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목)
* 중국의 고대 국가로는 하 왕조와 북방인, 유목민, 동이(東夷)족으로 구성된 은과 서쪽에서 동쪽으로 진출하는 주를 중국 3대 고대 국가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고대국가는 나라의 중앙 천자인 왕과 각 지역을 다스리는 제후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군신관계인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제후들의 힘이 커지면서 각 지역의 12의 제후들이 중국 대륙의 패권을 가지고 싸우는 시기가 바로 B.C 7년 춘추전국시대이다. 이 춘추전국시대에 활동한 대표적 사상가로 노자와 공자가 있다. 나아가 기원전 403년부터는 7웅의 전국시대가 열리는데 이는 기원전 221년에 진시황의 진의 통일로 전국시대는 막을 내린다. 전국시대의 사상가는 맹자, 순자, 맹가가 있다.
* 노나라의 정공은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노나라의 계손씨와 숙속씨, 맹손씨 즉, 삼환이라 하는 세력에 눈치를 봐야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정공은 공자를 등용하여 삼환을 견제하면서 나라를 이끌어가려했다. 국무총리까지 역임하면서 승승장구하던 공자는 결국 삼환의 간섭과 방해로 정치계에서 은퇴하게 된다. 은퇴 후 공자는 13년간 주유천하를 하며 전도사업을 했다. 하지만 이 전도사업을 실패로 돌아간다. 후에 공자는 편찬사업으로 3000편의 시경을 311편으로 축소하여 편찬하고, 청치 철학서인 서경과 십익이라는 역해설서인 역경을 편찬한다.
* 영화 공자에서 공자가 순장의 풍습을 폐지하기 위하여 주장한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은 공자의 사상 인(仁)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이다. 이에 춘추전국시대의 시대적 상황과 배경에 따라 공자의 사상은 실패한다. 이에 질문을 하자면, 왜 공자의 사상은 실패할 수 밖에 없었는가? 자세한 이유와 당시의 백성들과 민중들은 이러한 공자의 사상을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였을까? 마지막으로 지금의 공자의 인 사상은 학계에서 어떻게 평가되는가를 알아보고 싶습니다.
첫댓글 실패할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시대가 서로 자기 영역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죽이고 정복하는 시대였습니다. 공자는 그 시대에 맞지 않은 사상을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즉 때가 아니 였다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공자의 사상이 잘 못된다는것은 아닙니다. ^^
예, 위엣 분이 잘 말씀해주셨네요. 저는 덧붙여 말하자면 공자가 주장한 건 덕치주의로써, 강제적인 법률이나 형벌보다는 도덕과 예의로 백성들을 교화하는 정치, 통치자가 먼저 군자다운 인격을 수양하고 모범을 보인 연후에 백성들을 다스려야 한다 인데요. 또, 대동사회도 인과 예를 통하여 올바른 도덕을 확립하고 바람직한 사회질서를 회복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는 거였는데요. 서로 왕이 되려고 급급해해 싸우는 터에 공자의 사상을 들어줄 왕이 없었던거죠. 공자의 사상을 받아들여서 평화롭게 나라를 만들도록 노력하는 왕이 있었으면 한데요. 없었다는게 아쉽네요.
받아들였다면 백성들은 아주 평등하게 살았을 겁니다. 대동사회 중 재화의 공평한 분배가 이루어지고 만인의 신분적 평등이 이루어지는 사회 라는 게 있거든요.
앞의 질문은 위에 분들이 잘 설명해주셨으니 넘어가겠습니다. 공자의 인 사상에는 큰 단점이 있는데, 인의 범위에는 노비, 평민이 들어가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영화에서 본 순장 노비 구출 장면은 공자의 사상을 극대화 시키기 위한 조작 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공자는 철저한 계급주의자 였습니다.
공자는 철저한 계급주의자라고 한 것은 오해입니다. 공자의 인은 보편애를 말합니다. 즉 예수님의 사랑과 통하는 말입니다.
위에 분 말씀대로 인의 범위에는 노비와 평민이 포함되지 않습니다.
공자는 군주와 신하의 절대적 관계를 강조했기 때문에 그의 학술은 그 당시 왕권강화에 많은 도움을 줍니다.
교수님께서 설명하신 대로, 그때 공자의 인사상은 실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공자는 그때에 너무 맞지않는 사상을 내세웠기때문입니다.
당시의 백성들은 공자의 인이 자신들의 삶을 치유해 줄것 이라고 생각 하지않았기때문에
그 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