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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책망한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심한 공포와 두려움, 무서움에 떨게 되는 경우가 분명 있습니다. 전쟁의 위협이나 지진과 같은 자연 재해, 또는 각종 사고와 사건들로부터 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혼자 밤길을 걸으면서 한 번쯤 두려움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그때 누굴 만나면 제일 두렵습니까? 머리 긴 여자? 아무리 간이 크고 간이 부은 사람이라도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움을 많이 느끼는지 말 속에도 다 나타납니다. 옆에 앉은 사람이 무서울 때 뭐라고 합니까. "무서워유". 남자들은 여자가 얼마나 무서운지 "무서운걸"이라 하고 여자들은 남자들이 무서워서 "무섭군", 북한 사람들은 여름에 홍수 나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비 올 때마다 이렇게 말을 한답니다. "동무도 무섭지비" 김영삼 대통령이 살았을 때 자주 쓰는 말이 "궁민이 무섭데이"라고 했답니다. 누가 뭐래도 가장 무서운 게 전쟁입니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면 "아이고, 무서워"라고 합니다. 옆에 사람에게 내가 무섭냐고 물어볼 때는 "무섭나"라고 하면 됩니다.
미국에 경제 공황이 왔을 때 당시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미국 국민 여러분, 우리가 이 시점에서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다면 두려워한다는 사실 그 자체 하나뿐입니다." 오직 한 가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고 했습니다. 그는 경제위기나 정치위기보다도 두려움이란 심리적 상태를 경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먼저 두려워하게 되면 총명이 흐려져서 그릇된 판단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가다가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우리가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풍랑을 만나지 않는다고 가르치신 적은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니 풍랑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어도 풍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건너가자고 해서 출발해도 풍랑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요16:33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느라” 즉 나를 믿으니 이제 너희에게 환란이 결코 없을 것이라고 하지 않고 환란을 당하더라도 이길 수 있으니 담대하라고 하셨습니다. 고난이 있어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이길 힘을 주겠다는 것이 주님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1:2) 여기서도 예수님을 믿으니 이제 어떤 시험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날 수 있다, 그러니 시험을 대비하고 만약 만나면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찬송가에도 '예수가 함께 계시니 시험이 오나 겁 없네'입니다. '시험이 오나 겁 없네'이지 '시험이 전혀 없네'가 아닙니다. 또 다른 찬송에서는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만약 불시험을 당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벧전4:12) 평범한 시험이 아니라 불같은 시험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불같은 시험을 만나게 되더라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므로 이길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란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19)고 했습니다. 성령에 매여 올라가니까 어떤 환란도 없고 시온의 대로가 열리고 만사형통할 것이라는 고백이 아니라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나는 모른다. 오히려 결박과 환란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예고한다. 그렇다 해도 나는 올라가겠다.’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환란이나 핍박이 나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확신한 것이 무엇입니까? 환란과 핍박도 없다는 확신이 아니라 어떤 환란과 핍박도 하나님의 사랑과 나의 믿음을 끊을 수 없다는 확신입니다. 할렐루야!
본문에 나타난 갈릴리 호수의 풍랑은 23절을 보시면 광풍, 거대한 풍랑입니다. 갈릴리는 호수입니다. 그런데도 주변이 백두산보다 높은 헐몬산이 있고 게다가 수면이 바다보다 120미터나 낮은 곳입니다. 이런 지형이다 보니 자주 광풍이 부는지 갈릴리의 ‘갈’이 ‘풍랑’이란 뜻입니다. 이날도 배를 뒤집을 수 있는 풍랑! 내 삶을 송두리째 위협할 수 있는 풍랑, 현재만 아니라 미래도, 목숨도 위태롭게 하는 풍랑, 나만 아니라 내 자녀들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 풍랑, 이 거센 풍랑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경에 크게 세 종류의 풍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만난 풍랑은 불순종으로 인해 만난 풍랑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도록 회개하게 하는 풍랑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는 길에 만난 풍랑(유라굴라)은 상황을 역전시키는 풍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과 함께 가다가, 예수님이 가자고 해서 순종했는데도 만난 풍랑입니다. 이 풍랑은 믿음을 자라도록 연단시키고 단련시키는 풍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혹 풍랑을 만났을 때 그 풍랑이 왜 일어났는지를 먼저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부분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배를 안정시키려고 애써다가 급기야 배에 물이 들어와서 침몰될 지경이 되니까 이제 주님을 깨웁니다.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 안 돌아보시나이까!' 처음에는 예수님이 주무시는데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심조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도무지 안 되니까 다급하게 깨운 것입니다. 그때 주님이 일어나셔서 명령합니다. 24절 중반에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고 기록합니다.
바다에 이는 광풍을 예수님이 꾸짖으셨다, 바람을 꾸짖으셨다고 합니다. 이 '꾸짖다'는 단어는 예수님이 악령들을, 귀신들을 꾸짖을 때 사용되는 특별한 표현입니다. 그것이 바람과 파도를 '꾸짖다'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러자, 파도와 바람이 잠잠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바다를 꾸짖고 파도를 잠잠케 하신 일이 두 번 있었습니다. 첫 번째 사건은 제자들과 배를 타고 함께 가다가 그랬지만 두 번째 사건은 제자들이 따로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났을 때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셔서 바다와 풍랑을 잠잠케 하신 사건입니다(마14:22~).
오늘 이 광경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저분이 누구신가? 바람과 파도도 잠잠케 하시는 저분은 누구일까? 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한 것입니다. 두 번째 사건에서는 결론을 이렇게 내립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이제 제자들은 깨달았습니다. 처음에는 놀라고 두려워서 저분이 누구신가, 라고 했지만 두 번째 사건을 보고는 저분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말씀으로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저분은 곧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구나! 이들은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곧 하나님이심을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곧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입니다(요1:14). 예수님을 독생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요1:18). 그분은 곧 창조자이십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했습니다(골1:16). 창조자일 뿐만 아니라 그는 만물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주관자요, 심판자이십니다. 풍랑을 잠잠하게 하고 평안을 줄 수 있는 분, 풍랑 속에서도 나를 구원할 수가 있는 분, 예수님은 우리 주시오,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제자들처럼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아무 소용없게 되었다고 무서워서 낙심하는 것은 믿음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제자들에게 믿음 없다고 한 것은 더 다른 문제도 있습니다. 22절에 보면 주님이 먼저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처음에 하신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계획 속에 배가 움직인 것이고 현재 주님의 계획 속에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순간도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건너가자고 하지 않았느냐? 내가 시작한 일이 아니냐? 그런데 중간에 풍랑 만났다고 그렇게 놀라고 죽게 되었다고, 내 약속을 잊어버리느냐? 너희 믿음이 도대체 어디 있는 거냐?' 라고 하신 것입니다. 믿음은 주님의 약속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가는 것이 믿음인데 조금 가다가 힘들다고, 어렵다고, 풍랑 만났다고 무섭다고 낙심하고 못 가겠다고 하니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는 거냐? 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처럼 우리도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1:6)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사야 66:9에서도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아이를 갖도록 하였은즉 해산하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마지막으로 오늘 제자들을 보면 처음에는 광풍으로 인하여 두려워했지만 이후에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두려워하며 놀랍게 여겼다고 기록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만 사람들은 대부분 반대로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도리어 두려워하고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풍랑 이는 환경을 보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파도를 보고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시편91장 5절처럼 "밤의 두려움과 낮에 흐르는 화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이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시46:1에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요일4:18에서는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두려워하는 것은 불신앙일 뿐입니다. 두려움의 정도가 곧 불신앙의 정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근신하는 마음입니다(딤후1:7).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약속을 믿으면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실로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10:28에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무서워하라는 말이 아니라 도리어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 설 때 그분이 두렵지 않도록 잘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을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두려워 숨은 아담처럼 되지 말고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우리 또한 죄를 두려워하고 죄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 앞에서 피할 길을 얻지 못하고 심판받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를 범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죄를 심판하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죄를 돌이키고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나의 풍랑을 잠잠케 하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심을 믿고 의지하여 어떤 폭풍도 이기시길 바랍니다. 환경을 보고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라 환경을 다스리는 주님을 두려워하여 죄를 버리고 주님을 사랑하므로 주 앞에 설 때를 준비하는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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