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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임술 생
지난 화요일(10.17)에 1922년(壬戌)생 두 분의 생애를 기릴 기회가 있었다. 오전에는 고 유동식 교수님(1922-2022), 오후에는 고 임기윤 목사님(1922-1980)이었다. 두 분 모두 평생 감리교인으로 활동하면서 자신만의 발자국을 남기셨다. 유 교수님이 100세 곧 상수(上壽)를 누리며 장수하셨다면, 임 목사님은 50대 후반에 억울하게 눈을 감으셨다. 두 분이 생전 나이로 101세 같은 날에 기념되었다는 것은 우연이나, 신비롭다.
유동식 교수를 기억하는 자리는 1주기를 맞아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에 기금을 전달하는 연세대 핀슨관에서였다. 평소 연희전문 2년 선배 윤동주 시인과 동문수학한 것을 자랑하셨는데, 핀슨관은 묵향을 느낄 만큼 동주의 옛 시집들을 모아 둔 기념공간이었다. 열 명 남짓 모인 조촐한 자리였다. 고인을 회고하면서 나눈 도시락과 함께 멀리 1년 전의 추억을 이어 붙일 수 있었다.
유 교수님이 100세를 맞은 작년 3월, <풍류신학 백년> 발간을 축하하며, 자리를 같이했던 기억이 새롭다. 코로나19의 여진이 남았기에 아주 작은 식탁으로 100년의 생애를 기념하였다. 평생 종교학 전공자로서 한국적 신학의 광맥을 탐구하던 분답게 100세에 논문집을 헌정 받았으니 명예로운 인생이다. 평생 20여 권의 책을 썼으며, 미수(米壽)를 맞아서는 전집을 묶어내기도 했다. 보기 드믄 저작가로 가장 오랫동안 팔린 책은 <한국종교와 기독교>인데, 한자투성이의 이 책을 다시 원형 그대로 복원하려고 한단다.
청년 유동식은 처음에 연희전문학교 수학물리과에 진학했다. 중퇴한 유동식은 일본으로 유학 후 신학으로 전과하였다. 그리고 일제 말 학병(學兵)으로 징용당해 가고시마 전선에서 여러 차례 사선(死線)을 넘었다. 죽음은 오끼나와 턱 밑까지 다가왔다. 이러한 체험적 증언을 품고 귀국 후 1947년 감신에 편입하였다. 동급생보다 나이 든 그는 김지길, 박순경, 허혁, 이영빈과 동기동창이다.
유 교수는 100세에도 청년 시절에 겪은 학병 시절의 모멸감에 대해 단호한 분노를 토로하곤 하였다. 비록 77년이 흘렀지만 일제에 대한 감정이 결코 해묵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정시대 못 겪은 사람은 8.15를 몰라!” 그는 자신의 신학적 배경을 설명하면서 일제 강점기에 겪은 식민지 청년의 수모가 배어있다고 하였다. “우리 성씨(性氏)를 바꾼 놈들이야.” 유동식의 신학이 지극히 한국적인 까닭이다.
오후 2시에는 자리를 옮겨 서대문 기사연 이제홀에서 열린 ‘고 임기윤 목사 추모세미나’에 참석하였다. 고난모임, 순교자 임기윤 목사 국가배상 추진위원회, 사) 한국기독교민주화운동이 함께 주관하는 자리였다. 1980년 7월 26일이 소천일인데, 43년이 흐른 지금까지 그의 생애는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있다.
임 목사는 부산제일감리교회를 담임하던 1980년 7월 19일, 보안사 부산분실로 끌려갔다. 광주 5.18을 강제 진압한 구데타 세력은 전국으로 번진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임 목사와 같은 양심인사를 보안사로 불러들여 입막음을 강요하였다. 부산지역 인권운동을 대표하는 임 목사는 강제 조사 3일째 쓰러졌고, 원인이 묻힌 채 의문사하였다. 아직 마음이 청청한 58세의 장년(壯年)이었다.
공권력의 간접살인임에도 공식적인 사인 규명이 미루어지다, 20년이 흐른 2001년에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통해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위법한 공권력 행사로 인한 희생으로 인정받았다.그리고 또 20여 년이 흘러 당시 불의한 정부를 향해 책임을 묻고, 국가배상을 추진 중이다. 추진위는 진상규명을 위한 펀드를 만들어 사람들의 참여를 불러 모았고, 법적 다툼을 개시하였다. 임기윤 목사님은 5.18 묘역에 잠드셨으나 역사는 그를 거듭 호명하여 불러내고 있다. 그 시대의 부채의식 때문일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은 얼마나 고귀한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다. 게다가 그리스도인답게 평생 믿음의 길을 지켰으니, 후학으로서 등불과 귀감으로 삼을 방안을 찾고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백년시대는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역사의 숨결 때문에 호흡을 이어가는 중이다. 1922년은 여전히 우리 곁에서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