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주의 영화》 공선옥 작가가
‘시낭고낭’ 앓다가 세상에 내놓은 이야기
글 : 유슬기 기자 / 사진제공 : 창비
[2019년 10월호]
공선옥 작가는 지금 전라남도 담양에 있다. 밥 해 먹고 텃밭 가꾸고, 책 읽고 글 쓰는 게 전부인 일상이다. 그는 전남 곡성에서 태어나 여수, 광주, 서울, 춘천 등에서 살았다. 방랑하는 삶 같지만 한 번도 스스로를 ‘도시인’이라 여겨본 일이 없다.
“제 의식의 배면에는 대도시가 없습니다. 늘 농촌이거나 소도시입니다. 제가 대도시를 처음 경험한 건 고등학교를 다니기 위해 광주로 와서입니다. 유년기는 인간의 의식을 형성하는 데 가장 두터운 시기인 것 같아요. 농촌과 소도시가 제 소설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겁니다.”
지난 8월 말, 공선옥 작가는 소설집 《은주의 영화》를 냈다. 2007년 《명랑한 밤길》 이후 12년 만이다. 스스로도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다. 젊을 때는 4~5년이 지나는 게 10년 같았는데, 지금은 10년이 4~5년 같다. 이 소설집은 표제작 〈은주의 영화〉를 포함해 여덟 편의 단편으로 이뤄져 있다.
각각의 작품은 2010년부터 2018년까지 문예지에 발표됐다. 책을 내면서 스스로도 골똘히 생각해봤다.
이 이야기들은 어떻게 나에게 왔을까.
“〈행사작가〉를 쓸 무렵 나는 글은 쓰지 못하고 글하고는 상관없는 어떤 행사를 ‘뛰고’ 있었다.
그 행사 후에 원고료보다 훨씬 많은 ‘행사비’를 받아서 뜨거운 햇빛 속을 눈을 감고 걸어서 집으로 왔다.”
- 작가의 말 中
첫 단편 〈행사작가〉에는 아주 오래전 〈대낮의 매운탕〉이라는 단편을 쓴 작가 K가 등장한다.
그는 그 이유로 종종 매운탕과 관련된 행사에 초청받는다. 작품은 무거운 시대를 건너는 청춘의 초상을 그린 것인데, 이후 그를 찾는 이들은 오직 매운탕에 대해서만 말한다. 행사에서 그는 ‘매운탕 전문 작가’로 소개된다. 행사에 앞서 그는 전어, 송어 등 관련 생선에 대한 공부도 겸한다.
‘선명한 시간’은 어떤 식으로든 말을 해야지, 안 그러면 사람이 ‘시낭고낭’ 앓게 되는 법이다

‘시낭고낭’은 ‘간난신고’를 뜻하는 경북 지방의 방언이다. 그가 앓으면서 써낸 글에는 자신의 경험과 그가 본 풍경이 한데 뒤섞여 있다. “산다는 것은 보고 들은 것을 기억하고 그 기억이 희미해지고, 또 그런 속에서도 몇 가지는 체로 거른 듯이 잊히지 않아 이렇듯 글로 쓰이는 것들이 있는”데, 어떤 옛날은 지금보다 더 선명하다.
“제가 빠르게 변하는 세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어서 더욱 그런 것 같아요. 일상에서도 늘 ‘삶의 시차’를 겪습니다. 지금도 소설을 쓰면서 헉헉거려요. 어쩌면 제 소설은 그런 고군분투의 결과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에게 ‘선명한 시간’은 1980년의 광주다. 1963년생인 작가가 청춘의 나날을 보낸 1980년대는 가혹한 날들이었다. 시대가 수상하지 않았더라면 죽지 않았을 젊은이들이 죽었고 수많은 어머니들이 자식을 잃었다. 남은 자들은 살아야 하는데 온전한 마음과 정신으로 살아지지가 않았다.
〈은주의 영화〉는 카메라에 이런 이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은주는 현재 취업 준비생이다. 하지만 돈을 버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카메라에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 데만 마음이 동한다. 그의 카메라에 담긴 인물은 그의 이모다. 은주의 이모 상희는 5·18 때 계엄군들이 자기 집 마당에까지 들어와 개와 닭들에게 총질을 하는 모습을 본 후 다리를 절게 됐다. 우리 집 개가 총을 맞고 피를 뿜으며 죽어가는 모습과 닭들이 너덜너덜한 채로 도망치는 것을 본 후로 상희는 제대로 걷지 못한다. 엄밀히 그는 5·18의 피해자도, 희생자도 아니다. 그저 평소처럼 마당을 지나 대문을 열고 나가던 길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정말 그는 피해자도 희생자도 아닐까?
“저는 제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을 굳이 결핍 혹은 아픔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단지 그들이 겪어내는 ‘삶의 한 양상’이지요. 저는 그들의 삶을 글로 따라갈 뿐입니다.”
2009년 출간한 장편 소설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그들이 가장 예뻤던 스무 살의 겨울을 그리고 있다. 이들의 스무 살은 ‘사람들이 많이 죽어간 한 도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아빠 없는 아이를 낳고, 누군가는 대학을 떠나 공장에 취직한다. 이들은 꽃향기에 설레면 그것이 무슨 죄라도 되는 듯 몸을 떨었고 멋을 부릴 기회도 잃어버렸다. 공선옥의 소설에는 역사나 뉴스의 물리적 통계엔 집계되지 않았으나 저마다의 상흔을 갖고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 기록된다.
문학이 꼭 ‘영혼의 밥’ 노릇을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작가는 이들의 기록을 담은 문학의 당위를 힘주어 외치지 않는다. 때로 문학이 채울 수 없는 허기가 있다는 걸 그는 담담히 인정한다. 단편 〈설운 사나이〉는 평택 ‘쌍용자동차 사태’를 담았다. 미용실을 운영하는 주인공 영애는 자신에게 처음으로 책을 선물한 초등학교 교사 이강호를 통해 ‘영혼의 밥’을 먹는 기쁨을 알게 된다. 그의 눈에 배호 노래를 부르고 책을 읽지 않는 차우진은 투박한 사내다. 한동안 우진이 보이지 않아 궁금해하던 영애는 그가 공장 안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 그 안에는 물도 없고 쌀도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영애는 영혼의 밥보다 더 시급한 밥이 있다는 걸 그 뜨거운 시멘트 바닥 위에서 느낀다. 그리고 누군가 말한다.
“사는 기 이케 서룹다.”
공선옥 작가는 이런 서럽고 억울한 삶을 사는 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이들의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을 포장하지 않고 담아낸다. 그러면서 갖게 된 생의 비굴함이나 어긋난 비뚤어짐도 그대로 기록한다. 생전에 박완서 작가는 공선옥의 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거친 듯하면서도 위선이 없는 정직한 문장이다.”
이를테면 단편 〈순수한 사람〉에는 핍진한 삶을 사는 딸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저 푸성귀와 나물을 뜯어 보낼 수밖에 없는 노모의 술주정 같은 한탄이 담겨 있다.
“가거라, 싹 다 가부러라, 가서는 이 악물고들 살어라. 못난 느그 엄씨는 느그들한테 암것도 줄 것이 없다. 느그 어매 젖은 진작에 보타져불고 수중에 일전 한 닢이 없다. 시방 그렇게 느그들은 맘 모질게 묵고들 살어라잉.”
그러니까 공선옥 작가의 글은 현실을 잊을 수 있는 잠시의 위로나 위안이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전하고 담음으로써 오히려 이들이 기억되고 기록될 수 있는 한 편의 공간을 마련한다. 그리고 그 공간은 늘 평소 그런 공간을 갖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 열려 있다.
“친절이나 호의, 환대나 정성 같은 것은 어떤 식으로든 많이 가진 사람이나 강한 사람에게 가기 마련이지요. 이것들이 다 가는 쪽으로 제 글도 간다면, 제가 글을 쓸 이유가 없을 겁니다.”
소설로밖에는 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 나는 안다
© 강경필그가 나고 자란 전라남도 곡성군 삼기면 청계리는 지금도 거의 변함없는 모습을 갖고 있다. 길이 조금 더 닦이고, 냇가의 정자가 조금 더 번듯해진 것 외에 변한 것은 없다. 오히려 이렇게 변하지 않은 풍광을 간직한 이곳은 전근대를 담은 영화의 촬영지가 되거나 기찻길의 흔적을 지닌 ‘기차 마을’이 됐다. 작가와 함께 이곳은 세월의 시차를 빗나가는 곳이다.
“제게 고향은 척박하고 고독하고 황량했던 땅입니다. 이 땅에서 여기를 떠난 뒤 내가 알고 느끼고 깨달았던 모든 것의 합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내 속에 저장할 수 있었어요. 느낌과 생각과 감각을 갖기에 척박과 고독과 황량은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지금도 그는 고향 언저리 어딘가에서 터를 잡고 한 시절을 보내고 있다. 그러다 보면 어떤 소설들이 그의 곁으로 온다. 소설도 살아 있는 생물처럼, 어느 날 문득 씨가 생기고 분화를 하고 부풀어 오르다가 마침내 ‘터지는 순간’이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 찰나, 터져서 흩어지기 전에 수습해서 옷을 입혀 세상에 내어놓는 게 그의 일이다. 그러고 나면 그 이야기들은 또 전혀 낯선 물건이 되어버린 듯 세상으로 나가 각자의 삶을 산다.
그의 문장을 칭찬했던 고 박완서 작가는 한국 전쟁의 상흔을 담은 이야기를 쓰곤 했다. 그 아픈 생채기를 다시 들여다보는 게 고역이지만, 그것을 기록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혹시 그 상처가 아물어 사라질까 봐, “고름을 짜내며 글을 쓴다”고 그는 말했다.
한국 전쟁은 작가의 삶에서 한 번 지나가고, 소설의 인물을 통해 한 번 지나며, 독자에게 또 한 번 지난다. 독자는 살아보지 않은 어떤 생을 소설을 통해 살아낸다. 공선옥 작가에게는 질곡의 현대사가 그렇다. 그 광주의 젊음을, 그 5월의 잔인함을 행여 잊을까 싶어 그는 쓰고 또 쓴다. 쓸수록 선명해지는 그 기억이 설혹 독자를 불편하게 만든다 해도, 그것이 응당 작가의 일이라 믿는다.
“이 소설들이 지금 세상의 어느 누구에게 가 닿아서 그에게 어떤 식으로 말을 걸까. 말을 걸 수나 있을까? 혹은 누가 이 소설들에 말을 걸어오기나 할까? 나는 혹시 노래를 익혀 ‘밤무대 가수’로 사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그렇게 사는 것이 ‘존재 의의’로서는 좀 더 윗길이지 않았을까? 소설이 세상에서 그리 유용한 물건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기는 해도 어쨌거나 그럼에도 아랑곳없이 나는 앞으로 사는 동안은 소설을 쓰면서 살게 될 것이다. 내가 ‘소설’로밖에는 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 나는 안다.” - 2019년 8월 담양 수북에서, 공선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