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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느 한 곳으로 고개를 돌리던 소문은 땅이 꺼져라 한숨
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왜 그러느냐? 구경을 한다면서?”
구양풍은 갑자기 변한 소문의 행동에 의아심을 가지며 물었다.
“구경만 하려고 하였지요. 한데 저기를 보십시오. 누가 있는지.
젠장, 중원에 와서는 한시도 편히 쉴 날이 없다니까. 휘소나 잘
보고 계십시오.”
소문은 안고 있던 휘소를 구양풍에게 건네주더니 발에 걸린 돌
을 냅다 차버리고 장내로 걸어 나갔다.
“아니 도대체 있기는 누가 있다고… 흠, 있군.”
소문이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리던 구양풍은 그제 서야 볼 수
있었다. 한쪽 구석에 모여 있는 쟁자수들 중에서 그도 소문도
알만한 사내가 공포에 떨고 있었다.
“천리표국이었군. 하긴 이 정도 규모의 표행을 나설 표국이 중원
에 몇이나 되겠느냐 만은 하필 천리표국이라니. 네놈들도 참 운이
없구나.”
“아고야!”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린 소문의 눈에 곰방대를 돌리는 할아버
지의 모습이 들어왔다.
“왜 또 그러세요?”
“쯧쯧, 제 버릇 개 못준다고 여전히 멍청하구나!”
할아버지는 들고 있는 곰방대를 당장에라도 휘둘러 댈 것 같은
표정으로 소문을 바라보았다.
“저들은 제가 중원에 와서 처음 도움을 받은 천리표국의 사람입
니다. 도와줘야 된 다구요.”
“이놈아! 누가 돕지 말라더냐?”
“그런데 왜 그러세요?”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구나. 저 싸움터에 나가서
또 한바탕 검을 휘두를 셈이냐? 네놈의 어깨에 메고 있는 것은
궁이 아니라 그저 작대기에 불과한 것이더냐? 여기서 도와도
충분한 것을 굳이 나서려는 것은 무엇이냐? 그렇게 앞뒤 분간
못하고 덤비니 지난번처럼 박살이 나는 것이다. 이놈아!”
할아버지는 지난 만독문과의 싸움으로 인해 당가에서 당한 낭패
를 상기시키는 듯 했다. 딴은 그러했는지라 소문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곳에 와서 얼마나 솜씨가 늘었는지 보도록 하자. 우선 저놈!”
할아버지는 아무나 찍어 잡고는 곰방대로 몸을 가리켰다.
“살인은 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적당히 하거라,”
소문은 대답을 하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꺾은 나뭇가지를 시
위에 재었다.
퉁!
미세한 소리와 함께 시위가 튕겨지고 화살은 쏜살같이 목표로
하는 살수에게 날아갔다.
“으윽!”
힘겹게 버티고 있던 표두의 목숨을 끝장내려던 음자문의 살수는
난데없이 밀려오는 통증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들고 있던
무기를 떨군 사내는 공격을 멈추고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
런 사내의 어깨에 한 개의 화살이 꼽혀 있었다. 소문이 날린 화
살이 정확히 어깨를 관통(貫通)한 것이었다. 그런데 사내의 비
명과 함께 소문 또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욱!”
소문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속도로 고개를 돌렸다. 또 다시
자신의 머리를 강타한 할아버지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묻는 강
력한 의사표시였다.
“이놈아! 그렇게 평범하게 쏘면 저 녀석들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
야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 아니더냐.”
“그래서요?”
소문은 퉁명스레 대꾸를 했다.
“그래서요? 이놈이 말버릇 보게나. 어린애도 아니고 애아버지가
된 놈이 말버릇이 영!! 쯧쯧쯧, 휘소가 네놈의 뭘 보고 배울지
걱정이 되는구나. 어쨌든 저놈들이 알지 못하게 화살을 날리거라
. 괜히 이곳으로 몰려와 피곤하게 만들지 말고.”
말이야 그럴 듯 했지만 요지는 ‘움직이기 귀찮으니 알아서 해라’
였다. 그리고 소문에rps 적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궁술을 지니고
있었다.
‘앓느니 죽지.’
어떤 말이 나올지 몰라 내색은 하지 못하고 속으로 투덜거린 소
문은 철궁을 들어 거의 수직으로 세웠다.
‘그러나 저러나 오랜만이군. 이런 자세는. 잘 될라나…….’
퉁!
시위를 떠난 화살은 까마득히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얼마나 올
라갔을까? 정점에 이른 듯한 화살이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화살의 바로 아래에는 종남파의 제자와 치열한 격전을
펼치고 있는 두 명의 살수가 있었다. 이미 표사들을 전멸시킨
음자문의 살수들은 수적인 우위를 앞세워 두어 명씩 짝을 지
어 복마단의 무인들을 협공했다. 개개인의 무공으로 치면 살수들
보다 우위에 있었던 복마단원이지만 두 명, 세 명이 에워싸고
협공을 하자 손발이 어지러워 힘든 싸움을 하고 있었다.
“억!”
동료가 공격을 하는 틈을 타 적의 허점을 노리고 있던 살수는
갑작스런 통증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어느 틈엔가 무기를 들고
있는 어깨에 나뭇가지 하나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어깨에 나
와 있는 길이가 한 뼘에 불과 하나 밀려오는 통증을 감안할 때
드러난 길이보다 훨씬 긴 것이 몸에 박힌 것을 알 수 있었다.
“역시! 언제 보아도 너의 솜씨는 놀랍기만 하구나!”
“호오! 그 동안 놀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구양풍이 엄지손가락을 치며 올리며 찬사를 하자 할아버지 또한
짐짓 감탄의 탄성을 내뱉었다. 하나 그것이 감탄이 아님을 소문은
알고 있었다. 묵묵히 입을 다문 소문은 다시 세 개의 화살을
시위에 재었다.
퉁!
시위를 떠난 화살은 제각기 높이와 속도를 달리 하여 적에게 날
아갔다. 그리고 어김없이 들려오는 비명성! 소문이 날린 화살은
단 한발의 화살도 빗나가지 않고, 그것도 정확하게 무기를 들
고 있는 살수들의 어깨를 관통해 버렸다.
“대단, 정말 대단하다.”
일찍이 소문의 솜씨를 알고는 있었지만 절로 입이 벌어지는 것
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구양풍은 고개를 홰홰 돌리며 놀
라워했다.
“뭘 저 정도를 가지고 놀라워하나? 저것도 못하면 애초에 이곳
으로 보내지도 않았지.”
심드렁히 대꾸를 하는 할아버지의 음성에 그러나 약간은 자부심
이 담겨 있었다. 할아버지와 구양풍이 말을 나누는 사이에도 소
문의 손은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연신 시위를 떠난 화살은 자
유자재로 날아가 공격에 열을 올리는 음자문의 살수들을 무력화
시켰다. 소문이 잠시 철궁을 내릴 때까지 쓰러진 살수들의 수가
무려 스물이 가까이 되었다. 표사들을 상대하며 셋, 복마단을
상대하며 마흔이 죽거나 다친 것을 감안하면 잠깐 동안 등장한
소문으로 인해 입은 음자문의 피해는 실로 막대했다. 백 명의
살수들 중 이제 남은 자는 체 사십이 되지 않았다. 하나 이미 지
칠 대로 지친 복마단원들은 그들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
수도 처음보다 현격하게 줄어있음을 감안하면 음자문의 살수들의
수가 비록 반이 넘게 줄었지만 결코 상대할 수 없는 숫자였다
. 그러나 장내에서 더 이상 싸우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근 한시진이 넘게 치열하게 싸우던 배명과 전원삼의 싸움도
어느 샌가 멈추어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문이 아무리 은밀
히 화살을 날렸다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스물이 넘는 전력이
쓰러졌으니 바보들이 아닌 이상 눈치 채지 못할 그들이 아니었다.
“조심해라. 암수가 있다.”
배명은 화급히 명을 내려 수하들을 단속했다.
“훗, 대단하시오. 어느 틈엔가 저런 방비책을 마련하시고 말이
오.”
배명은 싸늘히 웃으며 전원삼을 노려보았다.
“하하, 피차일반이 아니겠소. 난 저들이 땅속에서 나올 줄은 생
각도 못했으니 말이오.”
전원삼은 음자문의 살수들을 바라보며 한껏 여유 있는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이 암수를 폈으니 우리 또한 준비를 했다.’ 라는
말이었는데 내심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 또한 어찌된 영문인
지 전혀 모르고 있기는 배명과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우리를 돕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누구인가?’
화살이 날아오지 않았지만 싸움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음
자문은 언제 어디서 화살이 날아올지 모르니 함부로 움직이기엔
무리가 있었고, 간신히 살아남은 복마단원은 더 이상 싸울 여력
이 없었다. 더구나 도움의 손길이 끊기기라도 한다면 말 그대로
그들은 절단이 날 상황이었다.
‘어찌 해야 하는가? 이번 표행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막으라는 명
이 떨어졌는데… 이대로 싸우다간 애꿎은 수하들만 죽게 생겼
으니. 그렇다고 여기서 그만 둘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배명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갈등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배명의 갈등을 단숨에 날려버린 사내가 있었으니 간신히
죽다 살아난 오상이었다. 정신없이 도망치던 오상은 잠시 기운을
회복했는지 공격을 멈추고 갈등하고 있는 음자문의 살수를
다짜고짜 공격하였다. 명령이고 뭐고 필요 없었다. 목숨이 오락
가락 하는 판에 가만히 당할 바보는 아무도 없었다. 동시에 오상
의 검을 막은 살수는 곧바로 반격을 개시했고 잠시 멈추어졌던
싸움은 다시 시작되었다.
“저런, 멍청한 자식!”
무공이 약한 사매를 돌보랴 자신에게 덤비는 적을 막으랴 남들
보다 세배는 부산히 움직였던 최진원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창피한 일이었지만 싸움이 이대로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저 멍청한 오상이 나서서 꺼져 가
는 불씨에 기름을 들이 붇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적의 공격은 다시 시작됐다. 최진원의 입에서 절로 욕이 튀어 나왔다.
싸움이 시작되었지만 배명은 전원삼을 상대하지 않았다. 전원삼
을 상대한 것은 다른 네 명의 살수들이었고 전원삼 자신은 주
변을 뚫어지게 살피고 있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전원삼
이 아니라 화살을 날리는 자들이 위치한 곳을 찾는 것이었다.
오늘 일의 성패는 자신이 얼마나 빨리 그들을 발견하느냐에 달
려 있다고 생각을 하였다. 배명은 자신은 물론이고 여유가 있는
몇 명의 수하에게도 적의 위치를 예의 주시하라고 일러두었다.
“크악!”
난데없는 비명이 터지고 또 한명의 살수가 어깨를 부여잡고 쓰
러졌다.
[발견하였느냐?]
[모르겠습니다.]
[별다른 이상이 없습니다.]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동쪽 하늘에서 날아 온 것처럼 보입니
다.]
배명과 함께 주변을 살피던 수하들은 재빨리 전음을 보내왔고
그 중 한명이 어렴풋이나마 화살이 날아온 곳을 알려왔다.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동쪽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살핀다.]
배명의 명령과 함께 수하들의 이목이 일제히 그곳으로 향했다.
“으악!”
그러는 동안 다시금 비명성이 들리고 동시에 보고가 올라왔다.
[동남쪽입니다.]
“이런!”
자신의 위치를 찾으려고 한다는 것을 어느 틈엔가 눈치 챘는지
적은 자신의 위치를 이동하며 공격을 하고 있었다.
“후후, 아무리 찾아 보거라. 너희들은 나를 절대로 잡지 못할 것
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이동을 하는 소문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배명이 전원삼과의 싸움을 하지 않고 주변을 살필
때부터 자신의 위치를 찾고자 한다는 것을 눈치 챈 소문은
재빨리 자리를 바꾸어 가며 화살을 날렸다. 예상대로 적은 자신
이 있는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고 소문은 간발의 차이로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일이란 항상 예기치 못한
곳에서 일어나는 법이었다.
“응애! 응애!”
살벌한 기운이 풍기는 싸움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배명은 재빨리 공격을 하던 살
수들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이러지는 침묵!
“이런, 착하지. 쉿! 쉿!”
당황한 구양풍과 할아버지는 잠에서 깬 휘소를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곁에 소문이 없는 것을 알았는지 휘소는 숲이
떠나가라 울어 젖혔다. 그러자 희미하게 들리던 아이의 울음소리
가 이제는 음자문의 살수의 귀에도 그리고 복마단원들에게도 확
연히 들려왔다.
“거기 있었군. 쥐새끼들 같으니!”
배명은 스산한 살기를 뿜으며 동쪽의 숲을 노려보았다. 겨우 십
여 장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숨은 적들에 철저히 농락당했다는
생각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더욱 커지고 결국 참다못한 구양풍과 할아버
지는 숲에서 걸어 나왔다. 공격도 하지 않았는데 적이 제 발로
걸어 나오자 배명은 의아심을 감출 수 없었다.
“당신들이 우리를 공격한 것이오?”
걸어 나온 노인들이 왠지 범상치 않아 보이는지라 긴장의 빛을
감추지 못한 배명이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하나 연신 아이를 달
래며 걸어 나온 노인들이 향하는 곳은 한 쪽 구석에서 떨고 있
는 쟁자수들에게였다.
“이보게. 대식이! 잘 있었는가?”
죽음을 생각하며 겁에 질려 있던 채대식은 갑자기 자신을 부르
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서 있는 노인, 구
양풍을 바라본 그는 반가움에 소리를 질렀다.
“어르신!”
“허허! 기억을 하고 있었네 그려. 그래, 어찌 지냈나? 아니지 그
건 나중의 문제고 지금 빨리 간단히 죽이나 좀 써 주게. 이 녀
석이 배가 고파서 그런지 난리를 치는구먼.”
“예?”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이상하게 구양풍을 바라본 채대식은
웬 노인의 품에 안겨 겨우 울음을 멈추고 있는 아이를 볼 수
있었다.
“어서 준비해 주게. 최대한 빨리.”
“예? 예… 그런데…….”
우선 대답이야 하였지만 상황이 상항인지라 채대식은 주변의 눈
치만을 살필 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 이들의 등장에 긴장을
했던 배명은 자신의 질문엔 대꾸도 없이 쟁자수에게 다가가
엉뚱한 요구를 하는 노인들을 바라보며 부르르 몸을 떨고 있었다.
“숨어서 암습이나 해대더니만 죽이라… 영감탱이들! 지금 그 말
이 이 상황에 맞는 말이라 생각하는가? 뭣들 하느냐! 쳐라!”
배명은 분노에 찬 음성으로 명을 내렸다. 그러자 안 그래도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화살에 공포에 떨던 살수들은 진한 살기를 내
뿜으며 덤벼들었다.
“어이쿠! 이놈들이!”
“애 놀란다. 소리는 지르지 마라!”
할아버지와 구양풍은 조금 전의 여유 있는 모습과는 달리 다급
히 몸을 움직였다. 물론 공격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그 공격으로
인해 간신히 울음을 멈춘 휘소가 또 다시 울지 모른다는 생각
을 해서였다.
“그나저나 소문이 놈은 뭘 하고 있는 것인지.”
“그러게 말입니다.”
적의 예봉을 피한 그들은 소문이 사라진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소문은 한가로이 자리를 잡고 앉아 상황을 지켜볼 뿐이
었다.
‘흐흐흐!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말았군. 어디 열심히 움직여들 보시
구랴. 난 여기서 구경이나 하려니. 크크크!’
소문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즐거워했다. 할아버지와 구양풍의
실력을 감안하면 저들이 떼로 덤벼도 휘소는 무사할 것이라는
생각에 아이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까지 자신만
이리 뛰고 저리 뛴 것이 못내 못마땅하던 그인지라 내심 고소
해 하고 있는 것이었다.
“숨어 있더니만 도망도 잘 다니는군!”
배명은 코웃음을 치며 도망을 다니는 두 노인을 바라보았다. 요
리조리 몸을 돌리며 도망을 다니는 그들을 수하들은 번번이 놓
치자 화도 치밀어 올랐다. 이미 복마단원들과의 싸움도 멈추어졌
고 모든 음자문의 살수들은 죽어라 노인들을 쫓고 있었다.
‘헛! 저 늙은이는!’
가쁜 숨을 몰아쉬던 오상은 두 노인 중 아이를 안고 앞서 뛰어
가는 노인을 바라보며 거친 숨을 들이켰다. 기억이 틀리지 않는
다면 일전에 화산파에서 자신이 궁왕으로 오인했던, 저 재수 없
는 소문보다 더 꼴 보기 싫은 노인네였다. 그러나 위기에 빠진
지금 그에겐 최고의 구원자나 마찬가지였다.
‘흥, 네놈들이 아무리 기를 쓰고 덤벼 보거라. 그 노인네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있는지. 흐흐흐!’
이미 할아버지의 실력을 맛본 오상이 노발대발하는 배명을 바라
보며 썩은 미소를 짓고 있을 때 도망만 다니던 할아버지와 구
양풍의 신형이 약속이나 한 듯 멈추어졌다. 그리고 들려오는 소리.
“응애! 응애!”
간신히 달랜 휘소가 또 한번 힘차게 울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이
들이 처음 움직일 때만해도 약간의 흔들림에 좋아한 휘소였지만
곧 자신이 잠에서 왜 깨어났는지 그리고 뱃속에서 올라오는
아련한 울림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몸이 반응을 했다.
“흐흐. 어디 더 도망을 가보시지. 쥐새끼 같은 영감탱이들 같으
니라고!”
배명은 끈적끈적한 살기를 흩뿌리며 노인들에게 다가갔다.
“쥐새끼라 했나? 제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니겠지요. 형님?”
“내 귀가 이상하지 않다면 쥐새끼라 부른 것이 틀림없는 것 같
네.”
몸을 돌린 구양풍은 자신을 쫓던 살수에게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다가가 무기를 빼앗고 발을 한번 놀리는 것으로 그의 정신을
암흑 속에 빠트렸다.
“쥐새끼라… 그 한마디로 네놈들의 운명은 결정 되었다.”
“암! 절대로 그냥은 넘어가지 못하지. 내 몫까지 해주게. 후~ 이
녀석을 달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 하구먼.”
한번 울면 끝장을 보는 휘소를 달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요즘 들어 자신들이 어르고 달래도 울음을 그
쳤지 처음 모옥을 떠나 올 때만해도 소문이 없으면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그 울음을 멈추지 못했었다. 그런 휘소가 다시 울음
을 터뜨렸으니 화가 날만도 했다. 할아버지는 휘소를 달래며 한발
뒤로 물러섰다.
“미친 늙은이들! 뭣들 하느냐. 당장 저 늙은이들의 입을 닫지 않
고.”
하나 배명의 명이 떨어지기도 전에 구양풍이 먼저 움직이고 있
었다.
“크윽!”
“하나!”
“헉!”
“둘!”
이미 무공이 그 정점에 오른 구양풍에게 특별히 초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가볍게 휘두르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났다. 단숨에 네 명의 살수들을 날려버린 구양풍의 움직임은 멈
추어지지 않았다.
“마, 막아랏!”
음자문의 살수들이 기겁을 하며 무기를 들어 구양풍의 공격을
막으려 하였지만 애초에 수준이 다른 구양풍이었다. 빈 옷소매를
펄럭이며 전광석화처럼 움직이는 구양풍의 모습은 토끼 떼에
둘러싸여 날뛰는 대호(大虎)를 연상시켰다. 음자문의 살수들이
실력이 약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기가 죽을 대로 죽고 기세가
꺾여 본신의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이, 이익! 정신을 차려라!”
배명은 분기탱천하여 구양풍에게 달려들었다. 배명의 실력은 역
시 단연 발군이었다. 장난감 가지고 놀 듯 살수들을 휩쓸어 가던
구양풍은 배명의 공세에 막혀 잠시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호오~ 그나마 조금 났군.”
“헛소리 하지 마라.”
구양풍이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한 배명은 연신 절초를 사용하면
서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고 구양풍의 요혈(要血)만을 집요하게
노리면 거세게 공격했다. 배명의 가세로 기세가 오른 나머지
살수들도 살수 특유의 장점을 살려 기습을 준비했다.
“이크크! 위험하군. 위험해.”
자신을 노리는 공격이 매서워 짐을 느낀 구양풍은 연신 소리를
지르며 방어에 치중했다. 하나 그의 얼굴엔 조금도 난처한 빛이나
수세에 몰려 위급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말을 들어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예상대로 뛰어난 솜씨를 지녔
어.”
할아버지는 구양풍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오래전의 이야
기였지만 강호에 내려오는 구양풍의 전설은 아직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었다. 더구나 지금 그가 만든 패천궁이 강호를 휩쓸
고 있으니 그는 잊혀질래야 도저히 잊혀질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지요. 참 대단한 분이라니까요.”
언제 왔는지 할아버지의 곁에는 소문이 다가와 있었다. 소문의
품에 안겨 있는 휘소 또한 울음을 멈추고 웃고 있었다.
“형님, 이놈이 언제 울지 모르니 빨리 준비해 주세요.”
“하하, 알았네.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게. 금방 준비 할 터이니.”
오랜만에 소문을 만난 채대식은 신바람이 났다. 당장 죽을 줄 알
았건만 소문과 구양풍이 나타나다니! 소문이 어떤 인물인지 소
문을 들어 익히 알고 있던 채대식이기에 더 이상 목숨 걱정을 하
진 않았다. 또한 말 하는 것을 들어보니 소문의 옆에 서 있는 노
인이 말로만 듣던 소문의 할아버지인 모양이었다. 소문을 키운
할아버지가 약할 리가 없는 법, 더욱더 안심이 되었다. 분위기를
파악한 다른 쟁자수들 또한 희색이 만연하여 안심을 하고 죽
을 끓이는 채대식을 돕고자 나섰다. 한쪽은 생사를 가늠하는 치
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다른 한쪽에선 아이에게 먹일 죽을 끓이는
묘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한편 싸움도 죽도 끓이지 않고 있는
복마단원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한곳에 모여 구양풍과 음자문의
싸움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매! 정말 대단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지 않아? 어떻게 하면 저
토록 빠른 몸놀림과 정확한 공격을 할 수가 있는 것이지?”
“글쎄요. 사형도 언젠가는 저렇게 되지 않을까요?”
자신을 보호하느라 남들보다 두 배는 험한 싸움을 한 최진원의
곁에 앉은 차상일은 한껏 사랑스런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저 노인의 실력은 보통 평범한 것이 아니야. 저렇게 많
은 적을 상대하면서도 한번도 피를 보지 않고 있어. 보아하니
칼등으로 기절을 시키는 모양인데 얼마나 여유가 있으면 저렇게
싸울 수가 있는 것일까?”
“강호엔 우리가 알려지지 않은 무수히 많은 기인인사들이 있다
고 사부님이 늘 말씀하셨잖아요.”
“그런 것 같아. 정말 대단해.”
최진원은 구양풍의 움직임에 눈을 떼지 못하고 대답을 하였다.
그때였다.
“헛, 저 사람은!!”
살아남은 몇 되지 않은 인물 중 종남파의 제자 하나가 휘소를
안고 있는 소문을 바라보며 기겁을 했다.
“소란 떨지 마라!”
이미 할아버지의 곁에 소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오상이 나
직한 음성으로 나무랬다.
“저, 저 사람은 궁귀, 을지 소협이 아닙니까?”
때마침 종남의 제자가 가리킨 곳을 바라본 화산의 제자가 놀라
소리쳤다.
“궁귀?”
“을지소문!”
최진원은 물론이고 나머지 복마단원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려 소
문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이를 안고 연신 어르고 있는 청년, 남
들보다 키가 한 뼘은 더 컸고 등에는 철궁을 매고 있는 그는
강호에 그 명성이 자자한 을지소문이었다.
“정말 을지 소협이로구나!”
“어쩐지 조금 전의 활은 그가 날린 것이로군. 예사 솜씨가 아니
라더니”
소문을 알고 있던 몇 몇의 무인들이 밝은 얼굴로 말을 하였다.
“저자가 궁귀란 말이오?”
소문으로만 들었지 아직 직접적으로 소문을 보지 못했던 최진원
이 흥분을 하며 물었다.
“그렇소이다.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는 틀림없는 궁귀 을지
소협이오.”
“저렇게 젊었단 말인가!”
최진원은 절로 감탄성을 내뱉었다. 소문으로 들어 알고는 있었지
만 젊어도 너무 젊었다.
패천궁과 구대문파의 뭇 고수들을 연파하고 백팔나한진에 단독
으로 덤볐던 사내.
정도의 명숙들을 상대할 때 보여줬던 단 한번의 검법은 이미 전
설이 되어 백도의 후기지수들에겐 우상과 같은 존재가 된지 오
래였다. 그런 그가 갑자기 은거를 하여 많은 추측을 불러일으키더
니 바로 오늘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었다.
“흥!”
사람들이 감탄과 감격을 하면 할수록 오상의 심기는 불편해 졌
다. 아직도 화산에서 소문에게 당한 망신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어디 두고 보아라. 내 반드시 너의 명성을 뛰어 넘는 인간이 될
것이니.’
한편 구양풍과 음자문의 싸움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애초에
싸움이 되지 않았던 상황이었기에 배명의 가세로 잠시 힘을 찾
았던 음자문은 곧 이어진 구양풍의 반격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 삼십이 넘는 살수. 아무리 구양풍이라도 약간은 애를 먹을
숫자였지만 한시진이 넘게 이어진 싸움의 피로와 구양풍의 절대
적인 강함에 전의를 상실한 그들은 살수 특유의 끈질김과 악을
살리지 못하고 점점 구석으로 몰리고 있었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배명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단 한명의 노인에게 자
신을 포함하여 삼십이 넘는 살수가 제대로 된 힘도 써보지 못
하고 이토록 처절하게 당할 수 있단 말인가! 도저히 용납할 수도
믿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크아악!”
수하의 단발마가 숲에 울려 퍼지고 구양풍이 몸을 돌렸을 때 배
명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사람이 자신과 노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 또한 곧 차가운
땅에 누운 수하들처럼 되리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구차하게
덤비느니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 났다는 생각을 한
그는 들고 있던 무기를 집어 던졌다.
쨍그랑!
“졌소!”
배명의 음성은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사부의 손에 이끌려 살수의
수업을 받은 지 삼십년, 이토록 허망하게 무너진 적이 있던가?
단연코 없었다. 그는 동료들 보다 항상 앞섰고, 열다섯 번의 힘
든 살수행을 간단하게 성공시켰다. 그런 능력을 인정받아 음자
문의 문주이자 사부인 부인곡의 총애를 한껏 받아왔는데… 그
런 자신이 이런 꼴이 될 줄이야!
패배를 인정하는 배명의 눈에선 굵은 눈물이 흘러나왔다.
“쯧쯧, 당연한 것을 가지고 눈물은. 그리고 저들은 적당히 사정
을 봐 주었으니 정신을 차리거든 데리고 돌아가도록 하여라. 오
랜만에 힘을 썼더니 몸이 개운하구나!”
구양풍은 멍청히 서 있는 배명을 뒤로 하고 소문과 할아버지의
곁으로 다가왔다.
“하하, 대단하십니다. 구경 잘 했습니다.”
“흥, 네 녀석이 공격을 멈출 때부터 알아봤다. 고얀 놈 같으니.”
“그 덕에 확실히 몸을 풀지 않았습니까? 너무 몸을 사리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시끄럽다. 사탕발림은 듣고 싶지 않으니 그만 하고 어디 가서
물이나 한 사발 구해 오너라. 잠시 몸을 움직였더니 목이 컬컬
하구나.”
“하하, 알았습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싸움이 끝나자 전원삼은 몸을 돌려 허탈하게 서 있는 사람들을 바라
보았다. 표물은 무사히 지켰다지만 당해도 너무 심하게 당했다. 이
끌고 온 표사들 중 살아남은 자가 있나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어쩌다. 일이 이지경이 되었는지… 표물을 지켰다지만 표국의 근간
인 이들이 이리 많이 희생되었으니 이제 어찌 하여야 하는 것인가!’
“국주님! 괜찮으십니까?”
전원삼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화급히 몸을 돌렸다.
“자네! 살아 있었군.”
“하하! 제가 저 정도 살수들에게 당할 줄 아셨습니까?서운합니다.”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대꾸를 하는 연성문은 그러나 자신감 있는
말과는 다르게 꼴이 말이 아니었다. 입고 있는 의복은 이미 걸레가
된지 오래였고 몸 이곳저곳에 흉한 상처들이 도배를 했다. 그러고도
저리 움직일 수 있다니 참으로 대단한 의지를 지닌 사내였다.
“다행이네. 정말 다행이야.”
전원삼은 다가온 연성문의 손을 잡고 눈시울을 붉혔다.
“어쨌든 표물은 무사합니다. 다만 살아남은 표사가 일곱, 표두가 저
까지 둘입니다. 살아남기는 했어도 나머지 부상이 심해 거동이 불가
능합니다.”
어느새 조사를 했는지 연성문은 피해규모를 설명하였다. 비록 담담하
게 말을 하고 있었지만 은은히 떨리는 목소리엔 슬픔과 분노의 기
운이 흐르고 있었다. 그걸 감지하지 못할 전원삼이 아니었다.
“되었네. 그렇게라도 살아주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지만 표국이…….”
“괜찮네. 내가 괜한 고집을 부려 이 먼 곳까지 표행길을 떠나 많은
표사들이 죽고 말았구만.”
“아닙니다. 무슨…….”
“그만 하세나. 자네는 우선 쟁자수들을 시켜 저들을 돌보고 주변을
수습토록 하게나. 나는 잠시 인사를 드리고 오겠네.”
전원삼은 연성문에게 주변 정리를 부탁하고 소문의 일행이 있는 곳
으로 걸어갔다.
“그나저나 강량 어르신과 다른 형님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분들은
이번 표행에 나서지 않으신 것입니까?”
소문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게…….”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니면 일을 그만 두신 건가요?”
“강량 어르신과 그들은… 다 죽었네.”
채대식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힘없이 대꾸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죽다니? 도대체 누가 죽었다는 말입니까?”
화급히 반문을 하는 소문의 전신은 싸늘하게 식어만 갔다.
“자네가 떠난 뒤 천리표국에선 가능하면 강남으로 표행을 나서지 않
았네. 위험했기 때문이지. 그런데 몇 달 전부터 강북에서도 좀처럼
안전한 표행을 나설 수가 없었네. 저들이 계속해서 공격을 했기에
표행에 성공하는 예가 드물었네. 그래도 인명은 해치지 않고 표물만
을 건드리던 저들이 한번은 표사들은 물론이고 쟁자수들까지 모조리
죽인 적이 있네. 그때 강량 어르신을 비롯하여 모든 친구들이 죽었지
. 다만 나는 집안 일로 인해 표행에 따라나서지 않았다가 이렇게
목숨을 부지 하고 있지만 말이네.”
“그런 일이…….”
두 눈을 감은 소문의 뇌리에 처음 표국에 들어온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주던 그들의 얼굴이 하나씩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그가 눈을 떴을
때는 자연적으로 고개가 음자문의 살수들에게 향해졌다. 구양풍에
게 당한 그들은 여전히 땅에 쓰러져 있었고 간신히 정신을 수습한
몇 명만이 일어나 동료들을 돌보고 있었다.
“아서라. 어차피 지나간 일이다. 네가 저들을 어찌 한다고 하여도그
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저들 또한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 아니더냐?”
조용히 지켜보던 할아버지가 소문을 말리고 나섰다. 소문의 전신에 살
기가 깔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형님 말씀이 맞다. 그러니 살기를 가라앉혀라. 휘소가 놀라지 않느
냐?”
소문이 자신도 모르게 일으킨 살기가 품에 앉고 있는 휘소에게 전달
된 모양이었다. 본능적으로 겁에 질린 휘소는 울지도 못하고 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런!”
깜짝 놀란 소문은 일으켰던 살기를 풀고 놀란 휘소를 달래야만 했다.
“쯧쯧, 저러다 애하나 잡지. 앞뒤 분간 못하는 것은여전하다니까.”
할아버지는 혀를 차며 못 마땅해 했다. 그때 조심스레 소문의 일행에
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은혜에 뭐라 감사들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
다.”
사실상 싸움이 끝이 나자 인사를 하기 위해 재빨리 다가왔지만 소문
과 할아버지의 대화가 이어져 잠시 지체했던 천리표국의 국주 전원
삼이었다.
“인사는 무슨. 손주 놈이 과거에 천리표국에 은혜를 입었다 하여 도
운 것뿐이라오.”
할아버지는 마주 인사를 하며 대꾸를 했다.
“저 친구가 그 유명한 궁귀 을지소문입니다. 지난날 잠시 저희 표국
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전원삼의 곁으로 다가온 채대식이 재빨리 설명을 했다.
“아! 과거에도 녹림도로부터 표행을 지킨 적이 있었던…….”
“그렇습니다.”
“허허, 이렇게 거듭 은혜를 입었네.”
전원삼은 소문에게 포권을 하며 인사를 했다.
“그, 그게…….”
휘소를 안고 있어 마주 인사를 하기도 뭐한 소문이 우물쭈물 거리자
할아버지가 대신 나섰다.
“은혜랄 것도 없소. 그런데 보아하니 저들이 어째서 표국을 공격하는
것이오?”
할아버지의 질문에 전원삼은 안타까운 음성으로 대답을 하였다.
“후~ 사실 저들과 저희는 별다른 관계도 없습니다. 다만 중원에 산
재한 표국의 대부분이 구파일방이나 백도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본
산에서 필요한 생활비용을 조금 충당하는 편이지요. 그런데 백도와
싸움이 벌어지자 패천궁에선 백도의 자금줄을 저희 표국으로 판단하
고 무차별적인 공격을 하는 것이지요. 벌써 많은 표국들이 문을 닫
고 피해를 입었습니다.”
“저런, 쯧쯧.”
“벌써 저희 표국도 몇 차례 표행에 실패하여 위기에 몰리고 있었습
니다. 하여 표국의 명운을 걸고 이번 표행에 임한 것인데… 결국 이리
되었습니다.”
전원삼의 안색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고래싸움에 새우등이 터진다고 어쩌다 불똥이 이리 튀었는지 모르
겠습니다.”
“강한 자들이 싸우면 원래 그 주변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법이라오.”
“그나마 도움을 주셨기에 이 정도로 끝날 수 있었습니다.”
“무슨 말을!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오. 인사는 이쯤 해 두고저들이
나 보살피는 것이 좋을 듯 하외다. 보아하니 많은 표사들이 당한 것
같은데…….”
“예.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전원삼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이때만을 기다
렸다는 듯이 밀어닥치는 사내들이 있었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복마단, 아니 정도맹을 대신하여감사드
립니다. 저는 청성파의 최진원이라 합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최진원이 앞서 인사를 하자 뒤따라온 무인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
다.
“허허, 무슨 말을. 사해는 동도가 아닌가? 너무 어려워하지 말고 편
히 대하도록 하게나.”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는 이들을 바라보며 기분이 좋아진 할아버지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일일이 인사를 받아주었다.
‘나참, 재주는 곰이 부린다더니 싸운 것은 나와 구양영감인데 인사는
할아버지가 받는구나!’
어차피 공치사(功致辭)를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저렇듯 할아버
지가 나서서 모든 공을 차지하자 약간 반발이 생긴 소문은 슬쩍 구
양풍을 바라보았다. 예상과는 달리 구양풍은 그런 것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저 채대식이 준비해온 술만 들이키며 기
꺼워 할 뿐이었다.
“위명은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청성의 최진원이라 합니다. 이쪽은
사매인 차상일입니다.”
“예. 저는 을지소문입니다.”
할아버지와 말을 마친 최진원이 다가와 인사를 하자 할아버지에게
재빨리 휘소를 넘긴 소문은 마주 포권을 하며 인사를 했다.
“화산에서 은거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언제 다시 강호에 나선것입니
까?”
“하하, 말씀을 들으니 제가 마치 대단한 인물이나 되는 것처럼 들립
니다. 단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잠시 머문 것이지 은거는 당치
않습니다.”
소문이 손사래를 치며 대답을 했다.
“아무튼 이렇게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협의 도움이 아니었으
면 천리표국과 저희는 오늘 여기서 뼈를 묻을 뻔 했습니다.”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소문이 제법 겸양을 차리며 말을 하고 있을 때 그를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이제 그만 떠나도록 하자. 피내음이 진동을 하는구나. 우리야 상관
없지만 휘소에겐 그 다지 좋은 영향을 줄 것 같지 않으니 그만 떠
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저들도 뒷 수습을 해야지. 우리가 시간을
빼앗으면 안 될 것이다.”
“저들은 어찌 하지요?”
소문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있는 음자문의 살수들을 바라보았다. 대
답은 구양풍이 대신했다.
“저들도 무인이라면 무인, 한번 패했으니 다시 덤비지는 않을 것이
다.”
구양풍은 마치 배명이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을 하였다. 배명은
그런 구양풍은 지그시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알겠습니다. 그리 하지요.”
구양풍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소문이 대답을 하고 휘소를 다
시 안아 들었다.
“상황이 이리 되어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죄송합니
다.”
재빨리 다가온 전원삼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했다. 뻔한 상황
이기에 인사를 드리게 남아달라느니 하는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아니외다. 경황이 없을 것인데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일을보
시오. 어서 가도록 하자.”
할아버지는 몸을 돌려 걸으며 소문을 재촉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소문 또한 전원삼과 복마단의 무인들에게 인사를 하고 아쉬워하는
그들에게서 몸을 돌렸다. 할아버지와 구양풍은 벌써 한참을 앞서 걷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머리 위에는 유일하게 잡을 줄 아는 참새 한
마리를 잡아와 즐거워하는 철가면이 날고 있었다. 소문은 그런 철가
면의 모습에 어이없어 하며 발걸음을 빨리 했다.
“그가 출도했으니 강호에 또 한번 회오리가 몰아치겠구나!”
멀어지는 소문을 바라보던 최진원이 조용히 읊조렸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글쎄, 우리와 함께 패천궁과 싸워준다면 더 큰 힘이 없을것인데.”
“흥, 저자는 우리와 함께 싸울 수 없소. 지난날 화산에서 저자가 저
지른 무례는 생각하지 못하시? 혹 저자가 정도맹에 들어온다 하여도
우리는 절대로 받아들이지 못하오.”
전원삼과 복마단의 무인들이, 더구나 종남파의 제자들까지 소문의 일
행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러 갈 때도 인사는커녕 분노에 찬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던 오상이 소리쳤다.
“절대로 그렇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오.”
‘멍청한 놈! 우리라는 말은 하지 말고 그냥 네놈이라고 해라.한심해
서는!’
최진원은 아무런 말도 없이 앞에 서 있는 오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
다. 종남파의 관계를 생각해 말은 하지 않았지만 보면 볼수록 한심한
인간이었다.
‘종남파의 미래가 보이는구나! 암울한 미래가!’
강남을 석권하고 강북의 일부를 점령하고 있는 패천궁은 크게
세 곳으로 세력이 나누어져 있었다. 애초에 패천궁이 세워졌던
본성과 강남을 정벌하고 새로이 지은 강남 총타, 그리고 무
당파와 제갈세가의 연합을 격파하고 확보한 제갈세가에 세워진
강북 총타가 그곳이었다.
복건성에 있는 패천궁은 그 상징적 의미로써 매우 중시되고 있
었지만 최소한의 병력만이 남아 지키고 있을 뿐이었고 대부분의
병력은 이미 호남의 애주부에 위치한 강남 총타와 직접적인
전장 터와 연계되어 있는 강북 총타에 집중되어 있었다.
특히 패천궁의 궁주인 관패가 머물러 있는 강남 총타는 패천궁
의 무인들을 비롯하여 그 동안 몰려든 흑도의 기인인사들과
여러 문파의 우두머리들이 모여 있어 사실상 전 흑도의 중심부
가 되어 있었다.
그런 용담호혈에서도 가장 신성시 되고 경계가 삼엄한 곳, 바로
궁주인 관패가 머물고 있는 지존각(至尊閣)이었는데 관패와 귀
곡자는 초저녁부터 머리를 맞대고 뭔가를 한창 논의 하는 중
이었다.
“그래, 잘 일러두었는가?”
“예. 거세게 반발은 하였지만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 놓았습니다.”
“반발이라… 쯧쯧, 좌우지간 뭘 모르면서 곧 죽어도 자존심을
세우기는!”
관패는 영 못마땅한지 안색을 찌푸렸다.
“하하, 그 정도 자존심도 없어서야 살수계를 지배했겠습니까?
당장 죽더라도 동료의 복수는 하고자 하는 것이 그쪽 방면 무
인들의 특징입니다.”
귀곡자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대꾸를 했다.
“나도 아네. 하나 너무 빤히 보이지 않나? 그들이 백 명이 아니
라 천명을 동원해 보게. 그런다고 그 친구가 눈 하나 깜빡할 줄
아는가? 모르긴 몰라도 공격을 한 살수치고 제명에 죽는 자
가 아무도 없을 걸세.”
“그래도 음자문의 살수라면 가능성이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
아닙니까?”
귀곡자가 혹시나 하여 물었다. 그러나 관패는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것도 어느 정도의 무인에게나 통하는 것
이지. 그 친구 같이 절대의 경지에 이른 자에겐 그딴 암수야
아무것도 아니지. 게다가 그 친구 못지않은 고수가 두 명이나 있
지 않은가?”
“전대 궁주님께서야 설마 나서시겠습니까?”
“자네 말도 일리가 있지만 그것도 장담은 못하는 일이네. 무슨
바람이 불어 어떻게 행동하실 지는 오직 사부 본인만이 알고
계시지.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들과 동행을 하시는지. 휴~”
관패는 난처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분 나름대로 뜻이 있으시겠지요. 설마 저희와 적대시 하시겠
습니까?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거야 그렇지만 몰래 궁을 떠나시고자 제자에게 반역까지 하
게 하시고는 저렇게 공공연히 나서시니 사부가 무엇을 원하는지
도무지 그 속내를 알 수가 없으니 그저 답답해서 하는 말이네.”
그랬다. 이미 구양풍이 살아 있는 것과 관패가 벌인 일련의 일
들이 모두 사제지간의 계획된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패천궁의
수뇌들은 아무도 없었다. 굳이 감추려고 하였다면 모르되 구
양풍이 공공연히 모습을 드러냈고 때로는 패천궁의 무인들과
충돌까지 하게 되자 관패가 수뇌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예 모든
사실을 털어 놓은 것이었다.
처음에야 적지 않은 혼란이 있었지만 어찌 보면 그 당시 패천
궁의 상황엔 그것이 최선이었음을 상기한 이들은 아무런 불만도
없이 지금의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다만 직접적으로 구
양풍을 치는데 관여한 귀곡자와 혈참마대의 대주 냉악만은 관패
에게 서운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죽음을 각오하고 일을 성사시켰는데 그것이 한낱 연극이었다면
허탈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관패는 궁주라는 체면을 버리고 거듭 사과를 함
으로써 모든 일을 원만히 수습할 수 있었다.
“어쨌든 아까운 기회를 놓쳤습니다. 이번 표행만 막을 수 있었
다면 천리표국을 무너뜨리는 것은 물론이고 백도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자금줄을 끊을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상관있겠나? 어차피 항상 성공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계속
해서 표행을 방해하면 좋은 소식이 있겠지.”
아쉬워하는 귀곡자와는 달리 관패는 그저 덤덤하게 말을 하였
다.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니?”
“지금부터는 더 이상 표행을 공격하는 것을 자제를 해야겠습니
다.”
“어째서? 그것만큼 백도의 자금줄을 끊는 것은 없다고 주장하
지 않았는가?”
관패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해했다.
“관에서 저희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관에서?”
관패가 깜짝 놀라 반문을 하자 귀곡자는 어쩔 수 없었다는 표
정으로 대답을 했다.
“관에서 저희를 관찰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무당파와 싸움을
벌이면서부터 입니다. 궁주님께서도 아시다시피 관에서 정식으로
인정하고 약간이나마 지원하는 곳이 소림과 무당입니다. 그런
곳과 싸움을 벌였으니 비록 무림의 일이라 끼어들지는 않았
지만 저희를 주의 깊게 살핀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러던 중 저희가 표행에 나서는 표물을 습격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듯싶습니다. 문파끼리의 싸움이라면 끼어들
명분이 없지만 표국은 문파라 보기엔 문제가 있습니다. 더구
나 표국들이 피해를 우려하여 너도나도 표행을 거부하고 나서
자 제때에 물건을 나르지 못하는 장사치들이 관에 하소연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관에서도 더 이상 외면하지 못하고 이
일에 끼어들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흠, 관이 끼어든다? 무림의 일에?”
“표국의 문제는 무림의 일과 별개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틀림없습니다.”
귀곡자는 단언하듯 말을 했다. 그러나 관패의 안색엔 별다른 변
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면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애초에
백도의 자금줄을 끊는다는 뜻은 좋았지만 그 방법으로 표행단을
습격한다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네. 잘됐군. 이참에 그 일
은 그만 두도록 하게. 그러면 관에서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
지 못하겠지.”
어쩔 수 없이 허락을 했지만 처음부터 이 같은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관패는 힘도 들이지 않고 대꾸를 했다.
“자네의 안색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은 것을 보아하니 다른 생
각이 있는 듯한 모양인데 말해보게.”
별로 신경을 쓰지 않기는 귀곡자 역시 마찬가지인 듯 했다.
“이미 상당한 효과를 얻었으니 지금 그만둔다 해도 손해 날 것
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시기도 어느 정도 무르익었습니다.
지난날 입은 피해도 모두 복구를 했고 지금 저희들의 힘은 유래
가 없을 정도로 강력합니다. 이제는 궁주님의 결정만이 남
았습니다.”
처음으로 관패의 표정이 바뀌었다.
“결정이라…….”
귀곡자는 관패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길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 이정도의 결과에 만족
하고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중원을 이분하여
정도맹과 패천궁이 지배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무엇인가?”
귀곡자의 말을 끊고 관패가 물었다.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분위
기였다.
“궁주님도 짐작하시리라 믿습니다. 당연히 전면전입니다. 많은
피해가 따르겠고 또한 절대적인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 육 할의 승산은 있는 싸움이 될 것입니다.”
귀곡자는 말을 마치고 조용히 대답을 기다렸다.
“흠, 그러니까 ‘안주(安住)냐? 도전(挑戰)이냐?‘ 하는 말이로군.
자네는 내가 어찌 하리라 보는가?”
“…….”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귀곡자는 입을 다물었다.
“지난번에도 말하지 않았나. 애초에 이 정도에서 멈추려면 시작
도 하지 않았다고. 비록 정상적인 상황에서 궁주의 지위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싸움을 시작한 것은 바로 나네. 당연히 도전을
해야지 안주라니 어림도 없지. 또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도
전이 아닌가? 그리고 나는 그 도전이 성공하리란 확신을 가지네.”
관패의 말은 단호했다.
“물론입니다. 저 또한 궁주님께서 반드시 중원일통을 하시리라
믿습니다.”
귀곡자는 당연하다는 듯 길게 읍을 함으로써 관패의 말에 지지
를 표시했다.
“결정을 하셨으면 바로 시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이네.”
관패의 고개가 천천히 힘차게 끄덕여 졌다.
조용했던 지존각에는 순식간에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몰려들었
다. 결심이 선 이상 그 시기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귀곡자의
의견을 받아들인 관패가 전격적으로 수뇌회동을 소집했기
때문이었다.
“적지 안이 늦은 시간에 이렇게 모이시라고 하여 미안합니다.”
장내가 정리되자 중앙의 태사의에 앉아 이들을 기다리던 관패
가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이 시간에 저희를 부르신 데에는 틀림없이 중요한
일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강북 총타를 천수유에게 맡기고 잠시 뒤로 물러나 있던 궁사흔
이 미소와 함께 말을 받았다.
“그렇습니다. 궁주님께서 갑자기 이런 자리를 마련하신 것은 중
대한 결정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좌중의 모든 눈동자가 귀곡자를 향했다. 크게 심호흡을 한 귀곡
자는 서서히 입을 열었다.
“궁주님께서는 지난날 피치 못해 멈추시었던 강북을 다시 한번
도모하시겠다는 결심을 하셨습니다.”
“오!”
“드디어!”
귀곡자의 말에 좌중은 저마다 탄성을 지르며 흥분을 했다.
“그래, 그 시기는 언제로 정하셨습니까?”
흥분에 휩싸인 좌중의 분위기와는 달리 궁사흔의 질문은 차분
히 가라앉아 있었다. 지난번 싸움의 총 지휘자였던 그로서는
백도의 전력이 실로 만만치 않음을 알기에 다소 염려스런 목
소리였다.
“내일입니다.”
“헛! 내일이란 말씀이시오? 너무 이른 것이 아닙니까?”
궁사흔은 미처 예상치 못한 대답에 몹시 놀라며 관패를 바라보
았다.
“하하! 태상장로님께서도 예상치 못하는 것을 저들이 어찌 예상
하겠습니까? 또한 이미 오래 전에 공격의 모든 준비는 끝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물론 아직도 부족한 점이 있겠지만 완벽을 기하다가는 저들의
대비 또한 철저해 지리라 믿습니다. 어차피 시작될 싸움이라면
전광석화 같은 기습을 통해 기선을 제압하는 것도 좋으리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 제 말을 따라주십시오.”
“흠. 알겠습니다. 제가 놀란 것은 궁주님의 명에 다른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 시기가 너무 급박해 보여서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보아하니 이미 모
든 계획이 수립된 모양이니 이 늙은이가 그리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듯싶습니다.”
궁사흔은 관패의 옆에 시립해 있는 귀곡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태상장로께서 제 말을 따라주신다니 마음이 든든
합니다. 하하하!”
관패는 궁사흔의 말에 크게 웃으며 기뻐하였다. 어느새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관패와 궁사흔의 대화를 지켜보던 좌중의
인물들도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패천궁의 궁주는
관패였지만 태상장로인 궁사흔의 힘 또한 그에 못지않게 대
단하였다. 그런 궁사흔이 관패의 명에 반발을 하면 제대로 일이
처리될지 의문이었다. 하나 그런 염려와는 달리 궁사흔은 기
꺼이 관패의 뜻에 동조를 했다. 그 또한 자신이 관패와 대립했을
때 야길 될 수 있는 위험을 알고 있었고, 또한 관패라는 인물
을 오랫동안 지켜보아왔기에 그가 패천궁의 궁주로써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믿고 맡기는 것이었다.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 설명을 하고 조언을 구하도록 하게.”
귀곡자에게 명을 하는 관패의 음성은 다른 어느 때보다 힘이
있었다. 궁사흔의 동의를 얻은 관패로선 더 이상 걸리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관패의 명을 받은 귀곡자는 중원의 지형이
그려진 지도를 펼치고 간단한 설명을 시작했다.
“호북에는 우리 패천궁의 강북총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곳
에 책임자는 여기 계신 태상장로시지만 지금은 잠시 천수유
장로님께서 맡고 계십니다. 병력은 냉악이 이끄는 혈참마대와
흑기당을 중심으로, 만독문 지옥벌의 무인들이 포진되어 있습니
다. 사실상의 최전선이기에 항상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습
니다. 당연히 모든 공격의 준비를 마쳤다고 보시면 정확합니다.”
“적들도 대비를 하고 있지 않겠소이까? 호북에 상당히 큰 진지
가 있다고 들었는데?”
현 지옥벌의 벌주를 맡고 있는 해구신이 물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강북에 넓게 퍼져 있는 비혈대의 보고에 따
르면 저들 또한 호북에 정도맹의 전진기지를 두어 외견상으로는
저희와 맞서고는 있지만 그 인원은 몇 안 된다고 합니다. 사실
상 저들은 호북을 포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란 말이지
요. 저들은 모든 전력을 정도맹이 있는 하남성에 집결하고
있습니다.”
“흠, 그럼 이번에 어찌 공격을 하려 하시오? 지난번처럼 화산이
나 아니면 다른 곳을 우회하여 공격을 하는 방법을 쓰려 하는
것이오?”
마검사 뇌우현의 질문을 받은 귀곡자는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
다.
“모든 계책은 한번 사용하면 다음에 사용하기가 힘들지요. 또한
지난번에는 본궁의 전력이 저들을 압도했기에 병력을 양분할 수
있었지만 이번엔 조금 힘듭니다. 자칫 크게 병력을 분산하여
공격을 하다가는 모든 힘을 한 곳으로 집중한 저들에게 큰 낭
패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럼?”
“그렇습니다. 이번에야 말로 전면적이 힘 싸움이 될 것입니다.
본궁이 무너지든가 아니면 저들이 무너지든가 말이지요. 그러나
저들은 힘을 두 곳으로 분산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또 무슨 말인가?”
궁사흔이 의아하다는 듯 반문을 했다.
“보통 싸움을 하면 여러 가지 계책과 방법이 동원됩니다. 저희
에겐 저들에겐 없는 혈영대와 음자문이 있습니다. 소위 백도란
자들이 경원시 하는 살수들이지요. 이번 싸움에서는 그들에게
백도와 정도맹의 배후를 교란시키는 임무를 줄 예정입니다. 인
원이 적음을 감안하면 일반 무인에겐 어림도 없는 일이겠지만
음자문의 살수들이나 혈영대원들이 지닌 능력이 어떤 것인지
를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입니다. 혈영대와 음자문의
살수들이 적의 배후를 휘젓고 다니면 저들은 결코 수수방관
을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적당히 은신과 매복을 하는
이들을 견제하려면 최소 배 이상의 인원이 동원되고 외면을
하려해도 상당히 신경을 쓰게 될 것입니다.”
귀곡자는 말을 마치며 음자문의 문주인 부인곡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번 싸움의 승패는 이들에게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호오~ 듣기 좋은 말이구려. 물론 그 정도의 임무는 우리 음자
문에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맡겨만 주시오.”
이미 백도의 자금줄 역할을 하는 표국을 습격하여 많은 공을
세운 음자문의 문주 부인곡은 이번 기회를 패천궁 내에서 음
자문의 입지를 더욱 탄탄히 하는 계기로 삼으리라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런 그와는 달리 혈영대의 대주 안당은 영 못마땅한
얼굴로 귀곡자를 쳐다보았다.
‘흥, 우리에게 승패가 달려 있어? 입에 발린 소리는 하지나 말
것이지. 백이면 백 죽는 길인지를 누가 모를 줄 아나 본데…
나를 저런 멍청한 인간과 같이 취급하려 하다니! 그나저나 일이
이리 되어버렸으니 거부도 못하겠고 어쩐다…?’
내심 불만을 가지고 있지만 귀곡자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기
에 딱히 거절한 방법을 찾지 못한 안당은 뭐라 말을 하지 못
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그렇게 앉아 있어야만 했다.
‘후후! 네 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지만 어쩔 수 없을 것
이다.’
그런 안당을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은 귀곡자는 다시금 입
을 열었다.
“우선 큰 줄기는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전면적인 기습공격과 함
께 최단시간에 호북을 점령하고 정면으로 정도맹을 칠 것입니다.
또한 혈영대와 음자문을 따로 움직여 저들이 힘을 한곳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적절히 견제도 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세부
적인 사항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복잡하지만
그것 또한 이미 마련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때그때 궁주님께서
명으로 내리실 것입니다.”
설명을 마친 귀곡자가 뒤로 물러나자 그때까지 태사의에 앉아
있던 관패가 몸을 일으켰다.
“본궁이 궁을 벗어나면서부터 이미 시작된 싸움이오. 이제 그
끝을 보려고 합니다.”
관패의 눈에서 열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는 본궁뿐만 아니라 그 동안 저들에게 억눌려 있던 흑도의
힘을 만천하에 알리는 길이기도 하오. 나 관패가 패천궁과 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건데 우리에게 패배란 결코 있을 수 없
소이다. 오직 승리만이 우리를 맞을 것이오. 부디 죽음을 각오
하고 최선을 다해 싸움에 임해주기 바라오.”
“봉명!”
그때까지 자리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허리를 굽혀
명을 받았다. 이견이 있을 리가 없었다.
때를 맞추어 동시에 하늘로 날아오른 전서구!
전서구가 날아가는 곳은 패천궁의 강북 총타가 있는 호북의 제
갈세가였다. 바야흐로 강남에서 시작하여 화산을 끝으로 잠시
멈추었던 전쟁의 수레바퀴가 다시 돌게 되는 순간이었다.
첫댓글 즐감하고갑니다.
감사해요~~~^~
감사합니다.
즐겁게 보고갑니다!
즐감~1
드디어 때가 왔는가?
ㅎㅎㅎ
잼납니다
전면전
즐감
ㅈㄷㄱ~~~~~~~````````````
ㅈㄷㄳ
즐감하고 갑니다
즐김요~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즐독했습니다~~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즐독 감사합니다^^^
즐독~~~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