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處, pali. āyatana)에 대해>
불교에서 처(處)는 빠알리어 아나따나(āyatana)를 한역한 말인데,
‘처(處)’란 영역이나 장소라는 의미인데,
구역(舊譯)으로는 ‘들어온다’는 입(入), 입처(入處)로도 번역했다.
그리하여 처(處, ayatana)란 마음(心)과 마음작용(心所)이 일어나고, 생겨나고,
이미 생겨나 있는 마음과 마음작용의 세력을 증장하고
강화시키는 장소 또는 근거, 토대, 역할을 뜻한다.
즉, 심(心)과 심소(心所)의
생장문(生長門-생겨나고 증대하는 문)을 뜻한다.
이것은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라는 육근(六根)과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이라는 육경(六境)을 합친
12처의 각 처(處)가 현재 생겨나 있지 않은 마음과
마음작용을 생겨나게 하고, 이미 생겨나 있는 마음과
마음작용의 세력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만유(萬有)를 근(根)ㆍ경(境)ㆍ식(識) 3종으로 분류한 것 중의
근(根)과 경(境)이 마음(心)과 마음작용(心所)을 일으키는 곳(것)이므로,
6근(根)과 6경(境) 그 둘을 합해 12처, 혹은 12입, 12입처라 한다.
그리하여 초기불교의 법체계 가운데 하나인
12처(十二處)에서의 처(處)와 12연기에 나오는 제5지분인
6입(六入), 이 육입을 6근(六根)을 6처(六處)라고도 하는데,
여기서의 입(入)과 처(處)들이 이러한 뜻을 가진다.
그러므로 처(處)란 대상이 들어오는 기관인 육근(六根)과
그 기관에 들어오는 대상인 육경(六境)을 합한 것이다.
대상을 감각하거나 의식하는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라는
기관을 육근(六根), 육입(六入) 혹은 육처(六處)라고 하는바, 근(根)ㆍ입(入)ㆍ처(處)가
같은 맥락의 말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입(入) 또는 입처(入處)라고 하는데,
이는 ‘들어오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다.
즉, 오온인 색ㆍ수ㆍ상ㆍ행ㆍ식(色受想行識)에서
수(受)ㆍ상(想)ㆍ식(識)이 들어와서 행(行)이 이루어지는 곳이
처(處)이기도 하다.
그래서 장소, 근거, 역할 이외에 입장, 그런 경지, 그런 방식 등의
의미를 가진다.
부처님 말씀은, “일체(一切)란 곧 눈과 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촉감, 의지와 법을 말한다.
만일 이 12처를 떠나 다른 일체란 없다.”고 하셨다.
삼라만상은 12처를 벗어나 있지 않다.
12처 안에 다 들어있다는 말이다.
그럴 때 마음(의식)이나 마음작용(의식작용)은
그 자체 단독으로는 일어나지 않고,
반드시 감관(根)과 대상(境)을 조건으로 삼아 일어난다.
즉, 육근과 육경을 조건으로 일어난다.
따라서 12입(十二入)보다는 1
2처(十二處)라는 용어가 보다 일반적이다.
원래 처(處)는 한자어로서 장소를 뜻하지만,
세우다(立), 토대가 되다, 확립하다의 뜻을 내포하고 있으며,
때로는 원인이 된다는 인(因)의 의미도 있다.
그래서 근과 경이 접촉해 마음이나 마음작용을 일으킨다고 한다.
또한 삼사화합(三事和合)이 이루어지는,
촉(觸-접촉)이 이루어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면 근(根)은 무엇이냐?
그렇게 수ㆍ상ㆍ행ㆍ식이 어울려서 노는 차원에 매몰되지 않은,
원래의 어떤 기능, 어떤 능력이다.
눈이 뭔가를 볼 때, 있는 그대로를 보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어떤 관념에 의해서 본다는 말이다.
우리가 뭔가를 인식할 때 관념의 작용에 의해서, 때 묻은 인식을 한다.
있는 그대로 바로 보지 못한다.
이 게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지나가는 여인을 봤을 때, 그냥 여인이라고 보면 될 텐데,
예쁘다느니, 밉게 생겼다느니,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여인이라느니,
사귀고 싶다느니, 입이 너무 크다느니, 성깔이 좋지 않겠다느니, …
이렇게 보니까 문제가 생긴다는 말이다.
즉, 처(處)란 바로 ‘나름의 인식’을 낳게 하는 문(門)이란 뜻이다.
우리들은 일종의 색안경을 끼고 사물을 보고 있다는 말이다.
그 색안경을 흔히 선입견(先入見) 또는 선입관(先入觀)이라 한다.
억측으로 물들어 오염돼있는
주관(主觀)의 틀에 맞추어 사물을 본다는 말이다.
우리는 ‘누구’를 봤을 때,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인상이 좋다, 인상이 고약하다, 여우같다, 선량해 보인다,
이렇게 분별을 한다.
그런 오염된 주관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즉 때 묻지 않은 것이 곧 근(根)이다.
그래서 바로 보는, 오염되지 않은, 근(根)을 지키는 것이
근 방호(根防護)이고, 그 근 방호를 잘 해서
상(想) 놀음에 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수행이다.
우리 몸에는 안근(眼根), 이근(耳根), 비근(鼻根), 설근(舌根),
신근(身根)이 있다. 여기에 법(法)을 대상으로 삼는
마노(mano-意)가 의근(意根)의 역할을 하므로 육근이 된다.
즉, 의근(意根)은, 기능은 존재하지만
다른 5기관들처럼 직접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기관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의식이 생기므로 일종의 기관으로 간주한다.
오늘날에는 의근을 뇌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에게 있는 감각기관인 육근(6根)을 내입처(內入處)
혹은 내처(內處)라고도 한다. 6근의 근(根)은
기관(器官)이라는 뜻 이외에 기관이 가지고 있는 기능까지 포함한다.
즉, 안근(眼根)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안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보는 눈의 기능까지 포함한다.
한편 6근에 상응하는 바깥 세계의 대상,
즉 형상(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촉감(觸), 법(法)이라는
육경(六境)을 6입처(入處) 혹은 6외입처(外入處)라고도 한다.
이 우주에 있는 존재, 삼라만상의 수는 셀 수 없이 많지만
요약해서 분류하면 주관계와 객관계로 나눌 수 있다.
주관계를 구성 하는 것은 6내입처이고,
객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은 6외입처이다.
그래서 6내입처와 6외입처를 합쳐 12처, 곧 일체(一切)라고 한다.
그러므로 주관과 객관의 모든 현상은 12처에 포섭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일체법의 분류 방식은 일체존재의 주체인 인간의 인식능력을 중심으로
구분해서 체계화한 것이다.
처(處)는 근(根)과 다르다. 처는 마노(mano-意)와 근을 더한 것이다.
따라서 처는 육식과 육근을 합한 것이다. 그래서 12처라 한다.
즉, 처는 새로운 식(마음)을 생겨나게 하는 곳이다.
‘안(眼-눈)과 색(色-대상)을 조건으로 안식(眼識)이 일어난다’라고 할 때,
안(눈)은 처이고 색(대상)도 처이다. 안은 내입처(內入處)이고 색은 외입처(外入處)이다.
즉, 근은 감각기관이고, 처는 ‘근(기관-몸)’과 ‘식(마음)’을 합한 것이다.
그런데 처는 새로운 식(마음)을 생겨나게 하는 것(곳)이라 했으니,
식(識)이 일어나려면 일어날 때 의지하는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바로 그 식이 일어날 때의 토대가 처(處)인 것이다.
안식(眼識)은 눈이라는 감성의 물질을 토대로 하고,
이식(耳識)은 귀를 토대로 하고, 비식(鼻識)은 코를,
설식(舌識)은 혀를, 신식(身識)은 몸이라는 감성의 물질을 토대로 한다.
그리고 의식(意識)은 마노(mano-意)를 토대(근거)로 한다.
마음[識]이 일어난다 함은 감각기관[根]이 감각대상[境]과 접촉하는 것을 말한다.
즉,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라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6근]이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이라는
여섯 가지 감각대상[6경]에 부딪치는 것, 만나는 것, 접촉하는 것[觸]을 말한다.
이와 같이 마음(識)은 토대(根)가 있고,
그에 의지해서 대상(境)이 있어야 일어난다.
그리고 이 마음은 동서남북 천방지축 날뛰고, 대상이 있으면
언제든지 일어난다. 그래서 마음은 실체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감각기관에서 눈은 눈을 토대(의지처)로 한다. 귀는 귀를 토대로 한다.
이렇게 감각기관이 토대(의지처)를 갖는다면
마음 역시 당연히 토대가 있어야 하는데,
바로 심장이 마음(마노, 意)의 토대라는 것이다.
이것을 오늘날 서구에는 심장이 아니라 뇌라고 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에서
의(意, mano)라는 것은 마음이긴 하지만
대상을 접촉한다는 의미에서 ‘감각기관’이라 볼 수 있고,
감각기관이기 때문에 당연히 토대를 가져야 하는데,
심장을 토대로 갖는다고 해서,
초기불교에서는 심장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위와 같은 설명을 다시 정리를 해서 12처(十二處, ayatana)를 검토해보자.
12처란 6개의 감각기관[6根]과 그것에 상응하는 6개의 대상을 합친 것이다.
6근(根)을 6내처(六內處)라고도 하고, 6근에 상응하는 6경(六境)을 6외처(六外處)라고도 한다.
이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존재의 수는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이것을 요약해서 분류하면 주관계(主觀界)와 객관계(客觀界)로
나눌 수 있고, 주관계를 구성하는 요소가 6근[6내처]이고,
또 객관계를 이루고 있는 요소가 6경[6외처]으로서,
이것을 합친 것이 12처이다. 따라서 일체, 곧 삼라만상이 12처에 다 포함된다.
이렇게 12처를 논하는 근본 목적은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진리를 밝히는데 있다.
특히 물질에 대해 잘못 이해해서 물질이 실체라고 생각하거나,
물질 가운데 실체적인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12처를 설한다.
일체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12종의 요소에는 고정 불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 12처의 모든 것들은 무상이고 무아라고 하는 것이다.
※위에서 보듯이 불교에서 ‘처(處)’는 한 글자이지만 다양하게 사용된다.
기본적으로 쓰이는 것은 12처(處)이다.
이때의 처는 위에서 쉽게 설명하느라 ‘장소’라 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장소가 아니다.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마음의
인식기관이 모양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을 마주하는 찰나 -
접촉하는 순간을 처(處)라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눈으로 어떤 형색을 보더라도 그 형색에 끌려 다니지 않고,
귀로 어떤 소리를 듣더라고 그 소리의 노예가 되지 않고, …
마음이 과거의 일을 기억할 때 현재로 끌어오는 일을 멈추고,
미래의 불안을 떠올릴 때 현재로 당겨오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눈으로 무엇을 보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듣고, …
마음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기억하든, 괴롭고 힘들고
두려운 환경에 처하더라도 중심을 잘 잡고,
각각의 경계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마치 <금강경>에서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 했듯이
번뇌에 휘둘려 헤매지 말라고 가르치기 위해 처(處)란 말을 쓰게 된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