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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김법룡이 일제에 바친 8만원, 도우가 성철에 보낸 10원/성철큰스님 평전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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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 도리사 태조선원 전경. 현재 선방은 템플스테이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
"성철에게는 머물 절도, 따르는 신도도 없었다. 또 시자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 형편을 잘 알고 있는 도우는 향을 사르고 불당을 청소해서 얻은 돈 10원을 스승께 보낸 것이다. 당시 쌀 한 말에 3, 4원이었으니 쌀 서너 말 값이었다. 이렇듯 선승들은 굶주리며 정진했다."
성철은 청담을 상주포교당에 남겨두고 다시 선방을 찾아 나섰다. 물이 되어 또 구름이 되어 깃드는 곳이 곧 수행처였다. 청담도 따라나서고 싶었지만 쇠약해진 몸은 걷기에도 힘이 들었다. 성철은 도우와 더불어 문경 사불산 대승사를 찾아갔다. 그곳 쌍련선원에서 겨울을 나려고 했다. 1943년 늦가을, 대승사로 가는 산길은 험했다. 잎 떨군 나무들이 추워보였다. 대승사에서 방부를 들이려하자 원주스님이 좀처럼 답을 하지 않았다. 한참을 지나서야 속내를 푸념처럼 내비쳤다.
“먹을 게 없소이다. 먹어야 참선도 할 수 있는 것 아니요. 겨울나기가 막막한 실정이요. 눈이 퍼붓기 전에 다른 곳을 알아보시오.”
겨울을 나려면 입을 줄여야 했다. 도우는 성철의 안색을 살폈다. 아무리 깊은 절이래도 어찌 성철을 모를 것인가. 그럼에도 깨달은 선승이 밥 한 술 얻어먹기 어려웠다. 성철은 말없이 산을 내려갔다. 도우가 뒤를 밟았다. 가을 산길은 더없이 쓸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성철은 이렇게 홀대받아서는 안 될 선승이었다. 도우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았다. 산길은 오를 때보다 더 멀게 느껴졌다.
성철과 도우는 ‘눈이 퍼붓기 전에’ 경북 구미 도리사 태조선원을 찾아갔다. 태조선원에는 종수, 장수 스님이 있었다. 그들은 성철을 따뜻하게 맞았다. 겨우 굶지 않고 겨울을 날 수 있었다.
도리사는 신라 최초의 가람으로 알려졌다. 아도화상이 중국 진나라에서 건너와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숨어서 포교를 하며 세운 신라불교의 발상지이다. 신라는 외래 문물에 배타적이어서 불교도 적극 배척했다. 따라서 불도들에 대한 박해가 심했다. 아도는 묵호자란 이름으로 지금의 선산지방에 들어와서 모례의 집에 숨어들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사람들을 모아 불법을 전했다. 그러던 아도가 수행처를 찾아다니는데 어느 곳에 이르니 겨울임에도 복숭아[桃]꽃과 오얏[李]꽃이 피어 있었다. 그 곳에 절을 지으니 곧 도리사(桃李寺)였다. 이른바 신라불교 초전법륜지인 셈이다.
1977년 경내 석종형 사리탑에서 진신사리와 금동육각사리함을 발견했다. 그러자 도리사는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을 조성했다. 아마 성철이 정진하고 있을 당시에는 옛 탑에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줄 몰랐을 것이다.
도리사도 지독한 식량난에 직면했다. 그야말로 겨우 입에 풀칠만 해야 했다. 생식을 하는 성철은 그래도 견딜만했지만 스물세 살 도우는 배가 고팠다. 그럼에도 겨울밤은 길기만 했다. 도우는 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환한 볕이라도 실컷 마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봄이 오기도 전에 문제가 생겼다.
1944년 새해, 설이 지나고 막 동안거를 해제했을 때였다. 주지가 돌연 도리사 선방 문을 닫겠다고 했다. 선객들에게 나가라는 통보였다. 선객들은 선뜻 나서지 못했다. 봄은 아직 멀리 있었고, 엄동에 선객을 받아들인 곳은 없었다. 주지는 성철에게만은 계속 남아 있어도 좋다는 뜻을 도우에게 전했다. 주지는 선방의 정진이 한 치 흐트러짐이 없는 성철을 겨울 내내 지켜봤다. 왠지 내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도우는 떠나가야 했다. 까짓 젊은 몸뚱이 눈밭에 굴려도 살아가겠지만 홀로 남을 성철이 걱정되었다. 성철이 곁에 있으면 근심과 두려움이 사라졌다. 깊은 곳에서 나온 한 마디는 지난날을 감싸기도 하고 또 내일 가야할 길을 밝혀주기도 했다. 나이와는 상관없이 기품이 느껴졌다. 성철과 함께 수행하면 언젠가는 부처가 될 것 같았다. 성철이 등잔불 밑에서 뚫어진 양말을 꿰매는 모습을 보면 외경심과 신심이 밀려들었다.
‘내가 없으면 성철 스님 심중을 누가 헤아려 모실 것인가.’
도우는 걸망을 지고 도리사를 떠나갔다. 북쪽으로 올라가 신의주 건너편에 있는 단동으로 갔다. 그곳에서 속가의 형을 만나고 묘향산에 들었다. 묘향산 축성전에서 부전을 보면서 봄 여름을 났다. 축성전은 보현사에 딸린 암자로 상원암 뒤편에 있었다. 도우는 도리사에 머물고 있는 성철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성철로부터 답장이 왔다. 도우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만주와 묘향산에 있을 때 성철 스님에게 편지를 하니 열심히 정진하라고 연락을 하더라고요. 그런데 성철 스님의 편지에 도리사에 혼자 있기가 불편하다고 하면서 대승사에 가고 싶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부전(副殿) 보아 번 돈 10원을 보내드렸지.”
성철에게는 머물 절도, 따르는 신도도 없었다. 또 시자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 형편을 잘 알고 있는 도우는 향을 사르고 불당을 청소해서 얻은 돈 10원을 스승께 보낸 것이다. 당시 쌀 한 말에 3, 4원이었으니 쌀 서너 말 값이었다.
이렇듯 선승들은 굶주리며 정진했다. 깊은 암자에 들어 대처승이 장악하고 있는 큰절에서 근근이 빌어먹고 있었다. 하지만 제도권의 종권을 휘어잡은 친일승들은 큰절을 접수하고 ‘통 크게’ 살고 있었다. 바로 도우가 묘향산 작은 암자 축성전에서 부처님을 씻기고 불당을 청소하고 있을 때 묘향산 큰절 보현사의 주지 김법룡은 말사 주지들을 선동하여 돈을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1944년 4월 무려 8만원을 군용기 헌납금으로 일본군에게 바쳤다. 친일승들은 일본이라면 무조건 엎드렸다.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다시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폭격했다. 대륙의 전쟁은 바다(태평양)의 전쟁으로 번져갔다. 전황은 점점 나빠졌다. 일본은 인력과 물자가 부족하자 조선 전체를 쥐어짰다. 종교계에 비행기 헌납을 강요했다. 불교나 기독교 모두 친일파들이 득세하고 있었다. 조선불교 조계종 종무원은 재빨리 호응했다. 이종욱 종무총장 주도로 전국 사찰마다에 분담금을 배정하고, 승려와 신도들로부터 헌금을 거뒀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군용기 한 대를 헌납했다. 비행기는 ‘조선불교호’로 명명했다.
‘조선불교호’가 하늘을 날았다. 그러자 통도사 주지 박원창은 독자적으로 모금하여 비행기 1대를 헌납하니 ‘통도사호’였다. 이에 질세라 묘향산 보현사 주지 김법룡이 나서서 ‘보현사호’를 바쳤던 것이다. 자극을 받은 조계종 총본산은 2차 모금을 하여 또 한 대를 헌납했다. 경남지역 사찰들도 다시 헌금을 모아 비행기 한 대를 바쳤다. 이로써 불교계는 태평양전쟁에 군용기 5대를 헌납했다. 조선불교호, 통도사호, 보현사호가 얼마나 용맹스럽게 싸웠는지는 알 수 없다. 또 얼마나 오랫동안 격추되지 않고 친일승들의 바람대로 황은(皇恩)에 보답했는지도 알 수 없다.
일본은 전쟁물자가 달리고 특히 금속류가 부족하자 조선 강토에서 쇠붙이를 수탈해갔다. 조계종 총본산 친일승들은 재빨리 1942년 3월 태고사(현 조계사)에서 ‘국방자재헌납결의안’을 의결했다. 사찰의 쇠붙이들을 전쟁물자로 징발했다. 범종과 불구들이 용광로에 들어갔다. 이 강산에 아침을 열고 저녁을 불러오며, 번뇌를 없애고 지혜를 길러주던 종들이 끌려나왔다. 전국 사찰에서 실려와 한데 모여진 종들은 서로의 몸을 치며 울었다. 그 맑고 우렁찬 소리로 지옥의 중생까지 제도한다는 범종이 ‘지옥의 무기’로 둔갑했다. 경성 일대에서만 태고사, 안양암, 봉은사, 수종사, 사자암 등이 범종을 떼어 일제에 바쳤다. 저들은 법당에 모신 철불상까지 끌어내 실어갔다.
‘대동아전쟁 때 일본은 군수용철물이 부족하여 당시 해인사의 유기(鍮器), 대소종(大小鐘), 다기, 향로, 철불상 등 무려 1900여점을 트럭 3대에 만재(滿載)하여 가져갔다’ (‘가야산 해인사지’)
불교계 최대 문장가로 알려진 권상로는 일본 구미에 딱 맞는 글을 지어 바쳤다. 그것들은 마설(魔說)이었다. 임혜봉 스님이 밝혀낸 ‘불상의 장행(壯行)’을 보면 권상로는 불상 헌납을 이렇게 찬하고 있다.
‘이 얼마나 감격하며 얼마나 황송하며 얼마나 장쾌하냐. 전승(戰勝)을 위하여 교주의 성상(聖像)까지 내어바친다는 것은 불교가 아니면 없을 것이요 일본이 아니면 없을 것이다. 체적(體積)이 분촌(分寸)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불상까지 출동하셨으니 듣기에 얼마나 감격하며, 중량이 치수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불상까지 헌납이라니 보기에 얼마나 황송하며, 국가를 위하여서는 불상까지 응소(應召)하다니 참으로 비할 데 없이 장쾌한 바이다.’ (‘신불교’ 제48집)
아무리 나라를 앗겼더라도 이 땅의 백성이 이 정도의 문장에 감응할 리는 없다. 당시의 지적 수준이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권상로와 그의 무리들이 미쳐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참담한 일들은 줄지어 일어났다.
사명당의 사당이 있는 밀양 표충사에서도 범종을 포함하여 각종 불구류를 내놓았다. 지독한 친일승인 표충사 주지는 표충서원 향사제기(享祀祭器)까지 바쳤다. 밀양사 표충서원이 어떤 곳인가. 임진왜란의 대장부 서산·사명·영규대사의 충렬을 기리는 사당이 아니던가. 원래는 떨어져 있었지만 1839년(헌종 5)에 잊지 말고 거룩하게 기리자며 경내로 이건하고, 그래서 절 이름도 표충사라 하지 않았는가.
대사들의 영혼을 우러르고 추모하던 신성한 그릇이 녹아서 무엇이 되었을까. 향사제기들이 무기로 변했으니, 그래서 왜적을 물리친 만고의 충혼이 전장에 나갔으니, 일본의 패망은 이미 정해진 것 아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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