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되기를 싫어하는 집단이 이단보다 더 위험하다.”
어제 고신대학교에서 열린 <한국칼빈학술대회>의 개회예배에서 남천교회 배굉호 목사가 한 말입니다. 배 목사는 개회예배 설교를 통해 “한국 교회와 그 강단은 성경적인가?”를 화두로 한국교회에 올바른 말씀선포와 권징이 사라졌음을 지적하고, 칼빈의 후예로서 개혁주의 신학을 파수해야 할 책임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오래전부터 우리 카페에서 고민해오던 바입니다. 지난 2005년 여름, 고신대학교에서 열린 <제3회 부흥과 개혁 카페 포럼>에서 본 카페의 카페지기가 ‘변화되지 않는 성도들도 문제지만 변화되지 않는 목회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들을 재교육할 시스템이라도 마련해야 하는 것인가’하는 문제를 던지며 눈시울을 적셨던 사건(?)을 기억해봅니다.
한국교회의 개혁이 절실하면서도, 또 그에 대한 공감의 목소리가 높아져 가면서도 정작 아무런 변화도 나타나지 않고 있는 형편입니다. 오히려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편의적이고 인본주의적인 개혁을 주장하는 이들로 인해 한국교회는 더욱 어지러운 형편 가운데 처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칼빈 출생 500주년을 기념하여 곳곳에서 칼빈과 관련된 행사와 모임이 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행사와 모임을 통해 칼빈 정신을 올바로 살피고 계승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대부분의 장로교회와 신학교 교수들이 참여하는 <칼빈탄생500주년기념사업회>가 칼빈의 흉상을 만들고, 도로 이름을 칼빈으로 하고, 칼빈 기념 음악회를 개최하는 등의 일들을 통해 칼빈을 기념한다고 하는데 이런 행사들을 통해 과연 칼빈 정신이 바르게 계승될 수 있을까요? 칼빈이 한평생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해 주님의 몸된 교회를 말씀을 통해 개혁하고 섬긴 본을 한국 교회에 적용하는데 유익을 줄 수 있을까요?
평양 부흥 100주년을 기념한다고 하면서 모여서 회개(?) 한번 떠들썩하게 하고 나면 뭐가 크게 바뀌고 부흥이 올 것처럼 이야기하더니 이제 잠잠해진 것처럼, 칼빈 탄생 500주년이니까 행사 한번 크게 치러보자는 식이라면 이 역시 교회를 말씀으로 개혁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할 것입니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아직도 교회로서의 본질, 하나님을 경배하는 공예배, 그 공예배의 중심인 강단을 통한 하나님 말씀과 참된 신앙의 상속에는 관심이 없는 듯 보입니다. 그보다도 각종 절기를 지키고 그 절기를 행사화 하고, 각종 기념일을 만들어 지키는데 모든 시간과 힘과 노력을 쏟는 것 같습니다. 신자들은 한국 교회의 다양한 현상들을 경험하며 이것이 참된 교회의 모습인가, 이 말씀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인가 고민하며 괴로워하는데, 정작 말씀을 맡은 직분자인 목사와 신학 교수들은 올바른 말씀 선포를 통한 교회의 개혁과 상속에는 관심이 없는 듯 보입니다.
이러한 형편이다보니 한국의 장로교회는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장로교회에서 분리하여 ‘개혁교회’라는 이름으로 장로교회를 비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분들이 옳은 것일까요? 우리도 더 이상 소망없는(?) 한국의 장로교회를 버리고 말씀을 경외하는 개혁교회의 본을 따라야 할까요?
현재 대부분의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그 신앙고백으로 채택하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역사가운데 신앙의 선배들이 말씀을 잘 살펴서 올바른 신앙의 도리들을 가르치고 전수하는데 온 힘을 쏟으며 훌륭한 유산들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의 장로교회들은 그것을 하찮게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로교회와 동일한 뿌리를 가진 개혁교회는 신앙고백서를 살피고 가르치는데 매우 철저합니다. 그들은 역사적 전통적 신앙 고백서를 가르치고 배우는데 열심을 낼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계시된 말씀과 잘 조화되는지를 살피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한국의 장로교회가 그들로부터 배워야할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칼빈을 칭송하고 칼빈을 높이며 칼빈을 쉴 새 없이 이야기하지만 정작 칼빈이 말한 올바른 신앙의 도리와 교회의 참된 모습에 대해선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칼빈을 ‘기념’하기는 하지만 칼빈을 ‘계승’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형편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이제는 칼빈을 이야기 할 때가 아니라 한국 장로교회를 이야기 해야 할 때입니다. 칼빈의 후예로 자처하면서도 말씀으로 개혁되기를 싫어하는 한국 장로교회의 모습, 은혜의 방편을 하찮게 취급하고 엉뚱한 종교 행사와 각종 프로그램이 신앙의 도리를 대체하고 있는 한국 장로교회를 올바로 진단하고 평가해야 할 때입니다. 한국 장로교회는 자신의 모습도 바르게 평가하지 못하면서 칼빈을 평가하고자 하는 오만한 자세를 버리고 이제 말씀의 거울 앞에 스스로를 겸손히 비추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장로교회의 목사와 신학자들이 장로교회가 고백하는 역사적 신앙고백이 무엇인지를 잘 살피고 이를 통해 건전한 신앙의 상속이 바르게 이루어지도록 관심을 기울이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와 우리의 자녀, 다음 세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는 본이 될 것이며 우리를 살리는 은혜의 방편이 될 것입니다.
(09. 05. 15, Theologus)
첫댓글 이 글을 읽으면서 든 생각인데 혹시 다른 나라에도 사골국물처럼 뼈를 우려내는 음식이 있습니까? 며칠이나 우려먹는 것 말입니다.... 알뜰하게 우려먹는 것은 좋은데 너무 우려내면 맹물만 남지 않을까요? 한국은 500년 된 칼빈과 그의 신학을 우려내고 있지만 알맹이나 진국은 없는 맹탕이 아닌가 합니다....^^
올바른 지적입니다. 하지만 정성구님의 말을 인용한 부분은 상당히 염려가 됩니다. 정성구님이 과연 칼빈의 신학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되기 때문입니다. 그 단락만은 사족같습니다. 그 단락이 없다면 거칠 것 없이 문장이 흘러가는데 갑자기 돌맹이에 발뿌리가 부딛치는 것 같아서 마음에 걸림니다. 신학을 매개로 더우기 칼빈 선생님의 이름을 매개로 돈을 버는 장사치들이 아무리 그럴 듯하게 말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분별해서 제거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분별하게 도와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글의 내용을 수정하였습니다. ^^
저도 어느 분의 강요에 못이겨 그 행사의 논평자로 참석했습니다. 한철하 박사의 입장인 "칼빈과 웨슬레는 동일한 사상을 가진 신학자"라는 주장을 개혁주의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인지, 정성구 원장이 인용한 칼빈의 말 "탐욕과 야망은 모든 성직의 부패가 시작되는 두 근원이다."는 문구는 과연 그 자신이 아닌 누구에게 먼저 적용해야 하는 것인지, 너무나도 혼란스러운 칼빈탄생 500주년 행사였다고 생각합니다. 최기자님 말씀처럼 칼빈을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이제 그만 우려먹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주최하지는 않았지만 동참자의 한 사람으로써 theologus님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겠습니다만 송목사님의 지적대로 남의 말이나 글을 마치 자신의 것인양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분을 과연 칼빈주의자라 할 수 있을지... 그리고 칼빈 초상화에 대한 해설도 너무나도 주관적이고 황당한 것이라 할 말이 없었습니다. 왜 그런 분들을 모셔야 하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외국에서 엄청난 비행기 값을 지불하고 모셔온 분을 단 30분의 강의로 마무리하는 정말 대담한 계획에 아연실색할 뿐입니다. (사실 주 강사는 저의 지도교수님이시지만 제가 초청하지는 않았습니다. 덕분에 저는 한국에서 교수님을 모시면서 이러저러한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얻어 너무 좋았습니다. ㅎㅎㅎ)
apeldoornh님, 원고를 꼼꼼히 읽으시고 논평 작성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논평 시간이 짧고 충분치 못한점이 아쉬웠습니다. 한 박사님 답변도 영 엉뚱하고... 마치고 바빠보이셔서 인사도 못 드리고 그냥 왔습니다. 여하튼 수고 많으셨습니다. ^^
원래 돈쓰는 사람 따로, 덕보는 사람 따로인 법이지요....^^
두 분 덕분에 그냥 지나치지 않고 고민해보고 다시 살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졸필을 읽으시고 지적해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글의 내용을 수정했습니다. 여전히 졸필이지만 우리의 형편을 짚어보고 생각해 보는데 조금이나마 유익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졸필에 대한 지적이나 충고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
황 교수님과 제자 중 한 분이 이렇게 한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참으로 보기에 좋습니다. 옛날에도 제자는 스승의 잠자리까지라도 엿보며 스승의 면모를 자신의 삶으로 승화시키려고 했다고 하는데, 황 교수님의 모범은 오늘날 스승이 부제하는 시대에도 여전히 스승이 건재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어서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황 교수님의 논평 자료도 보고 싶어집니다. 귀한 깨우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