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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10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복 음 : 루카 19,28-40
제1독서 : 이사 50,4-7
제2독서 : 필리 2,6-11
복 음 : 루카가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가 정신을 집중하려고 애쓰면 동공이 확장됩니다.
주의력과 집중력이 동공에 투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릿속으로만 계산하게 하면 저절로 동공이 커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동공은 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동공의 움직임이 생기면 뇌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계산이나 암기할 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상황에서도 동공이 확장된다고 합니다.
좋아하는 대상을 보려고 할 때, 또 부정적인 말이 아닌
긍정적인 말을 하려고 할 때 동공이 확장됩니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긍정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뇌 건강을 위해서도 매우 바람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건강을 위해서라면 이상한 것도 과감하게 하는 우리가 아닙니까?
하물며 실천하기 그렇게 어렵지 않은 사랑하기와
긍정적인 자세로 사는 것을 굳이 피할 이유가 있을까요?
이렇게 사는 사람의 눈은 반짝반짝 빛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예뻐진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멋진 사람이 됩니다.
자기를 위해서라도 사랑과 긍정적인 자세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매일매일 약을 챙겨 먹듯이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주간의 첫째 날인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을 보냅니다.
예수님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인 것이지요.
그리고 성주간을 시작하면서 복음은 아주 긴 수난 복음을 읽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기를 묵상하면서,
문득 예수님을 향해 적의를 표현했던 사람들의 눈을 떠올려 봅니다.
과연 어떤 눈이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초롱초롱 빛나는 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철천지 원수를 바라보는 듯한 적의 가득한 눈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부정적인 마음이 과연 그들 자신에게 어떤 유익을 주었을까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제거하는 커다란 죄의 무게만을 키웠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마음과 미움의 감정에서 생겨난 행동은
결국 커다란 후회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게 되지요.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루카 22,27)
“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군중도 모두 그 광경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루카 22,48)
우리의 눈을 바라보십시오.
혹시 우리의 눈 역시 예수님을 부정하는 적의 가득한 눈이 아닐까요?
사랑하지 않는다면, 부정적인 마음으로 가득하다면
다시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커다란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가슴을 치며 후회할 행동은 2000년 전의 이스라엘 사람들로도 족합니다.
이제는 그러한 생각과 행동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고 칭찬할 사랑의 생각과 행동을 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참된 위로와 기쁨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성지주일입니다.
동시에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는 수난 주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임금으로 환영하는 상징적 행위로 성지가지를 축성하여
성당에 들고 들어왔으며, 또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수난사를 들었습니다.
오늘 전례 역시 기쁨과 슬픔이 교차 되고 있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임금으로 환호하고 환영하던 행렬은
배척과 조롱의 십자가 행렬로 바뀌고, 하늘 높이 흔들던 영광과 축복의 성지가지는
저주와 모욕의 채찍으로 바뀝니다.
자신의 겉 옷을 벗어 길에 깔았던 바로 그들이 이제 예수님의 속옷마저 벗겨가고,
나귀 위에 오르셨던 바로 그분은 이제 십자가 위에 매달리십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왕으로 성안으로 모셔진 바로 그분이,
죄인으로 강도와 함께 성 밖에서 처형됩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신기하게도 이러한 일을 예언자 이사야는 제1독서에서 미리 예언하고 있고,
사도 바오로는 제2독서에서 찬미 노래로 부릅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는 부활성야 때 그 모습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선 사랑을 거절한 까닭이 아닐까!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한 까닭 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이 세상에 아드님이 왔건만,
그분도, 그분의 사랑도 거절된 까닭이 아닐까요!
결국 예수님은 사랑의 거절 때문에 고통받으신 것이 아닐까!
오늘도 당신 사랑에 대한 나의 거절 때문에 당신께서는 고통받고 계시지는 않는 걸까요!
그러나 당신의 사랑은 하도 커서 거절당해도 멈출 수가 없는 사랑인가 봅니다.
하도 커서 배신을 당해도 그칠 수가 없는 사랑인가 봅니다.
‘죽기까지’ 해도 다하지 못할 사랑인가 봅니다.
사랑에는 자신을 죽이는 아픔이 따르기 마련인가 봅니다.
고통 속에서도 당신의 사랑은 식을 줄을 몰랐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루카 27,34)하고 간청하십니다.
사랑 때문에 고통을 감수하시면서까지 용서하시는 자비의 모습입니다.
그리하여 이 일이 빚어진 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거절 때문이지만,
드러난 것은 하느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고통받으셨습니다.
결국 고통받더라도 사랑하기를 결코 멈추지말라는 말씀입니다.
상처받더라도 사랑하기를 결코 멈추지말라는 말씀입니다.
죽기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대체 왜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한 걸까요?
왜 예수님을 거절한 것일까요?
종교지도자들과 원로들은 왜 예수님을 반대한 걸까요?
왜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걸까요?
또 유다스와 베드로, 그분의 제자들은 왜 걸려 넘어진 걸까요?
그것은 그들이 작아지고 섬기려 하지 않은 까닭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그들은 기득권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지배와 권세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누가 제일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옥신각신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감으로 자신을 내세우다 꾸중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옆자리를 요구하다가,
그리고 다른 제자들은 그것을 보고 화를 내다가 꾸중을 들었습니다.
그들이 작아지고 섬기려 하지 않은 까닭이었습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 볼 수 있듯이,
세상의 왕들과 기득권자들은 가진 자로서 권세와 횡포를 부리고 지배하고 군림하고자 합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작은 자들에게서 빼앗고 힘없는 이들을 때리고 억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것을 다스림의 기준으로 제시하십니다.
그리고 스스로 섬기는 사람으로 처신하십니다.
아버지를 섬기고, 제자들을 섬기고, 최후 만찬에서는 자신을 배신할 제자들마저도 섬기십니다.
참으로 작아지고 낮아져서 남을 섬기며, 많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왕으로 자처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뒤따르는 우리의 삶도 또한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호사스런 영광을 취하기보다 작아지고 섬기는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혹 우리 역시 당시의 제자들처럼 작아지고 섬기려 하지 않으려다
자칫 예수님을 거절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루카 27,34)
주님!
그 어떤 모든 일을 통해서도 드러나는 것은 당신의 사랑이게 하소서.
그 어떤 저의 거절 때문이라도 드러난 것은 당신의 크신 사랑이게 하소서
먼저 사랑하시고 결코 멈출 줄 모르는 그 사랑을 결코 잊지말게 하소서.
상처받더라도 사랑하기를 결코 멈추지말게 하소서.
죽기까지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조욱현 토마스 신부
성지주일 : 다해
오늘은 성지 주일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축제 기분에 들뜬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성대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을 기념하고 있다.
이 예수님의 성대한 예루살렘 입성은 수난의 짓누르는 고통을 먼저 거쳐야만 하는
야훼의 종의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예언적 전조와도 같다.
이사야서는 하느님의 고통받는 종의 셋째 노래를 전하고 있다.
이 종은 하느님의 고통당하는 종이다.
이 종은 주님께 대한 충실성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이사 50,7).
복음: 루카 22,14-23,56: 주님의 수난
예수께서는 당신을 휩쓸어버리려는 그 파괴적인 공격을 맞이할 채비를 하신다.
루카 복음에서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무엇보다도 그 예루살렘에서의 사명과
당신의 마지막 공적 가르침과 이후 직접적으로 계속되는 사건들,
즉 최후의 만찬, 겟세마니, 재판, 십자가, 부활과
그 후의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을 일치시키는 통로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과 파스카를 거행하기를 간절히 원하셨다.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22,15).
이 파스카는 확실히 죽음을 통한 봉헌의 표지로서
식탁에 놓였던 최후의 만찬의 빵과 포도주로 상징되는
그분의 생명을 통한 희생적 봉헌의 예표이며 동시에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22,19.20).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도 당신보다는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걱정을 하신다.
그래서 슬픔에 잠겨 십자가를 따라오는 예루살렘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
푸른 나무가 이러한 일을 당하거든 마른 나무야 어떻게 되겠느냐?”(23,28.31).
그러나 애석하게 생각하고 울어야 하는 사람은
패배당한 것같이 보이고 천시당한 예수님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를 죽음에 처한 사람들이다.
실제로 이 여인들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울어야 하는지를 모르면서 우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마지막 순간에도, 다른 공관복음의 절망적 외침인,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시편 21,2)가 아니라,
아버지께 평온히 의탁하는 태도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23,46; 시편 30,6).
그러므로 아버지 ‘하느님’이 ‘아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모습이다.
이렇게 루가복음은 예수님의 수난사를 과장되게 표현하지는 않지만,
인간으로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께서 가지셨던 ‘고뇌’에 대해서 아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22,44).
이 표현은 예수께서 ‘수난’을 능히 극복하고 지배하실 수 있지만,
죽음 앞에서의 인간적 한계와 번민에서 그를 제외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 위대하신 것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하느님께 의탁함으로써만
절망의 공포와 유혹을 물리칠 수 있으셨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22,42).
그러므로 예수님의 인성은 지극히 고통스럽고 굴욕적인 처지에 처하게 되는
바로 그때 참으로 신성을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십자가의 신비,
즉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음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많은 사람이 지도자들과 군인들의 태도와는 달리
적개심보다는 호기심과 놀라움에 가득 차 있었다.
그들 마음에는 후회의 감정이 있었다.
“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군중도 모두 그 광경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23,48).
“백인대장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23,47).
이는 마르 15,39에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라고 더 강하게 표현되고 있다.
이것이 바오로 사도의 십자가의 어리석음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람들을 변화시켜 ‘구원’되도록 한다.
오른쪽 강도도 마찬가지이다.
함께 못 박힌 다른 강도의 예수에 대한 조롱에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나서 그 죄수가 예수님께 간청하였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23,40-43).
십자가의 예수님의 죽음은 그 강도에게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이 되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은 인간의 모든 비열한 행위와 배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의 심판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에게만 보장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그것을 모르고 잘못하고 있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23,34).
이렇게 우리를 위로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십자가상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 자신을 낮추신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돌아가시지만,
그것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에 들어가셨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립 2,9-11).
이렇게 파스카의 빛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순간
온 땅을 뒤덮었던 그 무서운 어두움을 이미 벗겨내고 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2021년 8월 30일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이 철수했습니다.
2001년 10월에 시작된 전쟁이 20년 만에 끝났습니다.
미군은 텔레반과 협상하면서 미군의 철군을 결정했습니다.
당시에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 ‘가니’는 먼저 외국으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대통령도 도망갔고, 정부의 관료들도 모두 도망갔습니다.
수도인 카불 공항은 외국으로 도망가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기차도 아니고, 비행기에 매달려서 도망가려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미국이 지원해준 무기는 탈레반에게 넘어갔고, 행정조직은 쉽게 무너졌습니다.
미국은 20년간 아프가니스탄의 자치정부가 국가를 통치할 수 있도록 지원했지만,
무능과 부정부패에 물든 아프가니스탄 행정부는 탈레반에게 국가를 넘겨주었고,
국민들도 도망간 국가지도자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와준다고 합니다.
국민을 외면하고 가족들과 해외도 도망간 대통령을 역사는 어떻게 평가할까요?
2022년 2월 24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였습니다.
군사대국 러시아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는
3일이면 수도인 키이우가 함락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1달이 넘었지만, 아직도 키이우는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러시아는 명분 없는 전쟁으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경제제재로 러시아 경제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물론, 명분 없는 전쟁에 자녀들이 사망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러시아 내에서도 반전시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가 이렇게 러시아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는 것은
국제사회의 지원도 있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의 지도력이 있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끝까지 수도인 키이우에 남아서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싸울 것을 독려하였습니다.
미국, 유럽연합, 영국의 의회에 화상으로 연설하면서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대통령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협상을 맺고 전쟁을 마무리한다면
역사는 젤렌스키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할까요?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주일입니다.
‘호산나 하느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라는 환영을 받으며,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심각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 시작은 예수님의 제자인 유다의 배반이었습니다.
유다는 스승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겼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지옥까지라도 가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베드로는
새벽닭이 울 때까지 스승인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
수석사제와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율법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단죄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발이 두려워
예수님을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서로 원수였던 헤로데와 빌라도는 친구가 되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바로 십자가의 길에 서 있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성서는 이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 곁에는 예수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길을 함께 하시는 어머니 성모님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지만, 성모님은 예수님 고난의 길에 끝까지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무게에 넘어지셨던 예수님은 잠시 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수건으로 닦아드렸던 베로니카가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예루살렘의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들의 슬픔을 위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면서 하혈이 멈추었던 여인,
예수님의 ‘일어나라’라는 말씀으로 죽었다 살아났던 소녀의 어머니,
예수님께 믿음을 칭찬받았던 이방인이었던 시로페니키아 여인,
예수님께 죄를 용서받고 새 삶을 찾았던 여인,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 드렸던 여인입니다.
예수님께 자비를 청하였던 십자가 위의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성서는 이들의 이야기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주일입니다.
나는 어느 편에 있었는지 돌아봅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 속에 있었는지,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와 함께 있었는지,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처럼 나 역시 예수님을 외면한 것은 아닌지,
내가 가진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모함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갈 수 있다면,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드린 베로니카처럼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다면,
예수님의 제자였던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처럼
예수님의 죽음까지도 함께 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예수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들의 편에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실 것입니다.
‘넌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성주간의 시작인 주님 수난 성지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파스카의 신비를 완성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서십니다.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복음은 입당 행렬 전에 봉독 되고,
미사 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가 길게 읽힙니다.
오늘은 당신 백성을 향한 예수님의 눈길이 제 마음에 맺힙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루카 22,26)
예수님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는 이 순간까지 제자들은
"누구를 가장 높은 사람으로 볼 것이냐는 문제로 말다툼"(루카 22,23)을 벌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간곡히 당부하십니다.
당신 이름으로 세워질 하느님 백성의 교회는, 제2독서인 필리피서에서 봉독되듯이
'낮춤과 비움'의 뿌리 위로 가지를 뻗어 올려야 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친히 먼저 보여주셨듯이
힘, 명예, 돈으로 지배하는 세상 원리와 역행하는 질서를 근간으로 합니다.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루카 22,35)
자상한 눈길로 우리 모두를 향해 물으십니다.
물론 세상살이의 격류를 헤쳐가는 우리에게 물리적으로 부족한 게 없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조금만 영의 눈을 활짝 열고 바라보면,
결핍의 순간마다 어떤 방식으로든 채워주시는 하느님을 놀랍게 체험하지요.
또 때에 따라서는 필요한 것을 챙기라고 허용하시는데,
그 둘 사이의 분별 기준은 주님의 말씀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루카 22,61)
아니라고 잡아떼었지만 결국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지요.
닭 울음소리에 놀라 예수님의 예고를 깨달은 베드로의 처참하고 황망하고
수치스런 감정을 다독이고 녹여주시며 "괜찮다"고 말씀하시는 눈빛은,
때때로 한눈을 팔고 발을 헛디디고 곁길로 삐져 나가는
우리의 배반을 제자리로 돌려놓아 주시는 연민의 사랑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그동안의 예수님 눈길이 아직 자리싸움이나 하는 제자에게,
당신을 배반하는 제자에게 향한 것이라면,
이 말씀의 눈길은 폭력과 조롱으로 당신에게 직접 해를 가하고 있는
유다인들과 로마병사들을 향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모욕과 수모, 그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제1독서인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에 잘 드러나 있지요.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
나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이사 50,7)
예수님께는 수모와 모욕 조롱에 노출된 것이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거기에 휩쓸려 하느님의 피조물을 증오하고 복수심을 품는 것이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기에,
당신이 겪는 고통과 물리적으로 해를 가하는 이들을 분리하시고,
오히려 악을 행하는 그들에게 연민과 자비 가득한 눈길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당장 코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파르르 떨고 약간의 손해에도 핏대를 올리는 우리는
그 일에 숨겨진 거대한 우주적 인과관계因果關係나 하느님의 뜻, 신비적 의미를 모릅니다.
지금 내게 해가 되는 일, 사람, 사건 역시
누군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행하는 역할 수행일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처럼 서로 서로에게 슬프고 아픈 영향을 미치는 불쌍한 존재들일지도 모릅니다.
자기와 이웃을 불쌍히 보는 연민으로 우리 눈빛이 예수님의 눈빛을 닮아가길 소망합니다.
이제까지 저를 사로잡은 눈길이 예수님의 눈길들이었다면,
마지막은 복음 말미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눈길입니다.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온 여자들도 뒤따라가 무덤을 보고,
또 예수님의 시신을 어떻게 모시는지 지켜보고 나서,
돌아가 향료와 향유를 준비하였다."(루카 23,55-56)
당시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들은 예수님께 많은 위로와 힘을 얻었습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이의 허망한 죽음 앞에서 여인들은
도망가거나 모르는 체 하거나 배반하지 않고,
찬찬히 시신 수습과 안장의 과정을 바라봅니다. 이는 진정 관상의 눈빛입니다.
애도와 사랑, 연민과 아쉬움, 그리고 마지막까지 정성을 다하려는 충실함으로
그들은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합니다.
그간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와 적대자와 온 인류에게 보낸 자비와 연민의 눈길이
여인들의 이 소박한 사랑의 눈빛으로 보상받았으리라 감히 추측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건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여인들의 이 꾸밈없이 진실 된 사랑의 눈길은,
우리 사랑의 눈길에 목마르고 허기지신 예수님께 이번 성주간을 통해 무엇을 드려야 할지,
실패로 점철된 사순시기를 아슬아슬 길게 지나온 우리를 다시 한번 일깨웁니다.
넘치는 용서와 구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인간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지만,
주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이 시간 한결같은 사랑을 쏟아주시는 주님을 생각하는 가운데
풍부한 은총을 입으시기바랍니다.
‘감탄고토’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뜻입니다.
‘자기에게 이로울 때는 이용하고 필요하지 않을 때는 배척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요즘 정치권을 보면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고,
적으로 여기던 상대를 입맛에 따라 동지로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도대체 신의라는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유다백성들이 꼭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입성할 때에
제자들은 어린 나귀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걸치고
예수님을 거기에 올라타시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길가의 나뭇가지를 꺾어서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고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루카19,38) 하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 로마군사정권을 물리치고 유다민족을 1등 국민으로 독립을 시키며
수천 년 기다려온 메시아로서 부와 권력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옷을 길바닥에 갈았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바친 것입니다.
당시의 겉옷은 단순히 옷 그 이상의 것입니다.
겉옷은 담보 삼을 수 있을 만큼 중한 것으로
밤을 넘길 수 있는 이불이요, 햇빛을 가릴 수 있는 천막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소중한 것을 길바닥에 깔고 주님을 환영하였던 그들인데
빌라도 앞에 선 예수님을 보고
“그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루카23,21)하고 외쳤습니다.
베드로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고난의 길을 걷게 되리라고 예고할 때 베드로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다가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는 꾸중을 들었고,
결정적으로 예수님께서 수난을 예고하시며
“오늘 밤에 너희는 모두 나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마태26,31).하고 말씀하시자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26,33) 하였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갈 준비도 되어있고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루카22,33).하고 장담하였습니다.
그것은 솔직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위급한 상황이 닥치자
자기도 모르게 3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말하였습니다.
닭이 울고서야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목놓아 울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연약합니다. 강한 것 같지만 시련과 고통의 두려움 앞에서 무너집니다.
우리는 바로 이 약함 때문에 주님께 더 간절히 의탁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어떤 고난의 역경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의지만을 믿고 방심하면 걸려 넘어지고 맙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이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사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행위’는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세례성사를 받으면서
‘하느님의 자녀로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모든 죄를 끊어 버리고,
죄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해 악의 유혹을 끊어버린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를 범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으며,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고,
부활의 삶을 믿는다.’고 선언하고서는 그 부활이 없는 것처럼 처신하고 있습니다.
우환이 생기면 성체 앞에 쫓아와서 기도할 생각보다도
‘어디 용한 사람 없나?’ ‘오늘의 운세가 좋지 않더니만…이런 일이 생겼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자녀의 결혼 날짜를 정하는데도 길일을 정한다고
점쟁이를 찾고 사주팔자를 보시는 분도 많이 계십니다.
점쟁이를 찾아갔는데 너무 많은 사람이 와서 묵주기도를 하며 기다렸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점괘가 좋고 사주팔자가 좋으면 뭐합니까?
노력하지 않는데! 아무 노력 없이 복이 굴러옵니까?
가정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하실 때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마지못해 하셨습니까?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고 ‘너 없이는 못산다.’고 하였습니다.
너만 있으면 앞날이 열리고 행복할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눈에 꽁깍지가 씌워져 보이는 게 없었죠.
그래도 어찌 되었든 하느님과 일가친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신의를 지키며
일생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선언해 놓고는 상대방을 무시하고 자기 뜻에 맞춰주지 않는다고 바가지 긁고, 변명을 늘어놓고…….
자녀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교육한다고 해놓고서는 신앙은 자유라고 합니다.
커서 자기가 판단해서 선택하게 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다른 교육은 왜 하십니까? 자기가 커서 알아서 하게 두지.
신앙교육은 다른 것에 우선해야 합니다.
모든 가르침은 ‘주님을 두려워하여 섬기는 데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배운 것이 많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주님 마음에 들게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부모의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직면해서도 당신을 뱉어버린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자기를 기억해 달라는 죄수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하시며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혹 죄를 짓게 된다면 잘못을 뉘우치고 허물을 고백하며
주님께 의탁하여 구원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용서와 자비로 충만하십니다.
그러므로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으로 걸려 넘어지는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은 큰 복입니다.
하느님께 알게 모르게 약속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 충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십자가에 못을 박는 행위가 더 이상 되풀이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하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백인대장이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루카 23,47)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조롱과 모욕, 억지로 우겨대는 사람들을 상대하여
한마디의 항변과 변명도 없이 무력하게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그 깊은 침묵 속에서 백인대장만큼은 의로움을 발견하였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모함하고 헐뜯고 비방하며 흉을 본다면 그렇게 침묵할 수 있을까요?
우리도 어떤 예기치 않은 상황과 처지에서 그리고 구설수에
침묵의 언어로 사랑의 깊이를 더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침묵은 진정한 사랑이었습니다.
깊은 침묵으로 사랑에 사랑을 더하고 사랑을 담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토마스 머튼은 “왜? 라고 묻지 않고 십자가를 포용할 때 침묵은 흠숭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매 순간 흠숭을 드리는 기쁨을 차지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성주간입니다.
용서와 자비, 넘치는 사랑, 거룩함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