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익공(貞翼公) 조변(趙변, 1500-1582) 정암 문하에서 학문 연마, 기묘사화 때 강진에서 19년간 유배 기묘명현 세자이사에 추증, 정익의 시호로 백일하에 대의 밝혀져
중종 때에 훌륭하면서 덕행을 나타내지 못한 분과 원통하게 돌아가신 분이 많았는데 정익공〔가천재공파 11세조 휘 변(?), 자 호연(浩然), 호 금재(琴齋)〕이 그 중 한 분이시다. 대체로 시운(時運)의 소관(所關)이나 세도(世道)에는 치세(治世)와 난세(亂世)가 있으며 정사(政事)에는 좋고 나쁜 일이 있으니 난세가 치세로 바뀌고 치세가 난세로 바뀌는 것은 이치의 상도(常道)이다. 태평성세가 지속되는 동안 소인배가 집정하여 기강을 무너뜨리고 왕의 주변에는 간신들이 요직을 맡아서 앙화(殃禍)의 뿌리가 거듭 곪아서 터지니 준재(俊才)들은 죽음을 당하고 충직하고 어진 신하는 유배되어 사화(士禍)의 반복됨이 십여차였으니 기묘사화(己卯士禍)가 가장 참혹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간사하고 못된 말로 남을 헐뜯어 없는 죄도 있는 것 처럼 윗 사람에게 꾸며 고해 바치는 무리들이 임금을 속이고 그 세력들의 서리같은 요사스럽고 망녕된 앙화(殃禍)가 사나운 불길보다 심했던 것은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괴롭힌 간당들이 조정에서 탕란(蕩亂)을 일으켜 천추(千秋)에 지탄(指彈)받을 일이 역사에 소상하게 실렸으나 누구도 그것을 속죄(贖罪)할 자 없으니 공자가 말씀한 『효자자손(孝子慈孫)이 백대가 흘러도 조상의 허물은 고칠 수 없다』라고 한 것이 이러한 일들이 아니겠는가? 후세에 역사를 읽는 이는 누구나 눈물을 흘릴 일이니 원통함을 당했던 분의 후손이야 말할 여지가 있겠는가?
공은 연산군 6년(1500년) 정월 보름날, 문과(文科)를 거쳐 응교(應敎)와 동래부사를 역임하시고 승지(承旨)로 증직되신 아버지 광언공(光彦公)과 어머니 문화 유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나셨으나 일찍 부모를 여의어서 나중에 추가로 복(服)을 입고 여막살이를 하였다. 어려서부터 영특한 기질로 나이가 들면서 더욱 지혜로우니 문중과 이웃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성년이 되기 전에 가학(家學)을 익히고 정암(靜菴) 문하에서 학문을 더욱 연마하여 모든 경서(經書)와 고금사(古今史)를 통찰함이 동문(同門)에 뛰어나서 선생이 각별히 아끼셨으나 큰 집 문간의 불이 연못의 고기에까지 화가 미칠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1519년 기묘사화 때 안처겸(安處謙)이 국문(鞠問)을 당할 적에 옷을 평복으로 바꾸어 입고 들것을 메면서 문안했고 송사련(宋祀連)의 무고(誣告)에 이름이 적혀 있어 약관(弱冠)에 당대의 저명인사와 화복을 함께 하시어 심한 고문을 당하시고 강진에 유배되었다. 1525년 유배지에서 조모상을 당하시어 거기서 빈소를 마련하시고 가례(家禮)에 따라 극진히 집상(執喪)하시어 유배중이라도 예를 생략하지 않고 오히려 독실(篤實)히 하셨으며 세상이 바뀌어 임금이 정도(正道)를 밝힘에 따라 무술년에 사면되었으나 19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후에는 벼슬에 뜻을 버리고 항시 성현의 학문을 실천하면서 자신을 성찰(省察)하시어 위대한 명성이 있었으니 명문장도 남겼을 것이고 또 소년기에 화를 당하시고 높은 증직을 받으신 일을 추측해 보면 백의(白衣)의 소치가 아니고 관직에 몸을 담아 청백한 명성이 있었는 듯 하나 거듭된 병란(兵亂)을 겪은 나머지 고증할 곳이 없으니 이것은 공자께서 기송(杞宋, 주나라 초기에 있었던 작은 나라)의 역사가 없어진 것을 탄식함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명철한 현인도 다 밝히지 못했는데 항차 수백년 후에 사그라진 역사를 읽은 자가 무어라 말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여러 자손들이 마련한 공의 팔순 잔치에 공이 읊은 감회시(感懷詩) 중에 『형은 팔십이요 아우는 칠십일, 기묘년 봄을 다시 만난 신세로다.』라고 했으니 이 시구(詩句)만 갖고도 어렸을 때의 청화(淸華)함과 노년기의 승덕(勝德)을 짐작할 수 있다. 1582년 9월에 향년 83세로 작고하시어 용인 포곡에 장사하였다. 처음에 이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영조조에서 기묘명현(己卯名賢)을 추증할 때에 좌찬성(左贊成) 세자이사(世子貳師)의 증직이 거듭 내려졌고 철종 때 정익의 시호가 내렸으니 공의 덕행이 백일하에 거듭 밝혀졌으나 고증할 수 있는 것은 구전(口傳)과 여러 행장(行狀) 서첩(書帖) 및 기묘록(己卯錄) 뿐이니 혹자는 사적(史蹟)의 꼼꼼하지 못하고 간략함을 흠 잡으나 옛 사람이 말하기를 『값진 보배는 다듬을 필요가 없다.』고 했으니 대의(大義)가 이미 밝혀진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대략적으로 밝힐 수 있는 것은 배운 곳은 정암 문하요, 교유한 분은 당대의 청렴하고 결백한 분들이다. 간혹 더 자세한 내용을 말하는 이도 있으나 고증할 수 없는 내용을 서술한다면 후세 사람이 누가 이 글을 믿겠는가? 그래서 생략하였다. 부인 광주 안씨는 홍문관 박사 한영(漢英)의 따님으로 천품이 온순하여 시할머님과 공을 훌륭히 받드시니 아름다운 범절이 문향(門鄕)에 알려졌고 공이 유배생활을 시작한 후로는 시할머님을 더욱 극진히 받들고 아들 손자를 훈계하고 가정을 꾸려가면서 모든 일을 잘 처리하여 화목과 공경함이 지극했으니 어찌 맹광(孟光, 양흥의 아내로서 내조를 잘했다고 전해오는 대표적 인물)의 내조에 비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