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4:13-21, 막6:30-44, 눅9:10-17 비교하라 이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을 빼고는 유일하게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내용이다. 그것은 이 기적의 사건은 역사적으로 실제 존재했으며 당시의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내용이었다는 것을 뒤받침 한다. 그 후에는 정확하게 언제를 말하는지 알 수는 없다.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다른 기사들을 기록할 때 요한이 즐겨 사용하는 용법이다(요2:12, 3:22, 5:1, 7:1). 디베랴 바다는 갈릴리 바다의 또 다른 이름으로 구약에서는 하프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서 '긴네렛'(민34:11)이라고도 불렀으며 '게네사렛 호수'(눅5:1)라고도 불렀다. A.D. 20년경 헤롯 안티파스가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Tiberius)를 기념하기 위해 호숫가 근처에 도시를 세운 뒤 붙여진 이름이다. 건너편은 이 기적의 장소를 말하는데 4개의 복음서 중 마태(마14:13)와 누가(눅1:1-3)도 베드로, 안드레, 빌립의 고향인 "벳세다"를 암시하고 있다. 마가는 막6:45에서 제자들을 호수 건너편 "벳세다"로 가게 하셨다고 함으로 정확한 장소를 찾기 힘들다.
2절 표적을 봄이러라 ejqewvroun(에데오룬)은 qewrew(데오레오) 미완료형으로 게속 해서 [보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기 전에 이곳에서 여러 병자들을 고치시고 계셨던 것이다.
3절 산에 오르사 그러나 마태(마14:13)에서 "빈들"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다른 기사 마5:1-12에서 '산상수훈'으로 누가(눅6:17-49)는 '평지수훈'으로 기록했다. 이것은 유대지형의 특징이 얕은 산으로, 산 위에 올라갔다 해도 평지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4절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요5:1절의 명절이 유월절이 아니라면 예수께서는 공생애 세 번 유월절을 맞이하시는데 요한의 기사에 의하면 첫 번째는 요2:13에 올라가셨고 그리고 현재의 기사가 두 번째가 되는데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으신 것으로 볼 수 있다.
5-6절 예수님은 왜 빌립에게 이 질문을 하셨을까? 6절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시험 peiravzwn(페이라존)은 나쁜 의미로 사용된 적도 있지만 여기서는 단순한 Test로 이해해야 한다. 아울러 이 단어에는 "훈련하다"의 뜻도 있다.
7절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빌립은 이들에게 아주 간략한 식사(떡 한 조각)을 하게 돈으로 계산을 한다면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라고 대답했다. 현재 이 금액을 정확히 산출하기는 어렵지만 마20:2에 따르면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 한 데나리온에 해당하기 때문에 약 200명의 일당을 지급해야 하는 것과 같다.
8-9절 이 대 베드로가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나누어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기적을 베푸실 것을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10절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는 서 있는 사람을 앉게 하라는 의미보다는 다시 자리정리를 하라고 하신 것이다. 눅9:14에는 "오십명씩 앉히라"고 기록했다. 이것은 나누어주기에 편리하도록 앉히라는 말씀이다.
11-13절 축사하신 eujcaristevw(유카리스테오) "감사의 표현을 하다"는 뜻으로 하나님께 이 영광을 돌리시고 계시다. 원어의 이 단어는 "칠병이어"(마15:36, 막8:6), 성만찬 사건 때(마26:27, 막14:23, 눅22:17, 19, 고전11:24) 기록되었다. 성만찬 때도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 일부의 학자들은 이 단어에서 성만찬의 유형을 찾으려 하지만 이 단어만을 가지고는 부족하다. 하지만 오병이어의 사건에서 축사하신 단어와 성만찬 때 사용한 단어가 같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본다.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 저희가 배부른 후에 이것은 빌립이 말한 "조금씩"의 반대로 실컷 먹고는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6:16-21 물위를 걸으신 예수
마14:22-33, 막6:45-52 비교하라 이 사건은 요한이 기록한 7개의 표적중의 하나이며 누가복음을 제외한 3개의 복음서에 모두 나오며 오병이어의 사건 뒤에 기록된 것이 특이하다.
16절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마가는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앞서"(막6:45)라고 기록함으로 왕으로 삼으려는(15절) 군중들의 틈을 벗어나려고 했다.
17절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파도가 일어나기 직전의 때를 말한다. 이 때는 어두움이 든 저녁때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막6:48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온 때가 "밤 사경"(오전 4시부터 해뜰 무렵)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탄 이 배는 예수께서 오시기 전까지 밤새도록 떠다녔다는 이야기가 된다.
19절 십여리쯤 가다가 25-30 stadivou"(스타디온) "1스타디온은 약185m이며 25-30스타디온은 약 4.6km-5.6km이다." 그래도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제자들인지라 그들은 파도와 사투를 벌이면서 배는 떠밀려 가고 있었다. 이때 제자들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fobevw(프호베오) "두려워하다, 경악하다, 놀래다, 무서워하다" 이 단어는 마9:8 중풍병자를 고치셨을 때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마17:6의 변화산에서 하늘에서 나는 음성을 듣고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마27:54의 부활 때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 외에도 (막5:15, 막12:12, 눅2:9, 눅8:35, 눅9:34, 눅20:19)에 기록된 사건들은 모두가 예수님과 관련된 놀라움과, 두려움이 포함된 하나님의 기적사건에서 나타났다. 마10:28에서 예수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21절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중간에 원문에는 eujqevw"(유데오스) "직접, 즉시, 바로"의 부사가 있다. 이 단어를 넣어서 다시 번역하면 [이에 기뻐서 즉시 배로 영접하니]가 된다. 제자들의 반갑고 기쁜 마음을 재빨리 예수를 배로 영접하여 나타냈다.
6:22-34 정치적 목적으로 예수를 따르는 군중
21-24절 무리와 예수께서는 배로 숨박꼭질하는 것과 같은 모습을 연상케 한다. 22절에서 배는 하나밖에 없었고 분명히 그 배에는 예수께서는 타지 않고 제자들만 타고 떠나는 것을 무리들은 보았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곳에 계시지 아니했다.
24절 가버나움 갈릴리 바다 북서쪽 해변 가에 위치한 이곳은 베드로와 안드레의 집이 있었고(마8:14, 막1:29),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시고(막1:21-28),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등의(막2:1-12) 많은 사역을 하셨지만 회개하지 않는 악한 도시로 책망 받았다(마11:23, 눅10:15).
25절 어느 때에 povte(포테) "언제" 오셨냐고 물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어떤 방법으로 이곳에 오셨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들이 예수를 찾는 이유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26절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로 말했다. shmei'a(세메이온) "표적, 지시"는 물론 "기적, 이적"의 뜻도 있다. 그러나 본 절에서 그 구분을 예수께서는 명확히 하셨다. shmei'a"표적"은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 속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깨달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발견하는데 있다. 그러나 이들은 "표적"으로 기억한 것이 아니라 "이적"으로만 보고 있음을 말한다. 한마디로 영의 세계에 관심이 있다기 보다는 육의 세계에만 몰두해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답답한 마음으로
27절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하신다. 가족이나 개인을 위한 노동의 대가가 전혀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썩을 양식만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원히 생명을 존속케 하는 양식, 즉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말씀하신다.
28절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e[rga(에르가) "일"은 복수형으로 기록되어 29절의 예수님의 답변에서 e[rga(에르가) "일" 단수형으로 기록된 것이 다르다. 유대인들이 생각한 하나님의 일이란 모세를 통해서 주어지고 자신들에 의해서 수 없이 만들어진 율법 지키는 일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들이 예수께 질문하는 뜻은 "어떻게 해야 율법들을 잘 지킬 수 있습니까?"라고 말한 것과도 같다.
29절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유대인들은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예수께서는 단 한가지 일 "믿음"을 강조하셨다. 이들은 어떤 일을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일이란 아무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이 평생을 노력하여 어떤 일을 한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믿음에는 그에 합당한 책임과 행동이 따르기 마련이다.
30절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이들은 아직도 표적을 찾고 있었다. 그것은 아직 예수께서 메시야임을 못 믿는 것이다. 이미 예수께서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고, 38년 된 병자도 고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도 일으키셨다. 또 어떤 표적으로 요구하는지 답답한 노릇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표적요구에 마12:39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하셨다.
31절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이들이 요구하는 표적은 하늘에서 내린 '만나'와 같은 것이었다(출16:4). j
32절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32절 ou(우) "아니"는 문장 전체를 부정하는 의미로 볼 수 있는 32절 "levgw"(레고) "말하다"의 다음에 ou\n(운)이 있다. 이것은 이 떡은 모세가 준 것도 아니지만 그 앞에 나타나는 ou\n(운)은 그것은 "참 떡이 아니다"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설명이 마치기도 전에 34절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대답했다. 아직도 이들은 육 적인 양식을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올 것을 기대하고 있는 듯 한다.
6:35-51 생명의 떡으로의 초대
35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하늘에서 '만나'같이 내려오는 양식을 생각한 사람들은 실망한 표정이 역력하다.
41절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이들은 예수께서 자라나신 배경을 알고 그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사실에 부정하고 있다.
45절 선지자의 글은 구약성경의 일부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선지서를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마26:56, 롬16:26).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는 이사야 54:13절이나, 예레미야 31:34를 생각하신 것 같다.
46절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영지주의자들(gnosists)은 구원에 이르는 신비한 지식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직 예수께서만 하나님을 보았고 예수께로만 영생의 길이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49절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 사람들이 그토록 기다리는 '만나'의 이적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그것을 먹었어도 결국은 '죽지 않았느냐?'고 하시는 것이다. 원문에는 ejrhvmw/(에레몬) "버려졌다"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
6:52-59 참된 양식인 예수의 피와 살
52절 서로 다투어 mavcomai(마코마이) "싸우다, 전쟁하다, 논쟁하다"의 뜻으로 격렬하게 언쟁하고 있음을 말한다. 언쟁의 주제는 지금까지 예수께서 하신 '생명의 떡'(살과 피)에 관한 것이었다. 이들은 언쟁하면서 피를 마시는 것은 율법에 금지된 사항이라는 것을 말했을 것이다(레3:17, 레17:10-14, 레19:26). 예수께서도 이러한 문제를 익히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러나 이 피는 사람의 생명에 대한 대속을 말하기도 한다(레17:11).
55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ajlhqhv"(알레데스) "참된"은 '진리에 부합하는 뜻'이 아니라 "진짜"(real)를 말하는 것이다. 만나와 메추라기는 한 때 육 적 양식이 되었고 그것은 예수께서 주시고자 하는 현재의 예표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56절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mevnw(메노) "거하다, 거주하다, 남아있다"의 이 말은 요한의 주요 신학적인 주제이다. 아버지가 아들 안에 "거하고"(요14:10), 성령님이 예수님에 "거하며"(요1:32), 신자들이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께서도 그들 안에 "거한다"(요6:56, 요15:4). 요일2:6, 27, 28, 요일4:12에서도 나타난다. 이 말은 단순한 영적 교감의 수준을 넘어 본질상 하나가 되는 영적 교통함을 말한다. "예수께서 내 안에 거주하고 내가 예수께 거주함"을 말한다.
57절 살아계신 아버지 zw'n(자온) "살아있는"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으로는 구약, 신약에 모두 나오지만(수3:10, 삼상17:26, 삼상25:26, 왕하19:4, 사37:4, 렘10:10, 마16:16, 마26:63, 롬9:26, 고후3:3, 딤전4:10, 히3:12, 히9:14, 히10:31, 히12:22, 계10:6) "살아계신 아버지"는 본 절에서만 나온다. 생명의 근원이 아버지께 있음을 말한다.
6:60-65 생명의 교훈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
60절 제자 중 여럿이 41절에 보면 유대인의 따라온 무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명백하다. 그런데 이곳에 제자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음도 사실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12제자뿐만 아니라 눅10:1의 70인 또는 72인의 제자들이 있었다. 지금은 정확하게 얼마인지 알 수 없지만 유대인들과 함께 섞여있었다.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어렵도다" Sklhrov"(스클레오스)는 "굳은, 마른, 거친"의 뜻이다. 즉 말씀을 쉽게, 부드럽게 해 주셔야 하는데 너무 딱딱하고 어렵다고 불평하는 것이다. (칼빈은 이에 대해서 예수의 말씀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이들의 마음에 있다고 했다.) 제자들이라고 해서 별로 나을 것은 없겠지만, 그래도 제자들이 어렵다고 했으면 다른 유대인들은 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61절 걸림이 되느냐 skandalivzei(스칸달리) "함정, 걸려 넘어지다"의 뜻이다. 62절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에 ou\n(운) 부정문으로 시작함으로 문장 자체는 부정을 마치게 되기 때문에 해석은 상당히 어려워 진다. '예수의 승천장면을 보게되어도 넘어질 자는 넘어지게 되리라'는 뜻으로 이해된다(행1:11 참고). 또한 동시에 '믿음을 가진 자는 더욱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는데 많은 학자들은 동의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63절 살리는 것은 영이니 zwopoievw(조오포이에오) "살리는, 생명을 주다"의 표현을 바울도 즐겨 사용했다(롬4:17, 고전15:22, 딤전6:13).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갈3:13). 그러나 실제로 이 율법은 누구도 완벽하게 지킬 수도 없을 뿐만이 아니라 설령 지킨다해도 육체로 구원을 얻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영(믿음)은 우리를 살릴 수 있는 것이다. 육은 무익하니라 sa;rx(사르크스)는 "육체"를 가리키며 주로 '부패된 인간성'을 지적하는데 사용되었다. '육'은 '영'과 대립되는데 단순한 선악으로 구분되는 대립이 아니라 '육'은 율법시대에 강조되어온 '행위'에 있으며 '영'은 새 시대의 '믿음'으로 대변되고 있다.
64절 너희 중에 eijsi;n(에이신)는 현재 직설법 3인칭 복수로 가롯유다를 포함해서 여러 제자를 의미하고 있으며 예수께서는 지금 그들을 가리키시며(비록 손가락으로 보이게 한 것은 아닐지라도) 말하고 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저자는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모를 때 이미 예수께서는 자신을 팔 자를 알고 계셨다고 말하고 있다.
65절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를 다시 말씀하심으로 구원이 사람의 행위로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롬5:2)와 선물(엡2:8)로 주어지는 것이다.
6:66-71 예수께 등을 돌린 많은 제자들
66절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결국 예수님의 말씀이 여러 제자에게 61절의 "걸림"이 되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것을 다 아셨을 것이고 많은 제자만을 선택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제자, 자신의 말을 믿고 따를 수 있는 제자를 선택하신 것이다.
67절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요한은 열두 제자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독자들이 열 두 제자에 대해서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을 염두에 두고있는 것 같다. 많은 제자들이 떠나가는 모습을 보고 12제자도 동요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아울러 이미 알고 계신 가롯유다에게는 너도 가도 좋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68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예수께서 질문한 것에 대해서 분위기를 반전시킬만한 대답으로 베드로는 확신에 찬 어투로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베드로는 성격이 급하고 때로는 모순되는 행동을 하기는 하지만(마16:16, 22) 제자 전체를 대표하는 역할로 많이 나타나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예수께 대한 신뢰를 보여주고 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공관복음의 고백(마16:16, 막8:29, 눅9:20)과 그 내용이 일치하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학자들에 따라서는 같은 사건에서 나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곳은 '가버나움'이고 공관복음서는 '가이샤랴 빌립보'이다. 또한 현재의 상황(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떠나가고 있는)과 공관복음의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예언 뒤에 이어지고 있어 내용은 같지만 장소와 상황이 맞지 안는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이러한 고백을 두 번 이상 한 것이다.
69절 우리가 hJmei'"(헤메이스)로 베드로 자신으로부터 다른 제자들에게까지 확대시키고 있다. 이러한 베드로의 태도는 개인에게서 공동체로 이어지는 믿음으로 볼 수 있다. 구원은 개인의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개인의 믿음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믿음을 주는 행위는 전도요, 복음의 나눔인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처럼(70, 71절) 가롯유다는 이러한 고백에 합당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71절 가룟 시몬의 아들은 요13:2, 26에 나오며 12:4에서는 '가룟 유다'로 나오고 그냥 '유다'(요13:27, 29, 30, 요18:2, 3, 5)에 나온다. '유다'란 이름 앞에 이렇게 다양한 설명이 붙은 것은 '가롯 유다' 외에도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예수의 동생 '유다'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혼동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이다. 요14:22에는 "가룟인 아닌 유다가"로 나타난다.
마14:13-21, 막6:30-44, 눅9:10-17 비교하라 이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을 빼고는 유일하게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내용이다. 그것은 이 기적의 사건은 역사적으로 실제 존재했으며 당시의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내용이었다는 것을 뒤받침 한다. 그 후에는 정확하게 언제를 말하는지 알 수는 없다.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다른 기사들을 기록할 때 요한이 즐겨 사용하는 용법이다(요2:12, 3:22, 5:1, 7:1). 디베랴 바다는 갈릴리 바다의 또 다른 이름으로 구약에서는 하프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서 '긴네렛'(민34:11)이라고도 불렀으며 '게네사렛 호수'(눅5:1)라고도 불렀다. A.D. 20년경 헤롯 안티파스가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Tiberius)를 기념하기 위해 호숫가 근처에 도시를 세운 뒤 붙여진 이름이다. 건너편은 이 기적의 장소를 말하는데 4개의 복음서 중 마태(마14:13)와 누가(눅1:1-3)도 베드로, 안드레, 빌립의 고향인 "벳세다"를 암시하고 있다. 마가는 막6:45에서 제자들을 호수 건너편 "벳세다"로 가게 하셨다고 함으로 정확한 장소를 찾기 힘들다.
2절 표적을 봄이러라 ejqewvroun(에데오룬)은 qewrew(데오레오) 미완료형으로 게속 해서 [보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기 전에 이곳에서 여러 병자들을 고치시고 계셨던 것이다.
3절 산에 오르사 그러나 마태(마14:13)에서 "빈들"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다른 기사 마5:1-12에서 '산상수훈'으로 누가(눅6:17-49)는 '평지수훈'으로 기록했다. 이것은 유대지형의 특징이 얕은 산으로, 산 위에 올라갔다 해도 평지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4절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요5:1절의 명절이 유월절이 아니라면 예수께서는 공생애 세 번 유월절을 맞이하시는데 요한의 기사에 의하면 첫 번째는 요2:13에 올라가셨고 그리고 현재의 기사가 두 번째가 되는데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으신 것으로 볼 수 있다.
5-6절 예수님은 왜 빌립에게 이 질문을 하셨을까? 6절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시험 peiravzwn(페이라존)은 나쁜 의미로 사용된 적도 있지만 여기서는 단순한 Test로 이해해야 한다. 아울러 이 단어에는 "훈련하다"의 뜻도 있다.
7절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빌립은 이들에게 아주 간략한 식사(떡 한 조각)을 하게 돈으로 계산을 한다면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라고 대답했다. 현재 이 금액을 정확히 산출하기는 어렵지만 마20:2에 따르면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 한 데나리온에 해당하기 때문에 약 200명의 일당을 지급해야 하는 것과 같다.
8-9절 이 대 베드로가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나누어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기적을 베푸실 것을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10절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는 서 있는 사람을 앉게 하라는 의미보다는 다시 자리정리를 하라고 하신 것이다. 눅9:14에는 "오십명씩 앉히라"고 기록했다. 이것은 나누어주기에 편리하도록 앉히라는 말씀이다.
11-13절 축사하신 eujcaristevw(유카리스테오) "감사의 표현을 하다"는 뜻으로 하나님께 이 영광을 돌리시고 계시다. 원어의 이 단어는 "칠병이어"(마15:36, 막8:6), 성만찬 사건 때(마26:27, 막14:23, 눅22:17, 19, 고전11:24) 기록되었다. 성만찬 때도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 일부의 학자들은 이 단어에서 성만찬의 유형을 찾으려 하지만 이 단어만을 가지고는 부족하다. 하지만 오병이어의 사건에서 축사하신 단어와 성만찬 때 사용한 단어가 같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본다.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 저희가 배부른 후에 이것은 빌립이 말한 "조금씩"의 반대로 실컷 먹고는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6:16-21 물위를 걸으신 예수
마14:22-33, 막6:45-52 비교하라 이 사건은 요한이 기록한 7개의 표적중의 하나이며 누가복음을 제외한 3개의 복음서에 모두 나오며 오병이어의 사건 뒤에 기록된 것이 특이하다.
16절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마가는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앞서"(막6:45)라고 기록함으로 왕으로 삼으려는(15절) 군중들의 틈을 벗어나려고 했다.
17절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파도가 일어나기 직전의 때를 말한다. 이 때는 어두움이 든 저녁때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막6:48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온 때가 "밤 사경"(오전 4시부터 해뜰 무렵)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탄 이 배는 예수께서 오시기 전까지 밤새도록 떠다녔다는 이야기가 된다.
19절 십여리쯤 가다가 25-30 stadivou"(스타디온) "1스타디온은 약185m이며 25-30스타디온은 약 4.6km-5.6km이다." 그래도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제자들인지라 그들은 파도와 사투를 벌이면서 배는 떠밀려 가고 있었다. 이때 제자들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fobevw(프호베오) "두려워하다, 경악하다, 놀래다, 무서워하다" 이 단어는 마9:8 중풍병자를 고치셨을 때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마17:6의 변화산에서 하늘에서 나는 음성을 듣고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마27:54의 부활 때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 외에도 (막5:15, 막12:12, 눅2:9, 눅8:35, 눅9:34, 눅20:19)에 기록된 사건들은 모두가 예수님과 관련된 놀라움과, 두려움이 포함된 하나님의 기적사건에서 나타났다. 마10:28에서 예수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21절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중간에 원문에는 eujqevw"(유데오스) "직접, 즉시, 바로"의 부사가 있다. 이 단어를 넣어서 다시 번역하면 [이에 기뻐서 즉시 배로 영접하니]가 된다. 제자들의 반갑고 기쁜 마음을 재빨리 예수를 배로 영접하여 나타냈다.
6:22-34 정치적 목적으로 예수를 따르는 군중
21-24절 무리와 예수께서는 배로 숨박꼭질하는 것과 같은 모습을 연상케 한다. 22절에서 배는 하나밖에 없었고 분명히 그 배에는 예수께서는 타지 않고 제자들만 타고 떠나는 것을 무리들은 보았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곳에 계시지 아니했다.
24절 가버나움 갈릴리 바다 북서쪽 해변 가에 위치한 이곳은 베드로와 안드레의 집이 있었고(마8:14, 막1:29),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시고(막1:21-28),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등의(막2:1-12) 많은 사역을 하셨지만 회개하지 않는 악한 도시로 책망 받았다(마11:23, 눅10:15).
25절 어느 때에 povte(포테) "언제" 오셨냐고 물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어떤 방법으로 이곳에 오셨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들이 예수를 찾는 이유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26절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로 말했다. shmei'a(세메이온) "표적, 지시"는 물론 "기적, 이적"의 뜻도 있다. 그러나 본 절에서 그 구분을 예수께서는 명확히 하셨다. shmei'a"표적"은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 속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깨달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발견하는데 있다. 그러나 이들은 "표적"으로 기억한 것이 아니라 "이적"으로만 보고 있음을 말한다. 한마디로 영의 세계에 관심이 있다기 보다는 육의 세계에만 몰두해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답답한 마음으로
27절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하신다. 가족이나 개인을 위한 노동의 대가가 전혀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썩을 양식만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원히 생명을 존속케 하는 양식, 즉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말씀하신다.
28절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e[rga(에르가) "일"은 복수형으로 기록되어 29절의 예수님의 답변에서 e[rga(에르가) "일" 단수형으로 기록된 것이 다르다. 유대인들이 생각한 하나님의 일이란 모세를 통해서 주어지고 자신들에 의해서 수 없이 만들어진 율법 지키는 일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들이 예수께 질문하는 뜻은 "어떻게 해야 율법들을 잘 지킬 수 있습니까?"라고 말한 것과도 같다.
29절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유대인들은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예수께서는 단 한가지 일 "믿음"을 강조하셨다. 이들은 어떤 일을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일이란 아무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이 평생을 노력하여 어떤 일을 한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믿음에는 그에 합당한 책임과 행동이 따르기 마련이다.
30절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이들은 아직도 표적을 찾고 있었다. 그것은 아직 예수께서 메시야임을 못 믿는 것이다. 이미 예수께서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고, 38년 된 병자도 고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도 일으키셨다. 또 어떤 표적으로 요구하는지 답답한 노릇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표적요구에 마12:39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하셨다.
31절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이들이 요구하는 표적은 하늘에서 내린 '만나'와 같은 것이었다(출16:4). j
32절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32절 ou(우) "아니"는 문장 전체를 부정하는 의미로 볼 수 있는 32절 "levgw"(레고) "말하다"의 다음에 ou\n(운)이 있다. 이것은 이 떡은 모세가 준 것도 아니지만 그 앞에 나타나는 ou\n(운)은 그것은 "참 떡이 아니다"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설명이 마치기도 전에 34절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대답했다. 아직도 이들은 육 적인 양식을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올 것을 기대하고 있는 듯 한다.
6:35-51 생명의 떡으로의 초대
35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하늘에서 '만나'같이 내려오는 양식을 생각한 사람들은 실망한 표정이 역력하다.
41절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이들은 예수께서 자라나신 배경을 알고 그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사실에 부정하고 있다.
45절 선지자의 글은 구약성경의 일부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선지서를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마26:56, 롬16:26).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는 이사야 54:13절이나, 예레미야 31:34를 생각하신 것 같다.
46절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영지주의자들(gnosists)은 구원에 이르는 신비한 지식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직 예수께서만 하나님을 보았고 예수께로만 영생의 길이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49절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 사람들이 그토록 기다리는 '만나'의 이적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그것을 먹었어도 결국은 '죽지 않았느냐?'고 하시는 것이다. 원문에는 ejrhvmw/(에레몬) "버려졌다"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
6:52-59 참된 양식인 예수의 피와 살
52절 서로 다투어 mavcomai(마코마이) "싸우다, 전쟁하다, 논쟁하다"의 뜻으로 격렬하게 언쟁하고 있음을 말한다. 언쟁의 주제는 지금까지 예수께서 하신 '생명의 떡'(살과 피)에 관한 것이었다. 이들은 언쟁하면서 피를 마시는 것은 율법에 금지된 사항이라는 것을 말했을 것이다(레3:17, 레17:10-14, 레19:26). 예수께서도 이러한 문제를 익히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러나 이 피는 사람의 생명에 대한 대속을 말하기도 한다(레17:11).
55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ajlhqhv"(알레데스) "참된"은 '진리에 부합하는 뜻'이 아니라 "진짜"(real)를 말하는 것이다. 만나와 메추라기는 한 때 육 적 양식이 되었고 그것은 예수께서 주시고자 하는 현재의 예표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56절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mevnw(메노) "거하다, 거주하다, 남아있다"의 이 말은 요한의 주요 신학적인 주제이다. 아버지가 아들 안에 "거하고"(요14:10), 성령님이 예수님에 "거하며"(요1:32), 신자들이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께서도 그들 안에 "거한다"(요6:56, 요15:4). 요일2:6, 27, 28, 요일4:12에서도 나타난다. 이 말은 단순한 영적 교감의 수준을 넘어 본질상 하나가 되는 영적 교통함을 말한다. "예수께서 내 안에 거주하고 내가 예수께 거주함"을 말한다.
57절 살아계신 아버지 zw'n(자온) "살아있는"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으로는 구약, 신약에 모두 나오지만(수3:10, 삼상17:26, 삼상25:26, 왕하19:4, 사37:4, 렘10:10, 마16:16, 마26:63, 롬9:26, 고후3:3, 딤전4:10, 히3:12, 히9:14, 히10:31, 히12:22, 계10:6) "살아계신 아버지"는 본 절에서만 나온다. 생명의 근원이 아버지께 있음을 말한다.
6:60-65 생명의 교훈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
60절 제자 중 여럿이 41절에 보면 유대인의 따라온 무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명백하다. 그런데 이곳에 제자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음도 사실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12제자뿐만 아니라 눅10:1의 70인 또는 72인의 제자들이 있었다. 지금은 정확하게 얼마인지 알 수 없지만 유대인들과 함께 섞여있었다.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어렵도다" Sklhrov"(스클레오스)는 "굳은, 마른, 거친"의 뜻이다. 즉 말씀을 쉽게, 부드럽게 해 주셔야 하는데 너무 딱딱하고 어렵다고 불평하는 것이다. (칼빈은 이에 대해서 예수의 말씀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이들의 마음에 있다고 했다.) 제자들이라고 해서 별로 나을 것은 없겠지만, 그래도 제자들이 어렵다고 했으면 다른 유대인들은 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61절 걸림이 되느냐 skandalivzei(스칸달리) "함정, 걸려 넘어지다"의 뜻이다. 62절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에 ou\n(운) 부정문으로 시작함으로 문장 자체는 부정을 마치게 되기 때문에 해석은 상당히 어려워 진다. '예수의 승천장면을 보게되어도 넘어질 자는 넘어지게 되리라'는 뜻으로 이해된다(행1:11 참고). 또한 동시에 '믿음을 가진 자는 더욱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는데 많은 학자들은 동의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63절 살리는 것은 영이니 zwopoievw(조오포이에오) "살리는, 생명을 주다"의 표현을 바울도 즐겨 사용했다(롬4:17, 고전15:22, 딤전6:13).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갈3:13). 그러나 실제로 이 율법은 누구도 완벽하게 지킬 수도 없을 뿐만이 아니라 설령 지킨다해도 육체로 구원을 얻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영(믿음)은 우리를 살릴 수 있는 것이다. 육은 무익하니라 sa;rx(사르크스)는 "육체"를 가리키며 주로 '부패된 인간성'을 지적하는데 사용되었다. '육'은 '영'과 대립되는데 단순한 선악으로 구분되는 대립이 아니라 '육'은 율법시대에 강조되어온 '행위'에 있으며 '영'은 새 시대의 '믿음'으로 대변되고 있다.
64절 너희 중에 eijsi;n(에이신)는 현재 직설법 3인칭 복수로 가롯유다를 포함해서 여러 제자를 의미하고 있으며 예수께서는 지금 그들을 가리키시며(비록 손가락으로 보이게 한 것은 아닐지라도) 말하고 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저자는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모를 때 이미 예수께서는 자신을 팔 자를 알고 계셨다고 말하고 있다.
65절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를 다시 말씀하심으로 구원이 사람의 행위로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롬5:2)와 선물(엡2:8)로 주어지는 것이다.
6:66-71 예수께 등을 돌린 많은 제자들
66절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결국 예수님의 말씀이 여러 제자에게 61절의 "걸림"이 되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것을 다 아셨을 것이고 많은 제자만을 선택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제자, 자신의 말을 믿고 따를 수 있는 제자를 선택하신 것이다.
67절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요한은 열두 제자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독자들이 열 두 제자에 대해서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을 염두에 두고있는 것 같다. 많은 제자들이 떠나가는 모습을 보고 12제자도 동요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아울러 이미 알고 계신 가롯유다에게는 너도 가도 좋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68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예수께서 질문한 것에 대해서 분위기를 반전시킬만한 대답으로 베드로는 확신에 찬 어투로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베드로는 성격이 급하고 때로는 모순되는 행동을 하기는 하지만(마16:16, 22) 제자 전체를 대표하는 역할로 많이 나타나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예수께 대한 신뢰를 보여주고 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공관복음의 고백(마16:16, 막8:29, 눅9:20)과 그 내용이 일치하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학자들에 따라서는 같은 사건에서 나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곳은 '가버나움'이고 공관복음서는 '가이샤랴 빌립보'이다. 또한 현재의 상황(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떠나가고 있는)과 공관복음의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예언 뒤에 이어지고 있어 내용은 같지만 장소와 상황이 맞지 안는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이러한 고백을 두 번 이상 한 것이다.
69절 우리가 hJmei'"(헤메이스)로 베드로 자신으로부터 다른 제자들에게까지 확대시키고 있다. 이러한 베드로의 태도는 개인에게서 공동체로 이어지는 믿음으로 볼 수 있다. 구원은 개인의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개인의 믿음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믿음을 주는 행위는 전도요, 복음의 나눔인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처럼(70, 71절) 가롯유다는 이러한 고백에 합당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71절 가룟 시몬의 아들은 요13:2, 26에 나오며 12:4에서는 '가룟 유다'로 나오고 그냥 '유다'(요13:27, 29, 30, 요18:2, 3, 5)에 나온다. '유다'란 이름 앞에 이렇게 다양한 설명이 붙은 것은 '가롯 유다' 외에도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예수의 동생 '유다'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혼동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이다. 요14:22에는 "가룟인 아닌 유다가"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