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서 창세기 1장의 사람과 2장의 사람은 다르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1장의 사람은 말씀으로 창조가 되었지만 2장의 사람은 흙과 생기로 창조된 사람이다. 1장의 사람은 변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 온전한 사람인데 반하여, 2장의 사람은 생명과를 먹어서 영생의 사람으로 한번의 변화를 가져야 할 사람인 것이다.
이를 순서적으로 말하면 2장의 사람이 먼저 창조가 되어서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사람이 될 때 비로서 1장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두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흙에서 난자를 생명과(예수님)를 통하여서 영생하는 사람이 되도록 겨냥하여 창조를 하였다는 말이다. 즉 창세기 1장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바라는 사람이고, 2장의 사람은 1장의 사람을 겨냥하여 창조가 된 사람이라는 말이다.
모든 인간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일곱째 날 하나님의 안식의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은 아직도 창세기 1장의 엿새 속에 속한 것이 되고 예수님께서 재림을 하시면 모든 창조가 완성이 된 일곱째 날이 되어 하나님의 안식에 동참하게 된다. 하나님이 안식할 일곱째 날은 예수님께서 완성을 하신다.
그렇다면 창세기 2장부터 요한계시록 22장까지는 하나님의 안식의 날인 일곱째 날 이전의 날에 속한 것이 된다. 일곱째 날이 되면 모든 일을 마치시고 쉬는 날이 되는데 이를 아담에게 적용을 한다면 아담이 생명과를 먹고 창세기 1장의 사람과 같이 되어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에덴으로 나아가서 쉼을 얻는 것과 같다.
우리는 흔히 에덴동산을 같은 맥락으로 이해를 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에덴과 동산은 구별된 다른 세계임을 증거해 주고 있다. 먼저 창세기 2장 8절과 10절을 보면 먼저 8절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라고 하여 에덴과 동산은 다름을 말해주고 있다.
다음 10절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라고 하여 하나님은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만드셨다고 하며, 또한 동산은 에덴에서 흘러 보내주는 물을 받는 곳으로 말해주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에덴은 동산에 물을 공급해 줌으로서 동산보단 더 풍성한 세계임을 알 수가 있다. 에덴은 생명을 공급해 주는 원천임을 알 수 있다. 생명의 물도 에덴으로부터 흘러나온다. 동산이나 동산 밖의 세상은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통하여 생명을 공급받게 되어 있다. 즉 스스로 살 수 없고 오직 에덴에서 흘러주는 생수로서만 살 수 있다는 뜻이다.
동산이라는 히브리어의 "간" 이라는 말은 "울타리"라는 뜻을 담고 있다. 쉽게 예를 들어 말한다면 에덴이 하나님이 거하는 청와대라고 한다면 동산은 청와대를 울타리처럼 감싸고 있는 서울시와 같다고 하겠다. 국가의 모든 명령이 청와대로부터 나오듯이 생명의 근원인 생수가 에덴에서 나오는 것을 보게된다. 동산도 에덴에서 흘러 보내준 생수를 먹음으로서 생명을 꽃 피울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려놓은 창조 세계이다.
하나님이 감독하는 드라마에 주인공은 예수님이지 인간이 아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기가 주인공이 되려고 한다. 인간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 예수도 죽이는 자들이다. 뱀의 말처럼 선악과를 먹고 난 인간들은 자기가 하나님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모든 일에 자기가 주인공이 되고자 한다. 이것이 죄다.
바울은 분명하게 모든 피조물은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가 되었다고 증거해 준다.
성도라고 한다면 이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골로새서 1장 13-17절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바울은 짧은 구절 속에 "그"를 아홉 번이나 강조하면서 초지일관 "그"를 증거 한다. 왜냐하면! "그"가 인간을 만드신 분이고, "그"가 생명을 주신 분이고, 만물이 "그"안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신앙이란? 바울이 그토록 증거하고자 하는 "그"를 관심사로 두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가 빠진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고 "그"를 소유한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흙인 인간이 "그"(생명과, 예수님)를 먹고 "그" 안에서 생명의 사람이 되도록 만드신 것이다. "그" 안에는 생명이고, "그" 밖에는 저주와 슬픔뿐이다.
그렇다면 아담에게 있어 구원이란? 동산에 있는 "그"(생명과)를 먹어서 영생하는 사람이 되어 에덴으로 나아가 하나님과 더불어 안식하는 것이다. 이토록 모든 인간은 "그"이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창조되었다. "그" 이신 예수님의 인도하심 없이는 아무라도 하나님께 갈 수가 없다. 예수님은 "그"로서 하나님께로 나아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이 사실은 영원토록 변치 않을 "진리이며", 이렇게 "그" 예수를 통하여서 얻어진 생명만이 하나님이 인정하는 참 "생명"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동산에 두신 목적은 "그"(생명과)를 먹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제일 먼저 생명과를 먹을 것을 명령하셨던 것이다.
창세기 2장 16-17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히브리어 동사는 일반적인 형태의 "칼"(Qal) 동사와, 강조형의 "피엘"(Piel) 동사, 사역형의 "히필"(Hiphil) 동사 등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명령한 "명하여"(wx'yw)라는 동사는 피엘 명령법을 사용하여 반드시 먹어야 할 것을 한층 더 강조하셨다. 즉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반드시 생명과는 먹어야 하고, 선악과는 절대로 먹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두 나무의 속성을 알려 준 것은 너는 "생령"이므로 영생에 관심을 두고 살아야 할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즉 너는 생령으로 살 자가 아니라 영생의 사람이 되도록 창조가 되어진 자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이 영생하는 사람이 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돕는 배필을 주시고자 하셨다.
창 2장18절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돕는 배필이라는 히브리어의 "에제르 네게드"라는 말은 곁에서 도와주는 조력자를 말한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보혜사(another helper)"라는 말의 "돕는 자"(helper)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시겠다고 한 것은 곧 아담 스스로 독자적으로는 영생의 세계로 나아갈 만한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아담은 누군가가 곁에서 도와주어야 영생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였다. 즉 영생에 관하여는 아직 미숙한 자라는 말이다.
이는 아담이 여자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먹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가 있다. 아담은 죽는 것이 무엇이며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되어진 지식이 없으므로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죽는 것과 영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돕는 배필"을 주시려고 한 것이다.
진정으로 아담이 영생에 관하여 죽음에 관하여 아는 자였다면 아무리 자기 갈비뼈로 만든 여자이지만 그 여자가 주는 선악과를 먹지 말았어야 했다. 그럼에도 아담이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게 된다는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도 여자가 주는 선악과를 망설임 없이 먹고 말았다. 이는 아담이 죽음이라는 저주와, 영생이라는 축복을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죽음이라는 저주와, 영생이라는 축복을 알려주기 위하여 돕는 배필을 준비하신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아담은 스스로의 판단에 돕는 배필이라고 생각하였던 여자 때문에 반드시 먹어야 하는 생명과는 안 먹고 절대로 먹어서는 안되는 선악과는 먹고 말았다.
결과론으로 따진다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준 여자는 아담에게 돕는 배필이 아니라 죽음으로 이끄는 저승사자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은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준 것이 아니라 저승사자를 준 것일까? 만약 하나님이 여자를 아담의 돕는 배필로 주셨다면 하나님이 아담이 범죄하도록 도와준 장본인이 되고 만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책임을 추궁 당할 때 하나님이 내게 주신 여자 때문에 먹었다고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는 내용을 보면 기실 아담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고 생각할 수가 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시고자 한 돕는 배필이 여자가 아니고 따로 준비해 두셨는데, 아담 스스로가 여자를 돕는 배필로 받아 들였다면 이는 아담의 범죄는 아담에게 있는 것이지 하나님께 원인을 물을 수는 없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 가운데 인간이 먹어서는 안될 독버섯도 있고 식용 버섯도 있다. 하나님께선 독버섯을 인간이 먹도록 창조한 것이 아닌데 인간이 먹고 죽었다고 하여 그 죽음을 하나님께 돌릴 수 없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피조물들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세계에 필요하여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피조물 중에는 인간에게 해악을 주는 것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 인간이 먹어선 안될 독버섯을 먹고 죽으면서 하나님 왜? 이런 독버섯을 만들어 놓았습니까? 라고 원망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나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한 것을 왜? 먹었느냐! 라고 하셨다. 왜? 먹지 말라는 것을 먹어 가지고 속을 섞이느냐! 라는 말이다. 선악과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겐 독이다. 그래서 먹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를 않았고,,,급기야는 먹고 죽음의 세계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죽음을 하나님께 전가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창세기 3장 11절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하나님께선 각종 피조물들에게 각자에게 적합한 먹거리들을 따로 주셨다. 사자는 고기를 먹고 소는 풀을 먹도록 창조하셨다. 그런데 소가 먹어서는 안되는 고기를 먹어서 광우병에 걸려서 죽는다든가, 사자가 소화도 시키지 못할 풀을 먹고 죽는다면 그들의 책임이지 결코 하나님의 책임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선 분명히 아담에게 먹으면 죽을 과실과, 먹으면 살 과실을 알려 주었다. 그럼에도 아담은 먹으면 죽을 과실을 따먹고선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순 없는 것이다.
돕는 배필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생각한 돕는 배필은 따로 있는데 아담이 엉뚱한 것을 돕는 배필로 맞이하여서 망한 것이라면 그것은 어디까지 아담의 잘못이지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아담에게 여자를 돕는 배필로 주지 않았다. 그런데 아담이 스스로 여자를 돕는 배필로 맞아들인 것이다.
무슨 쌩뚱맞는 소리인가? 과연 그러한가를 성경을 통하여서 고찰해 보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시고자 한 돕는 배필은 과연 누구였는가를 아담과 여자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들을 탐사해보자.
창세기 2장 18-23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20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신다고 하고선 흙으로 각종 짐승들을 만들어서 아담에게 끌고 왔다. 그런데 아담은 짐승들을 돕는 배필로 맞이하지 않았다. 이는 나중에 하나님이 데리고 온 여자를 보고서 "이는 배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반가워 한 것과는 너무도 대조되는 모습이다.
아담은 짐승들을 보고 대뜸 그들의 본질을 알아차리고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아담이 짐승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말은 아담이 짐승들보다 높은 차원에 있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흙으로 만든 짐승들을 아담의 돕는 배필이 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아담은 짐승들은 돕는 배필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던가?
아담이 짐승을 척 알아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담의 본질이 짐승과 다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짐승들은 흙이라는 재료로만 지음을 받았지만, 아담은 흙과 생기라는 재료로 지음을 받았다. 흙이 재료의 전부인 짐승은 흙 밖에 모르지만 아담은 흙에다 생기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어렴풋이나마 생기라는 "니스마트 하임"이 제공해 주는 정보로 생명의 기운을 알아보는 능력은 짐승보다 월등하게 나았다.
그래서 아담은 하나님이 데리고 온 짐승들을 돕는 배필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20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0절의 말씀을 보면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라고 하곤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라고 하였는데, 이걸 아담이 짐승에게서 돕는 배필을 "찾지 못하므로" 라고 볼 수도 잇다.
즉 하나님께서 돕는 베필을 주시겠다고 하시곤 흙으로 짐승들을 만들어 아담에게 가지고 왔으나 아담이 그 짐승들 속에서 돕는 베필을 찾지 못하였다는 뜻이다. 아담의 눈에는 짐승들은 한 수 아래 열등하게 보였기 때문에 거부한 것이다. 아담이 짐승을 돕는 배필로 받아들이지 않자 하나님은 이번엔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다. 그리고는 여자를 아담 앞으로 데리고 왔다.
21-23절을 보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아담이 하와를 보자 대뜸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고 하며 반색을 하였다. 아담은 앞서서 짐승을 데리고 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나타내었다. 앞서서 아담은 짐승들을 볼 때는 소 닭보듯 하였지만 여자를 보고선 한 눈에 빠지고 말았다. 아담은 주저함도 없이 대뜸 여자를 돕는 배필로 맞이하였다.
아담이 하와를 보고 기뻐한 것은 하와 자신이 곧 아담의 뼈와 살이기 때문이었다. 아담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빠지고 만 것이다. 아담이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은 결국 자기 수준에 만족한 것이다. 아담이 여자가 주는 선악과를 먹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기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끼리끼리 노는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
알다시피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시고자 한 것은 아담이 자기 수준을 벗어나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기를 바라심에서였다. 그런데 아담은 여자에게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 아담은 생명과를 먹고 더 완전한데로 나아가야 할 자이다. 그런데 아담은 자기가 가야할 길은 망각하고 여자 속에 비췬 자기 모습을 보고 나르시즘에 빠져서 갈 바를 잊고 말았다.
아담이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두어서 자신은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어 에덴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였다면 하와 역시 돕는 배필로서는 합당치 않은 자로 여겨야 했었다. 아담이 만약 하와마저도 돕는 배필로 인정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다른 돕는 배필을 보내 주셨을 것이다.
돕는 배필이란? 글자 그대로 돕는 자이다. 그렇다면 아담이 어느 길로 가느냐에 따라서 돕는 배필이 달라지게 된다.
하와가 창조 될 때의 시점을 보면 하와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와 생명과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난 연후에 만들어졌다. 창조의 순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먼저 만드셔서 선악과와 생명과에 대한 정보를 주시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난 후 돕는 배필을 주시겠다고 하시곤 흙으로 짐승을 만드시고 아담에게 데리고 오자 아담이 거절하니 다시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신 것이다.
그렇다면 아담보다 늦게 창조된 여자는 선악과와 생명과에 대하여 아담과 같이 정확한 정보를 알지 못한다. 하와가 선악과와 생명과에 대하여 안 것은 기껏해야 아담으로부터 들어서 알게 된 정보일 뿐이다. 그렇다면 선악과와 생명과에 대하여서는 아담이 하와에게 돕는 자이지, 하와가 아담에게 돕는 자는 될 수가 없다.
다시 말하지만 아담이 어디를 지향하느냐에 따라서 하와가 돕는 배필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아담이 만약 "네페쉬하야" 라는 "생령"으로 살고자 한다면 하와는 아담과 동격이므로 얼마든지 말동무가 되며 돕는 배필이 될 수가 있다. 그러나 아담이 영생하는 자가 되어 에덴(하늘)으로 나아가야 한다면 여자는 돕는 배필이 될 수가 없다.
이는 마치 성도가 세상을 지향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돕는 자가 될 수가 있지만, 천국을 지향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돕는 자가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영적으로 본다면 세상 사람들은 짐승이고 성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구약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놓쳤기 때문에 아담과 같이 망하고 만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 놓고 땅을 바라보고 살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늘에 있는 본향을 바라보도록 하셨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만 바라보고 산다면 가나안 원주민들은 얼마든지 돕는 자가 될 수가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보이는 땅을 바라보고 살 자들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본향을 바라보고 살아야 할 자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늘을 바라보지 않고 가나안이라는 땅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가나안 원주민들을 돕는 자로 두었던 것이다. 뱀의 후손들은 땅의 기운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므로 땅에 대하여는 전문가들이다.
이스라엘은 땅에 대하여 전문가인 가나안 거민들을 돕는 자로 두어서 땅을 벗어나지 못하고 만 것이다. 결국 가나안 원주민들이 이스라엘을 뒤에서 붙잡는 돕는베필이 되어서 땅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만 것이다. 가나안 원주민은 우상을 섬기게 하는 데에는 돕는 자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는 해로운 존재들이고 옆구리의 가시와 같은 발목을 잡는 자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가나안 백성들을 한 사람도 살려두지 말고 다 쫓아내라고 하셨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가나안 거민들을 자기 집 머슴으로 삼아서 그들의 도움을 받고 살았다. 그러니 약속의 땅에서 뱉어냄을 당하고 만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지금도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땅에 것은 버리고 위엣 것을 바라보라고 한다. 그래서 땅에 속한 자들과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교인들은 믿음이 좋은 사람들의 말을 듣기보단 믿음 없는 사람들의 말을 듣기를 좋아한다. 쉬운 예로 믿지 않는 남편이나 혹은 아내와 산다고 하자.
그러면 당연히 믿는 자가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 앞에서 믿음에 돕는 자 노릇을 하여야 하는데 실상에선 반대로 믿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남편의 말을 듣고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례들을 수 없이 볼 수가 있다. 그러니 믿음에 퇴보를 하는 것이다. 안다는 것에는 냉정함이 들어가 있다. 죽고 사는 문제엔 인정이 끼여들어선 안된다.
아이들도 무슨 문제가 있으면 부모에게 도움을 구하고 자문을 구하지 않고 꼭 자기와 비슷한 놈에 말을 듣고 그릇된 길로 가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게 다 아담의 후손이라서 그런 것이다. 이 인간이란 하라는 것은 안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죽어도 하고자 하는 청개구리 심보를 가진 자이다. 아담이 만약 하나님의 명령을 귀담아 두어 자신은 영생하는 자로 한번의 거듭남이 필요한 존재란 것을 알았다면 여자를 보고서도 앞서서 짐승들을 보듯 해야 했었다. 그리곤 하나님께 영생을 아는 자를 돕는 배필로 달라고 했어야 했다.
(웃자고 하는 말로 우리가 흔히들 영화를 보게 되면 꼭 여자들이 남자를 돕겠다고 나서서 오히려 남자를 더 곤경에 처하게 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괜히 가만히 집에서 아이나 돌보고 있으면 도와주는 것인데 꼭 돕겠다고 나서서 남자를 더 힘들게 만들어서 얻어터지게 만들고 죽을 고생을 하게 만드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지금 하와가 꼭 그런 짝이다. 뱀이 만약 아담에게 접근을 하였다면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 가장 지혜롭다고 한 뱀이 아닌가? 그래서 뱀은 타깃을 아담이 아니라 하와를 정한 것이다. 결국 뱀의 생각대로 하와는 뱀에게 넘어가 결국엔 자기 신랑까지 지옥으로 끌고 가는 돕는 배필의 사명을 감당하게 된 것이다.
아담이 여자를 돕는 배필로 맞이하자 하나님이 준비한 진짜 돕는 배필은 저 만치서 아담을 안타까움으로 바라보며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시고자 했던 돕는 배필은 아담 "앞에서" 돕는 존재였다. 짐승이 아담의 "뒤에서" 아담을 도울 수 있는 존재라면 이건 도움이 아니라 오히려 해(害)이다. 짐승들은 아담을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는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흙의 세계에서는 모두 아담보다 한 수 위이지만, 생기의 세계에 대하여는 아예 무지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여자는 아담의 "옆에서" 아담을 도울 수 있는 존재였다. 여자는 아담의 몸에서 나왔기 때문에 동산에서 살아가는 일에는 얼마든지 충고를 하고 도울 수가 있다. 그러나 영생으로 나아가는 길엔 하와 역시 짐승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아담이 여자를 돕는 배필로 둔 이상은 아담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 갈 수는 없다. 기껏해야 생령인 "네페쉬 하야" 수준에 머물게 될 뿐이다.
아담에게 필요한 돕는 배필은 흙으로 살기 위한 짐승도 아니고, 동산에서 생령으로 살기 위한 여자도 아니다. 아담에겐 오직 아담의 앞에서 영생의 세계로 이끌어줄 돕는 배필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하여 준비해 둔 돕는 배필은 과연 누구였는가? 구약의 시편 기자는 여호와가 돕는 배필이라고 하였다.
시편 115편 9-11절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그래서 시편을 기록한 아담은 여호와가 아담의 돕는 배필이라는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언약이 바뀐 시대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알려 주신 돕는 배필이 누구인지 알아보자.
요한복음 15장 26절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4장 16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영을 성도들의 보혜사(another helper, 돕는 배필)라고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보내 주신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아담을 위하여 준비하신 "돕는 배필"(helper)은 바로 이 "진리의 영"이셨다. 이 "진리의 성령" 만이 아담을 영생의 세계로 인도할 돕는 배필이다. 영생의 세계를 나아가기 위한 돕는 배필이 되려면 영생의 세계에서 오신 분이라야만 한다. 하늘로서 온 자 이외는 하늘에 길을 아는 자가 없다.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로 가셔서 성령을 보혜사(another helper, 돕는 배필)로 보내 주신 것은 성도가 하나님 나라에 오는데 "길잡이"(돕는 배필)가 되라고 하신 것이다. 땅에서 지음을 받은 짐승이나 여자는 에덴의 길은 알 수가 없으므로 아담에 길잡이가 될 수가 없다. 에덴의 길은 오직 에덴에서 오신 분만이 알 수가 있다.
그 분이 누구인가? 바로 "진리의 성령"이시다. 이제는 이 "진리의 성령"이 성도들을 영생의 세계로 인도할 "돕는 배필"로 계신다. 지금도 교회 안에는 에덴동산에서와 같이 먹으면 죽을 과실이 있고, 먹으면 영생할 과실이 있다. 붙잡으면 "죽을 의"가 있고, 붙잡으면 "살 의"가 있다. "인간의 의"를 붙잡으면 죽고 "예수님의 의"를 붙잡으면 산다. 마귀가 붙잡으라는 의는 인간의 행함에서 나온 의이다. 인간의 행함에서 나온 의는 선악이라는 구조 속에서 나온 의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선 악일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악의 구조자체를 악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리 인간적으로 착하게 살아도 하나님 앞에선 악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나온 의" 말고 "하나님께서 나온 의"를 붙잡으라고 한다. 하나님이 붙잡으라는 의는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나온 의이다. 다름 아닌 예수를 믿는 믿음을 말한다.
이 예수님의 의는 인간의 의와 충돌을 일으킨다. 예수님의 의를 붙잡으면 인간의 의가 날아가고, 인간의 의를 붙잡으면 예수님의 의가 날아간다. 그런데 인간들은 아담이 자기 몸에서 나온 여자를 보고 한 눈에 반해 버렸듯이 자기가 만들어낸 의를 사랑하게 되어 있다. 만약 성도들에게 돕는 배필을 주시지 않으면 성도 역시 자기 것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 성도들에겐 성령이라는 돕는 배필을 주시는 것이다.
성령은 성도의 돕는 배필이 되셔서 인간의 의를 버리고 예수의 의를 붙잡도록 인도하신다. 인간은 죄의 속성이 그대로 몸에 살아 있기 때문에 무엇을 하여도 자기 의를 축적하는 쪽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성령은 간섭하여서 자기 의를 버리고 예수님의 의를 붙잡도록 일을 하신다.
하나님은 영생 주시기로 작정한 자들에게 성령을 보혜사로 주셔서 예수 안에 거하도록 끌어당길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이 돕는 배필이 되셔서 예수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신다.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보혜사는 영원토록 성도 안에서 함께 하시면서 믿음에 굳게 거하도록 주장해 주실 것이다.
이 든든한 돕는 배필이 계시므로 성도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지가 않는 것이다. 성령이 돕는 베필로 와 계신다는 것은 인간이란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종자들이라는 말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여자를 돕는 배필이라고 여기는 것을 먼발치에서 물끄러미 보고 계시던 그 성령이 이제는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보내 주셔서 영원히 돕는 배필로 붙여 주신 것이다. 구약의 아담은 실패하였지만 신약의 성도는 실패하지를 않는다. 왜냐하면! 성령이 돕는 베필로 일하시기 때문이다. 동일한 아담의 피를 갖고 있지만 그 안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 어떤 것으로도 성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 8장 33-39절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성도들은 질그릇 속에 예수의 씨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질 수가 없다. 이 끊어질 수 없는 질기디 질긴 하나님의 사랑의 끈에 매여 있는게 성도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것만 믿어진다면,,,,,,,
그래서 바울은 갖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지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고후 4:7-11=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이 지켜 내신다. 그래서 성령을 믿음을 선물로 준 성도에게 보내 주신 것이다. 이제 성령께서 든든한 돕는베필이 되셔서 성도를 끝까지 견인할 것이다. 어떤 식으로 견인하는가? 날마다 예수 죽음을 몸에 짊어지게 하는 방식으로 견인하신다. 즉 육신의 소욕들을 죽이는 방식으로 한다. 성도에게 성령을 돕는베필로 주셨다는 것은 비록 성도라 할지라도 육신의 소욕을 쫓아가고자 하는 본성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죄와 성령은 성도의 몸을 놓고 치열하게 전쟁을 한다. 죄는 육신의 소욕을 쫓아가라고 하고, 성령은 육신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한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에는 날마다 예수 죽음과 예수의 생명이 교차하여 나타나게 된다. 즉 성령께서 날마다 죄가 들추어내서 네가 바로 예수를 죽인 장본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여 회개하게 하고 예수님의 의를 붙잡도록 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이 돕는베필로 와 계신 성도는 세상에서 끊어질지라도 낙망치 말아야 한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 사실을 깨닫고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구원됨 하나로 감사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합 3장 17-18절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성도는 세상 가치관으로 살지 말고 구원의 가치관으로 살아야 세상 일로 실망치 않고 담대하게 살수가 있다. 성도가 믿음으로 하늘에 가치관으로 살면 실망할 일도 없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살아지지가 않는다. 왜? 그런가? 죄 때문이다. 성도란 이 죄를 아는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날마다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께 긍휼을 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알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큰 은혜를 입고 사는 지를 알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죄사함의 은총과 구원에 대한 감사와 감격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현실로 인하여 불평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구약 이스라엘처럼 보이는 왕을 구하게 된다.
예수님은 보이는 왕(주인)을 재물이라고 하셨다. 돈을 주인으로 두게 되면 돈의 가치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면 삶에 희노애락을 돈에 두게되고 결국은 하나님도 예수를 믿는 신앙조차도 돈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사용하지 말라고 경고한 것이다. 물론 성도는 성령이 돕는베필로 와 계시기 때문에 육신의 요구대로 살아지지가 않는다. 왜냐하면! 성령이 육신의 요구대로 살아지지 않도록 방해를 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복을 받은 자라고 한다. 진정한 복은 하나님 자신이 돕는베필로 성도를 간섭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불편한 축복인가? 내 마음대로 살수 없는 이 축복을 뉘라서 감사할 수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