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스모를 보기 시작했을 때 이름들이 하도 어려워서 메모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외모 위주로.
다카야스-불곰, 도쿠쇼류-우람한배, 아키세야마-더 우람한배..
또, 다치아이 직전 다양한 리키시들의 기행들:
테루츠요시-소금장수, 고토쇼기쿠-오두방정, 우라-카푸치노향 음미..
그런데 도쿠쇼류에 대해서는 우람한 배 이상으로 나에게 인상 깊던 장면이 있습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나올 때마다 패합니다. 패 패 패 패 패..
이런 리키시는 왜 나오는 걸까? 그런데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 모습이 감동적이었습니다. 대충 포기할 만도 한데, 패할 때의 표정은 안타까움이 온몸에 배어납니다.
그리고 그날.. 상대는 요코츠나 가쿠류. 이건 승부가 너무나 뻔했습니다. 지금이라면 니시키기와 테루노후지의 대결 같은.. 그런데 이날 도쿠쇼류는 승리합니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릅니다. 그날 이후 또 패 패 패..
그러나 그 한판 승부는 나를 스모의 세계에 빠지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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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허라(Last Hurrah)’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에 단 한 번 막판 반짝하고 찾아오는 영광의 순간.
어느 경기에나 언급되곤 하는.
PGA 프로 중에 벤 크랜쇼라는 선수가 있습니다. 이 선수의 라스트허라는 40세 중반 선수 황혼기에 찾아온 '95 마스터즈 우승입니다.
전성기의 크렌쇼는 퍼팅의 귀재였습니다. 그런데 퍼팅이 그를 완전히 떠나면서 슬럼프에 빠집니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대회를 앞두고 그는 고향의 오랜 스승 하비페닉을 찾아갑니다. 페닉은 텍사스의 한 골프장에서 소년시절 캐디로 시작해, 코스관리원을 거쳐 코치가 된 입지전적 인물입니다. 크렌쇼는 어렸을 적부터 텍사스 대학 다닐 때도, 프로가 되어서도 항상 페닉에게 코치를 받았습니다. 병상에 누워있던 페닉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크렌쇼가 퍼팅하는 모습을 살펴봅니다.
‘아무 것도 바꾸지 마. 완벽해. 문제가 있다면 네 마음이겠지. 너를 더 이상 믿지 못하는..’
시합이 있는 어틀랜터 오거스타에서 크렌쇼는 스승의 임종 소식을 듣습니다. 크렌쇼는 탐카이트 등 페닉의 제자였던 선수들과 제트 여객기를 빌려 장례식에 다녀옵니다. 선수들에게 코스에 적응할 수 있는 연습라운딩을 모두 포기하고..
막상 시합이 시작되었을 때 그의 퍼팅은 실로 신들린 그것이었습니다. 말도 안되는 거리에서 퍼팅이 쑥쑥 들어갔습니다. 마지막 퍼트를 성공시키고 우승이 확정되었을 때 그는 하늘을 한번 바라보곤 무너지듯 엎어져 눈물을 흘립니다.
‘그분이 항상 함께였어요. 퍼팅할 때면..’
라스트허라.. 그 이후 그는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합니다. 그건 귀신이 함께 한 우승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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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하쓰바쇼. 쥬료에서 빌빌 거리다 마에17번에 겨우 턱걸이 한 도쿠쇼류는 이 바쇼에서 라스트허라를 맛봅니다. 이틀 만에 패전을 맛본 그는 그때부터 연전연승을 거둡니다. 긴키대 출신인 그는 바쇼 중에 대학 시절 그를 이끌어 주던 감독의 임종 소식을 듣지만 시합때문에 장례식에도 참석 못하는 상황이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한 경기 한 경기 스승을 위해 승리한다는 마음으로 집중하다 보니 어느 새 13승1패. 센슈락에서 재경기를 피하려면 마지막 상대인 오제키 다카케이쇼를 눌러야 했습니다.
전성기 다카케이쇼를 상대로 두어 번 위기가 있었지만 결국 승리하며 그는 도효위에서 울음을 터뜨립니다.
‘위기 때마다 스승의 손길이 뒤에서 바치고 있는 걸 느꼈습니다.’ 후에 술회한 내용입니다.
귀신이 함께 한 우승.. 그것이 그의 라스트허라였습니다.
그 바쇼 이후 그는 다시 평소 모습으로 돌아가고 곧 쥬료로 내려갑니다. 작년에 은퇴식이 있었죠?
https://youtu.be/tbK9UVtaexk?si=HFyUbLMOSldvf6_a
(끝)
첫댓글 흥미로운 글이네요,잘 읽었습니다
저도 보았습니다 꼭 뒤에서 스승님이 밀어주는 기분이들었다고..ㅎ 아오이야마와 붙었을때 영상한번 찾아보셔요. 도쿠쇼류 표정이 예술(?)입니다ㅎㅎ "호오~ 위험했다" 라고하는듯한표정
위 링크가 15경기 모두 모아놓은 영상입니다. 아래 우리기 사랑한 리키시에 언급된 리키시들 많이 있죠. 고토에코 포함 ㅎㅎ
너무 재미있고 감동적인 글입니다~^^
영상도 올려주시고ㅋ
스모의 세계로 더 빠져드는느낌 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래 아사노야마님 글에 댓글로 쓰려다.. 좀 길어질것 같아 따로 소개합니다.
도쿠쇼류는 뭐니뭐니해도 도효 가장자리에서 사~알짝 피하는게, 최고의 기술이죠~~!! ㅋㅋ 아 그리고 덕분에 Last Hurrah 라는 단어 알아가요~~^^
+돗타리ㅎㅎ
감동입니다!
특히 벤 크렌쇼 얘기는, 모르긴 해도 감동거리 좋아하는 미국인들이 영화 한편 만들어놓았을듯합니다.
감사합니다.
다찌아이 이전 우라 의 의식 표현 최고입니다
좋은이야기감사합니다, 우라 - 카푸치노 음미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