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누구신가?
요6:65-68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축복의 새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오늘은 대강절 첫주입니다. 초신자들이 많았던 교회에서 “대강절입니다.” 했더니, 대강대강 보내는 때냐고 농을 하더군요. 12월이 되면 조금은 들뜨고, 선물과 파티 등이 먼저 떠오르는 시대를 살다보니, 그런 농담도 하는 것 같습니다.
대강절은 교회력으로 볼 때 새로운 한해의 시작입니다. 한해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러한 기다림을 상징하는 의미로 교회는 소망, 사랑, 기쁨, 평화를 상징하는 네 개의 촛불을 매주 하나씩 점화해 나갑니다. 오늘은 대강절 첫주 주일로 이사야 11장의 말씀을 기억하며 기다림과 소망의 촛불을 점화하는 날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우리는 기다림과 소망의 촛불을 점화하였습니다. 이때에 우리 모두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리며,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이해하고 더욱 주님을 향한 믿음을 견고히 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단심가’
요즘 세대 차이를 확인하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30대 후반과 40대 이후를 구별하는 방법입니다. “붉은 노을”이란 노래를 누가 불렀습니까? 하면 저희 세대 정도되면 대부분 이문세라고 합니다. 그러나 보다 젊은 세대는 빅뱅이라고 한답니다. 또 50대와 그 이상을 구분하는 방법입니다. “하여가”라고 하면 뭐가 떠오르시나요? 서태지와 아이들이 떠오르는 세대도 있지만, 이방원과 정몽주가 떠오르는 세대가 있습니다. 이방원과 정몽주가 떠오른다면... 연식이 좀....말안해도 아시겠죠!!
고려 말기에 이성계는 왕씨의 나라가 아닌, 이씨의 나라를 세우려고 합니다. 역성혁명이라고 하지요. 신진사대부 출신의 정도전 같은 인물들이 이성계를 지지했지만, 당시의 학자이며 신망받던 포은 정몽주는 반대했습니다. 당시로서 정몽주는 고려 말의 마지막 버팀목이었고, 이성계와 그의 세력들에게는 눈엣 가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성계의 아들이며 훗날 태종이 되었던 이방원이 정몽주를 찾아가 시조로서 그의 마음을 떠옵니다. 그것이 바로 하여가입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힌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년까지 살아보세”
즉 누가 왕이 되건 상관없이 잘 살아보자는 유혹을 담은 의미였습니다. 이에 정몽주는 자신의 뜻과 생각을 단심가로 드러냅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그는 일백번 죽더라도 오직 한마음뿐이라고 밝힙니다. 결국 그는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 의해 선죽교 다리 위에서 죽음을 당하게 되고, 고려의 마지막 버팀목이 죽고, 이씨 조선이 시작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참 간사하다고 합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경이 2차 세계 대전 중에 세계를 향해서 방송을 하려고 웨스트 앤드에서 택시를 불러 세우고 방송국인 BBC까지 가자고 하였답니다.
"미안하지만 다른 차를 이용해 주십시오. 저는 그렇게 멀리까지 갈 수가 없습니다." "아니 어째서?", "보통 때면 좋습니다만 아저씨, 한 시간 후면 윈스턴 처칠경의 '방송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꼭 들으려고 그럽니다." 처칠은 그 말에 기분이 좋아져서 1파운드라는 당시로 상당한 금액의 돈을 집어 주었답니다. 운전수가 1 파운드를 보더니 "어서 타세요, 그까짓 처칠이고 뭐고 돈부터 벌고 봐야겠오."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눈앞의 이익을 따라 마음을 쉽게 바꾸는 것이 인간의 모습인데,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6장에도 이같은 사람들의 모습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요6장을 보면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실 뿐만 아니라, 영생의 대한 말씀을 하시며 예수 자신이 영생을 위한 떡이요 양식이 되신다는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도 보았고,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기도 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실망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들과 예수님의 바라는 것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눈앞에 보이는 음식, 세상을 움직이는 권력과 힘, 지금 이 세상에서 당장 잘 먹고 잘사는 것에 원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구름떼처럼 몰려왔지만, 실망하여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저는 이 말씀을 던지는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수많은 사람들이 등을 돌렸습니다. 폭풍처럼 몰려왔던 인기가 한순간에 식었습니다. 얼마나 허무하셨을까요? 고통이 몰려왔을 것입니다. 그 고통 속에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 질문을 깊이 묵상해봤습니다. 이것이 문자로 읽는 것처럼 질문이라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붙잡는 맘으로 저희도 저들처럼 떠날거야? 정말 갈래? 이런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제게 주시는 마음을 아니었습니다. 질문 속에 담긴 예수님의 ‘단심가’가 마음을 울렸습니다.
“세상 사람이 다 떠나도, 저희마저 떠난다해도, 나는 내 길을 가련다”
예수님은 선택하신 길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선포였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6:38)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이 땅의 영광이 아닌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 순종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셨기에, 우리에게 복음이 되셨습니다. 성탄 절기에 세상의 어떤 유혹과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께 단심가를 부르셨던 예수님,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예수님의 마음을 기억하시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이 땅에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예수께서 “너희도 가려느냐?”라는 질문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예수님의 단심가에 베드로의 단심가가 울려 퍼집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의 의미와 기치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정확히 알았던 것은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약 400년 전에 그리스 땅에 서양 철학의 창시자가 되었던 소크라테스가 있었습니다. 그는 왕이 내린 사약 즉 독약을 먹고 죽게 되었는데, 바로 죽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이제 곧 죽을 것을 예상하며 그의 제자들과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고, 플라톤이 기록해서 "플라톤의 대화"(The Dialogue of Plato) 라는 책이 되었습니다. 사약을 마신 직후에는 마치 물한 모금을 마신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감옥 복도를 왔다 갔다 하며 제자들과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한참 거닐다 보니까 독이 몸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걷지를 못하고 서서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것도 힘들어지자 앉아서 말을 계속 하였고, 그것도 힘들어서 누워서 이야기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독약을 마셨어도 그 독이 온 몸에 퍼질 때까지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죽음은 시간문제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의 모습입니다. 인류는 사단이라는 뱀에게 물려서 죄의 독으로 인하여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중입니다. 여기서 죽음은 육체의 죽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죽음이며 영원한 멸망입니다. 이 죽음에서 예외는 없었습니다. 성경의 기록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죄의 문제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모든 사람들은 결국 영원한 지옥에 떨어져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속에서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이같은 멸망과 영원한 고통에 처한 인류, 바로 여러분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 자는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바라보는 자, 영원한 고통 아래 놓일 뿐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5)
광야에서 있었던 독사의 심판 속에서 그들이 살 길은 장대에 달린 구리뱀을 쳐다보는 것뿐이었습니다. 본자는 살았고, 거부했던 자들 은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멸망을 향해가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광야의 놋뱀처럼 주님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가야할 길은 배신과 조롱과 고난의 길이지만,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겠다는 단심가로 선포하셨던 예수님께, 베드로와 같은 단심가로 답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대강절은 기쁨의 시간이요,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아, 오직 예수를 더욱 사랑하겠다는 시간입니다.
“너희도 가려느냐?”라는 질문을 마음 속에 깊이 새기시고, 베드로와 같은 단심가로, 답하시는 벤츄라교회의 모든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