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조 洪基兆 (1865 ∼ 1938)】 "독립운동은 국민의 의무" 의연했던 홍경래의 후손"
1865년 12월 16일 평남 용강군(龍岡郡) 오신면(吾新面) 하양리(霞陽里) 749번지에서 출생하였다. 천도교인으로 도호는 유암(游菴)이다.
어려서 용강군의 노옥림(盧玉琳) 등으로부터 한학과 붓글씨를 배웠다. 1893년경 황해도 강령(康翎)의 김유영(金裕永)을 통하여 동학을 알게 된 후, 1894년 10월 정식으로 입교하였다.
"내가 처음으로 사문에 길을 열기는 지금으로부터 33년 전 병신(1896년) 11월 17일이엿슴니다.(그 때 내 나희는 설흔 세살) 음력 동짓달인지라 날도 에지간히 차고 길도 여간 멀지가 안치만 선생님을 뵈옵고 십흔 생각이 하도 간절하야 만사를 폐해 놋코 분연히 니러나 멀니 경상도 문경(聞慶) 땅으로 선생을 히저(찾아)가게 되얏슴니다. 동행으로 말하면 종형 되시는 홍기억(洪基億) 씨와 동덕 림복언(林復彦) 씨엿슴니다.…12월 초상에야 이종훈(李鍾勳) 씨와 같이 문경을 향하여 또 떠낫슴니다. 츙주군 룽동 신접주은좌(申殷佐) 씨 댁에서 하로 밤 자고 그 다음 청안(淸安) 문의(文義)를 것쳐 회덕(懷德) 김접주텬녀(金天汝) 씨 댁에서 또 머물러 가지고 그 다음날 상주에서 김접주진우(金縉祐) 씨 댁에서 하로를 머물럿슴니다. 그리하야 맛츰내 목뎍디인 문경 은척원(銀尺院)에 니르러 남접주건칠(南建七) 씨의 인도로 그립고 그립던 해월 신사와 의암 성사 두 분을 뵈엿슴니다." ('사문에 길을 열든 때', 『신인간』 29호, 1928.11)
1896년 11월 홍기억(洪基億) · 임복언(林復彦)과 함께 강원도에 가서 이종훈의 중개로 최시형(崔時亨)과 손병희(孫秉熙)를 만난 후 돌아와 포교에 힘썼다. 그 결과 1896년 접주에 임명된 후 수접주(首接主)를 거쳐 1900년 평안도 대접주에 임명되었고, 1903년경 교호수 10,000호를 거느리는 창의대령(倡義大領)에 임명되었다. 1904년 손병희의 명을 받아 대동회(大同會) · 중립회(中立會) ·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고 동학의 근대화운동을 추진한 끝에 1905년 12월, 동학을 근대적인 종교인 천도교로 탈바꿈하는 데 참여하였다. 1906년 12월 평양대교구장에 임명되었고, 1909년 예비도훈(豫備道訓), 1910년 신도사(信道師)에 임명되었다. 1910년대 평양대교구 대교구장과 천도교 도사로서 포교 확대와 교세 신장을 꾀하는 한편 교리강습소 등에서 교인의 교육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민족운동의 역량을 확대하였다.
1919년 1월부터 손병희와 권동진(權東鎭) · 오세창(吳世昌) · 최린(崔麟)의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이 추진되자, 1919년 2월 말 천도교의 기도회 종료 보고와 국장에 참배한다는 명목으로 서울에 올라왔다. 2월 25일 전동(典洞)에서 권동진 · 오세창으로부터 3·1운동의 구체적인 계획과 “손병희 선생의 발기로 조선의 국권회복을 계획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할 것을 준비 중이니 그대도 동지로 가입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합되어 식민통치를 받는 것에 비분강개하고, 나라의 자주 · 독립을 갈망하였던 그는 기꺼이 동참하였다. 2월 27일 손병희 · 최린 · 오세창 · 권병덕 · 나인협 · 김완규 · 나용환 · 홍병기 · 박준승 · 양한묵 등의 천도교인들과 재동 김상규(金相奎)의 집에서 최남선(崔南善)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서류의 초안을 검토하고 그 자리에서 민족대표로 서명하고 날인(捺印)하였다. 그의 참여는 단순히 개인의 참여가 아닌 평안남도와 황해도 등지의 관할교인 수만 명의 참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3월 1일 오후 2시경 민족대표 28인과 함께 태화관 별 6호실에서 모여 한용운(韓龍雲)의 독립선언서 낭독 후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였고, 곧 민족대표와 함께 일제관헌에게 체포되어 본정경찰서(本町警察署, 지금의 중부경찰서)에 연행되어 혹독한 조사와 심문을 받았다. 이후 1년 반 남짓 지속된 재판기간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심한 옥고를 치렀으나, 재판관에게 “조선인으로서 3·1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이 일에 참여하였다”며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산입)을 받고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1월 6일 출옥한 후 교회 활동에 전념하였다. 1922년 현기관(玄機觀) 임시관장과 강원도 종법사(宗法師), 신도사(信道師) 등에 임명되어 잠시 중앙총부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평남으로 돌아가 진남포종리원 주임종리사, 화성포(化成包) 포덕사 등으로 활동하며 포교 활동을 벌였다. 또한 학교와 강습소를 통하여 교인들의 문화적 소양을 증진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고령으로 수년간 병을 앓다가 1938년 7월 6일 74세로 서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