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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탁동시 啐啄同時
선종의 특색과 그 가르침을 적절히 표현하는 말로 '불립문자(不立文字)''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말이 있다.
이 4개의 언구는 달마 대사가 주창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당송(唐宋) 시대 때 나온 것을 달마 대사의 말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선문에서의 '불립문자'는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는 뜻이지 언어나 문자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부처의 마음은 단순히 언어나 문자에만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마음에서 마음으로'전해진다는 뜻이다.
이는 초조(初祖) 달마 대사와 자신의 팔을 끊어 법을 구한 2조(二祖) 혜가 대사 사이의 법을 전수하는 과정에서도 볼 수 있으며, 특히 육조 혜능 대사의 남종선(南宗禪)에서 강조되고 있다.
자세히 거슬러 올라가 살펴 보면 석가모니 부처님과 가섭존자 사이에서 이루어진'염화미소 (拈華微笑)''가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발단이며, '불립문자' '교외별전' 역시 '염화미소'에서 유래한다.
문자를 써서 나타내는 것이나 언어에 의한 표현들은 모두 한계가 있다. 때문에 언어나 문자로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표현이 될 수 없다.
언어나 문자는 단순히 수단이나 방법일 뿐이지 사물 표현의 최선의 방법은 아니다.
불심(佛心)이나 불성(佛性)을 언어나 문자로 파악하거나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불심이나 불성은 문자나 언어 같은 설명의 수단을 단절한, 그런 것들이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절대의 세계이다.
이를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고 한다.
불심은 마음으로 직접 파악해야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바로 이것이 불립문자이며, 이심전심이다. 문자나 언어가 미치지 않는 행적(行的) 체험이 필요하다. 문자나 언어라 해도 체험에 의해 증명된 문자이고 언어여야 한다. 이런 언어에는 생명이 있고 박력이 있고 진리가 번뜩인다.
부처님 생존 당시 재가신자로서 불교의 심오한 뜻에 통달한 유마의 침묵을 사람들은 '우레와 같은 침묵'이라고 말한다.
이 침묵은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레와 같은 대 음향을 내는 침묵이다. 유마 거사는 이런 침묵이야말로 말없는 웅변이며 진실 자체 임을 갈파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묵묵히 마음으로 통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세계이다. 당나라 때의 고승 황벽은 에서 이렇게 말 하고 있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그 즉시 무심으로 묵묵히 계합할 뿐이다." 문자나 언어는 마음으로 가는 길잡이 구실을 할 뿐 마음 자체를 표현하거나 진실 자체를 표현하지는 못한다.
이 문자.언어를 단절한 '불립문자'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교외별전(敎外別傳;교리 즉 경전 외에 별도로 전해진 것, 진리를 가리킨다)' 이 말은 앞의 '불립문자'와 같이 연결되어 선의 근본 특색을 간단명료하게 드러내고 있다.
'교외별전' 역시 선의 참뜻이 경전이나 문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전에서 제시하고 있는 불심을 직접 파악하는데 있음을 나타낸 말이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에 의거하기 보다는 곧바로 가르침의 근본인 마음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교외별전'은 '이심전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심전심이란 스승과 제자가 경전이나 문자에 의거하지 않고 서로 직접 맞대서 마음으로부터 마음으로 불법을 전수한다는 뜻이다.
앞에서 서술 했듯이 선문의 조사들은 '염화미소'의 고사에 기초해서 언어나 문자에 기대지 않고 직접 부처님의 마음이나 불법의 참뜻을 전수 했던 것이다
왕양명이 지은 '무제(無題)'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같이 와서 나에게 안심법을 묻길래, 마음을 가져오면 편케 해 주겠다고 답했네."
이 시는 왕양명이 앞에서 서술한 달마의 안심법(安心法)을 인용 한 것이다. 왕양명은 달마처럼 선적인 방볍을 이용하여 진리를 체득케하고 있다.
송나라 때의 대유학자 정명도(程明道)를 비롯해 왕양명.육상산(陸象山)의 학풍은 교외별전.불립문자.이심전심의 선적 성격을 띠고 있다.
교외별전.이심전심이라고 하지만,전해 받는 이가 전하는 이와 똑같은 심경이 되지 않으면 그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법이다.
따라서 완전한 수용자세를 갖춰 일촉즉발(一觸卽發) 상태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전하는 자의 마음이 그대로 자연스럽게 전해지는 것이다. 전하는 자와 전함을 받는 자의 이 같은 관계를 '줄탁동시啐啄同時'의 기미(機)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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