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봉황산과 금오산을 종주하다.
안개 속의 그대. 손 내밀면 잡힐 듯. 마음의 끈으로 이어진 세월.
어두운 밤. 봄비는 추적이며 내리고 드문드문 밝히고 서있는 가로등이 시골 정경의 전형처럼 늘어서 있고, 이따금 들리는 먼데 개 짖는 소리.
오늘은 돌산을 종주하는 날. 봉황의 등을 타고 거북의 목을 잡고 용궁으로의 초대처럼 유명세라면 누구와 견줘도 버금가지 않을 돌산 갓김치로 유명한 정기를 받으러 간다.
여수. 꿈엔들 잊힐 리야 40년전 추억으로 물든 옛 애인이 살던 곳. 이제는 그 기억나지 않은 얼굴과 흔적들이 고스란히 잠들어 숨을 쉬는 곳. 그래서 여수는 떨어진 동백꽃잎처럼 애틋함이 통째로 묻어나는 그리움의 파문이 이는 곳이다. 밤새 편지를 쓰고 너무 두터워서 꼭 우체국에서 등기로 부쳐야만 했던 숱한 사연들. 기억나는 내용은 없지만, 아무래도 감수성이 풍부한 소년의 순수함이 가득 했으리라.
들머리에서 부터 하얗게 수 놓인 꽃잎은 봄비에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진 철쭉의 융단길처럼 랜턴 불빛에 반짝이는 형상은 마치 하늘의 별들이라도 떨어져 가는 길을 환영하는 듯 하다. 새벽잠도 없이 울리는 이름 모를 산새들의 기저귀는 울음소리는 사계의 어느 악보로 표현 할 수 있을까?
춘수만사택(春水萬四澤)이라 했거늘 어두운데다 비까지 내려 시계제로라는 말이 절로 실감이 난다. 우리는 과연 몇 발짝의 앞날을 예측하고 살아가고 있을까?
날이 밝아지면서 희부연한 세상이 보일 즈음. 서서히 젖어 들기 시작한 옷들이 멈추지 못하고 계속 앞만 보고 가라는 게시처럼 들려 오르고 또 오른다. 드디어 한 시간여 올라서 봉황산의 정수리에 우뚝 섰으나 뿌연 안개로 발아래 떨어진 섬 조차도 바로 보이지 않는다. 간식을 나눠먹고 재출발. 길 양편에 늘어진 소사나무 군락지는 마치 손길 닿지 않은 자연은 이런 것이다 하고 보여주는 듯하다. 내려가는 길에 바위 끝에 매달린 부처손은 아직은 한 겨울. 이제 이 봄비가 그치고 따사로운 훈풍이 불면 등돌리고 섰던 마음도 녹이듯 새 봄을 향한 손길을 활짝 펴리라. 마치 어린아이 손처럼 새순을 달고 연록색의 주먹을 펴리라.
봉황산을 마감하고 큰 대로를 가로질러 금오산 자락에 들어서 평이하게 오르는 길을 따라가면서 눈에 익은 맹금나무, 정금나무, 다래순, 새로 난 왕고사리, 해송 굵은 줄기엔 넝쿨이 슬금슬금 기어 오르고 더러는 밟힐세라 민달팽이가 이른 나들이 참이다. 아직 꽃을 피우지 않은 얼레지도 환영 일색이다. 금오산 정상에서 간식 타임을 갖고 우정의 잔을 나눈다.
날이 밝았음 천혜의 절경인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아기자기한 섬들이 눈에 들어 즐거웠을 법 하건만, 안개 속의 그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전망대 게시판을 보니 두라도, 횡간도, 화태도, 금오도, 개도 등의 지명이 보인다. 여기서 못다 본 한려수도는 정말 날씨 좋은 날을 잡아서 남해에서 여수 오는 배를 타고 삼백리 한려수도 그림 같다는 표현이 왜 노랫말로 나왔는지 다시 확인해 보기를 권해 드립니다.
내려서는 길에 만난 향일암. 절 마당에 온통 바다로 향하는 돌거북의 형상은 금오산이라는 지명도 그렇거니와 향일암의 지세가 거북이 용궁으로 들어가는 형세라고 해서 수많은 돌거북들이 저마다의 소원을 안고 바다로 가는 중이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버스를 타고 오동도에 도착 산책길에 나서 동백나무 숲이며 산중대, 대나무 우거진 오래된 숲길에서 해안 전망대로 이어지는 길까지 그리고 등대 전망대에 올라 멀리보이는 바다까지 보고 다시 한번 날씨 탓을 하고 내려서는 길. 휘돌아 나오다 남근목을 만납니다. 오늘도 무척 걸었습니다.
예전에 써둔 글을 첨부 합니다.
오늘처럼 햇살이 따사로운 어느 봄날 기막힌 친구의 탈출 음모 제안이 있었다.
저 멀리 남쪽 나라에 사촌이 사는데, 길게 계획을 잡고 한번 나들이를 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새벽기차를 타고 따라간 곳이 초록빛 바닷물이 출렁대는 남쪽바다 여수.
흘러간 유행가 중에 이미자 언니가 불러서 히트한 동백아가씨가 왜 그리 인기가 많은 줄 몰랐었는데 여수 오동도 섬을 한가롭게 거닐면서 까마득하게 깎아지른듯한 바위 모퉁이에 서면, 아! 붉게 타오르는 동백꽃잎처럼 열여덟 소녀의 선홍색 뺨처럼 봄바람을 맞고 선 그 자태 그대로 그 어느 화가도 그려내지 못한 한 폭의 풍경화가 된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간간이 섞인 오동나무 등걸과 맨들맨들하게 굵게 가지가 뻗어나간 동백나무 하며, 옛날 화살대로 쓰였다는 산중대 숲 사이로 난 길을 걸으면서 무슨 말을 그리도 진지하게 했는지는 하나도 기억에 없지만, 외롭게 서 있는 저 등대처럼 누군가는 기다리면서 망부석처럼 굳어진 바윗돌이 그냥 스쳐 지나가는 모습만이 아닌 색 다른 풍경처럼 느껴 졌습니다.
다시 돌아오는 발길에 여수 역에서 출발한 삼등열차를 타고 천천히 떠나던 기찻길에 여운을 뿌리면서 기적소리 길게 남기고, 떨어지던 황금빛 낙조 속에 차창에 기대면서 느껴지던 그 갯 내음은 그 어느 엽서에서도 보지 못한 낭랑십팔세의 환상곡이 었다고 생각 했지요.
그리고 세월 흘러 사십년이 더 지났건만 봄만 되면 그때 그 정경들이 봄날 햇살을 타고 마치 새싹이 돋듯 그리움의 바다에 떠 올라 잔잔한 애증의 봄 앓이를 하나 봅니다.
사랑이 별건 가요?
언제나 마음 속에 그리움을 담고 살면 그게 사랑인 게지!
창 햇살이 너무 따사로운 고양이 졸음 같은 봄날. 다시는 돌아 갈 수 없는 추억 속의 넋두리 였습니다.
누구나 첫 사랑 하나쯤은 간직하고 살지 않나요?
2014.04.15.정길진씀.
첫댓글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20년전 첫 사랑이 잠시 왔다가네요.^^
잘 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