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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8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예레 20,10-13
복 음 : 요한 10,31-42
그때에
31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33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하고 대답하자,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35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36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37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38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39 그러자 유다인들이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40 예수님께서는 다시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
41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와 서로 말하였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42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의대 교수는 의대생들이 시험에서 모르는 문제가 나왔을 때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답지에 적어낼 때 감점을 아주 크게 한다고 합니다.
보통 답을 몰라도 자기 나름의 답을 적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의대 교수는 의사가 생명과 연관된 직업이기에
그래서는 절대 안 된다는 주장입니다.
하긴 진찰하고서 잘 모르겠다며 아무 약이나 처방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절대로 해서는 안 될 행동이 분명합니다.
추측의 위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추측을 삶의 전반에서 취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판단하는 추측, ‘아니면 말고’ 식의 말들,
한 가지 모습만을 보고서 ‘그 사람은 ~ 이런 사람이다.’라고 단정 짓는 모습 등등….
이 추측은 과거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향해서도 똑같이 범했던 죄였습니다.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합니다.
죄목은 ‘신성모독’이었습니다.
하느님과 하나라는 예수님 말씀이 신성모독이기에 돌로 치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성모독의 경우는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때에만 해당했습니다.
율법해석가인 랍비 압바우(300년)는
“어떤 사람이 나는 하느님이요 라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나는 하늘로 올라갈 것이라고 말했다면
그는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즉, 굳이 따진다면 ‘거짓말’을 했다는 죄에만 해당하지, 신성모독 죄는 아닙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나는 메시아다.”라는 말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는 로마에 반기를 드는 행위였기에, 사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결국 억지 주장을 펼치고 있는 유다인들의 모습입니다.
좋은 일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이 그토록 믿고 따른다는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통해서라도 하느님을 믿으라는 호소인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많은 일들이 계속됩니다.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왜 받아들이지 못할까요?
어떻게든 믿지 않으려는 완고한 마음이
그 사랑의 손길을 보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하게 만듭니다.
이제 더는 함부로 추측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어 성전 봉헌축일 때,
솔로몬 주랑에서 벌어진 유대인들과의 논쟁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유대인들의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시오.”(요한 10,24)라는 질문에 대해,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요한 10,30)라는 예수님의 증언에 대한 반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곧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신성모독으로 여기고 돌로 치려고 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8)
이는 ‘아버지의 일’과 ‘예수님의 일’이 같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일은 사랑을 완성해 가는 일입니다.
곧 생명을 북돋우고 창조를 완성해 가는 일이요, 구원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 일은 또한 아버지와 아들을 알고 믿고 따르는 ‘우리의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믿게 되면, 곧 사랑을 완성해 가는 이 일을 믿게 되면,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안에 계심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0,38).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말은 그냥 단순히 알게 되는 것을 넘어서,
아는 바를 받아들여 체험하여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내재를 통해 알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그분 안에 내재할 때 깨달아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말씀을 믿고 받아들인 이들 안에서 말씀이 되는 일,
곧 말씀으로 거룩해지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사랑이신 말씀을 받아 사랑을 완성해 가고,
생명이신 말씀을 받아 생명을 완성해 가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받으면 하느님이 됩니다.
이를 흔히 ‘신화’(θεοσισ)라고 합니다.
이는 앞서 예수님께서 하신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요한 10,36)라는
말씀을 비추어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는 하느님이 될 것이요,
마귀의 말을 받아들이는 이는 마귀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이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대체 누구의 말을 받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혹 하느님의 말씀을 배척하고 모독하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으니,
들은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 따름으로써 하느님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그분 말씀을 따름 안에서 그분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한다.”(요한 10,34)
주님!
당신의 말씀을 받은 이가 되게 하소서.
받아들인 바를 따라 살며 당신 안에 들게 하소서.
제 안에서 말씀이 자라나고 당신 사랑이 실현되게 하소서.
말씀을 받았으니 말씀이 되게 하소서.
아멘.
요르단강 건너편으로 가시어
조욱현 토마스 신부
유대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32절) 하신다.
유대인들은 돌을 던지려고 한 이유가 바로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30절) 라고 하신 말씀 때문이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33절)
그들은 그분이 하느님이심은 알지 못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에 인간이었다가 나중에 하느님이 된 분이 아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하느님이셨고, 나중에 인간이 되셨다.
그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우리 인간을 당신과 같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말씀에 참여함으로써 하느님과 같이 되고,
아들과의 친교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들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하고 말할 수 있느냐?”(35-36절) 라고 하셨다.
사람들이 하느님과 같이 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말씀이 세상에 오셨다면,
하느님과 함께 계시는 바로 그 ‘하느님의 말씀’이 하느님이 아닌 다른 무엇일 수 있는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인간이 신(神)이 된다면,
그들이 참여하는 그분이 하느님이 아닐 수 있는가?
우리는 빛에 다가가 빛을 받고 하느님의 자녀들이 된다.
그러나 빛에서 물러나면 어둠 속에 있는 자가 된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신들이 되게 한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당연히 하느님이시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37-38절)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모든 일은 바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었으며
그분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는 것이었다.
그분이 하신 일들은 모두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이었다.
그분이 아버지의 일들을 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증거이다.
당신의 육체 때문에 하느님의 이름으로 불리기에 합당치 않다고 보인다면
그 일들만이라도 믿으라고 하신다. 아들의 일은 아버지의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유다인들은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 하였지만,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40절) 한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유다를 떠나 다른 민족들의 교회로 가시는지를 보여 준다.
이 교회에는 세례의 샘이 있고, 많은 사람이 요르단강을 건너 그분을 찾아온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요르단강 건너편에 머무르셨다는 말이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유다인들에게서 다른 민족들로 건너가셨고,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와” 그리스도에 관하여 한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다.”(41-42절 참조)
우리도 항상 아버지의 일을 살면서 그분의 사랑받는 자녀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인문학으로 성경 읽기’를 듣고 있습니다.
오늘은 도미니코 페티(Domenico Fetti)의 ‘걸작과 습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도미니코 페티는 요한복음 19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모티브로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라는 작품을 그렸습니다.
하나는 거의 습작의 수준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성을 기울인 걸작이었습니다.
걸작은 이탈리아 피렌체의 미술관에 전시되었습니다.
하지만 피렌체에는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이 많았습니다.
도미니코 페티의 걸작은 그곳에서는 그리 높게 평가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다른 걸작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습작으로 그렸던 작품은 독일의 뒤셀도르프 미술관에 전시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걸작에 있지 않았습니다.
습작처럼 그렸던 그림을 통해서 사람들을 변화시켰다고 합니다.
그림에는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나는 너를 위해 이것을 하였다.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왔느냐?
(Ego pro te haec passus sum. Tu vero quid fecisti pro me.)”
독일의 진젠도르프 백작은 이 그림 앞에서 깊이 묵상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영국의 해버걸이라는 여성은 이 그림 앞에서 깊이 묵상하였고
영혼을 울리는 성가를 작사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똑똑하고 잘났던 바리사이의 기도보다는 겸손했던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넉넉한 가운데서 헌금했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의 헌금보다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하느님께서는 귀하게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엘리야의 시대에 이방인이었던 시렙다 과부의 집에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했다고 하셨습니다.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도 나병환자가 많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방인이었던 나아만을 치유해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신뢰하면서 굳이 방문하지 않고 한 말씀만 하시면 종이 나을 것이라고 했던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이스라엘에서는 ‘이런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걸작’이라고 생각하는
‘학력, 능력, 업적, 재물, 명예, 권력, 신분’과 같은 것들에는 큰 관심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습작’이라고 생각하는
‘겸손, 희생, 나눔, 인내, 기도, 봉사, 절제’와 같은 것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셨던 유다는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겼습니다.
예수님께서 반석이라고 하셨던 그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던 베드로는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키레네 사람 시몬이었습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드린 사람도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베로니카였습니다.
저는 교구청에서 5년 동안 성소 국장으로 지냈습니다.
교구장이신 추기경님, 주교님들, 국장 신부님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교황님의 한국방문을 준비하는 모임에도 함께 했습니다.
어찌 보면 제 사제 생활의 ‘걸작’과 같은 시간들이었습니다.
물론 그 5년도 감사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제 주변에는 주교님, 다른 국장 신부님들이 많아서 저는 그리 드러날 일이 없었습니다.
저는 경기도의 작은 성당에서 3년 동안 지낸 적이 있습니다.
신자 수도 적고, 헌금도 적고, 할 일이 그리 많지도 않았습니다.
어찌 보면 제 사제생활의 ‘습작’과 같은 시간들이었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습작’과 같았던 그 시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사제생활 중에 다시 돌아가고픈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들 속에 감사할 일이 참 많았습니다.
빌라도가 이야기합니다.
‘이 사람을 보라.’ 예수님의 모습에서 결코 ‘걸작’의 품위를 찾기 어렵습니다.
가시관을 쓰면서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 ‘습작’의 모습이 보입니다.
하지만 구원은 걸작과 같은 빌라도의 권위에 있지 않았습니다.
걸작과 같은 헤로데의 신분에 있지 않았습니다.
걸작과 같은 대사제 가야파와 안나스의 율법에 있지 않았습니다.
구원은 한없이 초라해 보이는 ‘이 사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었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는 어떤 사람을 보려고 하는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리셨는데,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요?
사순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편견과 오만 그리고 교만과 이기심을 버려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참된 진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가르침의 핵심은 나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나의 욕망, 이기심, 자존심, 명예 그것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세상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복음은,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기적의 후일담입니다.
그 일은 그동안 예수님이 행하신 어떤 기적, 표징보다 적대 세력의 두려움을 자아냅니다.
그럴 수밖에요. 삶과 죽음은 인간 능력 밖의 문제,
즉 온전히 하느님의 영역임을 그들도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로마인들을 운운하며 자기들의 불안을 민족적 운명으로 확대하고
예수님에 대한 자기들의 공격 욕구를 합리화합니다.
그때 그해의 대사제 가야파가 말합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요한 11,50)
가야파의 예언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요한 11,51)이라고
복음사가는 전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말에는 그 자신도 의도치 못한 거대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선, 그는 예수님의 존재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저울 한쪽 접시에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 나아가 온 인류를 올려놓고,
다른 한쪽 접시에는 예수님을 올려놓은 채 평형을 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어 마땅한 미치광이 몽상가 죄인일 뿐이라고 규정해 놓고서도
대사제직에 부여된 영의 뜻을 자기도 모르게 발설했을 겁니다.
또한, 그분의 죽음이 "백성을 위한" 것임을 밝힙니다.
단순히 로마인들의 비위를 맟추기 위한 희생양 정도가 아니라,
죄악에 시달리는 인류를 "위한" 고귀한 죽음이 될 것임을, 자기도 모르면서 고백한 셈입니다.
독서인 에제키엘 예언서에서는 주님께서 바빌론 유배 중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려주시는 새 희망이 울려 퍼집니다.
"한 임금, 유일한 목자."(에제 37,22.24)
주님께서 세워주실 평화의 임금, 그분 종 다윗을 이을 새로운 통치자는
가야파 입을 통해 발설된 "한 사람", 곧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에제 37,23.27 참조)
옛날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계약의 말씀이 다시 갱신됩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이를 위해서 두 가지 제안을 하십니다.
첫째는,
"그들이 저지른 모든 배신에서 내가 그들을 구원하여 정결하게 해 주시리라."(에제 37,23)는 것이고,
둘째는,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에제 37,26)는 것입니다.
정결하게 하시고 백성 가운데의 성전 안에 현존하시리라는 이 약속은,
마침 오늘 복음에 드러난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적 관습에 잘 드러나 있지요.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많은 사람이
자신을 정결하게 하려고 ...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찾다가 성전 안에 모여"(요한 11,55-56)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신 하느님의 새 계약은
이렇듯 유다인들 종교 생활의 근간을 이루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제, 한 사람이 온 백성, 온 인류를 위하여 죽음으로써
시간과 공간, 육체와 신분, 이스라엘에게만 부여된 듯 자부했던
율법과 선민사상을 초월한 새롭고 영원한 계약이 체결될 것입니다.
잠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를 떠올려 봅니다.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온다."(요한 4,21.23)
유다인들이 사유화했던 정결례와 예루살렘 성전을 통한 하느님 현존의 계약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 희생 제사를 통해
그분 이름이 전해지는 곳 어디에나 확장되어 퍼져 나갈 것입니다.
육신의 소멸이 오히려 영의 자유로운 활동과 믿는 이들의 헌신으로 부활하기 때문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이제 파스카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이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에 잠시 숨을 돌리기는 하지만,
우리에게는 예수님과 함께 채워야 할 남은 고난이 있습니다.
그 유혹과 어둠의 시간을 예수님 수난과 발맞추어 성실히 완주할 수 있기를
서로 격려하면서 용기 북돋워 주면 좋겠습니다. 힘내십시오, 벗님!
내 방식이 꼭 최고는 아닙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를 무시하고 지나칠 때도 있지만 가끔은 버릇을 고쳐 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아니 버릇을 고쳐 주기보다도 혼을 내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엉뚱한 소리를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를 탓할 것이 아니라 그를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을
키우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유다인들은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행세를 하며 신성을 모독하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행동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하느님은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감히 인간 주제에 하느님의 행세를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인간이 아무리 훌륭해도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 예수가 하느님의 행세를 하였으니 돌을 맞을 일을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거나 따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요한10,26).
받아들이고 따르기 위해서는 마치 양 떼가 목자를 알아보고 따르듯
자기가 머물던 자리를 떠날 줄 아는 포기와 용기가 필요한데
유다인들에게는 자기 생각과 가치와 자존심이 그 무엇보다 소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양 떼 안에 들어가 목자이신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내맡기는
또 다른 양이 되길 거부한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이 될 수는 있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를 ‘육화의 신비’, ‘강생의 신비’라고 합니다.
강생은 우리를 위하여 인간이 되시기까지 한 사랑의 절정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같이 완전할 수는 없지만
완전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완전하게 이끌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처지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한없는 사랑으로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하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안에 계심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이웃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배척하고 적대시하는 이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의 이웃에 대한 시선도 그러해야 합니다.
자명한 것은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다면 영적으로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됩니다”(1요한4,12).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와 구원의 희망을 안겨 주었듯이
우리도 사랑으로 이웃에게 다가가서 기쁨과 평화, 위로와 희망, 구원을 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의 도구로 삼으시고 우리를 기대하십니다.
주님의 일을 함으로써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고 있음을 증거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전하는 이는 더 행복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하십시오.
유다인의 지도자들은 눈앞에 계신 하느님,
곧 예수님을 보면서 오히려 자신들 안으로 파고들었고,
자신들이 갖고 있던 기존 관념 안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좋은 일을 보지 않고
그저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사실에만 집착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내가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들에
마음을 열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롭게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려면 내 방식으로 나를 채우기보다 비워야 합니다.
그 빈자리에 주님께서 오실 것이고 주님께서 나의 모두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