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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산 남인희화백님의 카톡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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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잘알고 있는 설화 한편을 정리해서 보냅니다.
제목 = 백일홍(배롱나무)의 전설
먼 옛날
어느 바닷가 어촌 앞의 섬에
머리 3개가 달린 이무기가 살고 있었는데 그
어촌에서는 그 섬의 이무기에게
매년 처녀를 제물로 바치지 아니하면
이무기가 어민들에게 큰 화를 입게 한다는 것이었다.
어느 해
이무기에게 제물로 바치게 될 처녀가 선정되었는데
그 처녀를 사모하던 청년이 그녀를 구하기 위하여
처녀 대신에 처녀의 옷을 입고 제단 앞에 앉아 이무기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이무기가 나타나자 그 청년은 잽싸게 칼을 뽑아 이무기의 머리 두개를 잘랐으나
나머지 한개의 머리는 자르지 못한채 이무기는 섬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
이를 지켜보고 있던 처녀가 기뻐하며 저는 제물로 바처져 죽을 목숨이었는데
저를 이렇게 살려 주셨으니 저는 이제 낭군님의 여인이 되겠습니다라고 말하자
그 청년은
아직은 이르오 이무기의 남은 머리를 베어 오겠습니다
만약 내가 이무기의 남은 머리를 자르는데 성공하면 배에 흰 깃발을 달고 돌아오겠노라 약속하고 그 청년은 배를 타고 이무기가 살고 있는 섬으로 향했다
처녀는 청년이 무사히 살아 되돌아 오기를 간절히 기도하였고,
그러던 중 100일이 되는 날 저 멀리서 청년의 배가 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그 배의 깃발이 흰 깃발이 아니고 붉은 깃발이었다
처녀는 붉은 깃발을 보자 청년이 죽은 것으로 지례 짐작하고 그 배가 육지에 닿기도 전에 사랑한 님의 곁으로 간다면서 바다에 몸을 던져 죽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 배의 붉은 깃발은 이무기와 100일 동안 싸우느라고 피투성이가 되어 붉은 깃발이 되었던 것이다
그 후 그 처녀의 무덤가에 나무 한그루가 자라나 꽃을 피어 100일 동안 붉게 피어 났으니 그 나무를 죽은 처녀의 혼이 살아 난 나무라 하였고 그 나무의 이름을 百日紅이라 하였다
이 百日紅(백일홍)은 배롱나무라고도 하는데
중국에서는 붉은 꽃이라는 의미로 紫薇花(자미화)라 하고
일본에서는 나무가 미끄러워 원숭이도 미끄러진다 하여 "원숭이 미끄럼나무" 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百日紅 (배롱) 나무는 수령 약800년 된 나무로 부산시 동래구 소재
하지공원에 심어져 있다.
백일홍이 군락을 이루어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고 있는 곳은 전남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 소재 인조반정의 공신"오희도"가 자연을 벗 삼아 詩를 읊으며 閑居(한거) 하였던 곳
鳴玉軒(명옥헌) 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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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올림픽 구기종목에서 축구와 야구가 아쉽게 멕시코와 미국에 석패했습니다만,
여자배구는 일본을 제압하여 일본열도가 큰충격에 빠졌다고 합니다. 정말 기분 좋은일 입니다.
오늘밤도 변함없이 즐거움으로 가득 채우세요...
8월 중순 광복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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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의 아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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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그리움의 가을
가을바람에
흐르는 미소 향기에 날리듯
그대의 향기
내 가슴에 가을보다
더 먼저 내립니다
가을을 유난히도 좋아한
그대의 애틋한 사랑
가을에 풍겨오는
들꽃 향만큼이나
그대의 향기는 나를 감싸
피었습니다
가을바람에는
그대의 향기를 넣었습니다
내 몸을 타고 흘러
마음까지 퍼져서
그대 위하여 날리는
가을 사랑입니다
가을이 전하기 전해
나만의 향기를
가을 향으로 피어서
그대가 닿지 않는 가을에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며
내 사랑의 향기를 피워서
그대를 제일 먼저 가을을
주렵니다
가을바람에
그대 그리운 사랑
우리가 같이 할
가을 그날을 위해
여름부터 기다려온
나의 가을 담아서 그대에게
보냅니다
우리의 가을 그리움을
신유 ~ 내가 더 아플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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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만큼~ 건강해집니다~~~~^^^
👶👦👧👨👩👵👫👬👪 어느 시골에서 남편을 하늘처럼 섬기며 사는 아낙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간통죄로 고소되어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검 사 : 아주머니, 왜 착실한 남편을 두고 그딴 짓을 했어요? 그것도 딴 사람이 아닌 남편의 친구하고… 한 번 말씀 해 보세요. 아지매 : 예…… 지난 번에 점심먹구 가만히 누워 있는디~~ 제 남편 친구라고 하믄서 헐 말 있응게 지금 퍼뜩 ○○모텔로 오라고 하잖여유. 검 사 : 아니 외간 남자가 오란다고 모텔까지 갑니까? 아지매 : 하늘같은 남편의 친구는 또 하늘과 마찬가지 아님감유? 검 사 : 그럼 갔으면 얘기만 듣고 올 일이지 왜 그짓을 했어요? 아지매 : 지두 그럴려고 했지유~~ 근데 하늘의 친구인 그분이 저를 보더니 "아짐씨!! 참~ 아름답습니다." 하믄서 제 손을 잡앗시유. 그러믄서 한 번 달라고 하대유. 검 사 : 아주머니!! 아니 달란다고 아무나 막 줍니까? 아지매 : 그럼 어찌 안 주남유? 남편의 친구니께 역시 하늘과 동격(同格) 아닌감유? 그라고~ 없는 거 달라는 것도 아니구유. 또 어디 있는지 빤~히 알고 달라고 하는디 어찌 안주남유~~ 사람이 그라는기 아녀유, 이웃지간에……… 그라구~남편은 쓰지도않는거~ 친구분이 쓰겠다는데~어찌 안빌려 주남유~ 검 사 : 어허~ 아주머니~~ 남편 아닌 사람과 그런 거 하는 게 바로 간통 이라는 겁니다.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구형합니다. 아주머니, 한참 눈을 껌뻑껌뻑하더니 하는말~~ “선상님!!! 근디 궁금한것이 하나있는디요 내 거시기를 언제부터 나라에서 관리 햇씨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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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퇴계 이황의 일화 네가지 ㅡ
첫째
며느리를 대하는 일화!
퇴계 선생 묘소 바로 아래쪽에 며느리 봉화 금씨 묘가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녀의 무덤이 남편옆이 아니라 시아버지 곁에 있다고요? ^^~
이황이 21세에 맞이한 부인은 27세에 사별하고 30세에 재혼했던 안동 권씨 부인과 또한 46세에 사별하게됩니다. 그래서 이황이 늙어 만년에는 봉화 현감으로 있던 맏아들 준(寯)의 부인 봉화 금씨가 시아버지(이황)를 지극 정성 으로 모셨고, 퇴계 또한 그 며느리를 친딸처럼 아꼈다고 합니다.
며느리 봉화 금씨는 자신이 죽으면 “시아버지 무덤 옆에 묻어 달라. 죽어서라도 정성껏 모시고 싶다.”고 유언을 했고,퇴계의 손자 이안도(安道)는 어머니의 유언대로
할아버지(이황)의 무덤아래 어머니의 묘를 모셨습니다.
둘째
손주와 노비를 대하는 일화
퇴계는 손주 안도가 장가갈 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넣어 줬습니다.
“부부는 남녀가 처음 만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부부 는 가장 친밀한 사이이므로 더욱 조심해야 하며 바르게 행해야 한다. 중용에서 ‘군자의 도가 부부에서 발단이 된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맏손주 이안도는 안동 권씨와 혼인을 하였는데 손주 며느 리는 아들을 낳은지 불과 6개월여 만에 다시 임신하였는 데 그나마 부족했던 젖이 나오질 않게 되어서 퇴계의 증손주(이안도의 아들)은 굶주려야 했습니다. 증손주가 암죽으로 겨우 겨우 연명은 했지만 날로 쇠약해졌답니다.
마침 종가택(이황이 살고있던 집)에 하녀 학덕이 출산을 했습니다.
맏손자 이안도는 할아버지에게 간곡히 부탁했답니다.
‘증손주의 유모로 하녀 학덕을 보내주십시오.’ 당시에는 노비는 집안에 딸린 재산 목록이었고 매매가 가능하던 시대였으며 신분은 대물림 되었습니다. 때문에 대를 이어갈 증손주에게 젖을 먹여줄 유모로 보내달라는 것은 예사로운 부탁이었지요. 그리되면 젖을 빼앗긴 하녀 학덕의 자식은 또한 굶어죽게 되는 것은 뻔한 일입니다
당시는 이유식이 거의 없었지요. 그런데 퇴계가 손주에게 보낸 답은 이러했습니다.
내 핏줄이 소중한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네가 좌우명 처럼 읽고 배운 "근사록"에 의하면 ‘다른 사람의 자식을 죽여서 내 자식을 살리는 것은 몹쓸 일’이라고 가르친다. 모름지기 배운 대로 실천하지 않는 건 선비가 할 일이 아니다.” 결국엔 굶주렸던 맏증손자 창양은 약골이 되어 시름시름 앓다가 두 돌이 갓 지나서 세상을 떠나 버렸습니다.
그런 시할아버지 퇴계를 맏손주 며느리 안동권씨는 자식 을 잃고도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르침과 더욱 더 존중했으며 가문의 교훈을 실천해 나갔습니다.
집안 어른이 모두 죽고 남편마저(1584년) 차례로 세상을 뜨고 임진왜란까지 닥쳤을 때, 집안의 대소사를 관장하던 퇴계의 맏손주 며느리 권씨는 피난 중 퇴계의 저작물을 지키는 데 온몸을 바쳤습니다. 지금도 퇴계의 저작을 보고 배울 수 있는 건 권씨의 이런 정성 덕분이었습니다.
셋째
제자들을 대하는 일화
제자 중에는 퇴계 이황을 존경하여 멀리 전라도에서 스승 을 찾아온 "이함형"이라는 21세의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부인과 사이가 안 좋아 얼굴도 마주치길 싫어했다고 합니다. 퇴계는 제자가 순천 집으로 돌아가던 날 아침상 을 함께한 뒤에 반드시 고향집 사립문 앞에서 읽으라며 편지 한통을 건넸습니다.
편지에는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천지가 있은 후에 만물이 있고, 만물이 있은 후에 부부가 있고, 부부가 있은 후에 군신이 있고, 군신이 있은 후에 예의가 있다"하였으며"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시작되나 그 궁극적인 경지에서는 천지의 모든 원리와 직결된다’고도 하였다. 부부의 윤리란 이처럼 중대한 것인데 어찌 마음이 서로 맞지 아니한다고 소박할 수 있겠는가?. 충고하노니! 자네는 마땅히 거듭 깊이 생각하여 고치려 힘쓰도록 하게나. 끝내 고치는 바가 없으면 굳이 학문을 해서 무엇을 할 것이며, 무엇을 실천한단 말인가?.”
대문앞에서 서찰을 읽어 내려간 제자! 모든 것을 부인탓 으로만 돌렸던 이함형! 그날부터 아내를 깍듯이 예우하자 아내도 변했습니다. 그러자 부부는 서로를 진정 사랑하게 되었으니 놀라워라~^^ 이듬해에 퇴계선생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암형부부는 크게 깨우침을 주시고 행복을 되찾아 주신 퇴계선생을 평생 존경했으며 퇴계선생이 죽자 통곡을 하며 부모상을 당한 것처럼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상례를 갖추며 그를 추모했으며 상복을 입은 그의 부인은 음식도 극히 단식하듯이 소량만 섭취하며 사적인 즐거움을 절대 삼가했다고 합니다.
넷째
천민이나 평민이나 모두 공경하며 정성으로 예우하였습니다
영주에는 배점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에는 대장간에 심부름을 하던 십대나이의 "배순"이라는 어린 소년이 있었는데 퇴계 선생이 소수서원에서 강학할 때 강학당 밖에서 엿듣고 땅바닥에 글씨를 쓰며 공부하다가 퇴계 선생에게 들키게 되자 퇴계가 그를 제자로 거뒀습니다.
퇴계는 그의 미천한 신분을 차별하지 않고 함께 가르쳤는 데 그는 퇴계선생이 죽자 3년상을 치루며 소식을 했으며 철제로 퇴계상의 모습을 만들어 추모했다고 한답니다.
대장장이 배순은 선조왕이 죽자 역시 3년상을 치루고 첫째날과 보름날은 산봉오리에 올라가 궁궐을 바라보며 통곡했다고 합니다. 퇴계선생의 은혜를 잊지않았으며 몸소 성리학을 실천했던 퇴계의 사상을 배순도 따른 것이지요.
국망봉(國望峯)은 대장장이 배순이가 궁궐을 바라보며 통곡하던 봉오리란 의미로 국망봉(國望峯)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조선 왕조에서도 그가 사망하자 추모하는 정려비를 세워줬으니 그곳 비문에는 배순이 ‘78세에 생을 마치는 날 맑은 하늘에서 큰 비가 내리고 뜰에 까마귀 떼가 내려왔다’고 적혀 있습니다.
배점마을! 천한 백성 배순이가 대장간을 했던 곳이라 하여 "배점마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구전설화에는
그가 죽어 용이 되어 승천하다가 부인이 부르는 바람에 이무기가 되어 강에 떨어져 죽었다고 합니다. 그가 떨어진 죽계구곡을 "용소"라고 한답니다
퇴계의 사상철학은 성(誠)과 경(敬)으로 일과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을 똑같이 사랑하고 공경하라".입니다’ 건지산 산비탈에 있는 퇴계 묘에는 그의 사후에 왕명에 의해서 의정부 영의정으로 추존되었으나 초라한 묘비만 서 있을 뿐입니다.
퇴계의 11세손 이만도(1842~191O)는 25세에 과거에 장원급제 한 후 여러 관직을 지내고 국가의 국운이 기울자 1880년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다가 1910년 한일합병이 이루어지자 백성으로서 신하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탓하면서 24일간 단식으로 순국한 지사입니다.
또한, 이만도의 아들, 며느리, 조카, 친척 여러 사람이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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