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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찰하시는 하나님(창31:42-55)-2016.2.21
요즘 우리 사회는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곳곳에 설치된 CCTV를 통해 일거수일투족이 면밀하게 드러나는 사회라는 말입니다. 알다시피 CCTV는 감찰하는 기능입니다. 사전에 범죄를 예방하고 범인을 색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순기능이 많습니다. 물론 역기능도 만만치 않습니다. 오히려 상대방을 해코지하는 도구로 역이용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 아무리 CCTV가 잘 발달되어 있을지라도 분명히 사각지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시간이나 공간의 제약이 많고, 화상도에 따라 식별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기계와 사람이 하는 일은 완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이 감찰하시면 절대 완벽하십니다. 빈틈도 없습니다. 사각지대도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도 받을 수 없습니다. 범죄에 이용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24시간 밀착하여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한번도 쉬지 않고 풀가동하십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시121:3-5). 무엇보다 하나님은 믿는 자만 감찰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감찰하십니다. 한마디로 의인과 악인 모두를 감찰하신다는 말입니다(잠15:3). 그것도 언제 어디서나 감찰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세상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기자는 무지한 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칩니다.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시94:9). 하나님의 감찰 대상에서 제외된 사람이 하나도 없고, 제외된 장소도 없으며, 제외된 시간도 없습니다. 하지만 감찰하시는 목적은 전혀 다릅니다. 의인의 감찰은 지켜주심과 보호하심을 위함이요, 악인의 감찰은 그들의 죄악된 행위를 기억하시기 위함입니다. 때문에 혹시 하나님이 내 영혼을 감찰하시는 데 불편한 마음이나 두려운 마음이 든다면 당신의 영혼은 문제가 많은 사람이요, 하나님이 내 영혼을 감찰하시는 데 항상 마음이 든든하고 행복하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물론 자기 생각으로 하지 말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감찰은 평안과 축복이요, 악인의 감찰은 두려움과 공포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경호업체나 경호원을 동원해서 경비를 한다할지라도 뚫리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비교적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청와대도 뚫립니다. 우리 역사가 증명하잖아요. 때문에 세상 그 무엇도 우리를 지켜줄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이 지켜주셔야 완벽하고 안전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천군과 천사를 동원하여 믿는 자를 보호하시고 지켜주십니다. 감찰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분은 눈 밝으시고 귀가 밝으십니다. 시간과 공간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해상도나 시효를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1) 하나님은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42,49절)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십니다(잠16:2). 감찰이라는 단어는 감시하고 살펴보는 것을 말합니다. 감찰하는 이유를 기능적인 면에서 볼 때 크게 두 가지입니다. 보호하는 기능과 불법이나 비리를 캐내어 폭로시키는 기능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선한 목적으로 감찰하다가도 악한 목적으로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감찰하시는 목적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고 보호해주시는 데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감찰하시어 잘못이나 비리를 폭로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악용하지도 않습니다. 그분은 24시간 주야로 우리를 감찰하십니다.
누구보다도 육신의 부모는 자기 자녀를 가장 잘 알기에 가장 정확히 감찰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인간의 중심까지 감찰하십니다. 사람의 눈은 피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눈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동산나무 사이에 숨었던 아담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시스로 도망가는 요나는 하나님의 레이다망에 정확히 포착되었습니다.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는 은 한 달란트와 옷 두벌을 속이고 감추었다가 하나님의 감찰하시는 눈에 들통이 나고 말았습니다.
사도들 앞에서 자기 소유의 땅을 팔아 얼마를 감추고 거짓으로 예물을 드리려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거짓이 탄로 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완전 범죄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납니다. 여호와는 우리의 심령을 감찰하시는 분이시며, 심지어 사람의 심장까지 감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렘11:20). 그분은 하늘에서 땅을 감찰하시며(시102:19),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십니다(잠15:3). 그리고 우리의 수욕을 감찰하시고(애5:1), 나의 억울함을 감찰하십니다(애3:59).
창세기 16장을 보면 아브람과 정을 통해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은 사래의 몸종 하갈이 나옵니다. 그냥 하인의 신분으로 주인의 아들을 잉태했으면 안방마님 죄송하여 몸을 사리고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잉태하는 순간부터 안방주인을 멸시하여 여인열전을 벌입니다. 한마디로 안방의 주인을 차지하기 위한 여인들의 암투였지요. 호박에 줄을 긋는다고 수박이 되겠습니까? 호박은 호박이고, 수박은 수박입니다. 보다 못한 사래가 아브람의 후광을 입고 하갈을 학대합니다. 드디어 하갈은 광야로 쫓겨나고 사래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난 듯합니다.
쫓겨난 하갈은 애굽 여인이었기에 친정집을 향해 가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아마 자기의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며 앞날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의 사자가 그녀를 찾아와서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하시며, 장차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위로해주십니다. 그때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계속해서 그녀를 감찰하시던 하나님이 그녀의 외로움과 고통 가운데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녀는 우물의 이름까지 ‘브엘라해로이’라고 불렀습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창16:14).
(2) 하나님은 야곱을 감찰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야곱은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이리 속고 저리 속으며 모진 고생을 다하다가 이제는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자식들과 아내들과 약대들을 태우고 모든 소유물을 챙긴 채 라반의 눈을 피해 야반도주한 것입니다. 20년 전 자기 형 에서의 눈을 피해 삼촌 집으로 도망왔듯이 나갈 때도 도망쳐 나옵니다. 그런데 야곱이 귀향할 때 자기 아내 라헬이 아버지 집에 있던 드라빔을 훔쳐 나옵니다. 왜냐면 라헬도 자기 아버지가 너무 심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드라빔은 가정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라고 여기는 조각물입니다.
라반이 양털을 깎고 돌아와서 도망친 야곱 일행을 7일 동안 쉬지 않고 쫒아왔습니다(22-23절). 그리고 어찌하여 자기 신을 도적질하였느냐고 다짜고짜 따집니다. 물론 야곱은 모르는 사실입니다. 라반은 이곳저곳을 뒤지고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라헬이 드라빔을 가져다가 약대 안장아래 숨겨 넣고 자기가 그 위에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라반에게 강력하게 항의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억울함을 잘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실함도 우리의 생각도 하나님은 잘 아십니다. 사람은 잘못 판단하고 더러는 오해를 한다 해도 하나님은 정확히 아십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은 야곱의 사정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당하는 것을 그냥 보고만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라반의 꿈에 나타나시어 야곱에게 선악간의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자기의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라반에게 하나님이 자기의 모든 고난과 수고를 감찰하셨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삼촌 라반까지 감찰하사 어제 밤에 책망하셨다고 선포합니다(42절). 하나님은 야곱만 감찰하신 것이 아니라 삼촌도 감찰하셨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라는 경고입니다. 그런 야곱의 말을 들은 라반이 꼬리를 내립니다. 그가 먼저 언약을 세워 증거를 삼자고 제안합니다(44절). 다시 말해 야곱의 억울함이 풀려지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라반 사이를 쭉 감찰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감찰은 정확하십니다. 좌우로 치우침이 없으십니다. 지금까지 자기의 의로움만 끝까지 고집하던 라반이었지만 야곱의 설명을 듣고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면 야곱이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를 변명했기 때문입니다. 감히 누가 감찰하시는 하나님께 저항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야곱을 지금까지 쭉 감찰해 오셨습니다. 비록 인간적으로는 교활한 야곱이었지만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 당신의 언약을 이어갈 정통성 있는 인물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야곱도 그런 하나님의 언약을 분명히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스케줄대로 움직였습니다. 삼촌 라반의 집 밧단아람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야곱을 감찰하시면서 이끌어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런 야곱도 하나님의 언약을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는 창세기 28장에서 하나님과 맺은 벧엘언약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창28:15절).
그리고 때가 되매 하나님이 말씀하심을 듣고 라반의 집을 떠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30:13절). 다시 말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고 떠난 것입니다. 야곱은 라반과 언약을 맺어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그만큼 야곱은 하나님이 자신을 통하여 이루시는 하나님의 언약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기다렸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하여 맹세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이 자신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이 새 언약의 중보자 되시는 주님의 통로가 되는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때문에 그를 추격해온 삼촌 라반에게 담대하게 말한 것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라반은 야곱의 일행을 모두 다 데리고 자기 집으로 데려갈 심산이었을 것입니다. 너무나 억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라반의 욕심을 무너뜨리십니다. 하나님이 라반에게 현몽하여 가라사대 야곱에게 선악간 아무말도 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24절). 하나님이 두 사람 사이를 지켜보고 감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라반은 잃어버린 드라빔만 가지고 어깃장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야곱은 그런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편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삼촌 앞에 당당하게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 사정을 변호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감찰하셨습니다. 야곱의 감찰은 의인을 위한 감찰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맺은 언약을 충실히 이행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맹세로 언약하신 것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야곱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자기편에서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라반을 설득합니다. 어찌 보면 추격자와 도망자 사이에 충분히 무력충돌이 있을 수 있는 위급한 상황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야곱과 라반 사이에 평화조약이 체결됩니다. 이것이 바로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인 것입니다.
물론 라반의 제안으로 성사된 미스바 언약이었지만(49절), 하나님이 라반의 입을 봉하시고 야곱의 입을 열어서 조성하신 평화 선언입니다. 이들 사이에 하나님이 개입하심이 없었다면 이들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 사이를 쭉 지켜보시며 감찰하신 하나님이 이들을 통하여 상호불가침 선언을 맺게 하신 것입니다(52절). 한마디로 라반의 체면도 살려주고, 야곱의 자존심도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평화협정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시오, 화목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감찰하시면 누구도 속일 수 없습니다.
(3)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를 24시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성도는 그분 앞에서 항상 긴장해야 합니다. 영적인 긴장은 영적인 민감함을 의미합니다. 15세기 유럽의 수도원에 원생들이 50여명 되는 수도원이 있었습니다. 수도원장은 아주 훌륭하신 분이셨습니다. 원장님은 많은 원생들 중에 유난히 한 아이를 사랑했습니다. 그 아이는 볼품이 없고 지능도 다른 아이들에 비해 떨어지는 아이였던 것입니다. 다른 원생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원장님은 불공평하신 분이야. 우리 원장님은 바보이신가 봐’. 이에 수도원장은 이 문제를 해결해 보기위해 왜 내가 저 아이를 사랑하는지 이유를 말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원장은 원생들에게 작은 새 한 마리씩을 나누어 주면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그 새를 죽여 오라고 했습니다. 해가 질 녘이 되자 원생들이 하나 둘씩 모여와서 수도원 마당에 죽은 새의 시체를 놓았습니다. 그런데 가장 나중에 돌아온 아이의 손에 작은 새가 죽지 않고 산 채로 들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왜 늦게 오면서 새를 죽이지 않았느냐고 물어오는 질문에 아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원장님께서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새를 죽여 오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아무리 조용하고 으슥한 곳을 찾아봐도 하나님은 보고 계셨어요. 그래서 차마 새를 죽일 수 없었어요”.
이것이 바로 원장님이 이 아이를 사랑하는 이유였던 것입니다. 비록 이 아이는 지능은 낮았는지 모르지만 영혼지수가 다른 원생들에 비해 월등히 높았던 것이지요.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대한 영적 민감함이 다른 아이들보다 달랐던 것입니다. 이 아이의 신앙의 눈이 다른 아이들보다 순수하고 맑았던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등불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영혼 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속속히 알고 계십니다. 아무도 그분을 속일 수 없고 아무도 그분 앞에서 감출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현대인들에게는 군중심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낯선 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감추면 잘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익명의 크리스천들이 많은 것입니다. 큰 교회는 이런 익명의 크리스천들이 의외로 많다고 합니다. 자기를 드러내지 않은 채 군중들 속에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크리스천들입니다. 굉장히 위험합니다. 미안하지만 하나님은 정확히 아십니다. 하나님은 눈 밝으시고 귀 밝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민감하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모르시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에스겔서 8장을 보십시오. 선지자 에스겔이 이상을 보았습니다. 여호와의 제단 문에 이르러보니 담에 구멍이 나 있었습니다. 담을 헐고 그 안을 살펴보라고 해서 들어가 보니 온갖 가증하고 악한 일들이 자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각종 곤충들의 우상, 가증한 짐승들의 우상, 이스라엘 족속들의 모든 우상 벽화가 그려져 있고, 이스라엘의 70인 장로들이 각종 우상을 섬기면서 하는 말이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 이 땅을 버리셨다 하느니라”(겔8:12)하면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채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아무도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세상에 하나님 앞에 감추일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민감해야 합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목사가 가장 기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성도들의 작은 변화에 목사는 힘을 얻고 감동을 합니다. 주일에만 나오던 성도가 수요일에 나오고, 금요일에도 나오며, 새벽을 드릴 때 목사의 감동은 말할 수 없이 충만합니다. 목회만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아내는 남편의 작은 변화에 행복을 느낍니다. 남편도 아내의 작은 변화에 감동을 받습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아주 작은 변화에 민감하시고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부분까지 세밀하게 감찰하십니다. 우리가 거창한 일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감동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스런 말 한마디, 작은 섬김과 헌신, 사랑과 애정에 감동하십니다. 우리들의 부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의 부모님께 외제 승용차를 사드리고 해마다 해외여행을 보내드린다고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려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드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편하게 해 드려야 합니다.
그 방법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절대 내 힘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성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싶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수고해도 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드릴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가 주님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먼저 주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알아야 주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기만 해도 안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먼저 주님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나를 성전 삼고 지금 내안에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 사실이 이해가 되고 믿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이 안되면 절대 주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당연히 주님의 마음으로 살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주님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살면 주님이 내 영혼을 감찰하심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어떤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그분은 항상 어렸을 때, 어머니가 드시는 것을 빼앗아 먹었다합니다. 당시에는 철이 없어서 어머니는 안드셔도 사는 줄로 알았다합니다. 어느 날인가 그분은 배가 고프다고 어머니가 드시는 밥까지 다 빼앗아 먹어치우고는 밖에서 놀다가 물을 마시러 집으로 돌아와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답니다. 어머니가 도배를 하려고 쑤었던 풀에 김치 국물을 말아 드시는 장면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그는 숨이 멎어버릴 듯이 충격을 받아 숨어서 하염없이 울었다합니다. 후에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목사가 되었고 이제는 남을 위해 사는 자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머니의 매력은 속아주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매력은 용서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사정을 정확히 감찰하십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감찰하신대로 우리를 징계하시고 심판하셨다면 감히 누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 전에서 누가 예배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아십니다. 비록 내가 부족하고 하나님의 저울에 미달되어도 그런 나를 여전히 사랑하시고 나를 지켜주십니다. 그 주님이 먼데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 나를 성전 삼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주님이 나를 쉬지않고 감찰하십니다. 내 모든 삶을 감찰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시선을 날마다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지금 내 안에서 나를 성전 삼고 나와 함께 계심을 믿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큰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외면하거나 피하지 말고 오직 주님과 한 마음되어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저 날마다 주님의 마음되는 일에 집중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나를 포근하게 감싸주시고, 안전히 보호하시며 안위하여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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