두 개씩 전부 열 개를 붙였으며 내부에는 단아한 관음보살상과 동자상을 조화롭게 배치한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관음전의 초장 연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대웅전과 함께 광해군 5년(1613)에 묘전 화상이 중창하였으며 1721년에 흥보 스님이 다시 중건하였다고 한다. 주심포(柱心包)를 짜올린 소규모의 건물이면서도 장식과 초각이 과다할 정도이며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말기적 양식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렇게 오래 전에 건립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1613년의 건물이 아닌 것은 물론이고 1721년의 중건 뒤에 크게 개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평면은 정면 다섯 칸, 측면 세 칸의 규모에 도리통은 주칸이 동일하며 전면은 모두 문얼굴을 열고 각 칸에 3분합의 빗살문을, 양측면 첫째 칸에 각기 외짝 빗살문을 달았다. 지붕은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얹고 측면으로 뺄목이 짧은 탓에 풍판을 달았으며 내부에 관음상(觀音像)과 장경(藏經)을 봉안하였다. 주심에만 포작(包作)한 주심포식이지만 1출목을 짧게 내어서 행공 첨차를 걸고 그 위에 장혀와 보뺄목을 결구하여 외목도리를 받쳤다. 덤벙 초석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연꽃이 달린 파련 초각의 익공(翼工)을 창방과 교차시켜서 주두를 받치고 다시 그 위에 파련 초각한 익공과 봉두(鳳頭)를 초각한 보뺄목을 받게 하였다. 둘째, 셋째, 넷째 기둥에는 용두(龍頭)를 초각하여 익공을 받게 하였다. 이러한 가구 수법은 다른 건물에서도 확인되는데 특히 팔상, 독성, 나한 삼전의 경우와 거의 흡사하다. 따라서 두 건물이 같은 시기에 같은 장인의 손에 의해서 지어졌거나 본떠서 지은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범어사 자료에서 -

청련암 관음보살을 수호하는 12지상이 일렬로 늘어서서 호위를 하고 있다.

범어사 청련암

범어사에서 2시 방향으로 5분 정도 올라가면 갈 수 있는 청련암은 범어사 내의 11개 암자 중 하나이다.

이곳은 3.1운동 당시 부산지역의 본거지였다고 하며, 현재는 양익 큰스님께서 주석하고 계시는 곳으로 불문에서 전해지는 금강연영관이라는 무예를 수련하는 곳으로 이 금강영관의 연마는 불문을 수행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외부에 수행 모습이나 청련암이 알려지는 것조차 꺼리는 것이 이곳에 계신 분들의 특징이다.

특히 청련암에 있는 지장원은 지옥중생의 구제를 서원하는 지장보살이 계신 이상세계를 형상화한 곳으로 지장보살을 호위하는 수 많은 석상들이  사발을 둘러싸고 있으며, 이래쪽 계단 입구에 해태 두마리가 지키고 있어 그 규모의 놀라움과 함께 청련암의 명소가 되어 있다.

정면에서 바라본 관음의 모습  다른 불상들은 동상이었는데 정중앙의 관음의 모습만 금불로 되어있다.
뒷편에서 바라본 관음의 모습. 뒷편에도 각종 동상들이 관음의 주변에서 민생들의 고통을 보살펴준다.

미륵보살상

역시 동자불은 참으로 귀여운 모습으로 ~   그 귀여운 모습에 잠시 발걸음을 멈춰본다. 

금강역사상의 모습

비로자나 부처상

청련암 대웅전의 비로자나 부처

범어사의 창건설화
옛 기록에 의한 창건의 연기(緣起)는 이러하다.
 
 일찍이 바다 동쪽 왜인(矮人)들이 10만의 병선(兵船)을 거느리고 동쪽에 이르러 신라를 침략하고자 했다.

 대왕이 근심과 걱정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문득 꿈속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외쳐 부르는 것이었다. 신인이 말하기를,

"정성스러운 대왕이시여, 근심하지 마십시오. 태백산 산중에 의상이라고 하는 큰스님이 계시는데 진실로 금산보개여래(金山寶蓋如來)의 제7후신(第七後身)입니다. 항상 성스러운 대중 1천명, 범부 대중 1천명과 신중(神衆) 1천명, 모두 3천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화엄의리(華嚴義理) 법문을 연설하며, 화엄신중과 사십법체(四十法體) 그리고 여러 신과 천왕이 항상 떠나지 않고 수행합니다.

또 동쪽 해변에 금정산이 있고 그 산정에 높이 50여 척이나 되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그 바위 위에 우물이 있고 그 우물은 항상 금빛이며 사시사철 언제나 가득 차서 마르지 않고 그 우물에는 범천으로부터 오색 구름을 타고 온 금빛 고기가 헤엄치며 놀고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의상스님을 맞이하여 함께 그 산의 금정암 아래로 가셔서 칠일 칠야 동안 화엄 신중을 독송하면 그 정성에 따라 미륵여래가 금색신(金色身)으로 화현(化現)하고 사방의 천왕이 각각 병기를 가지고 몸을 나타내어 보현보살, 문수보살, 향화동자, 40법체(四十法體)등 여러 신과 천왕들을 거느리고 동해에 가서 제압하여 왜병들이 자연히 물러갈 것입니다.

그러나 후대에 한 법사가 계속해서 이어가지 않는다면 왜적들이 사방에서 일어나 병사가 바위에서 또한 울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 화엄 정진을 한다면 자손이 끊어지지 않고 전쟁이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

라 하고 신인은 곧 사라졌다.

왕은 놀라 깨어났고, 아침이 되자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꿈 이야기를 했다.

이에 사신을 보내어 의상스님을 맞아오게 하였다. 왕은 의상스님과 함께 친히 금정산으로 가서 칠일칠야를 일심으로 독경했다. 이에 땅이 크게 진동하면서 홀연히 여러 부처님과 천왕과 신중 그리고 문수동자 등이 각각 현신(現身)하여 모두 병기를 가지고서 동해에 가서 왜적들을 토벌하니 혹은 활을 쏘고 혹은 창을 휘두르며 혹은 모래와 돌이 비 오듯이 휘날렸다.

또한 바람을 주관하는 신은 부채로 흑풍(黑風)을 일으키니 병화(兵火)가 하늘에 넘치고 파도가 땅을 뒤흔들었다. 그러자 왜적들의 배는 서로 공격하여 모든 병사가 빠져죽고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 전장에서 대승을 거두고 돌아온 왕은 크게 기뻐하여 드디어 의상스님을 예공대사(銳公大師)로 봉하고 금정산 아래에 큰절을 세웠으니 이것이 범어사를 창건한 유래이다. 

이에 사신을 보내어 의상스님을 맞아오게 하였다. 왕은 의상스님과 함께 친히 금정산으로 가서 칠일칠야를 일심으로 독경했다. 이에 땅이 크게 진동하면서 홀연히 여러 부처님과 천왕과 신중 그리고 문수동자 등이 각각 현신(現身)하여 모두 병기를 가지고서 동해에 가서 왜적들을 토벌하니 혹은 활을 쏘고 혹은 창을 휘두르며 혹은 모래와 돌이 비 오듯이 휘날렸다.

또한 바람을 주관하는 신은 부채로 흑풍(黑風)을 일으키니 병화(兵火)가 하늘에 넘치고 파도가 땅을 뒤흔들었다. 그러자 왜적들의 배는 서로 공격하여 모든 병사가 빠져죽고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 전장에서 대승을 거두고 돌아온 왕은 크게 기뻐하여 드디어 의상스님을 예공대사(銳公大師)로 봉하고 금정산 아래에 큰절을 세웠으니 이것이 범어사를 창건한 유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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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11.14 23:56

    첫댓글 전에는 무얼 봤던가요..ㅡ.ㅜ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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