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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용 심씨 묘표(서울 기념물 25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후궁 숙용 심씨 묘표 전경 |
이 묘표(墓表)는 일본 금융계의 중진으로 수상(首相) · 대장상(大藏相) 등을 역임하다가 1936년 암살된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의 저택이 있던 자리에 조성된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 기념공원 안(일본 동경 소재)에 있다가 2001년 후손들에 의해 국내로 반환된 석비(石碑)이다.
비 몸돌 전면에 ‘숙용심씨지묘(淑容沈氏之墓)’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건대 성종대왕의 후궁으로 성종과의 사이에서 2남(이성군(利城君)과 영산군(寧山君)1) 2녀(경순옹주(慶順翁主) · 숙혜옹주(淑惠翁主))를 낳은 숙용(淑容) 심씨(沈氏)의 묘 앞에 세워져 있던 묘표로 추정된다. 실록이나『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등에 등장하는 후궁 가운데 숙용 심씨는 이 분 한 분 뿐이기 때문이다. |
▲ 묘지가 실전되어 묘표를 반환 받아서 아들인 영산군의 묘역이 보이는 앞 동산에 단소를 만들어서 묘표를 안치하였습니다. |
이 비가 어느 시기에 일본으로 가게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나 그동안 후손들에게도 분묘 자체가 실전(失傳)된 것으로 오래도록 전해진 것을 보면 성종과 중종의 능이 훼손되기도 했던 임진왜란 때로 추정된다. 현재는 은평구 진관외동 50번지에 조성된 단 위에 모셔져 있다.
숙용 심씨는 세조 즉위에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된 심말동(沈末同)의 딸인데 후궁이 된 경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성종대왕실록(成宗大王實錄)』의 성종 24년 4월 14일조에 ‘...심숙원(沈淑媛)이 이번에 부상(父喪)을 당했으니...(후략)’라는 기록이 보이는 바 1493년 이전에 이미 후궁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유출 되었다가 근래에 반환 받은 숙용 심씨 묘표 |
『성종대왕실록』에 실린 성종대왕 묘지문(墓誌文)에는 성종대왕이 왕비 3인, 후궁 7인을 둔 것으로 나오는데 숙용 심씨가 내명부의 4품 품계인 ‘숙원(淑媛) 심씨(沈氏)’로 맨 마지막에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심씨는 성종대왕이 세상을 떠날 당시까지 숙원이었다가 후세에 3품의 숙용(淑容)으로 추봉(追封)되었던 것 같다. ‘숙용(淑容) 심씨(沈氏)’라는 명칭이 등장하는 것은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전주리씨 장흥군파 종보』와 이 묘비 등에서인데 추봉 시기는 현재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
▲ 전면과 후면에서 바라 본 숙용 심씨 묘표 |
이 묘표는 심씨가 세상을 떠나 분묘가 조성되던 해 또는 숙용으로 추봉된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인데 전주리씨 장흥군파 종보에는 숙용 심씨가 중종 을해년(1515년) 세상을 떠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이 무렵 묘비가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묘표 자체도 16세기 경에 주로 보이는 형태를 하고 있다. 비 머릿돌(비수(碑首))과 비 몸돌(비신(碑身)), 비 받침(비대(碑臺))의 3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비머릿돌과 비 몸돌이 하나의 돌로 조성되고 이렇게 조성된 비가 2단의 비 받침에 꽂혀 있는, 이른바 통비(通碑) 형태이다. 비 머릿돌과 몸돌은 백대리석(白大理石)을, 비대는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
▲ 숙용 심씨 묘표 앞면 이수에 조각된 문양이 아주 예쁩니다. |
비 머릿돌은 뿔이 없는 용, 즉 교룡(蛟龍)이 조각되는 이수(螭首)가 보통인데 여기서는 뿔이 있는 숫룡을 구름무늬 속에 표현하였다. 용 뿔과 수염, 용 코의 조각이 뚜렷하고 섬세하다. 비수의 후면과 좌우측면은 모두 구름무늬에 둘러싸여 있다. 비 머리에 구름무늬가 사용된 예는 조선 초기부터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묘표의 경우처럼 구름무늬에 용이 조각된 예는 드문 편으로 16세기 석비 문화를 대표하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비 몸돌 앞면 정중앙 세로 방향에는 해서체의 작은 글씨로 ‘숙용심씨지묘(淑容沈氏之墓)’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묘주(墓主)의 신분을 알려 주고 있다. 글자의 크기는 대략 가로 4.7cm, 세로 4.5cm 정도이다. 필체는 고려 말부터 한수(韓脩)에 의하여 썼던 서체로 구양순과 안진경의 필획이 혼용된 서체이다. 이런 서체는 조선 말기까지 금석은 물론 공문서에 이르기까지 상용하던 서체이다. 비 몸돌의 후면과 측면에는 어떠한 글씨도 새겨져 있지 않다. |
▲ 숙용 심씨 묘표 전면(좌측 사진)과 후면 이수에 조각된 문양 |
비 받침은 보통의 형태와는 달리 2단으로 구성된 것이 특징적이다. 1층 비대는 한 면에 3장씩의 연잎을 엎고, 2층에는 복련(覆蓮)을 둘렀으며, 1층과 2층의 사이 좌우측면에는 2개, 전후에는 3개의 안상(眼象) 문양이 있고, 연주문(聯珠紋)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이와 같이 비대가 2층으로 된 예는 지금까지 발견된 묘표 중 숙용 심씨 묘표가 처음이다.
이 묘표는 실전(失傳)된 성종대왕 후궁 숙용(淑容) 심씨(沈氏) 묘의 존재를 알려주는 왕실 관련 유물이고, 400여 년 간 일본에 있다가 반환되어 오는 등 우리나라와 일본 간의 과거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 자료이며, 아울러 용무늬와 구름무늬가 조각된 이수(螭首) 및 2단으로 구성된 비좌(碑座)를 가진 매우 드문 묘표이다. |
▲ 측면에서 바라 본 묘표와 숙용 심씨 묘표 앞에서 바라 본 아들 영산군 묘역 |
2000-06-16 동아일보 기사
한국을 떠나 460여년간 일본 땅에 쓸쓸히 서 있던 묘비가 고국의 품으로 돌아간다. 16일 일본 도쿄(東京) 미나토(港)구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전 일본총리) 기념공원 내의 한 묘비 앞에서는 후손들이 비석을 옮기기에 앞서 제사를 올렸다. 묘비의 주인은 조선조 9대 왕인 성종의 후궁으로 1515년에 숨진 숙용심씨(淑容沈氏). 이 비석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빼앗아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 비석은 지난해 6월 최성규(崔性圭)한일역사공동연구학회장이 발견했다.
후손인 전주이씨 이성군과 영산군파는 즉각 묘비 환원추진위원회를 만들어 미나토구에 묘비를 돌려줄 것을 요청했다. 주일 한국문화원에서도 반환을 요청했다. 구청은 오랜 검토를 걸쳐 결국 돌려주기로 결정했다. 스가야 신이치(菅谷眞一)미나토구청장은 이날 오전 묘비 기증식에서 “이번 반환결정이 한일간의 우호 증진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후손인 이채원(李采元)씨는 “이제 조상 앞에서 떳떳이 고개를 들 수 있게 됐다”며 기뻐했다. <도쿄〓심규선특파원> |
제9대 성종대왕(成宗大王) [1457 ~ 1494] 가계도
정비 공혜왕후 한씨(恭惠王后 韓氏) [1456 ~ 1474] : 소생 없음
제1계비 폐비 윤씨(廢妃 尹氏) [1445 ~ 1482]
제2계비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 尹氏) [1462 ~ 1530]
서1남 계성군(桂城君) [1478 ~ 1504] (숙의 하씨) |
숙용 심씨 묘표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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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중앙 상단의 시작 부분에 숙용 심씨 묘표가 있으며, 빨간선 아랫 부분에 아들인 영산군 이전 묘역이 있습니다. |
지도 중앙의 시작 부분이 영산군 묘역이며, 빨간선 아랫 부분에 화의군 묘역이 있습니다. 소재지 : 서울 은평구 진관외동 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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