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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8일의 왕모산성 답사는 많이도 기다렸다. 지난 2월 초 두류네거리에 위치한 백강 물회에서 결정된 것이니, 한 달도 더 기다린 셈이다. 나름대로 공부도 하고 답사 자료집도 만들어 보려 하였지만, 천성이 게을러 하나도 이루지를 못했다.
밴드에 답사 참가를 묻는 공지가 오르자 순식간에 봉고차 정원을 넘겨 버렸다. 답사에 대한 우리 회원들의 마음을 알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25인승 미니버스로 이동수단이 바뀌면서 편한 마음으로 나는 후배 박 선생에게도 같이 가자고 말을 할 수 있었다.
답사 당일, 와총을 태우고 성서 홈플로 향했다. 9시가 가까워서인지 공영주차장은 만원이었다. 할 수 없이 도로가에 차를 세우고, 전날 허총과 와총이 사이좋게 준비한 물과 간식 봉지를 양 손에 들고 용산역 5번 출구로 갔다. 김 회장님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박 선생과도 오랜만에 인사를 했다. 허총이 탑승하자, 미니버스는 중앙고속도로를 통해 안동으로 달린다.
안동으로 가는 차 안에서 허총의 사회로 회장님의 인사 말씀이 있었고, 산대장님의 산행 안내가 있었다. 회장님은 남안동 IC에 내려 안동으로 접어들자, 마이크를 들고 조탑동 전탑과 영호루 이야기, 오천 군자리와 국학진흥원 등 차창 밖으로 변화하는 풍경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풀어가셨다. 우리 답사팀을 태운 미니버스는 청량산을 향해 골짜기 안으로 계속 달린다. 산골 풍경이 보이는가 싶더니, 퇴계 선생의 셋째 손자 동암 이영도 선생의 종택인 수졸당과 재사 건물이 보였다. 모르면 그냥 지나칠 것이지만, 퇴계 선생의 후손이신 이 선생님의 설명이 있었기에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조금 더 가니, 왼쪽에는 계상 서당 건물 세 채가 개울가에 서 있고 오른 쪽에는 퇴계 선생 종택이 보였다.
드디어 우리 미니버스는 왕모산성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짧지 않은 거리를 달렸지만,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던 시간이었다. 왕모산성 주차장에서 우리는 우리 답사팀의 산대장님을 따라 산행 안전을 위한 가벼운 몸풀기를 하였다. 간단한 동작이었지만, 온몸에 적당한 긴장감을 불어넣는 효과적인 준비 운동이었다.
1.5리터 생수 둘을 배낭 양쪽에 넣으니 묵직한 느낌이 온다. 가볍게 생각한 산행이었지만, 애초 기대와는 달리 가파른 산길이 이어진다. 가파른 산길을 정신없이 오르다 보니, 그렇게 보고 싶었던 왕모산성의 흔적을 그냥 지나쳤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니 누구를 탓하랴! 한참 지나 산행 안내도를 보니, 왕모산성은 저 아래 위치에 표시되어 있었다. 일행이 있으니 다시 내려갈 수도 없고.....
산길을 오르면서 오늘 우리 답사팀의 지도 선생이라 할 수 있는 이 선생님과 류 회장님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선성 김씨와 봉화 금씨의 산송(山訟), 도산서원 상덕사에 유일하게 종향된 월천 조목 선생 등.
왕모산성에 오르면서 내려다 본 풍경도 볼 만하였다. 넓은 골짜기의 산 기슭의 아늑한 곳에는 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고, 하천과 조화를 이루면서 넓은 들이 펼쳐져 있었다. 분명 골짜기이지만 삶의 터전이 좁아 보이지 않는다. 커다란 재산은 모으지 못하더라도 양반의 품위는 충분히 유지할 만한 곳이라 생각되었다.
원촌과 내살미, 하계와 의인 마을 등 책 속에서 보았던 동네가 눈앞에 펼쳐진다. 책을 읽을 때 상상하던 모습과는 좀 다르지만, 사람 살기는 참 좋은 동네라는 생각이 든다. 이 선생님은 하나 하나 손으로 가리키며 친절히 설명을 하셨다. 이곳에 사는 주민의 80%의 퇴계 후손들이라 하니 동네의 풍경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왕모산에서 바라 본 내살미, 하계, 의인 마을의 모습
왕모산 정상에 가기까지 12봉이 있다 하는데, 어떤 봉우리에 올라서니 아래에 작은 전각이 보인다. 빠른 걸음으로 내려가니, 평소 넉넉하신 마음으로 답사팀을 보듬어 주는 김 선생님이 벌써 전각을 살펴보고 있었다. 김 선생님을 따라 안내판과 전각 안을 살펴보았다. 안내판에는 이 작은 전각이 ‘왕모당(王母堂)’으로 소개되어 있었다. 1361년 겨울,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피난 왔던 공민왕의 가족 중에 왕의 어머니가 이곳에 머물렀다고 전한다. 안내판에는 공민왕을 구하고 지렁이로 변하였다는 老將帥의 공을 기리기 위해 왕이 사람을 보내 건립하였다는 설명이 있었다.
왕모당 안에 모셔진 남신과 여신
금(禁)줄이 있는 왕모당 모습
왕모당 안에는 남녀 신상이 모셔져 있었는데, 뒤에 붙여진 글을 보니 ‘왕모산성성황신위(王母山城城隍神位)’라 쓰여 있었다. 그리고 왕모당 밖에는 금(禁)줄이 쳐져 있었다. 정월 대보름에 마을 사람들이 祭를 지낸 흔적이라는 설명을 두 분의 선생님에게 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堂祭에 기울이는 정성이 대단하다고 한다. 이 堂祭는 아무나 지내는 것이 아니라 마을 주민 중에서 손(損)이 없는 사람을 특별히 엄선하여 일정기간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게 한 다음, (祭)를 주관하게 한다고 한다. 600여년을 넘은 그 긴 시간동안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왔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다.
지난 설날, 집안 어른께 세배를 갔었다. 왕모산성 답사가 예정되어 있었기에 청량산 자락에 사셨던 그 분에게 공민왕 제사에 대해 여쭤보았다. 그 어른께서는 공민왕에게 제사를 지낼 때, 마을 주민들은 숨소리 하나 내지 않을 정도로 조심하였다 한다. 제수를 마련하기 위해 씨앗을 뿌리고, 모심기를 하고, 잡초를 뽑고, 탈곡과 건조에 이르기까지 함부로 하는 것이 없었다는 말씀이었다. 그러면서 어린 시절에 들었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당시 공민왕의 제사에 쓰기 위하여 곡식을 햇볕에 말릴 때는 옆에 사람이 지키고 있었다 한다. 그런데 지키던 사람이 잠시 한 눈을 팔았는지, 새 한 마리가 공민왕의 제사에 쓸 곡식을 쪼아 먹었는데, 공민왕 혼령의 노여움으로 그 새는 결국 날개 짓 몇 번도 못해보고 죽었다는 이야기였다.
조금 더 길을 오르니 갈선대(葛仙臺)가 나타난다. 좁고 가파른 갈선대에 오르니 다리가 쩌릿하다. 얼마 서 있지 못하고 얼른 갈선대에서 벗어났다. 벗어나면서 보니 갈선대로 향하는 좁은 통로의 왼 편의 안내판에는 육사의 시 ‘절정’이 쓰여 있었다. 우리 답사팀은 이곳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갈선대를 벗어난 나는 와총의 부탁으로 카메라를 잡았다. 그 사진이 지금 밴드의 얼굴이 되어 있다.
갈선대에 있는 육사 시
갈선대에서 바라 본 단사벽
그런데 ‘갈선대’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도 존재한다. 농암 종손인 이성원 선생이 쓴 책을 보면, 퇴계 선생이 친구였던 ‘이문량’이란 분에게 쓴 편지글이 소개되어 있다. 일부를 인용하면,
‘갈선대의 산보는 늘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스무날이 넘으면 늦은 감이 있다 해도 말씀하신 대로 따를 것입니다. 다만 들리기는 근일 안동의 두 관원이 온다고 하니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으나 계속 끌려 다니는 처지가 될까 두렵기만 합니다. 만약 흥이 이는 것을 못 견디면 혼자서 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성원 선생은 이 글을 근거로, 지금의 갈선대는 원래 갈선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노년의 퇴계 선생이 산보 삼아 갈 수 있는 곳이 지금의 갈선대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1996년, 자신이 퇴계 종손이신 이근필 선생을 모시고 이곳을 지날 때 여쭤보니 종손께서는 왕모산성에 올라가는 언덕을 갈선대라 지목하였다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가파른 산길을 올라 드디어 왕모산 정상에 도착하였다. 넓은 헬기장이 있어 이곳에서 우리 일행은 점심을 먹었다. 허총과 산대장님이 어묵탕과 우동 요리를 해 주셨다. 산 위에서 먹기는 과분한 진수성찬이었다. 맛은 참 좋았지만, 너무 수고가 많은 것 같아 마음은 좀 불편하였다. 김밥 두 줄과 막걸리 한 병으로 족하던 나의 산행 점심과는 너무 달랐으니까..... 내려오는 길은 약간 달리 하였다. 왕모산에서 내려와 육사문학관에 들렀다. 그러나 문을 열지 않아 아쉬움이 많았다. 그곳에서 잠시 지체한 우리 답사팀은 도산서원으로 달렸다.
도산서원은 여러 번 가본 곳이었지만, 특별한 기대를 갖고 임하였다. 도산서원에 대해서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는 훌륭한 답사 가이드가 있기 때문이었다. 도산서원 입구에있는 천연대(天淵臺)에서 시사단(試士壇)을 바라보면서, 정조 임금이 영남 유림을 위해 실시한 과거 시험 이야기를 들었다. 두 분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원래 시사단이 있던 곳은 소나무 숲이었다고 한다. 이곳에 과거시험이 실시되었는데, 안동댐이 건설되고 이 곳이 수몰되면서 역사적 현장을 보존하기 위해 높은 단을 세우고 비와 비각을 옮겨 세웠다는 것이다. 평소 시사단을 바라볼 때마다 뭔가 이상하였는데, 오늘 그 연유를 알게 되었다. 강 건너 멀리에는 이 선생님의 아흔아홉칸 집이 아스라이 보였다. 올 연말이면 보수 공사가 끝난다고 하니, 언제 볼 기회가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시사단의 모습 낙동간 너머 아스라이 보이는 번남댁
안으로 들어가 도산서당을 보고, 특이한 서체로 쓰여진 현판을 배경삼아 단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전교당 마루 위에서 동재와 서재를 바라보면서 회장님께 도산서원 이야기를 들었다. 많은 회원들은 회장님이 보름마다 잠자는 방이 어디인지 물었다. 동재는 세 칸인데, 중간에 있는 방에서 일곱 분이 주무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도산서원 현판은 조선전기의 명필 석봉 한호가 썼다. 당시 선조임금은 32세의 젊은 석봉이 퇴계를 모신 도산서원 현판을 쓰게 된다면 부담을 느낄 것을 우려하여 마지막 글자부터 쓰게했다고 전한다. 원->서->산->도의 순서로 글자를 쓰던 석봉은 마지막 글자를 쓰면서 자신이 도산서원 현판을 쓴다는 것을 알고,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여 마음이 흔들렸다고 한다. 그래서 도산서원의 첫글자인 '도'자는 다른 세 글자에 비해 못하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서예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이고, 오랬동안 붓글씨를 써 왓던 내 친구도 큰 차이점을 느낄 수 없다는 말을 하였던 기억이 난다.
이것은 조상과 스승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스토리텔링이 아닐까? 꿈보다 해몽이라고.... 유일재 선생이나 백담 선생의 명성이 시간이 지날수록 바래져 간것은 이렇게 스토리 텔링을 해줄 후손과 후학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 사액 현판
우리 답사팀은 전교당에 붙어있는 향사 분정표를 보면서 류선생님께 초헌관과 아헌관, 종헌관과 분헌관의 역할, 축과 찬자, 알자 등의 소임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역사 공부인 것이다. 머리가 아닌 몸으로 느끼는.. 이 향사분정표는 서원에 향사된 퇴계와 월천을 높이기 위해 공연되는 연극의 출연 배우들이다. 헌관은 주연이고, 축이나 찬자, 알자 등은 조연 배우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향사에 참여하는 분들은 단역배우이자 관객이 되지 않을까 싶다.
서원은 교육기관이지만, 사당이 있음으로 해서 종교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어느 종교에서나 교주를 높이기 위한 신성한 의식이 존재한다. 거의 모든 제사가 그렇듯이 서원의 제향도 사당에 모셔진 선현의 학덕과 인품을 추모하고 계승하려는 본래의 의미보다는 사당에 모셔진 분의 위상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서원 구성원들의 기득권을 유지 확대하면서 단합까지 이끌어내기 위한 의식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도산서원 향사 분정표
전교당 강당에 붙어 있는 향사분정표를 보며, 나의 15대조인 임연재(臨淵齋) 배삼익(裵三益 ) 선생이 향사를 주관하는 모습이 상상하였다. 임연재 선생은 퇴계의 제자로서 황해도에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죽어가자, 관찰사로 특별히 임명되어 牧民에 힘쓰시다가 1588년 55세를 일기로 순직하신 분이다. 퇴계 선생이 1571년에 돌아가시고 나서, 제자와 유림들은 퇴계 선생을 모시기 위한 서원 건립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1575년에 서원이 건립되면서 사액을 받았다. 임연재 선생은 이때 도산서원의 초대 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월천 조목,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비지 남치리 등 학문과 인품이 뛰어난 많은 제자들이 건재한 가운데, 임연재 선생은 원장에 해당하는 상임에 추대되었다. 나이 43세 때의 일이었다. 초대 원장이 갖는 의미가 어떠한지를 알기 위해 농암 선생의 종손인 이성원 박사가 쓴 ‘천년 선비를 찾아서’에서 인용한다.
‘퇴계 사후 도산 사림과 안동 사림은 경쟁적으로 추모 사업을 벌였다. 그래서 도산 사림은 1574년, 안동사림은 1575년 여강서원을 짓기 시작하여 1576년 같은 날 퇴계의 위패를 봉안했다. 여강 서원 건립은 퇴계학파의 분화를 의미하며 한편으로는 안동 사림의 힘을 상징했다. 그런데 이 서원의 초대 원장이 유일재였다. 안동권의 수많은 쟁쟁한 제자를 넘어서서 지명된 것이었다. 여강서원 초대원장 추대는 안동 사림의 최고 학자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나이 54세 때였다.
임연재 배삼익 선생이 상임을 맡은 것을 기록한 도산서원 전임록
도산서원은 모두가 인정하는 우리나라 최고 권위의 서원이다. 그것은 도산서원의 사당인 상덕사에 퇴계 선생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물을 살펴보니 화려하기 보다는 단정한 느낌을 준다. 조금은 화려한 머리단청이 있었지만 그것은 후대의 채색일 것이기에 따지지 말자. 도산서원 강당인 전교당의 기둥은 사각 기둥이었다. 대부분의 서원들은 물론, 양반가의 사랑채가 거의 모두 원기둥을 쓰고 있는 것과는 구별되는 모습이다. 그리고 정면 4칸인 것도 특이하다. 보통은 정면 5칸을 두고, 우측의 한 칸은 원장의 처소로 사용되고, 좌측의 한 칸은 서원 유사들의 처소로, 중앙 3칸은 강당으로 이용되도록 지어지는 게 일반적이지만, 도산 서원은 총 4칸 중 맨 좌측에 방 1칸만을 두고 있다.
도산서원 전교당의 기둥
도산서원을 답사한 우리 일행은 안동으로 달렸다. 답사 인원이 많아 돈이 조금 남았기에 안동 시내에서 안동의 명물인 찜닭을 먹고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의 중학 동기 여자애가 떠올랐지만, 졸업 후 한 번도 만난 적도 없었고, 음식 맛을 모르기에 가만히 있었다. 이 선생님이 처음 전화한 대감집이 손님이 많아 식사가 불가하다는 말을 듣고 동기에게 전화를 하였다. 잠시 망설이더니, 가능할 것 같다면서 오라고 한다. 한 40분 정도 걸릴 거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20명 분의 식사를 준비해 달라고 하였다. 안동 구시장 찜닭집에 도착하니, 자기 남동생 집으로 안내한다. 누나와 남동생이 지척에서 찜닭집을 같이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안동 찜닭을 안주 삼아 일품소주를 기분좋게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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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성과 수고가 곁들인 훌륭한 답사기를 잘 봤습니다.근데 글 중간에 번남댁 이선생님은 주손인 이동익씨를 지칭하는 것인지 궁금하네요.
예. 남들이 다 보는 블로그에 쓰는 글이라서 실명을 밝히기가 조심스러웠습니다.
자상한 답사기를 잘 읽었습니다.
1988년 55세의 나이로 순직하신--1588년 55세를 일기로//1875년--1575년/오자가 있습니다.
교수님 ! 감사합니다. 쓰고 나서 몇번을 읽었는데도... 이런 실수를... 고쳐 놓겠습니다.
자주 글을 올려 주세요. 배선생님께서 오시니 이원장님의 고군분투가 더욱 빛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