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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 17,22-24
22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손수 높은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을 따서 심으리라.
가장 높은 가지들에서 연한 것을 하나 꺾어 내가 손수 높고 우뚝한 산 위에 심으리라.
23 이스라엘의 드높은 산 위에 그것을 심어 놓으면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훌륭한 향백나무가 되리라.
온갖 새들이 그 아래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이리라.
24 그제야 들의 모든 나무가 알게 되리라.
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는 높이며 푸른 나무는 시들게 하고 시든 나무는 무성하게 하는 이가 나 주님임을 알게 되리라.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 5,6-10
형제 여러분,
6 우리가 이 몸 안에 사는 동안에는 주님에게서 떠나 살고 있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언제나 확신에 차 있습니다.
7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8 우리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몸을 떠나 주님 곁에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9 그러므로 함께 살든지 떠나 살든지 우리는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를 씁니다.
10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서야 합니다.
그래서 저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 몸으로 한 일에 따라 갚음을 받게 됩니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4,26-34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6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27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1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32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34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사랑이 불타오르는 6월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저 높은 곳으로 부터 품고 온 아버지의 나라,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 나라’가 선사됩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우리에게 선사된 '하느님 나라'입니다.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손수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을 따서 심고, 그 나무가 무성하게 하는 이가 당신 주님이심을 알게 하리라.”(에제 17,22-24 참조)고 새로운 나라의 희망을 알려줍니다.
이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비유로 말씀하신 ‘겨자씨’를 떠올려줍니다.
제2독서에서 "함께 살든지 떠나 살든지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를 씁니다."(2코린 5,9)라고 하느님 나라를 품고 살아가는 이들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복음은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땅에 씨를 뿌려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마르 4,27)
그렇습니다.
먼저, ‘씨’는 우리에게 선사됩니다.
선물로 주어집니다.
곧 주시는 분에 의해 건네져 옵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는 ‘가는 나라’, 혹은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라 이미 건네 ‘온’ 나라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느님 나라의 이 ‘씨앗’은 이미 우리 안에, 우리들 가운데 들어와 있고, 스스로 줄기를 뻗고 싹을 틔우며, 이삭을 맺고 낟알을 영근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놀랍고 신비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매 순간 하느님의 힘이 작용하여,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이미 우리 안에, 우리 가운데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알아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곧 눈이 맑아져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믿음으로 체험하는 일입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상호 침투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왔지만,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곧 체험하지 않으면 알아보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는 ‘들어오는’ 나라요, 동시에 ‘들어가는’ 나라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서 성장하고 자라며, 우리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 이삭을 맺고 낱알을 영글어 갑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도 하느님 나라가 퍼져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막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위대한 은총이 우리 안에서 계속 자라도록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마르 4,31)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가 거창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와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작은 모습’으로 와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이미 우리 안에 심어진 씨앗입니다.
‘겨자씨’는 비록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나서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이게 됩니다.
마치 십자나무처럼 모든 인류를 끌어안은 큰 나무가 됩니다.
십자나무에 인간이 거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듯, 그 그늘에 짐 진 이들을 불러 안식을 주듯, 자라게 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작은이의 모습으로 하느님 나라를 품고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이 앞에, 작은이로 오실 수밖에 없는 까닭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작아져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작은이로 계신 그 씨앗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도 작은 ‘겨자씨’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공동체에서, 비록 작은 ‘겨자씨’지만, 결코 작은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 속에서 썩기만 하면 말입니다.
‘씨가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르게’ 그렇게 썩는다면 말입니다.
그들 속으로 들어갈 만큼, 작아지고 낮아지면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 나라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요, 그 나라를 체험하게 되는 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나라의 이 놀라운 신비에 순응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마르 4,31)
주님!
당신은 겨자씨처럼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사랑하는 이 위에 군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낮추어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방법이고 사랑의 길인 까닭입니다.
오늘 제가 형제들 앞에서 작아지게 하소서!
십자나무에 인류의 거처를 마련하듯, 형제들의 거처가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작은 씨가 큰 나무 되게 하려면>
오늘 복음은 겨자씨 비유인데,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게 하려면, 첫째는 씨를 뿌려야 합니다.
씨를 뿌려도 싹이 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 되는데 씨를 아예 뿌리지 않으면 애초에 아무 것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씨 뿌리는 인간의 행위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고, 이것이 있어야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도 유효해지겠지요.
이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곧 인간이 할 바를 다한 다음 하늘의 뜻을 기다리라는 말 과도 통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씨를 뿌리지 않는다면 왜 뿌리지 않습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가능성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씨를 뿌려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는 불신인데, 이는 가능성 곧 희망에 대한 불신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의 신망애 삼덕중에 믿음과 희망과 관련 있고, 희망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은 애덕이 없는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가능성을 덜 믿고 포기도 빨리하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빵 다섯 개와 두 마리의 고기가 수천 명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생각을 우리가 하기 쉬운데, 이것은 그것을 가지고 감사기도를 드리는 주님과 너무도 다르지요.
주님은 이것이라도 있는 것에 감사하고, 이것으로 수천, 수만 배 불려주실 하느님께 미리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실 수 있는 아버지의 능력과 그렇게 해주실 아버지의 사랑을 믿으신 겁니다.
이런 주님과 달리 믿음이 없거나 부족한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와 마찬가지로 능력도 사랑도 없다고 믿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불신도 믿는 것인데, 다만 하느님도 우리와 같을 거라고 믿는 것이고 그래서 아무리 하느님이어도 불가능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사랑이 없는 사람이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없고, 하느님의 능력과 사랑에 대한 믿음도 없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엄마는 불치병 자녀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반드시 낳을 것이라고 끝까지 믿는데, 자녀를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 믿음과 희망도 포기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망애 삼덕이 우리에게 있어야 씨도 뿌리고 자라게 한다는 말인데, 우리가 지레 포기하지 말고 뿌려할 작은 씨는 실제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작은 씨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우리의 좋은 생각이나 선의나 선행입니다.
세상의 거악에 비하면 우리의 좋은 생각이나 선의나 선행은 너무 보잘것없고, 그래서 그것은 마치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격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공동체를 바꾸려고 해도 우리 공동체는 꿈쩍도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작지만 좋은 내 생각이나 선의를 실행에 옮기지 않고 포기합니다.
그런데 제 자랑 같지만 제가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일을 벌이는 것은 제 생각이 나쁘지 않고 하느님께서도 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이 되면 오병이어로 수천 명 먹이신 하느님께 서 그렇게 해주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평양에다 무료 급식소를 세워야겠다는 최초의 생각을 그래서 저는 접지 않았고, 그 최초의 작은 생각은 1,500명을 먹이는 거대한 계획으로 자라났으며, 그것은 <평화봉사소>라는 종합 복지관을 세우는 것으로 실현됐습니다.
이 복지관 마련을 위해 자선 음악회를 처음 계획했을 때 북한이 미사일을 쏴 음악회는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처음 분위기는 냉랭했고 표가 팔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매일 어떻게 하면 표를 팔 수 있을까 궁리했는데, 어느 날 저의 걱정을 하느님께서 한 자매님을 통해 깨주셨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다 맡기니 대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비유 말씀처럼 우리는 씨를 뿌리는 어떤 사람이 되면 됩니다.
그다음엔 그것이 어떻게 싹이 트고 자라는지 모르지만 하느님께서 해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씨가 작다고 씨를 뿌리지 않으면, 땅이 나쁘다고 씨를 뿌리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자라게 해주실 것을 믿지 않으면,
씨를 뿌리지 않을 것이고 애초에 아무 것도 안 될 것이며, 아무리 하느님일지라도 아무것도 해 주실 수 없을 겁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이 살아 움직이는 상태>
한 유치원 원장님이 아이들에게 꽃씨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일 예쁜 꽃을 피워온 아이에게는 멋진 선물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아이들은 서로‘내가 제일 예쁜 꽃을 피워야지!’하며 신이 났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 아이들은 꽃이 활짝 핀 화분을 들고 왔습니다.
그러나 원장님의 표정은 이상하게도 밝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 아이가 빈 화분을 들고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저는 게을러서 꽃을 못 피웠어요!”
원장님은 환하게 웃으시며 그 아이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었습니다.
나누어준 씨앗은 싹을 틔울 수 없는 가짜 씨앗이었던 것입니다.
정말 싹을 틔워야 할 것은 우리의 진실한 마음입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입니다.
무엇을 하든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사실 씨앗이 생명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면 아무리 기다려도 싹은 트지 않습니다.
또한 씨앗 자체의 신비로운 힘을 믿지 않는다면 씨앗에서 싹이 트고 새싹이 돋아나도록 땅을 가꿀 이유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를 희망하면서도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실 땅에서 하늘이 열립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요?
어떤 특정한 장소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세상의 군주처럼 남을 지배하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사람들을 철저히 섬김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 위에 군림하지 않고 그를 위해 봉사합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방법이고 사랑의 질서이고 사랑의 길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고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사랑이 살아 움직이는 상태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농부가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위해 봄에 씨를 뿌리고 뿌린 씨가 잘 자라도록 온갖 정성을 다해 가꾸듯이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뿌려진 하느님 말씀의 씨를 정성껏 가꿀 때 비로소 건설될 수 있습니다.
뿌린 씨가 잘 자라려면 씨 자체가 자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하고, 동시에 뿌려진 땅이 비옥해야 합니다.
비와 햇빛도 있어야 합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튼실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에 새겨서 구체적으로 실천하게 될 때 선한 결실을 거두게 됩니다.
씨앗이 땅에 묻혀 모든 것이 끝나고 정지된 것처럼 보일 때 땅속에 있는 씨앗은 은밀하게 싹을 틔우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에 부합한다면 지금 당장 밝히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싹을 틔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좋든 나쁘든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가꾸어야 합니다.
나의 수고와 땀, 희생 봉헌이 미약해 보일지라도 결코 작지 않음을 기뻐해야 합니다.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12,24).
불신이 가득한 이 세상에 빈 화분을 들고 눈물을 지을 수 있는 진실함으로 하늘나라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진실이 있으면 바로 그 자리가 하느님의 나라요, 불신과 거짓으로 서로를 경계하면 그 곳이 지옥입니다.
사랑으로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쑥쑥 자라길 기도합니다.
하나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밭을 갈고 씨앗을 심고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벌레를 잡아야 합니다.
사람이 저마다 심고 가꾸는 대로 거둔다는 것은 하나의 진리입니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팥을 심으면 팥을 거두게 됩니다.
그렇다면, 적게 심고 많이 거두려 하거나 심지도 않고 수확만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는 법입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뿌려진 말씀의 씨를 정성껏 가꾸는 노력을 하지 않고서는 결코 우리의 신앙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정성이 들어가지 않는 신앙, 투자하지 않고 희생하지 않는 신앙생활, 편안한 방법으로 영적성장을 기대하거나 하느님을 체험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안일한 신앙생활입니다.
시편은 노래합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시편 126)
우리의 희생과 헌신을 통해 더 큰 기쁨을 간직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씨앗보다도 작은 겨자씨가 자라나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 4,32)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이 거처할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신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고 기쁨입니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겨자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말씀의 겨자씨가 되어 주위에서 모든 것들, 모든 사람이 와서 깃들일 수 있도록 크게 자라야 합니다.
내가 영적으로 자라지 않으면 내 주위의 누구도 그 품에 와서 쉴 수가 없습니다.
가장으로, 부모로, 자녀로서, 스승으로, 제자로, 각자의 있어야 할 자리에서 큰 품의 소유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사랑에 굶주린 사람들, 힘들고 지친 사람들, 여러 이유로 외롭게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찾아와 평화로이 쉴 수 있는 큰 나무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 한 주간 내 안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이 무엇인지 점검하고 그 씨앗이 아주 작다 하더라도 잘 가꾸어 그 말씀이 나를 점점 더 영적으로 성장시켜주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마침내 큰 나무 되어 모든 이의 쉼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큰 가지를 뻗을 수 있을 만큼 자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때를 기다리며 인내로 가꾸어야 합니다.
나의 연약함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 드리며 힘을 얻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전에 ‘광야’가 존재하는 이유>
하느님 나라는 왜 한 번에 오지 않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지옥과 같은 이집트를 탈출하였을 때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왜 꼭 광야라는 시험의 장소를 거치게 하셨을까요?
어쩌면 오늘 복음이 그 해답을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 나라는 두 비유가 하나의 짝으로 설명됩니다.
하나는 ‘하느님 나라는 땅에 뿌린 씨가 뿌린 자신도 모르게 자라서 열매를 맺기까지에 이른다.’라는 내용입니다.
두 번째 비유는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십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가 그 안에 이루어지면 그 사람은 ‘많은 새들이 깃들여 쉴 수 있는 휴식 같은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을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 구약성경 구절이 오늘 독서의 에제키엘서(17,22-24)입니다.
하느님은 손수 향백나무의 가장 연한 가지 하나를 꺾어 높고 우뚝한 산 위에 심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훌륭한 향백나무가 됩니다.
그 열매란 이것입니다.
“온갖 새들이 그 아래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이리라.”
(에제 17,23)
만약 하늘 나라가 우리 노력으로 이뤄진다면 어떨까요?
인간은 교만해질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이뤄져야 더 감사할 줄 압니다.
아기가 모든 이치를 깨달아서 자기 노력으로 두 발로 걷고 지식을 습득하여 사회생활이 가능해진다면 그만큼 부모에게 덜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로 행복하게 하시지 않고 광야의 시간을 주시는 이유는 또한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갑자기 행복해지면 행복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영화 <행복을 찾아서>는 아들과 함께 노숙자로 살다가 백만장자로 자수성가한 크리스 가드너의 실화를 담고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가정에서 홀어머니에게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을 버리고 도망가버려서 어머니 혼자 크리스를 키워야 했습니다.
그래도 크리스는 희망을 잃지 않았고 화장실에서 자면서도 결국 투자관리자로 큰 회사에 들어가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그렇게 힘들게 살았고 위로 올라오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잘 압니다.
그래서 그렇게 얻은 행복의 가치를 아는 것입니다.
16세 때 교통사고로 두 팔을 잃은 슈레아 시나다가우더의 사연은 큰 감동을 줍니다.
그는 다행히도 크고 털이 많은 검은 남자의 두 팔을 기증받았습니다.
그런데 수술이 끝나자 그 팔이 여성의 팔로 변해갔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저 스스로 매우 축복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어서 매우 기쁩니다.”
만약 그녀가 처음부터 팔을 잃지 않았다면 팔에 대한 감사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영화 <베테랑>을 생각해봅시다.
태어날 때부터 부자였던 재벌 3세 조태호는 자신이 누리는 재산의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행복하지 않고 더 많은 돈과 권력이 있어야만 만족합니다.
미국의 어떤 재벌들은 돈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습니다.
노력해서 성공하는 행복의 기회를 빼앗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없었던 적이 없다면 그 고통을 알지 못하기에 연민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화에서 조태호는 가난한 자의 고통 앞에서 “어이가 없네!”라고 말합니다.
‘상처받은 치유자’란 말이 있습니다.
내가 고통을 알아야 진정으로 상대의 고통을 통감할 수 있고 구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렇게 ‘휴식 같은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넬슨 만델라는 어떻게 27년을 감옥에서 버틸 수 있었느냐고 할 때, “나는 버틴 게 아닙니다.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믿고 포기하지 말라고 연설했던 덴젤 워싱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하늘 나라를 믿었습니다.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성모님은 성취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버티다가 엘리사벳을 통해 참 행복을 맛봅니다.
저는 연옥에 안 가는 기도를 압니다.
비르짓다의 ‘일곱 번의 주님의 기도’를 12년 동안 바치면 됩니다.
처음 바칠 땐 저도 긴가민가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행복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12년 동안 바치고 난 뒤에 느끼는 하늘 나라의 기쁨이 무엇인지 모르면 알려줄 수 없습니다.
즈카르야는 벙어리가 되면서 천사에게 이런 말을 듣습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루카 1,20)
먼저 믿고 버티는 광야를 거치지 못하면 행복을 알 수도 없고 행복을 전해줄 수도 없습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한없는 풍요로움과 가능성, 확장성을 지닌 하느님 나라>
그 누구도 다녀와 본 적이 없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너나 할 것 없이 이렇다 저렇다 떠들어댑니다.
저도 예외는 아니어서 떠들어 대다가도 가끔씩 걱정이 됩니다.
시각장애인이 코끼리 다리를 만져보며 코끼리의 생김새는 큰 기둥 같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전혀 아닌 이단을 선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저는 가끔 전례나 그레고리안 성가에 충실한 큰 수녀원 본원 미사, 그것도 부활 성야 미사 같은 큰 미사를 봉헌할 때 무릎을 탁! 치며, 아 그래 어쩌면 하느님 나라의 모습은 이렇지 않을까 상상해보곤 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모님을 비롯한 무수한 성인 성녀들, 천사들이 모두 좌정해 계시는 곳, 그리고 한쪽 일반석에는 먼저 떠난 사랑하는 사람들이 앉아있는 곳.
그럼 거기서는 뭘하는가?
마치 부활 성야 미사때처럼 제1독서, 화답성가, 제 2독서, 화답성가...알렐루야, 복음 낭독, 명강론, 성찬의 전례...등등 거룩한 예식이 끝도 없이 계속되는 곳.
그래서 지상에서 거룩한 전례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곳이지만, 돈이나 세상 좋은 것들에만 오르지 함몰되어 살아왔지 미사나 전례에는 완전 뒷전인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곳, 그 자체로 생지옥이요 연옥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아주 슬쩍 하느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설명해주십니다.
겨자씨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우세한 특징은 한없는 풍요로움과 확장성임을 강조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이 어떤 씨앗보다 더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더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마르 4,31-32)
아마도 하느님 나라는 이런 곳일 것입니다.
쥐꼬리보다 작은 우리의 선행, 너무나 미흡해 보이는 우리의 기도, 우리가 베풀었던 손톱만한 이웃사랑이 깜짝 놀랄 만큼 풍성한 결실을 거두는 곳, 넉넉함과 풍요로움, 기쁨과 감사, 대견함과 환희로 가득 찬 곳이 하느님 나라일 것입니다.
세파에 닳고, 세월의 흐름에 퇴색되고, 갖가지 상처와 죄로 얼룩진 우리가 그 오랜 짐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변화된 영혼으로 거듭나는 곳이 ‘하늘나라’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더이상 슬픔도, 눈물도, 상처도, 고통도 존재하지 않는 곳, 오로지 하느님의 풍요로운 자비와 은총만이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곳, 그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 앞에 우리의 모든 죄와 상처, 과오와 실수들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그곳이 하느님 나라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느님 나라, 언젠가, 먼 훗날에도 가능하겠지만, 지금 이 순간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땅 위에서도 실현되어야 하겠습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우리 인간이 하느님과 온전히 합일된 충만함 속에 사는 곳이라고 확신합니다.
서로의 가능성을 눈여겨보고 북돋와주는 우리 공동체, 서로의 부족함을 기꺼이 견뎌주는 우리 공동체, 서로의 성장을 위해 꾸준히 땀 흘리는 우리 각자의 현실이 또 다른 하느님 나라일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1)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에서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열매를 맺게 하시는데” 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저절로’ 되는 일은 없습니다.
모든 일이 다 하느님의 사랑과 보호 안에서, 또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이 다 알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를 스테파노 순교자와 바오로 사도의 경우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스테파노’ 라는 씨앗을 심으셨고, 그 씨앗에서 ‘바오로 사도’ 라는 나무가 자라나게 하셨고, 그 나무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의 구원’이라는 열매를 얻으셨습니다.
그 열매를 수확하는 기쁨은 하느님과 온 교회 공동체 모두가 함께 누리는 큰 기쁨입니다.
스테파노가 박해를 받고 순교한 일도 인간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인데, 박해자였던 사울이 회심하여 바오로 사도가 된 일은 이해하기가 더 어려운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 과정에 대해서 여러 번 증언하고 설명하긴 했지만, 하느님의 섭리가 어떻게 작용해서 그런 결과에 도달했는지 우리는 다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가 순교할 때까지 수없이 많은 박해와 고난을 받으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놀라운 선교활동을 할 수 있었는지, 그것도 인간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어떻든 그 모든 일은, 또는 ‘하느님 나라 건설’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우리는 그 일을 도와드리는 협력자입니다.
나중에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었을 때, 적극적으로 협력한 사람들은 그 나라에 들어가겠지만, 구경만 했거나 무관심했거나 방해한 사람들은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후회만 하게 될 것입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일종의 질문과도 같습니다.
“이제 곧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날이 올 텐데, 구경꾼이나 방관자로 남아 있을 것인가?
능동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함께하는 협력자가 될 것인가?”
그 선택과 실행은 나중이 아니라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2)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건설 과정’에, ‘겨자씨의 비유’는 ‘결과’에 초점을 맞춘 비유입니다.
사실 겨자씨에서 겨자나무가 자라나는 것 자체는 신기한 일도 아니고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또 작은 씨에서 큰 나무가 자라는 것도 그렇게 신기하거나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겨자씨의 비유’는 ‘씨는 작은데 나무는 크다.’가 핵심이 아니라, ‘씨 속에 들어 있는 생명력’이 핵심 주제입니다.
그 생명력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한 일, 즉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씨가 작든지 크든지, 또 나무가 크든지 작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작은 씨 속에 놀라운 생명력이 들어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라는 말씀은 “인간들은 가장 작은 씨앗이라고만 생각한다.”, 즉 “인간들은 작고 보잘것없고 하찮은 일이라고만 생각한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 때 항상 ‘작은 일’로만 시작하시는 것은 아닌데, 믿음 없는 인간들은 항상 그 일을 무시하면서 하찮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작은 일과 큰 일이 따로 없습니다.
모든 일이 다 똑같이 ‘큰 일’이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크다, 작다, 라고 분류합니다.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자기 자신이 하느님의 ‘겨자씨’ 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에페 2,20-22)
주춧돌이든 작은 벽돌이든 간에 ‘하느님 나라’ 라는 집에서는 모두가 다 중요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나’를 아주 귀하게 여기십니다.
3)
‘하느님 나라’ 라는 집에서 벽돌 하나가 빠져나간다 해도 그 집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빠져나간 사람의 인생은 무너지고 끝나버립니다.
작은 실수 한 번, 작은 죄 하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방치하다가는 그 작은 일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마태 5,19).
그것은 한 방울의 독으로 생명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작은 죄라도 습관적으로 반복하면 ‘대죄’가 됩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나라 -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좋으니이다 지존하신 님이시여,
주님을 기려 높임이,
그 이름 노래함이 좋으니이다.”
(시편 92,2)
언젠가 말씀드렸다시피 일기쓰듯 쓰는 강론입니다.
1989년 7월 11일, 사제서품 후 2024년 6월16일 오늘까지 매일 써오는 강론이기에 좀 자유롭고 싶습니다.
첩첩산중(疊疊山中), 날마다 산을 넘는 듯 매일 써도 처음 쓰는 듯 힘든 강론이지만 ‘살기 위해’, ‘더불어 살기 위해’ 씁니다.
한 밤중 일어나 맨먼저 하는 일은 만세칠창 후 교황님 홈페이지를 확인하는 일입니다.
얼마나 많은 세계 각계 각층의 사람들을 만나는지 전무후무(前無後無),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분일 것입니다.
“인공지능은 객관적이지도 중립적이도 않다.”
며칠 전 이태리에서 열렸던 ‘주요 7개국 정상회담(G7)’에서 하신 연설의 요지입니다.
인공지능에 경각심을 촉구하는 지혜와 통찰로 가득한 내용들입니다.
일곱 정상들 한가운데 위치한 교황님의 사진 모습을 보면서 명실공히 정신적 세계 대통령임을 깨닫게 됩니다.
“더 좋은 세상을 꿈꾸도록 우리를 도와 주십시오.”
세계 각처에서 바티킨의 교황님을 찾은 100여명의 코미디언들에게 하신 연설의 요지입니다.
“자선활동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역시 어제 교황님을 방문한 사업체 지도자들에게 하신 연설의 요지입니다.
자선활동은 물론이요, 환경, 가난한 이들, 젊은이들에 대해서도 폭넓은 시야와 관심과 도움을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만나는 옛 어른의 말씀도 분발의 용기를 줍니다.
“거듭 천 번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 단지 필요한 것은 타고난 능력이 아니라, 과감히 도전할 수 있는 용기이다.”
<다산>
“다른 사람이 한 번에 할 수 있다면, 나는 백 번을 하고, 열 번에 할 수 있다면 나는 천 번을 한다.”
<중용>
다산 정약용 선생이 이런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음은 일상의 삶은 물론 고전을 치열히 폭넓게 섭렵하면서 반추한 결과임을 깨닫게 됩니다.
목숨을 걸고 공부에 매진했던 다산같습니다.
“늙음은 온갖 불편의 집합이다.
마지막으로 정리할 게 무엇인가 생각할 때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아침에 해가 뜨고 아파트 발코니에선 꽃들이 피고 지고 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시, 물빛으로 환한 시간이.”
87세 황동규 노시인의 고백입니다.
참으로 폭넓게 펼쳐지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 다양한 예를 통해 나눴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에 계신 ‘영원한 현재’의 하느님이십니다.
눈만 열리면 하느님의 현존이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제 애송하는 자작시 내용 그대로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 사랑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 천국이옵니다.”
교회는 단지 하느님 나라의 표지이자 성사일 뿐 하느님의 나라는 교회를 뛰어 넘어 시공을 초월하여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바로 이 평범하면서도 놀라운 진리를 보여준 분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실상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 되는지 모른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하느님 나라의 표지들입니다.
쉬지 않고, 끊임없이, 소리없이 일하시는 하느님입니다.
바로 언제 어디서나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펼쳐지는 하느님의 나라임을 깨닫습니다.
죽어서 가는 하느님의 나라도 아니고 어디 밖에 있는 별세계같은 하느님의 나라도 아닙니다.
바로 지금 여기서 펼쳐지는 하느님의 나라를 놔두고 밖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찾는 이들이야말로 어리석은 사람들이요 끝내 찾지 못할 것입니다.
어디나 하느님 계신 성지인데, 오늘 지금 여기 성지를 놔두고 성지순례를 떠날 필요가 어디 있겠는지요.
바로 제자리가 하느님의 나라임을 알게 함이 성지순례의 궁극적 목표일 것입니다.
어떻게 하느님의 나라를 살 수 있겠는지요?
신망애(信望愛), 믿음, 희망, 사랑의 삶을 통해서입니다.
첫째, 믿음의 삶입니다.
하느님을 믿을 때, 펼쳐지는 하느님의 나라를 봅니다.
내 시각으로 볼 때 문제투성이지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는 너무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할 일은 믿음의 눈으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깨달아 아는 것이요, 기꺼히 받아들여 충실히 살아내는 것입니다.
제1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자가 그 모범입니다.
이미 그 예전에 믿음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살았던 분입니다.
“내가 손수 높은 향백나무의 꼭대기에 순을 따서 심으리라.
...온갖 새들이 그 아래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이리라.”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이런 향백나무같은 개인이, 공동체가 눈에 보이는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또한 믿음의 사람들은 하느님의 섭리안에 펼쳐지는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제야 들의 모든 나무가 알게 되리라.
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는 높이며, 푸른 나무는 시들게 하고, 시든 나무는 무성하게 하는 이가, 나 주님임을 알게 되리라.
나 주님은 말하고 실천한다.”
참으로 믿음의 눈으로, 하느님의 눈으로 매사 펼쳐지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깊이 드려다 봐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몰라서 원망, 절망, 실망이지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느님 하시는 일에 감사, 감동, 감탄이 뒤따를 것이며, 매사 진실, 성실, 절실한 자세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둘째, 희망의 삶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사람들은 희망의 여정을 살아가는 희망의 순례자들입니다.
하느님께, 하느님의 나라가 궁극의 꿈이자 비전이자 희망인 자들은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를 삽니다.
그 빛나는 모범이 바오로 사도요 그의 고백이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용기를 줍니다.
“우리가 이 몸 안에 사는 동안에는 주님에게서 떠나 살고 있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언제나 확신에 차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몸을 떠나 주님 곁에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함께 살든지 떠나 살든지 우리는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씁니다.”
믿음과 희망이 함께 감을 봅니다.
바로 이런 주님이 우리의 궁극의 희망입니다.
이런 주님을 늘 그리워하고 바라보기에 희망이 샘솟고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살게 됩니다.
늘 희망의 주님께 시선을 두면서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씁니다.
셋째, 사랑의 삶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눈이 열릴 때 보이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입니다.
예수님 사랑의 눈에 포착된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하느님이 주도권을 잡고 소리없이 묵묵히 펼쳐가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가만히 바라보고 지켜보며 참으로 필요할 때 협조해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하느님 섭리의 손 안에 있음을 봅니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 나라의 순리이자 섭리입니다.
심는 분도 주님이요 거두는 분도 주님입니다.
하느님 섭리의 손을 벗어날 수 없는 우리들이요 이래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섭리를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겨자씨의 비유도 그대로 하느님 나라의 전개과정을 상징합니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그 작았던 요셉 수도원이 이제는 큰 숲이 되어 많은 이들의 사랑의 쉼터, 치유의 쉼터가 되고 있으니 그대로 하느님 나라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사랑의 하느님 나라 공동체를 이뤄주는 성전에서의 사랑의 성사(聖事)요, 식당에서의 사랑의 식사(食事)요, 배밭 농장에서의 사랑의 농사(農事)이니, 바로 ‘사랑의 삼사(三事)’입니다.
배농사를 보면 하느님 나라의 실현에 사람의 적절한 도움도 필수임을 깨닫습니다.
배농사의 80%는 하느님 몫이고 나머지 20% 사람몫인 가지치기, 잡초깎기, 거름주기, 농약치기, 적과하기, 봉지싸기 등 농부 수도자의 시기적절한 협조도 필수입니다.
사랑의 기도와 사랑의 노력이 함께 가야 합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요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입니다.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에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는 일이 얼마나 본질적이고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펼쳐지고 있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내가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내 몸담고 살아가는 공동체가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참으로 겸손하고 성실한 하느님 사랑의, 섭리의, 순리의 도구와 협조자가 되어 신망애의 참 좋은 하느님의 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 집안에 심어진 그들은 하느님의 뜰에서 꽃피리이다.
의인은 늙어서도 열매 맺고, 물이 올라 싱싱하리라.”
(시편 92,13-14)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나라는 절대평가입니다>
우리의 주식은 ‘쌀’입니다.
쌀로 밥도 하고, 쌀로 떡도 하고, 쌀로 국수도 만들고, 쌀로 막걸리도 만듭니다.
쌀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들의 땀과 눈물이 알알이 익어가는 것이 쌀입니다.
봄이 되면 농부는 논에 물을 받습니다.
모판에 키운 어린 벼를 논에 옮겨 심습니다.
이것이 ‘모내기’입니다.
벼를 너무 얕게 심으면 바람이 불거나, 비가 내리면 물에 둥둥 뜨게 됩니다.
그런 벼는 열매 맺지 못합니다.
벼를 너무 깊게 심으면 숨이 막혀 제대로 자라지 못합니다.
그래서 벼를 ‘적당한’ 깊이에 심어야 합니다.
쌀을 나타내는 한자는 미(米)입니다.
이는 농부가 88번을 수고해야 비로소 알곡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어르신들은 ‘밥은 곧 하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어릴 때 부모님은 ‘쌀가게’를 하였습니다.
지금은 마트에 가서 쌀을 쉽게 살 수 있지만, 그때는 쌀가게에서만 쌀을 살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제게 과제를 주곤 했습니다.
쌀에 있는 작은 돌이나, 도정이 안 된 벼를 골라내는 겁니다.
그렇게 골라내면 아버지는 십 원을 주셨습니다.
신학교를 ‘못자리’라고 하였습니다.
신학교는 울타리가 되어서 신학생을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신학교는 신학생이 사제가 될 수 있도록 양성하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88번의 수고와 땀을 흘려 알곡을 생산하듯이, 신학교는 10년 동안 신학생을 양성합니다.
2학년을 마치면 군에 입대합니다.
4학년이 되면 ‘독서직’을 받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소임이 주어집니다.
이때부터 사제의 복장인 ‘수단’을 입습니다.
5학년이 되면 ‘시종직’을 받습니다.
제단에서 봉사할 수 있는 소임이 주어집니다.
시종직을 받으면 성체분배를 할 수 있습니다.
1989년에 세계성체대회가 서울에서 있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여의도 광장에서 미사를 집전하였습니다.
시종직을 받은 저는 성체분배를 하였습니다.
7학년이 되면 ‘부제품’을 받습니다.
부제가 되면 성직자의 반열에 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아닌 ‘품’을 받습니다.
예비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수 있으며, 세례성사도 줄 수 있습니다.
혼인예식도 거행할 수 있고, 장례 절차의 여러 예식을 주도할 수도 있습니다.
공동체와 관련해서 축복예식도 할 수 있으며, 봉성체와 성체 강복 등도 할 수 있습니다.
7학년을 마치면 ‘사제품’을 받습니다.
사제가 되면 못자리인 신학교를 떠나서 사제의 직무를 수행합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이 피기위해서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울었다고 하듯이, 한 명의 사제가 되기 위해서 10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비유’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영토, 국민, 정부’가 정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길가에, 자갈밭에,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는 열매 맺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뿌려진 하느님의 말씀이 열매 맺도록 우리의 마음을 좋은 땅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농부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보물이 묻혀있는 밭을 산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야 할 보물은 금과 은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야 할 보물은 큰 집과 땅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야 할 보물은 지금 굶주린 사람입니다.
지금 아픈 사람입니다.
지금 갇힌 사람입니다.
지금 외로운 사람입니다.
그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눌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의 나라에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부가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물에 건져진 것 중에 쓸모없는 것은 버리고, 양식이 되는 것만 가져온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밀밭에 함께 자라는 가라지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추수 때가 되면 밀은 모아 곳간에 넣어놓고, 가라지는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지금 잘못한 사람은 회개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우리는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누가 밀인지, 누가 가라지인지 판별은 오직 하느님의 몫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누룩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작지만 발효가 되면 커지는 누룩처럼 하느님의 나라도 비록 그 시작은 미소할지라도, 그 끝은 창대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겨자씨가 비록 작지만 그것이 땅에 뿌려져서 자라면 많은 새들이 쉴 수 있는 큰 나무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나라에는 우리가 머물 곳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상대평가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절대평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아무나 갈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르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사회 안에서 높은 인지도가 있는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이들은 의사, 선생님, 운동선수, 정치인, 판사, 변호사 등 자기 분야에서 그래도 꽤 알려진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성공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얼마나 성공했다고 답변했을까요?
대부분이 성공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성공은 아주 먼 미래에 있다’라는 식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성공을 갈망하고 있고, 아직도 이 성공을 좇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족하지 못함으로 인해 불행한 사람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즉,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고 누리고 있는 것에 관한 감사함이 있어야 행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지난달 말에,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님께서 제가 있는 본당을 방문하셨습니다.
본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비롯한 각종 성물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신 것입니다.
스테인드글라스, 십자가, 십자가의 길 등을 보시면서 계속 감탄하셨습니다.
1시간 정도만 머무르신다고 했는데, 2시간 넘게 머무시면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곳 본당 신자들은 너무 좋겠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성물이 있고, 또 멋진 성당에서 신앙생활을 하시니까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런 마음으로 신앙생활 하는 분이 얼마나 많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미사 끝나기도 전에 성당 문을 나서며 돌아가시는 분들이 떠올려지면서, 누군가는 부러워하며 오래 머무는 곳이 누군가에게는 빨리 떠나고 싶은 장소가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의 내용처럼,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보기보다는 불평불만의 마음으로 보기에 만족하지도 또 감사하지도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 나라는 인간의 활동이 아니라 하느님의 활동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지요.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싹이 터서 자랍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지 못합니다.
씨는 마치 저절로 자라는 것처럼 싹이 트고 줄기가 생기고 잎이 자라고 꽃이 피어 열매를 맺습니다.
또 이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시면서 풍요로움을 말씀하십니다.
작은 겨자씨가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새들이 그늘을 찾아올 정도입니다.
이런 하느님 나라가 우리 마음 안에 이미 와 있습니다.
문제는 이 완벽한 하느님 나라가 이미 우리 안에 뿌려졌는데,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세히 보지 못하고 오래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상에 묻혀 바쁘게 사느라 하느님 나라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활동을 자세히 보고 오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만족과 감사함을 갖게 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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