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범어를 발견하고 한글에 눈뜨다/성철큰스님 평전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
|
▲ 성철 스님은 평소 신도들에게 3000배와 함께 능엄주 독송을 생활화할 것을 당부했다. 사진은 성철 스님이 능엄주를 직접 한문·범어·한글로 풀어쓴 것.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
“성철은 복천암에서 범어를 새롭게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성철은 한글이 가장 정확하게 범어를 옮길 수 있는 소리글임을 대견하게 생각했다. 천제는 성철이 범어를 원음으로 옮겨서 진언을 제대로 외우도록 가르친 것은 하나의 ‘사건’이라며 스승을 기렸다.”
“신미대사가 당시에 범어에 능통했고, 한글 창제에 관여했다고 말씀하셨다. 범어를 모태로 해서 생긴 소리글이 바로 한글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큰스님은 범어를 익혀 능엄신주를 비롯한 선문에서의 진언과 다라니를 직접 음역하여 원음에 가깝게 독송하도록 하셨다. 범어를 모태로 하여 만든 한글로 음역하는 것이 가장 원음에 가깝다고 하시며, 이중 삼중 한문으로 간접 음역한 것을 그대로 입에 올리면 되겠느냐고 하셨다. 반야바라밀다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는 ‘가테가테 파라가테 파라삼가테 보디 스바하’로 소리 내야 옳다고 하셨다. 노장이 60년 전에 정리해서 지적한 부분이다. 놀랍지 않은가.”
맏상좌 천제의 증언이다. 성철은 복천암에 머물 때 한글에 대해서 새롭게 눈이 떴다. 또 한글 창제의 숨은 주역으로 알려진 신미대사(1403?~1480?)와 범어에 대해서 깊이 들여다보았다고 보여진다. 도대체 신미대사는 누구이며 왜 그가 한글을 창제했다고 하는가.
‘복천사지(福泉寺誌)’는 ‘세종실록’ ‘세조어제 원문’ ‘영산 김씨 세보’ ‘복천보장’ ‘상원사 중수 권선문’, 또 신미가 지은 문헌을 통해 ‘신미대사가 한글창제의 주역’이라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 평생 신미대사 행적을 추적해온 복천사 회주 월성 스님의 해석 등을 곁들여서 ‘신미와 한글’에 대해서 살펴보자.
신미대사는 본명이 수성(守省)이고 본관은 영산(永山)이다. 조선시대 문장가 김수온의 친형이다. 10세 때 사서삼경을 독파했고, 출가 후에는 대장경에 심취했던 이른바 학승이었다. 한문경전이 마음에 차지 않아 범어와 티베트어를 공부하여 40세 즈음에는 막힘이 없었다고 한다.
범어(梵語)는 고대 인도어이다. 신미는 한자로 번역된 경전을 보다가 범어 원전이 보고 싶었을 것이다. 한자는 범어를 옮기기에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한자가 뜻글자였기에 소리를 제대로 표기할 수 없음은 당연했다. 만일 신미가 새 글자를 만들고자 했다면 부처님 말씀을 백성들이 쉽게 전해들을 수 있게 하고, 또 범어를 가장 원음에 가깝게 옮기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에는 우리 고유의 말은 한자의 음을 빌려 표기하는 이두(吏讀)를 사용하여 옮겨 적는 형편이었다.
일부에서는 신미가 범어의 50개 자모음 중에서 28개를 취하여 우리 소리를 글로 옮겼다고 믿는다. 최근에 발견된 ‘원각선종석보(圓覺禪宗釋譜)’ 1권(전5권)의 사본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주장한다. 사실이라면 이 책은 세종이 한글 창제를 명했던 시기(1443년, 세종 25)보다 5년이나 먼저 세상에 나온 것이다. 훈민정음처럼 초성과 중성, 종성을 활용함이 훗날의 한글 체계와 같으니 한글의 역사를 새로 써야 할 것이다.
대제학 정인지는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에서 ‘그 연원과 정밀한 뜻이 묘연해서 신 등은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고 밝힌 것은 당시 집현전 학자들의 역할이 별로 없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정인지는 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전하께서 정음 스물여덟 자를 창제하시고, 간략하게 보기와 뜻을 들어 보이시면서 이름하여 훈민정음이라 하셨다. 꼴을 본뜨되 글자가 옛날의 전자와 비슷하다.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 象形而字倣古篆)’
이로 미루어 반포 이전에 훈민정음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누군가 이미 새 글을 연구하여 내놓았으니 그 주역이 누구인가. 바로 ‘원각선종석보’를 펴낸 신미라는 것이다. 여기서 ‘본뜬 글자가 옛날의 전자[古篆]’라 함에는 여러 기원설이 있다. 범자 및 티베트어 기원설, 몽골 파스파문자 기원설, 고대문자기원설, 태극사상기원설 등이 그것이다. 그중 범자에서 따왔다는 설은 가장 오래도록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신미대사와 동시대 인물인 성현이 쓴 ‘용재총화’에도 ‘한글을 범자에 의지해 만들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수광도 ‘지봉유설’에서 ‘우리나라 언서(諺書)는 글자 모양이 전적으로 범자를 본떴다’고 했다. 황윤석 또한 ‘운학본원’에서 훈민정음의 연원은 대저 여기에 근본하였으되, 결국 범자의 범위 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당시에 이미 한글은 집현전 학자들의 창의적인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글을 아는 사람은 거의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렇게 볼 때 세종은 이미 새 글이 존재함을 확인하고 그것이 백성의 글, 즉 ‘훈민정음’이 될 수 있는지 여부를 확인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런 후에 세종은 집현전에 새 글 연구를 지시했다는 얘기이다. 또 일각에서는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에게는 별로 기대를 하지 않고 안평과 수양대군, 그리고 신미를 주축으로 학조와 학열대사 등 승려들에게 따로 새 글을 연구하라 일렀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요즘 연구실 격인 창제 공간을 따로 마련해 주었으며 그곳은 바로 경기도에 있는 대자암, 현등사, 진관사, 흥천사, 예빈사, 회암사 등 사찰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미의 업적은 왜 정사에는 나오지 않는 것일까. 이는 조선이 억불숭유의 시대임을 감안하면 곧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교사회에서 한글이 승려들의 작품이라 밝히면 결코 이를 반포할 수도, 유통시킬 수 없음은 분명해 보인다. 오히려 공적을 감춰 주는 것이 유생들로부터 신미를 보호하는 일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글이 창제되고 불과 몇 달 후에 최만리 등 집현전 유학자들이 한글 반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만일 그들이 주도적으로 만들었다면 반대할 리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또 한글로 번역하는 국책 사업이 불교경전이라는 것도 주목해 봐야 한다고 했다. 왜 가장 먼저 ‘석보상절’ ‘능엄경언해’ ‘월인천강지곡’ 등을 지었을까. 유교국가에서 쉬운 글을 만들었으면 당연히 ‘논어’ ‘맹자’와 같은 유교경전들을 번역해야지 왜 하필 배척 대상이었던 불경을 번역했겠느냐는 것이다.
또 세종은 인품과 학덕이 뛰어난 인재를 좋아했다. 이러한 문화군주의 성향에 신미는 딱 맞는 승려였다. 세종이 깊은 산 속 작은 절인 복천암에 불상을 조성하고 원찰로 삼음은 신미의 공적과 법력이 우리 생각보다 훨씬 컸기 때문일 것이다. 또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라는 법호를 아들 문종에게 내리라 유언한 것으로 봐서도 세종의 대사에 대한 경외감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이롭게 했다[祐國利世]’는 문구로 볼 때 신미가 범상치 않은 일을 했음은 확실하고, 비상한 시국이 아님에도 승려에게 이런 법호를 내림은 ‘나라 글을 만든’ 큰 일이 아니면 상상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한글 창제에 신미대사가 관여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단지 그 역할이 무엇인지는 앞으로 규명해 나가야 할 것이다. 월성 스님은 신미가 한글 창제의 주역이라는 설을 세상 사람들이 좀처럼 진지하게 추적하지 않는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했다. 스님은 우리가 쏟아낸 말과 글은 우주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설하는 노승의 모국어도 저 우주 어딘가에 저장될 것이다. 우리네 마음과 뜻을 실어 나른 모국어 한글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경배했는가. 살펴볼수록 새삼 한글이 위대했다.
성철은 복천암에서 범어를 새롭게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한 철만을 보냈지만 이후 범어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성철은 제자 천제가 범어에 능통하길 바랐다. 그래서 영어공부를 시켰다. 당시에는 외국어를 깨치지 않으면 범어를 습득할 길이 없었다. 제자가 범어 원전을 제대로 판독하고, 또 진언이나 다라니를 원음으로 송(誦)하여 그 공덕이 흩어지거나 감소하지 않도록 이끌기를 바랐다. 천제는 스승의 뜻에 따라 범어를 익혔다. 또 범어 연구와 관련된 뒷바라지를 도맡아 했다. 성철은 한글이 가장 정확하게 범어를 옮길 수 있는 소리글임을 대견하게 생각했다. 천제는 성철이 범어를 원음으로 옮겨서 진언을 제대로 외우도록 가르친 것은 하나의 ‘사건’이라며 스승을 기렸다.
“범어는 문자의 어머니이다. 아라비아 숫자도 범어에서 나왔다. 옛 글자이지만 결코 묵은 글자는 아니다. 이걸 노장께서 아신 것이다. 범어를 깨친 선견지명이 놀라울 따름이다.”
훗날 성철은 조계종단 종정으로 있으면서 불교사에 처음으로 한글법어를 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같은 법어는 아직도 많은 이들의 가슴을 적시고 있다. 그것은 복천암의 정진과 또 한글의 이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자에 갇힌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글로 풀어서 전함이니 이는 목마른 자를 ‘복천’으로 안내하는 것 아니겠는가.
|
첫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