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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이 높던 날
서 정 인
ㅡ달이 차면 영향력이 커져서 바다의 마음은 그리로 쏠린다. 바다의 중심이 그리로 쏠리면 육지의 마음은 바다로 쏠려서 그 빈 곳을 메운다. 그리하여 육지에는 광기가 가득 차게 된다.
그날은 화요일이었다. 현수는 송도 해변을 걷고 있었다. 바다에는 수평선이 없었다. 거대한 파도들이 깊은 물이랑을 뒤로 끌면서 말 위에 높이 앉듯 흉흉하게 솟구치고 있었다. 하얀 포말들이 말갈기처럼 그 위에서 부서졌다. 바다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방파제를 넘어다보면서 사납게 출렁거렸다. 바람이 세찼다. 하늘은 낮고 무거웠다. 하늘과 바다의 심한 요철과의 사이에는 농축된 대기가 가득 차 있었다. 공기는 투명체가 아니었다. 탁한 그 젖빛 공기를 뚫고 용솟음친 물결은 문득 정지하여 정상을 이루면서 적을 찾다가 밑이 무너지는 바람에 못다 한 미련을 가슴속에 간직한 채 내부로부터 봉괴되어 소리를 내면서 허물어졌다. 두 개가 서로 만나면 소낙비 같은 물방울을 하얗게 내뿜으며 맞붙어 싸웠다. 그러다가 잦아지면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방파제를˙ 보면 그들은 치열하였다. 움직이지 않는 양회 벽은 생리부터가 그들과는 상극이었다. 하나가 후려치면 다음 것이 뒤따라 후려쳤다. 때로는 미처 앞엣것이 스러지기도 전에 뒤엣것이 그 위로 덮쳐 내리쳤다. 인내심 많고 말없는 검붉은 방파제를 따라 길게 파도는 백열전을 그치지 않았다. 미쳐 날뛰는 파도는 구칠 줄 몰랐다. 노한 용왕은 송두리째 꿈틀거리고 있었다. 수심이 얕아짐에 따라 물결도 얕아졌다. 파도가 백사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 놀라운 힘을 잃은 다음이었다. 그것은 다만 커다란 혓바닥을 내밀어 모래 위를 핥았다. 사람들의 발자국은 지워지고 모래는 다시금 태고의 모래밭으로 되돌아갔다. 더렵혀지지 않은 물기 스민 모래 위에 새로운 그러나 곧 다시 지워질 발자국을 남기면서 현수는 걸었다. 그는 석호의 집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적어도 명자와 헤어질 때의 마음은 그러했었다. 그리고 그가 걷고 있는 방향으로 쭉 가면 석호의 집이――석호의 숙소가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들를 마음은 거의 없어져 버렸다. 그는 사실 석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찾아갈 딴 친구가 없어서 이리로 향한 것은 아니었다. 석호에게는 무엇인가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다. 그것은 그의 강한 성격 탓이었을까? 그랬을는지도 몰랐다. 남의 생각보다는 자기의 생각을 믿고 남의 의견을 좇아서 성공하는 것보다는 자기의 의견대로 하다가 실패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완강한성격――바보 같은 생리가 그에게는 있었다. 그에게 후회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의 후회는 현수의 것과는 성질이 달랐다. 그의 후회는 그의 다음 행동에 조금도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실패에는 항상 훌륭한 변명이 준비되어 있었다. 변명이 훌륭하다 함은 그 변명의 딴사람에 대한 설득력이 그만이라는 이야기다. 그는 실패하고 후회한다. 그러나 그 실패는 누가 그 일을 했어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실패가 된다. 따라서 그의 후회는 인간의 생래의 불완전성에 대한 것이지 자기 자신의 결함에 대한 것은 아니다. 같은 일을 같은 조건 아래에서 두번 다시 할 수 없다는 인간의 조건이 석호의 변명을 사실로 만들어 버린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석호의 의견대로 하다가 실패했을 경우 그 결과가 당연한 것으로 느껴질 뿐만 아니라 그 과정도 과히 서운하거나 불쾌하지 않다는 점이다. 반대로 현수의 의
견대로 했다가 일이 글렀을 경우 거기에는 성공할 수도 있었던 확률이 얼마든지 나타나게 마련이며, 만일 성공했다면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되어 버린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현수는 또한 석호를 싫어했는지도 몰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현수에게는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 할지라도, 설사 그것이 치명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석호 앞에 내어놓으면 시시한 일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석호의 이야기면, 가령 그것이 통술집 ‘삼학정’ 주인 아주머니의 손가락 끝에 칠한 손틉화장의 빛깔에 관한 것이라 할지라도 더없이 중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현수에 게까지도.
그는 외투 깃을 곧추세웠다. 세찬 바람이 목덜미에 차가웠다. 몇 시쯤 되었을까……. 그는 반사적으로 왼손을 호주머니에서 뽑았다. 그러나 팔목을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그의 시계는 남포동 입구에 있었다. 그는 바람에 날려 흩어진 그의 머리카락을 한 번 쓰다듬고는 빼낸 손을 다시 호주머니 깊숙이 쑤셔박아 버렸다. 송도 끝 혈청소로 가는 오르막 언덕길이 저편에서 바다를 따라 뿌옇게 도사리곤 있었다. 가난한 주택들의 번식이 시작된 곳에서부터 길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 경계선 어름에 자그마하나 아담한 일본식 집이 주위의 집들로부터 격리되어 독립 가옥으로 서 있었고 거기에 석호의 숙소가 있었다. 집들은 그 언저리에서부터 시작되어 산허리를 덮고 모래밭께에까지 잠식하고 있었다. 백사장 끝에는 검은 바위들이 있었다. 물결이 거기에 하얗게 부서지며 비말을 날리는 것을 멀리서도 볼 수 있었다. 현수는 턱을 가슴에 묻고 어깨를 웅크렸다. 바위 있는 데서 오른편으로 접어들면 길이 있을 것이고 길은 답답한 집들 사이를 뚫고 왼편으로 굽어 돌 것이다. 인가가 끝날 무렵이면 길은 꽤 높아 있을 것이고 석호네 집에 들어서면 출렁이는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이다. 석호는 어두운 방구석에서 중고품 휴대용 축음기 위에 김근자를 걸어 놓고 무릎장단을 치고 있다가, 입술을 한쪽에서부터 부수면서 반겨 줄 것이다. 그러면 현수는 그의 아가씨에 관해서 얘기를 시작할 것이고 석호는 조용히 들어 줄 것이다. 그러나 화제는 어느 틈에 바뀌어서 석호의 ‘메두사’가 맹렬히 비난받고 있게 될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메두사’가 얼마나 타기할 만한 동물인가에 대해서 그들은 합의를 본 다음 옷자락을 털면서 일어설 것이다. 그들이 어디로 갈 것인가는 빤하지 않는가. 밤 열시가 되어 그들이 취해서 헤어질 때에는 현수는 ‘메두사’에 대한 저주와 공포를 선명히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남포동 골목을 빠져나와 광복동 가로등 밑을 혼자서 터벅터벅 걷고 있을 것이다, 그의 아가씨에 대한 상념을 되살리면서…….
그 무렵 현수는 ‘공작’ 다방의 한 아가씨에게 정신을 잃고 있었다. 그가 제대한 후, 휴양 삼아 부산에 온 것은 한 달 전이었다. 심심하면 그는 그가 묵고 있는 그의 형네 집에서 멀지 않은 한 다방엘 찾아갔다. 두 번짼가 세 번째 들렀을 때, 그는 명자를 발견하였다. 드골! 그는 속으로 소리쳤다. 얼마나 멋있는 코냐……. 양미간에서부터 부풀기 시작한 코는 길게 코끝까지 쪽 곧았고 끝은 끝대로 곱게 둥글게 맺어져 있었다. 드골을 생각한 것은 코가 인상적이기 때문이었지 결코 너무 컸기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작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얼굴의 손잡이가 될 만큼 크지도 않았다.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비너스의 코였다. 그로부터 매일 그의 보습은 ‘공작’에 나타났다. 코 아가씨는 친절하고 상냥하였다. 항상 하얗게 웃으면서 찻잔을 살포시 내려놓았다.
“이름을 좀 알 수 없을까요?”
“왜요, 이름은?”
코 아가씨는 생글거리며 대담하게 현수를 쳐다보았다.
“내 이름은 현순데요, 내 건 내 건데 남이 많이 사용하지요. 이름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어머.”
“좀 알으켜 줄 수 없어요?”
“밝은 아들.”
코 아가씨는 말하고 나서 손가락 끝으로 코를 가리며 웃었다.
“오호! 밝은 딸이 아니구. 그럼, 광…… 명자 양인가요?”
명자는 대답 대신 머리를 까딱해 보였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너무 많이 사용하지 마세요, 닳아지지 않는다고 해서.”
“아니죠.” 현수는 웃음을 갚으면서 말했다. “세상에는 쓸수록 좋아지는 게 있어요. 이름도 그 중의 하나죠.”
“어머, 못 하는 말씀이 없으셔.”
명자는 얼굴을 붉히며, 그러나 미소를 잃지 않고, 달아나 버렸다. 그날부터 현수는 사실상 밤에 잠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수는 백사장을 빠져나갔다. 모래밭에는 인적이 끊어졌다. 파도막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잊어야지……. 잊을 것은 잊어버려야지……. 그는 그가 걸어온 물가를 한번 돌아다보고 길로 접어들었다. 그가 명자를 만나면 만날수록 명자의 얼굴은 희미해졌다. 얼굴의 육곽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황홀한 신비 속에 파묻혀 갔다. 상냥한 웃음,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웃는 눈부신 웃음이 그 얼굴 전체를 덮어 버렸다. 심지어는 그 코까지도……. 사실 그는 명자를 똑바로 쳐다볼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그녀와 결혼하겠다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저 지나는 길에 장난삼아 스쳐보겠다거나 하는 구체적인 결심이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좋았다. 괜히 두 다리를 꼬고 병신 같은 몸짓을 해야 시원할 만큼 때로는 안절부절못하기도 눴다. 이러한 그의 형편을 석호에게 이야기하였다. 다방 아가씨라는 것은 살짝 빼버리고. 석호의 대답은 간단하였다.
“자식, 어린애같이. 하여튼 좋아. 그럼 말야, 우선 같이 차를 마셔라. 될 수 있는 대로 으슥한 다방이 좋다. 그리고는 같이 점심을 먹어. 저녁두 좋구. 물론 중국집으로 가야지. 그 다음에 영화나 하나 보면 된다. 그럼 다 되는 거야, 이 녀석아.”
“간단하군.”
“물론 차를 안 마시겠다구 하면 할 수 없지. 저녁은 더욱 안 먹으려 할 테니까. 그렇다면 까짓거 내버려. 여자는 많다.”
“여자는 많아두…….”
“여자는 많아두 어떻단 말야? 임마 열병이야, 열병. 유행성감기가 지난 다음에 아스피린이나 코테인이 거들떠나 보여지던? 여자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단 말야, 지내고 보면. 그런데 도대체 누구야? 어떤 여자야?”
“많은 여자들 중의 하나지. 지금 가볼까?:’
“지금? 좋다.”
그들은 송도를 빠져나와 버스를 탔다. 사람들은 구석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허공들을 응시하였다. 날씨 탓이었을까. 창 밖으로는 잎 잃은 나뭇가지들이 먼 바다를 배경으로 앙상하게 얽히면서 뻗쳐 있었다. 버스는 포장된 내리막길을 기분 좋게 달렸다.
“나두 연애나 했으면 좋겠다.” 창 밖을 통해서 멀리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현수에게 석호가 말했다. “아줌마는 정말 참을 수 없단 말야.”
“또 그 얘기야?”
“또 그 얘기가 아냐. 나올 때 못 봤니, 방문을 쾅하고 닫던 거 말야. 내가 자기더러 뭘 달랬냔 말야. 밥을 달랬어? 옷을 달랬어? 왜 날 못 봐서 야단야? 정 분해서 못 살갔단 말야. 내 벌어서 내 먹는데. 지금은 그남둥 뭇 하지만.”
“방을 옮겨 버리면 될 거 아냐?”
“옮길 줄 몰라서 안 옮기나? 그나마 두 달 후면 방세도 다 된단 말야.”
현수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건 현수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석호는 남자다운 사내였다. 열 달 사글세로 얻은 셋방이 두 달 후면 기한이 차게 되고 석호에게는 달리 돈 생길 데가 없었다. 생기더라도 우선 먹고 살기에 바빴다. 그러나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였다. 그것은 두 달 후의 일이었으니까. 석호가 참을 수 없어하는 것은 주인 아주머니의 태도였다. ‘메두사’는 석호를 노골적으로 미워하였다. 석호가 축음기를 틀어 놓고 있을 때였다. 조용히 김근자의 갈색 목소리를 감상하고 있는데 갑자기 안방에서 전축이 음량껏 터져 나왔다. 석호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분노가 치밀었다. 그의 두 눈은 증오로 타올랐다. 그는 사운드 박스를 집어치우고 판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안방 방문을 향해서 축음기판을 내팽개칠 작정이었다. 그때 문득 전축이 소리를 죽였다. 주위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석호는 던지려던 자세 그대로 멈칫했다. 안방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침묵이 흘렀다. 석호는 호흡을 몰아쉬며 기다렸다. 안방은 끝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석호는 물결이 스러지듯 힘없이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는 문을 닫았다. 그의 눈에서는 여전히 분노와 증오가 타오르고 있었다.
아줌마는 얼굴이 추한 여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쁜 편이었다. 현수의 눈에도 그렇게 비쳤다. 그는 석후의 마담에 대한 증오심을 얼른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한마디 했다.
“증오와 사랑은 같은 거다. 다만 나타나는 방향이 반대일 뿐이지.”
이 말에 석호는 발끈했다. 그는 주먹을 쥐고 현수에게 달려들었다. 현수는 피하지 않았다. 피하면 주먹이 날아올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현수가 웃으면서 꿈쩍하지 않고 앉아 있자 석호의 주먹은 풀리면서 현수의 어깨를 붙잡았다.
“가자, 가서 대포나 하자.” 현수를 잡아 일으기면서 그가 말했다. “우라질 년 같으니.” 그는 술잔올 앞에 놓고 계속했다. “억울해서 나 같은 놈 세상 살겠네 어데. 자기 시동생이 민망해할 지경이란 말야. 하루는 다방으로 조용히 불러냈지. 할 말이 있다구서 말야. 그리군 따졌어요. 왜 나를 못 봐서 야단이시우? 도대체 뭐가 잘못돼서 그러시우? 내가 당신 욕을 하고 다닙디까? 영업을 방해합디까? 왜 그러시우? 말을 해요. 왜 사람을 못 찹아먹어 야단이시우? 조상 때려잡은 원수도 아닐 텐데.”
“그랬더니 뭐래?”
“그랬더니 날 빤히 쳐다보면서 한다는 소리가 그저 싫다는 거야. 보기만 해도 밥맛이 떨어진다나? 이런 우라질 년 같으니. 그래 왜 싫은가고 대들었지. 나와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길래 싫고 좋고가 있는 가고 말야. 내가 담배를 외상으로 피우든, 술을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시든, 오입을 하든, 무슨 상관이 있는가고 말야. 심지어는 내가 이발을 자주 하지 않는 것까지 말썽이야, 그년은. 사사건건 시비란 말야 나하군. 한번은 양복을 새로 지어 입었더니 돈이 아깝다나? 빤히 쳐다보고 있는 낯바닥에 주먹을 한 대 안겨 놓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지.”
그럴싸해서 그런지 그 뒤로 아줌마를 몇 번 관찰했을 때 현수는 그 얼굴에서 어떤 노기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보자 거기에는 분명히 노기가 서려 있었다. 푸른빛이 도는 듯하여 살벌한 기분마저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더구나 마담이 머리를 감고 나서 말리는 것을 한번 본 후, 마담을 ‘메두사’라고 불렀다. 석호는 딱 알맞는 별명이라고 손뼉을 쳤다.
“만일 하나님이 나에게 한 사람만 죽여도 좋다고 허락한다면, 갈데 있나, 그년, 그 손톱에 빨간 칠을 한 ―그…… 뭐? 메둣싸?”
버스가 종점에서 멎었다. 그들은 내려서 시청 쪽으로 걸었다. 비릿한 바닷바람이 코로 스며들었다. 더러운 거리 위에는 진창 물이 녹아흘렀다. 많은 사람들이 그 위로 발자국을 남기면서 바쁘게 오고 갔다.
“우리 이따 ‘삼학’에 들를까?”
현수가 불쑥 말했다.
“‘삼학’? 좋다.” 석호는 즉시 응낙했다. “그러나 그전에 이쯤 올라 있어야 돼.” 그는 손으로 이마께를 어름해 보이며 덧붙였다.
“맹숭맹숭한 정신으론 못 들어간단 말씀인가?” 현수가 악의 없는 조롱조로 웃어 보이며 말했다.
“못 들어간다는 말씀이 아니구 안 들어간다는 말씀이지. 취한 김에 들어가서 그놈의 집구석 확 때려부숴 버린단 말씀야.”
“술잔이 날아갈는지, 의자가 날아갈는지, 두고 봐야겠구나.”
현수가 석호를 데리고 ‘공작’에 들어섰을 때, 오전이라서 그런지 다방은 한가하였다. 현수의 시선은 재빨리 명자를 찾아냈다. 명자는 계산대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현수의 출현을 알아보고 웃고 있었다. 역시 하얀 털실옷에 통 넓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이 근처야?” 석호가 의자에 앉으면서 말했다.
“기다려, 잠자코.” 현수도 따라 앉았다. 명자가 와서 주문을 받아갔다.
“이쁜데, 고 기집애.” 석호가 코끝으르 명자의 뒤통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현수는 눈가에 엷은 미소를 띠고 말없이 석호를 바라보았다. 저 녀석에게서 그 이상의 칭찬을 기대할 누야 없지. 현수는 만족스러웠다. 메두사가 어떻단 말인가. ‘삼학정’이 어떻단 말인가. 아니 이 세상이 어떻단 말인가. 그대 위해 바칠 세상 없어도, 세상 위해 그대…….
“뭘 그렇게 멍하게 생각하구 있어? 바보같이. 담배나 태지 않구.”
석호가 담배 한 개비를 현수에게 던졌다. 현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석호는 현수의 마음 간 곳을 짐작할 수 있다는 듯이 빙그레 웃었다. 내버려. 까짓 거 내버려. 세상 위해 그대……. 내버려……. 내버려……. 현수는 답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명자가 차를 날라 왔다. 현수는 안면 근육에 엷은 긴장을 느꼈다. 명자의 얼굴은 찻잔을 똑바로 향해 있었다. 그러나 그 눈동자는 현수를 의식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앞으로 약간 몸을 굽히고 차를 따르는 그 옆얼굴에서 현수는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물에 젖은 듯 유난히도 영롱해 보였다. 명자는 입을 벌려서 웃음을 숨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 언저리는 주인의 내심을 감추지 못했다. 현수는 명자를 처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사실 그는 명자를 그렇게 자세히 제정신을 가지고 바라본 적이 없었다. ‘공작’에 들어서면 언제나 그는 긴장과 홍분을 느꼈고 문제의 인물이 접근해 올 때면 그는 전신이 굳어져 오는 것을, 그리고 가슴의 동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석호의 ‘다만 거기 있음’은 참으로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명자로부터 발산되는 수많은 입자들을 감당하기에는 이미 너무 무력해져 버린 현수의 세계가 석호의 파동권내에 있음을 기화로 약간의 평정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는 명자의 옆얼굴을 똑바로 관찰하였다. 그리고 탄복했다. 아ㅡ. 그때였다. 명자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가셨다. 그녀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져 갔다. 현수에게는 심장의 고동이 멈춘 듯한 한순간이 지나갔다. 그의 눈은 점점 크게 떠졌다. 손이……, 한 손이 명자의 엉덩이를, 통 넓은 검정 치마 밖으로 부푼 둥근 윤곽을 쓰다듬고 있었다. 현수는 눈을 감아 버렸다. 안 보았어. 난 안 보았어.
명자는 끝까지 차분히 차를 따랐다. 그리고 조용히 사라졌다. 마치 아무것도 중요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또는 중요한 일이 일어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명자가 그렇게 사라져 가자 연수의 닫힌 눈앞에는 차차 현실들이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새카만 어둠 속올 어지럽게 떠돌던 노란 환들이 정돈되면서 현수를 다시 사실 속으로 끌고 나왔다. 우선 그가 기대고 있는 의자등이 푹신하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리고 그때 마침, 마치 그때를 위해서 십 년 전부터 준비되기라도 했던 것처럼, 영창의 애절한 가락이 들려 왔다. 별이 어떻다든가 하는 그……. 석호가 뭐라고 중얼거렸다. 현수는 그 말을 한손으로 받아서 살펴본 다음 살며시 탁자 밑으로 내버렸다. 어디로? 자식, 병신 같흔 자식 같으니……. 치한. 하필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바보같이. 음악감상하니?”
“……”
“일루 오기루 했니?”
“……”
“여기서 만나기루 했어?”
“그래.”
“몇 시에?”
“지났다. 조금 늦었어.”
“병신. 몇 신데, 약속이? 뭐 그래, 기다리지도 않고. 집으로 가보자.”
“닥쳐, 이 자식아.”
“뿔났구나, 너? 하하하, 괜히 애매한 사람에게 화풀이하지 마. 내 탓에 일이 글른 것은 아닐 텐데, 설마. 하하하.”
“닥치란 말야 이 자식아.”
현수는 의자에서 발딱 일어섰다.
“어? 너 이상하다. 너 정말 먹을 걸 못 먹었구나. 못 먹을 걸 먹었던지.”
석호는 빙글빙글 웃었다. 현수는 잠시 그를 노려보다가 계산대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가 셈올 하는 동안 명자는 계산대 한쪽 끝에 새침히 기대서서 외면을 하고 있었다. 명자가 웃지 않는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현수는 종말――결별을 느꼈다. 전축은 영창을 마치고 시끄러운 유행가를 떠들고 있었다.
“가자.”
현수가 앞장서서 다방을 나왔다.
“고 기집애 엉덩짝 팽팽도 하더라, 제길.”
석호가 뒤따라나오며 중얼거렸다. 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그들은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석호의 말대로 눈에까지 술이 젖어 오르도록 그들은 잔을 기울였다. 그러나 삼학정에 의자가 나는 소동은 벌어지지 않았다.
현수는 남포동 골목을 걷고 있었다. 제대를 축하한다면서 그의 형이 맞추어 준 새 양복에 어울릴 만한 넥타이를 찾고 있었다. 몇 군데 양품점엘 들러 보았으나 마음에 맞는 것이 없었다. 까만 바탕에 빨간 무늬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이거 어떻십니꺼? 기누라서예 오래 매실 껍니더. 값이 좀 비싸서 흠이지만예, 젤 낫십니더.”
“물론 바다 건너서겠지요?”
“안 그런 거 어딨십니꺼? 이거 한번 매보이소. 어울릴 낍니더. 요새 이거 많이 맵니더.”
“기지요, 색깔요?”
“색깔도 안 좋십니꺼? 젊은 분들 회색 많이 맵니더.”
그래요? 환갑 때나 와서 하나 갈아 드리죠. 그는 양품점을 빠져나와 골목을 어슬렁어슬렁 걸어 올라갔다. 길은 좁았고 사람은 많았다. 다방과 술집과 축음기판상과……. 음악은 그치지 않았다. 이어지고 중복되고 반복되면서 이집에서 저집으로 계속되었다. 넥타이 노점 이 눈에 띄었다. 현수는 행여나 하고 걸음을 멈췄다. 넥타이와 넥타이 사이가 갈라지면서 얼굴이 하나 나타났다.
“현수!”
현수는 놀라 그 얼굴을 쳐다보았다. 석호였다.
“야! 너, 너두 제대했구나.”
“넌두 제대했네? 난 휴가 나온 줄 알았다. 야, 참 오래간만이구나, 몇 년 만이디 이거?” 석호는 그의 상품을 주섬주섬 꾸리기 시작했다.
“너 벌써 치우면 어떡허니?”
“아냐, 시마이하려던 탐이었디.”
“고향 말투가 많이 살아났구나.”
“동업자들이 동향인이라서, 하하하. 넌 언제 옷 벗었네야.”
“지난 팔월달야. 넌 언제 했었어? 난, 넌 제대 안 할 줄 알았는데?”
“일 년 남아 됐디. 하구파서 했갔네야, 벗기니끼 벗었디.”
잠시 후 그들은 대폿집에서 마주 앉아 있었다. 현수는 석호가 나이보다 성숙해 보인다고 생각하였다.
“영업은 잘 되니?”
“처음엔 재미 좀 봤디. 요즘엔 시들해졌다. 집어칠까 생각코 있디. 사일구 때 넌 어딨었니?”
“서울에 있었다. 휴가중이었지. 거짓말 같았어. 도무지 믿어지질 않았으니까. 그럴 리가 있나 했지, 눈으로 보면서두 말야. 감격했어, 그땐 정말.”
“이 녀석아, 너만 감격했니, 난두 감격했다. 울었단 말야. 넥다이 장사 못 해먹게 될 줄 알았더라면 더 크게 울었을 덴데 말야, 하하하.”
제대를 하자 석호는 부산으로 왔다. 그가 기지창에서 근무할 때 거래가 있었던 상인들에게 기대를 걸고서였다. 거리는 추워지고 있었다. 그가 찾아간 사람들은 대개 비슷한 말을 했다. 돈이 돌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모나자이트 공장도 쉬고 있었고 나일론 공장도 쉬고 있었다. 양초 공장도, 비닐 지갑 공장도, 유지 콩장도, 잉크 지우개 공장도, 다들 쉬고 있었다. 적어도 쉬고 있었다고들 말했다. 활발한 것은 해상 무역뿐이었다, 주로 어두운. 거리는 침울한 겨울철로 접어들고 있었다. 거리에서 한 발자국 안에 있는 인간의 건물들은 석호를 들어오는 것으로부터 막았다. 그들은 석호의 참여를 쉽게 허락하려 하지 않았다. 겨울은 닫힌 계절이었다. 석호는 취직을 포기하였다. 동향인들의 권고를 따라 그는 국제시장의 한 점포에서 묵으며 일올 거들었다. 날씨가 풀렸다. 그의 형편도 차차 풀려 갔다. 남포동 골목에 독립 점포를 차렸다. 비록 넥타이 노점이었으나 수입은 좋았다. 그 무렵이었다. 그가 그 근처 그의 동업자들과 함께 밤 열시경이면 점포를 거두고 매일 찾아가는 통술집 삼학정에서 그 아줌마를 처음 본 것은.
삼학정은 그들 사이에서 돼지갈비집으로 통했다. 질기지 않고 양념이 알맞고 또 잘 구워 주는 것이 그 집 돼지갈비의 특색이었다. 구워주는 자리에서 갈비를 뜯으며 불타는 술들을 한잔씩 비우면 하루의 일과가 끝났다. 그들도 삼학정에 대해서 특색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같은 시간에 매일 같은 얼굴들이 나타나서 같은 안주에 같은 양의 술을 없애 주는 단골이었다. 어느 날 밤 그들이 거기에 들어섰을 때, 계산대에 차가운 미소를 가진 낯 모를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 여인의 쌀쌀한 태도를 불평했다.
“인사도 안 하누만.”
“영업 안 할 생각인가?”
“이빨이 아픈 게디.”
“아줌마는 어디 간?” 우선 술부터 내온 작부에게 한 사람이 물었다.
“갈렸어요.” 힐끗 계산대 쪽을 눈짓하며 여자가 대답했다. 그 젊은 여인은 그 집의 새로운 아줌마였다.
아줌마를 들어서면서 처음 본 순간, 석호는 멈칫했다. 무엇인가 가슴에 와서 부딪히는 것이 있었다. 물론 그와 아줌마가 만난 것은 이 세상에 도착한 이래 처음이었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은 그냥 그대로의 태양 광선에 문득 놀라워지듯 가슴이 섬뜩해지며 맹렬한 반감이 환기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아줌마는 화를 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들은 조용히 그들의 술잔을 기울였다. 누구도 더 이상 그녀를 말하지 않았다. 석호는 그러나 등뒤로 그녀의 존재를 잊어버릴 수 없었다.
“그 뒤로도 우린 쭉 그 집엘 다녔다. 아줌마는 곧 우리를 알아보게 되었다. 고향 사람들은 이따금 나의 결혼을 걱정해 주었다. 탐한 색실 골라 당가를 가야디, 자네두. 그러나 나에겐 결혼보다 숙소 문제가 더 급했다. 그때까지두 난 국제시장 한모퉁이에서 쭈그리고 잤으니까. 이러한 나의 사정을 알게 된 아줌마가 자기 집에 방이 하나 비어 있다고 했다. 동향인들은 반대하였으나 나는 그리로 옮겼다. 나는 아줌마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호오간에 내가 마음속으로 그녀를 범하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인 거 같다. 내가 빈방만을 찾아서 하필이면 송도 구석에까지 이사를 했다면 너두 웃을 테니까. 세상에 여자를 싫어하는 남자가 어딨겠니. 저걸 그냥 콱…… 이런 생각을 했다. 너두 짐작을 하겠지만 그러나 내 기분에는 좀 이상한 데가 있었다. 보통 우리가 여자를 보고 이불 밑을 생각할 땐 솔직하고 대담하고 단순하지 않니? 그런데 저 아줌마의 경우, 뭔가 좀 다른 데가 있었다. 유리로 만든 꽃이 있다면 그것을 곱게 만지작거리며 놀고 싶은 대신에 그걸 확 짓부숴 버리고 싶은, 그것도 잔인하게 말이다, 그런 뭐가 있었다. 그녀가 날 좋아했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싫어하지두 않았다. 그녀는 물론 임자가 있는 여자였다. 냠편은 선원이었다. 한 달이면 하루이틀 집에서 묵는다고 했다. 나는 아직 그의 얼굴도 모른다. 때로는 몇 달씩 바다 위에 떠있기도 했다. 동남아를 다닌다던가? 그들이 조그마한 식모애와 함께 안방에서 거처했고 그 옆방엔 그녀의 시동생이 묵고 있었다. ㄷ대학에 다니는 얌전한 청년이었다. 그 건넌방이 비어 있었다. 처음 며칠 동안 나는 마음이 들떠 있었다. 환경이 갑자기 바뀌어진 탓만은 아니었던 거 같다. 방이 너무 넓었다. 한 칸도 채 못 되는 작은 방이었으나 혼자 자기에는 너무 넓었다. 도떼기시장 가겟방에서 틈에 끼여 잠을 잤던 내가 아닌가. 아직 방이 덜 찼는데…… 들어올 사람이 아직 밖에 남아 있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누우면 어떤 기대와 가능성을 쉽게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홍분은 미구에 가라앉았다. 나는 나대로 나의 생업에 얽매여 있었으니까. 아침 일곱 시에 눈을 비비면서 나가면 밤 열한 시가 지나서야 피곤한 다리를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세 끼 밥은 남포동에서 먹었다. 일요일두 없었고 물른 휴일드 없었다. 돈이 붙는 것이 대견스러울 뿐이었다. 그녀는 나보다 늦게 나가서 늦게 들어오는 것 같았다. 내가 나갈 땐 그녀가 자고 있었고 그녀가 들어올 땐 내가 자고 있었다. 한번 생활에 틀이 잡히자 그런대로 별일 없이 시간은 잘 홀렀다. 말하자면 철길이 정거장 안에서는 서로 곧잘 엇갈리지만 일단 방향을 잡아 그곳에서 벗어나면 두 개의 철길은 서로 부딪침이 없이, 서로 바라만 보면서, 멀리까지 마치 영구히 그러할 것처럼, 나란히 잘도 달리는 거와 같았다. 그녀는 그러나 먹고 살기 위해서 영업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종종 집에서 쉬어 버리곤 하였다. 그런 건 아무려나 좋았다. 내가 일에 쫓기면서 먹고 살거나 그녀가 심심풀이로 일을 하거나 아무튼 서로가 자기 발 위에 떳떳이 서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린데 언제부터인지 그녀가 나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아채기 시작하였다. 그런 기미를 알아채게 되자 내 뱃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었던 그녀에 대한 반감이, 분노 같은 것이, 꼬리를 흔들며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나를 경멸하고 있다고는 생각하기 싫었다. 무시당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가 나를 멸시하고 있다는 증거가 차차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사람 미치게도 말야.”
그들은 공작에서 나와 끼니를 거르면서 대폿집을 역방하였다. 술이 오르자 석호는 말이 많아졌다. 술이 들어가서 말을 쫓아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사연들을 가슴에 품고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그랬는데 말야, 이 우라질 년이 말야, 넌 모를 거다. 네가 알 수 있네야. 넌 행복한 녀석이야.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얼마나 멋있냐 말야. 좋아서 넌 지금 온몸이 후끈 달아 있지? 난 이렇게 가슴이 활활 타오르는데. 타올라서 불길이 솟구치는데. 현수, 알갔니, 뭇 참갔어, 정 뭇 참갔어. 난 세상에서…… 넌 알지, 나만큼 고생해 본 눔도 없을 거야. 난두 꽤 참을 줄 아는 눔야. 꽤는 많이도 견디어 왔단 말야. 단신 월남해서 고생도 할 만큼은 해보았구……. 고생이라면 지금도 무섭디 않디. 살아갈 자신은 있단 말야. 그러나 업신여기는 것만은, 그것만은 못 참아. 이렇게 가슴이 끓어오르는데 어떻게 참겐.”
“증오다, 증오. 사랑이 너가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멋있는 것은 아니듯이, 중오도 또한 너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멋없는 건 아냐. 진짜 멋없는 것은 둘 다 갖지 못했을 때란 말야. 미워할 사람조차 없을 때를 생각해 봐라. 그때야 말로 참으로 맛대가리가 없는 세상이 될 거다. 견딜 수 없는 건 그때란 말야. 하하하 아하하.”
현수는 자학적이었다. 일은 글렀다. 그러나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분명히 잘못된 데가 있었는데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를 나무랄 것인가. 명자를 욕할 것인가? 죄 없는 명자를? 석호를 욕할 것인가? 그는 다방 아가씨에게는 곧잘 야비한 장난을 거는 녀석이 아니던가. 자기 자신을 나무랄 것인가? 왜? 뭘 못 해서? 그렇다면 누구를 탓할 것인가? 다방 잘못인가? 명자가 다방에 있었다는 게 잘못인가? 명자의 전 생애가 잘못이란 말인가? 누구의 탓도 아닌 그러나 너무도 분명한 잘못ㅡ—그것은 무서운 공백이었다. 아직은 현수의 가슴 속에 명자를 향한 자세가 물러서면서 무너지면서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가고 나면 무엇이 올 것인가.
“그럴까? 정말 증오에도 멋이 있을까? 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에도? 글쎄. 그러나 설마 경멸에도 멋이 있다는 건 아니겠지. 더구나 받는 입장에서고 보면? 장사랍시구 할 때는 그래두 그런대로 괜찮았다. 우선 아줌마와 맞부딪칠 기회가 별루 없었으니까. 그눔의 갈비집엔 발길을 끊어 버렸었다. 그랬는데 그남둥 장사를 집어쳤으니 어떻게 되었겠니. 내 보기에두 내가 초라해지는덴……. 하여튼 자기 수중에 돈 없다는 건 비참한 일이야. 그러나 그런 건 다 좋아. 그쯤에서 믈러설 나라면 진즉 죽어 버렸을 거다. 누가 아니, 때가 오면 또 한몫 단단히 쥐게 될는지? 나라구 그러지 말란 법은 없을 테니까. 당장은 옹색하디. 담밸 다 외상으로 피구. 그러나 욕을 했으면 담배 가게에서 했지 왜 지가 하느냔 말야. 내가 자기더러 뷜 달랬나? 그거래두 달라고 그랬나?”
그들이 삼학정에 들어섰을 때 그들은 취할 만큼 취해 있었다. 삼학정은 그렇게 큰 술집은 아니었다. 석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그러나 놀랄 만큼 정확한 발걸음으로 곧장 계산대를 향해서 다가갔다.
“어서 오이소. 왜 그렇게 통 안 보입니꺼? 오래간만입니더.”
“비켜. 아줌마는 어디 간?”
“으짜꼬, 인사나 좀 받으이소야. 아줌마만 사람입니꺼? 아줌마 마 오늘 안 나왔십니더.”
“뭐, 안 나왔어?”
아줌마는 그날 집에서 쉬고 있었다. 석호는 긴장이 갑자기 풀리는 것을 느꼈다. 맥이 쑥 빠졌다. 그는 그 자리에서 녹아떨어져 버렸다.
현수는 어깨를 더욱 움츠렸다. 지대가 높아질수록 바닷바람은 점점 더 세차 갔다. 바다는 차차 넓어져 갔다. 파도 소리도 따라서 커졌다. 석호의 숙소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가 석호와 마지막 헤어진 것은 육 일 전, 그러니까 술에 취한 채 삼학정에서였다. 그날 밤은 그도 꽤 취해 있었다. 석호와 헤어져서 홀로 걸으며 그는 생각했었다. 잊자. 잊어버리자. 부산에 안 내려온 셈치면 될 것 아닌가. 또 설사 백보를 양보하여 내려왔다 치더라도 형님 집 근처에 있는 다방이 공작이 아니구 칠면조였다고 생각하면 될 게 아닌가. 아니, 그것이 공작이었다구 하자. 그렇더라도 거기에는 일찍이 명자라는 여인이 있은 적이 없다고 하면 될 거 아닌가. 자, 모두 다 떨쳐 버리자. 잊고 서울로 올라가자. 시간이 지나면 다 잊어지겠지. 시간은 잔인하지만 확실하니까. 통일호 출발이 네 시였지?
그러나 이튿날 술과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의 편리한 논리는 설득력을 상실해 버렸다. 그는 역시 부산에 있었고 당구장 모퉁이를 돌아서 중국집을 지나자 나타난 다방은 틀림없이 공작이었다. 명자는 역시 거기 있었고 그가 들어서자 웃으면서 다가왔다. 그러나 그 웃음은 전과 같은 저 눈부신 웃음이 아니었다. 그녀는 씁쓸한 웃음을 웃고 있었다. 그렇지만. 현수는 다가오는 명자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이대로 헤어져 버릴 수야 없지 않은가. 적어도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쯤은…….
“차는 뭘루?”
“어젠 정말 실례 많았습니다.”
“어머, 무슨 차를 드시겠냐구 물었는데……. 홍차루?”
현수는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명자는 약간 더 웃어 보이고는 조용히 되돌아갔다. 통제된 웃음……. 누구더라, ‘나무로 만든 웃음’이라고 말한 시인은? 표정이 없는 웃음, 피가 돌지 않는, 그리하여 온기도 색깔도 없는 웃음……. 입체 확성기에서는 서양 육자배기가 청승맞게 홀러나오고 있었다. 쿠쿠르 쿠크 쿠쿠르 쿠크……. 그것이 그때처럼 그의 가슴을 파고든 적은 없었다. 아이 아이 아이 아이 아ㅡ이, 아이 아이 아이 아이 아ㅡ이. 명자를 설사 잊어버린 후라 할지라도 벨라폰테의 그 자지러지는 목소리만은 결코 잊어버릴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명자가 차를 날라 왔다.
“어제 건 용서해 주시죠?”
“또 그 이야기세요? 벌써 잊고 있었는데.”
“아무래두 꺼림칙해서……, 그 앤 모르구 그런 거니까 너무…….”
“어머, 그것이 여자 엉덩이였다는 것두 몰랐단 말씀이세요?”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구요. 내가 말하는 건 그러니까, 결국…….”
현수는 적당한 말을 얼른 찾아낼 수 없었다. 너무 하다, 이건. 사람을 이렇게 궁지에 몰아넣다니.
계속하세요.” 명자는 현수를 빤히 바라보면서 재촉했다.
“그러니까, 결국 말하자면……, 누 건지를 몰랐단 이야기지요. 무엇인지를 몰랐을 리야 있겠어요? 잘 알았으니까 그랬을 덴데.”
“어머, 누 거라뇨?”
명자는 실소했다. 그리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얼른 돌아섰다. 그리고는 가볍게 달아나 버렸다.
“누 거긴? 내 거지.”
현수는 소리내어 중얼거렸다. 가슴이 뿌듯해 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기다렸다. 명자는 계산대에서 아줌마와 명랑하게 지껄이고 있었다. 현수는 찻잔을 들여다보았다. 불그스레한, 김 오르는, 표면 밑으로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그는 그 표면 위에 살며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얼굴의 그림자가 하얀 연기 속에 숨어 버렸다. 연기는 김과 함께 찻잔 위에 깔리면서 천천히 피어올랐다. 현수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생각하세요?”
명자가 다시 나타났다. 찻잔도 비우지 않았는데 엽차를 가지고서였다. 내가 뭘 생각하고 있었더라?
“다방과 휴일에 대해서……. 하하. 언제쯤 쉬는 날 없으세요?”
“왜요?”
“그날 같이 지내구 싶어서요.” 차와 점심과 영화와……. 점심은 중국집…….“
“오는 화요일……, 그러니까 닷새 후 제가 쉬어요.”
월요일 밤 방송에서는 폭풍 경보를 발하고 있었다. “남해안 일대에서는 폭풍이 불고 물결이 높겠으니 대소선박은 주의를 요합니다.”
이튿날 날이 밝았을 때 동광동의 한 청과 상인은 시민관의 커다란 영화 입간판이 길 건너 파출소 앞에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혀를 내둘렀다. 바람은 넓은 포도 위를 휩쓸며 광복동 입구로 휘몰아쳤다. 목욕탕의 높은 굴뚝에서는 연기가 나오기가 무섭게 흩어져 달아났다. 마치 굴뚝이 속력껏 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연기는 위 아래로 난폭하게 굽이치면서 흩어지다가 갑자기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바람은 보이지 않았으나 바람이 하는 짓은 도처에서 눈에 보였다. 바람은 한 방향으로만 불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기분 내키는 대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들 변덕의 완충 지역은 무풍지대를 만들었고 거기에서는 회오리바람이 하늘로 소용돌이쳐 올랐다. 더러운 휴지들과 오물들이 바람을 타고 수직으로 치솟았다. 하늘에 오른 휴지쪽들은 갑자기 방향을 잃고 망설이면서 살피면서 다시금 땅 위로 천천히 끌려 내려왔다. 바람은 변덕스럽고 방자하였다. 현수는 약속대로 아홉시 삼십 분에 ‘수정’ 다방으로 나갔다. 명자는 삼십 분 늦게 나타났다. 그러나 그들은 삼 분 이상 그곳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석호의 숙소가―—아줌마의 집이 코앞에 나타났다.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바람은 집을 날려 버리려는 듯이 험악한 기세로 몰아쳤다. 파도 소리가 길게 여운을 끌면서 저 아래에서부터 육중하게 들려 왔다. 석호가 집에 있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날은 만사가 뒤틀리는 날이었다. 현수는 명자를 생각하였다. 가봐야 돼요. 아니에요. 꼭 가봐야 해요. 그렇다면 뭣 하러 나왔단 말인가, 삼십 분이나 늦게. 삼십 분까지만 기다리자고 한 것이 잘못이었다. 십 분만 기다리는 건데, 십 분만. 현수는 문께로 다가섰다.
“석호.”
집 안은 잠잠했다. 파도 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석호!”
집 안은 역시 죽은 듯 조용하였다. 바람이 소리를 내면서 처마 밑으로 치나갔다. 석호가 집에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현수는 바다를 굽어보았다. 거대한 두 마리의 해룡이 맞붙어 싸우는 듯한 바다를.
“빈집에다 대고 감지르면 뭐 합니꺼?”
등뒤에서 소리가 났다. 현수가 돌아보았다. 식모애가 고무신짝을 끌면서 종종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도 안 계십니더. 건넌방 아자씬예 아침 일찡예 나갔십니더.”
“그래?”
현수는 그가 걸어왔던 방향으로 돌아섰다. 초라한 집과 집들이 바다의 위세에 늘린 듯 침울한 공기 속에서 언덕을 덮으며 스산하게 움츠리고들 있었다. 어디 갔을까, 이 험악한 날씨에.
“가실랍니꺼?”
“응. 건넌방 아저씨 들어오시믄 내가 다녀갔다구 전해라. 어쩌믄 오늘 오후에나 내일 서울 간다더라구.”
“예, 그라지예. 그런데예, 건넌방 아저씬예 안 옮기신담니꺼?”
“뭐?” 현수는 돌아섰다. “오늘 아침에 뭐 있었니?”
“아, 아니예. 아무것도 아닙니뎌. 어서 가보이소. 바람이 마 맵쌀시럽습니더. 내사 들어갈랍니더.”
식모애는 문소리를 내며 집 안으로 사라졌다. 현수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리고는 오던 길로 터벅터벅 되돌아 걷기 시작했다.
석호는 그때 그 근처에 있었다. 석호의 숙소를 지나서 오르막길을 더 올라가면 길이 고비를 이룬 곳이 있었다. 바다가 멀리까지 보이고 고구마 같은 부산의 중심가가 용두산 밑으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지점이었다. 길 한편은 언덕이었고 다른 한편은 바다에의 낭떠러지였다. 거기 석호가 있었다. 보통 날씨에도 인적이 드문 그곳에 석호가,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마구 휘몰아치는 바닷바람에 머리칼이 흩날리면서 삼학정의 주인 아주머니가 싸늘하게 침착하게 석호가 노려보는 곳에 마주 서 있었다.
석호는 그날 아침 아홉시경에 눈을 뗬다. 간밤에 마신 술이 그대로 삼아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 하자 숙취의 골치가 쑤셔 왔다. 입천장이 말라붙어 있었고 진저리가 처졌다. 그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버렸다. 목이 말랐다. 안방에서 아침을 먹는 소리가 들려 왔다. 바람이 집을 흔들며 지나갔다. 석호는 귀를 기울였다. 파도 소리가 높았다. 안방에서 말소리가 들려 왔다.
“바람 억세게도 세네예. 아자씬 어디 기실까예?”
“글쎄? 얼마 전에 대만을 떠나면서 편지하군 소식 없으니 나두 모른단다.”
“큰 바다는 바람도 셀 기라예?”
“그 대신 배두 크지 않니?”
식모애가 그 뒤를 이었으나 바람 수리가 그 위로 덮쳐 버렸다. 석호는 굳이 알아들으러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밥 그릇에 부딪히는 숟가락 소리에 섞여서 잠시 후 다시 말소리가 살아났다.
“……밖으로 나가 대문을 열었는데예 아무도 없지 않아예. 그래예, 저번 날 밤처럼 도랑에 넘어지신 줄 알고예 문 밖으로 나가 봤지예. 그랬더니에, 호호 전봇대 안 있십니꺼, 그기다 대고 오줌을 누고 있는 기라예. 전봇대에다 이마를 기대고예. 사람이 나온 줄도 모르잖아예. 방으로 들어와서 한참을 기다렸지예. 그래도 소식이 없잖아예. 그래서 예, 방문을 조금 열고 내다봤지예. 그랬더니예, 호호호, 마 대문이 잠긴 줄 알았던가바예. 뭣이 쾅 카더니예 마당 한가운데 툭 떨어지는기라예. 호호호. 우스워서 어젯밤 혼났십니더. 아, 아니예, 아주머니 왜, 왜 그러십니꺼?”
“아, 아니다. 아무것두 아니다. 어서 밥이나 먹어라. 작은아저씬 오늘두 안 들어으실 모양이지?”
“아주머니 국이 식지 않십니꺼?”
“응, 너나 어서 먹어.”
석호가 기침을 했다. 안방은 조용해졌다. 석호는 목이 말랐다. 그는 누운 채 소리쳤다.
“자야, 물 좀 다고.”
“그래도 용케 일어났지예. 기다―.”
“내버려둬요.”
아줌마의 제지하는 목소리가 뚜렷이 들려 왔다.
“물 좀 달라 카는데예.”
“내버려두라구.”
아줌마의 목소리는 완강하였다.
“그리고 너 딴 심부름두 하지 말어. 담배 외상 같은 거 말야.”
석호는 이불을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머리가 아찔했다. 방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쾅.
“방문이 무슨 죄졌나?” 밥 먹는 소리까지 그친 안방에서 아줌마의 목소리가 더욱 뚜렷했다.
“뭐?”
석호는 대번에 댓돌로 내려섰다. 두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는 구두를 한 짝 집어 들었다. 안방은 조용하였다. 그는 구두짝을 하늘로 쳐들었다. 그리고는 안방을 향하여 비틀거렸다. 안방은, 아니, 집 전체는 조용히 기다렸다. 바람 소리만 세찼다. 참으로, 하다못해 아줌마의 시동생만이라도 집에 있었던들 구두짝은 목적지를 향하여 날아갔을 것이다. 숨을 죽인 채 문을 닫고 기다리는 아녀자들에게 구두짝은 결국 날아가지 못했다. 석호는 비틀거리며 돌아섰다. 그리고는 댓돌 위에다 구두짝을 힘껏 내리쳤다. 그렇다고 댓돌에 죄가 있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옮기면 되지, 내가 옮겨 버리면 돼.”
석호는 휘청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속옷 바람이었다. 방 한쪽에 축음기가 뚜껑이 열린 채 놓여 있었다. 그는 축음기판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마당 한가운데다 힘껏 내팽개쳤다.
“옮기면 된단 말야, 우라질.”
그는 바지와 잠바를 끌어당겼다. 바짓가랑이를 꿸 때 그는 몸의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벽에 부딪혀 소리를 내면서 넘어졌다. 넘어진 채 그는 옷을 주워 입었다. 그가 대문을 박차고 나갈 때까지 안방은 끝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석호의 옆구리에는 축음기가 끼여 있었다. 그는 비틀거려지는 걸음을 바로잡으면서 언덕길을 내려갔다. 몰아치는 바람을 피하려고 그는 머리를 푹 숙였다. 축음기는 무거웠다. 어깨가 그쪽으로 기울었다.
축음기를 팔았다. 예상보다 적었으나 돈이 생겼다. 술을 들이켰다. 해갈에 해장을 겸해서 아침 삼아 독한 소주를 연거푸 들이켰다. 속이 확 틔었다. 술 기운이 창자를 덥히면서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날씨가 추워서예, 거래가 뜸하지예. 겨울철엔 항상 안 그렇십니꺼.”
일 년 전 그는 비슷한 말을 들었다.
“날씨가 추워서예, 방송ㅇi나 축음기 듣는 사람이 많지예. 겨울철엔 항상 안 그렇십니꺼.”
석호는 두 팔로 머리를 괴고 탁자 위에 엎드렸다. 자식들, 하하하. 뜨거운 열기가 창자를 짜릿하게 자극하면서 얼굴 위로 퍼져 올랐다. 아침 나절의 술집은 조용하였다. 하하하 하하하. 석호는 머리를 받치고 있던 두 팔을 무너뜨려 버렸다. 지주를 잃은 머리통이 탁자 위로 떨어졌다. 우후후. 가슴이 울컥했다. 뜨거운 것이 뱃속에서 위로 치솟았다. 그리고 그것은 목구멍에서 걸렸다. 날씨 탓인가. 흐흐흐 으흐흐 지나간 날들이 무질서하게 그의 머리를 스쳤다. 여자는 많아두…… 그는 고개를 들었다. 엎드린 채 머리만을 쳐들었다. 어머니의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본 적도 없는 어머니의 얼굴이 눈앞에 커다랗게 확대되어 왔다. 그는 울고 있었다.
석호가 월남한 것은 풀이 무성한 유월에였다. 그의 두 형들은 매일 밤 윌남을 모의하였다. 그는 엿들었다. 어머니와 형들은 석호를 데리고 가지 않는다는 것에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월남한 것은 형들이 아니라 석호였다. 그는 그의 어머니의 얼굴도 몰랐다. 그는 어머니의 젖을 빨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태어나자 즉시 아버지의 집으로 운반되어졌다. 아버지는 일 년이면 반이나 그 이상을 서울에서 지냈다. 아버지에 관한 추억으로는 선물을 많이 사준다는 것뿐이었다. 그 아버지를 서울에 두고 삼팔선이 굳어졌다. 그의 진짜 어머니는 그를 낳고 곧 죽어 버렸다. 그러나 석호는 그것을 믿지 않았다. 그는 그의 어머니가 서울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서울은 가기 어려운 곳이었으니까. 고랑포에서 임진강을 건너 파주에 도착했을 때는 첫여름의 이른, 먼동이 멀리 트고 있었다. 그를 데리고 온, 이라기보다, 그가 따라온, 같은 마을의 아저씨는 나이 어린 석호를 앞에 세워 놓고 말하였다.
“자, 어쨌든 여기까지 왔구나. 네가 날 따라온다는 것을 느티나무 늪께서만 알았더라도 널 집으로 돌려 보냈을 것이다. 아무튼 넌 운수가 좋은 눔이다. 이젠 여기까지 왔으니 설마 날더러 서울까지 널 데려다 달라고는 하지 않을 태지?”
그리고는 석호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석호는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그리고 저고리 안 호주머니에 손올 집어넣었다. 있을 것이 없었다. 바깥 호주머니를 찾았다. 역시 없었다. 그는 울상이 되어 온몸을 샅샅이 뒤져 보았으나 나와야 할 아버지의 주소를 적은 쪽지는 나오질 않았다.
서울까지 가는 것은 그러나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려운 일은 서울서부터였다. 그는 야간 중학교 이학년에 편입을 했다. 밤이면 학교에 나가고 낮이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돈을 버는 일이든지 굶는 일이든지 둘 중의 하나를. 그러는 한편 끊임없이 아버지의 행방을 찾았다. 그러나 그가 삼학년이 되도록 아버지의 소식은 묘연했다. 사학년부터만은 밤에 다니고 싶지 않았다. 태양이 빛날 때 다니고 싶었다. 그늘은 싫었다. 밤도 싫었다. 그러던 중 그는 드디어 아버지의 거처를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우연히 동대문 전차 차고 옆 시장 입구에서 같이 월남한 동네 아저씨를 만났다. 그가 석호에게 그의 아버지의 주소를 가르쳐 주었다. 그의 아버지도 그를 찾고 있다고 했다.
영천의 독립문은 석호가 결코 잊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다. 그의 아버지 집은 냉천동에 있었다. 하얀 양회의 높은 담벽 앞에 섰을 때 그의 가슴은 얼마나 두근거렸던가. 철조망이나 유리조각들로 무장되지 않은 그 담벽을 그는 어디선가 꼭 본 것만 같았다. 푸르스름한 대문 상단에 초인종의 단추가 있었다. 조그마한 뜰을 격하여 작지만 깨끗한 이층 양옥이 다사로운 햇볕 속에서 하얗게 빛나고 있는 것이 문틈으로 들여다보였다. 초인종이 울리자 안에서 퉁탕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고 신발 끄는 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대문의 한 부분이 안으로 패어 들어가고 그리로 제복의 소녀가 머리를 내밀었다.
“엄머, 누 찾으시죠?”
“여기가, 저…….”
석호는 갑자기 말더듬이가 된 자신에 화가 났다. 소녀는 의아스럽다는 듯이 석호의 위아래를 살펴보고는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엄마, 밖에 누구.”
목소리는 안으로 사라지면서 들려 왔다. 잠시 후 다시 문이 열리며 한 아름다운 부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어디서? 오라, 어서 들어와요. 기다리고 있었지 않아요?”
부인은 안으로 비켜섰다. 석호가 들어섰다. 소녀가 부인의 등뒤에서 내다보고 있었다. ·
“자 들어가요. 아버지가 이층에서 기다리:고 계시네요.”
부인은 석호의 등을 밀었다. 석호가 조심스럽게 부인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어머니는 그렇게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약간 울먹해진 기분으로 앞장서서 현관을 들어썼다.
“엄마 그?”
소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인에게 속삭였다. 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석호의 아버지는 이충에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요, 이눔. 많이 컸구나. 형들은 못 넘어왔다구?”
“……”
“그래, 그 동안 어떻게 지냈니. 고생이 많았겠구나.”
“……”
“이리 와 앉아라. 이제 석호도 어른이 다 됐구나.”
“아버지. 나 백만 원만 줘요. 혼자 살아갈 테니까요.”
“뭐? 이 녀석이. 하하하. 목욕을 해라. 그러면 정신이 새로워질 거다.”
뜨뜻한 물 속에 들어가서 사지를 쭉 뻗자 석호는 기분이 유쾌해졌다. 그는 하얀 양회 담벽 앞에 서 있었던 이래 몇 년이 지나가 버린 것 같았다. 목욕탕 안은 우선 방심할 수 있어서 좋았다. 돈 달라고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는데……. 이상한 일이지, 어디서 그 말이 튀어나왔을까. 더구나 액수까지……. 백만 삼백 원쯤 달라고 했더라면 좋았을걸. 한 끼 밥값까지 끼워서 말야. 하하하. 그는 아버지의 웃음을 흉내내어 보았다.
“엄마, 이 옷 좀 보아.”
“쉬잇.”
석호는 문득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는 그가 있는 곳이 어디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는 탕에서 튀어나와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는 듯이 물소리를 내면서 얼굴을 씻었다. 그러다가 잠시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아무 기척도 없었다. 그는 다시 천천히 몸을 씻기 시작했다.
목욕을 끝낸 다음 문을 빠끔히 열고 한 손을 내밀어 벗어 놓은 그의 옷을 찾았을 때, 손바닥에 와 닿는 감촉이 아무래도 달랐다. 그는 문을 조금 더 열고 목을 내밀어 밖을 내다보았다. 떨어지고 후줄근한 그의 옷은 간 곳이 없고 그 자리에 산뜻하고 깨끗한 새옷이 차곡차곡 포개져 있었다. 와……, 석호의 두 눈은 둥그래졌다. 얼마나 좋은 옷이냐. 지금 내 옷만큼 입어서 떨어진 후라 할지라도 이것들은 지금 내 옷보다 백 갑절은 더 훌륭하겠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석호의 입은 그러나 엉뚱한 말을 지껄였다.
“내 옷 달라우요.”
그의 목소리˙는 열려진 목욕탕 바깥문을 나가서 좁고 긴 복도 위에 의외로 크게 울렸다.
“내 옷 달라우요.”
그는 다시 소리쳤다. 늙은 식모가 나타나서 산뜻한 그 새옷의 주인이 석호라는 것을 말해 주었다. 그러나 석호는 그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그의 처음 주장을 완강하게 내세웠다. 식모는 할 수 없다는 듯이 가버렸다. 부인이 나타났다. 그러나 부인의 우아하고 권위 있는 설복도 석호의 초지를 굽히지 못했다. 부인은 잠시 석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목욕탕 바깥문을 들어서서 한구석에 비스듬히 기대 세워진 세탁판을 비켜 세웠다. 석호의 헌옷이 나타났다. 부인은 말없이 나가 버렸다.
석호는 옷을 다 입고, 고스란히 정돈되어 놓여 있는 새옷을 빨리듯 바라보면서 그리고 열심히 그것으로부터 피하면서 목욕탕 바깥문을 빠져나갔다. 미련을 가지고 목욕탕 문을 돌아다보면서 복도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 거기 부인이 조용히 서 있었다. 석호는 부인을 조심스럽게 살피면서 그 앞을 지나갔다. 부인도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석호는 고개를 뒤로 돌려 부인에게 시선을 고착시킨 채, 한 손으로 벽을 더듬어 방향을 잡고 악으로 나아갔다.
“어머, 깜짝야.”
이층에서 내려오던 소녀가 그의 앞에서 오똑 멈춰 서면서 눈을 크게 떴다. 석호는 멈칫했으나 소녀를 비켜서 그대로 나아갔다. 소녀와 부인을 뒤로 번갈아 바라보면서. 계단이 나타났다. 조금 전에 그가 그의 아버지와 백만 원을 담판했던 그 이충에의 계단이. 석호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으나 그 계단으로 올라서는 대신에 재빨리 현관으로 내려섰다. 그리고는 신발을 찾아 신자마자 대문을 향해서 뛰어나갔다.
“이봐요, 거기 있어요.”
부인이 뒤쫓아 나오면서 소리쳤다.
“이봐요, 이것 봐요. 거기 좀 있어요. 이봐요, 이봐요.”
석호는 벌써 하얀 양회 담벽을 돌아서 달리고 있었다. 주간 중학교에 갈 생각만 버린다면 발걸음을 늦출 필요가 없었다.
석호는 야간부 사학년에 진학했다. 주간에의 미련을, 유혹을, 쉽사리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는 드디어 야간부를 그만두었다. 주간부로 옮긴 것은 아니었다. 그는 육군에 입대했다. 징병관은 그가 나이를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조숙해 있었다. 그가 부대에 가까스로 배치되었을 때 삼팔선이 터졌다. 그의 부대는 진주까지 후퇴했다. 북진할 때 그는 그의 부대가 서부전선으로 진격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두만강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또다시 후퇴명령이 내렸다. 서울을 지날 때 영천엘 들러 보았다. 하얀 양회 담벽은 반쯤 무너진 채 시커멓게 그슬려 있었다. 집은 간 곳이 없었다. 그 뒤로 석호는 그 집에 살던 누구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휴전이 성립되고 그가 장교가 되고 그리고 그가 군복을 벗은 뒤에까지도.
술집을 나오자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후려쳤다. 가슴속에 뭉클했던 것이 싸늘하게 식어 갔다. 그리고 분노가 되살아났다. 그것은 얼마 전의 타오르는 분노가 아니라 차디찬 분노였다. 슬픔이 가라앉으면서 깊은 곳에 뿌리박은 분노의 분비선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그의 두 눈은 차가운 미소로 빛났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었다. 땅을 보는 것은 아니었다. 땅은 무수한 줄들이 되어 뒤로 달릴 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땅 위의 허공에 뜬 움직이는 한 시점이었다. 그것은 그가 걷는 속도로 그와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앞서 달렸다. 지금의 그의 기분에는 세상이란 쓰라리지도 달갑지도 않았다. 열망과 기대도 없었고, 애착과 회한도 없었다. 수많은 간판들과 그 뒤로 숨은 초라한 건물들, 웅크리고 서 있는 옷 많이 입은 늙은 노점상들, 구루마와 광주리와 사과 궤짝과 금세라도 찌그러들 듯한 허술한 판매대들, 값싼 사탕과 더럽혀진 과자들, 먼지 낀 치약들과 소복이 쌓여 있는 탐스러운 귤들, 그리고 그 앞으로 종종걸음치는 화사한 다리들, 빗줄기처럼 소리내며 엇갈리는 수많은 다리들, 발들, 구두들……. 그 모든 것들이 석호와는 관계없이 거기 있었다. 십 년 전에 있었던 것처럼, 또는 십 년 후에 있을 것처럼, 그것들은 다만 거기 있었다. 깡패 같은, 거지 같은 버스 차장의 우악스런 근무도 그에게는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했다. 세상의 모든 경치들이 바람과 함께 뒤로 달아났다.
버스의 창문을 통해져 보이는 경치가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고 우길 셈인가? 실재하는 부분들을 실재하지 않는 전체 때문에 무시할 셈인가? 이것들이 아니라면 그것이 어디 있으며, 그것이 있다 해도 이것들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것에 접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어디를 가거나 어디에 있거나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은 이 부분들, 손으로 만질 수 있고 역력히 듣고 볼 수 있는 이 부분들이 아닌가. 전체는 우리 모두의 것, 따라서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우리 누구의 것도 아닌, 다만 종이 위에나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던가. 주어진 것이, 그것이 아무리 협착한 세계라 할지라도,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부분이라 할지라도, 무너져버릴 때, 전우주와 전역사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전체가 아무리 위대하고 찬란해도 그것이 어떻단 말인가. 그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잡초 우거진 옛 성터는 전역사보다 더 역사적이고, 밤의 네모난 조그마한 창에 와서 박히는 몇 낱의 별들은 전우주보다 더 우주적이다. 우리가 붙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광년이 아니다. 영원하고 무궁한 시공(時空)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은, 그리고 주어지는 것은, 순간과 지점으로서이다. 세 치 남짓한 넓이의 땅이 우리의 발 밑에서 무너져 버린다면 그것은 전우주가 붕괴되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한 지어미의 가슴속에서 팔딱거리고 있는 조그마한 심장이 아니라면 대기에 미만해 있는 사랑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세계는 저기 있었고 석호는 여기 있었다. 외면하고 달아나는 그의 전부를 석호는 원망하지도 갈구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것을 다만 차창 밖으로 차갑게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석호가 집 앞에 이르렀을 때 아줌마는 출근차 대문을 나서고 있었다. 붉은 줄무늬가 드문드문 있는 하얀 토끼털 목도리 밖으로 머리카락이 바람에 난폭하게 흐트러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시선이 마주치자 서로를 멈추게 하면서 똑같이 발걸음을 멈춰 버렸다. 그들은 서로 노려보았다. 누구도 화를 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화를 내고 있는 것은 바람이었다. 만일 둘 중의 하나가 다른 하나를 먼저 발견했더라면 상대방의 출현이 주는 충격을 즉시 소화해 버리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을 것이며, 늦게 발견한 쪽은 상대방이 초연히 발길을 옮기
고 있는 것에 감화되어 무사히 발걸음을 계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지나치면서 서로 잠깐 흘겨보았을 것이고 그들의 시선은 방금 웃고 인사라도 할 것처럼 차분하고 조용했을 것이다. 그랬을 것인데 한번 발걸음을 멈춰 버리자 그것들은 그만 땅 위에 얼어붙어 버렸다. 바람은 그녀를 뒤로부터 몰아쳐서 앞으로 밀어 내렸고 석호에게 정면으로 부딪쳐서 뒤로 밀쳐 내렸다. 그녀는 뒤로 버티고 석호는 앞으로 몸을 굽혔다. 그들은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서로를 붙잡고 있었다. 하나는 위에서, 하나는 아래에서: 한 줄기 거센 바람이 고빗길에서 시작되어 내리막길을 휩쓸고 집들 사이로 흩어져 백사장께로 사라질 때까지 그들은 그렇게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새까만 양단 두루마기 앞자락이 소리를 내면서 펄럭거렸다. 바람에게 떼밀린 반동으로 석호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선도 따라 움직였다.
“갈이 저기까지 갑시다. 할 말이 있소.”
석호가 그녀 앞을 지나면서 말했다. 그리고는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녀는 돌아섰다. 석호는 단호하게 바람을 뚫고 비탈길을 걸어 올라갔다. 바람 소리는 그치지 않았고 파도 소리는 높았으나 석호는 등뒤로 그녀의 발 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오르막이 끝나고 둥성이가 나타났다. 그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돌아섰다. 그녀는 정면으로 바람을 받아 요철을 드러내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낭떠러지를 등지고 비켜섰다. 그녀는 언덕을 등지고 마주 섰다. 바람은 그들의 옆으로 몰아쳤다. 아줌마의 새카만 두루마기 자락은 한 옆으로 휩쓸렸다. 그 밑으로 대담한 꽃무늬가 있는 분홍 양단 치맛자락이 펄럭이면서 하얀 버선목을 드러냈다. 아줌마는 석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네가 ‘도’ 소리를 내면 나도 ‘도’ 소리를 낼 수 있고, 네가 한 음정 높여서 ‘도’ 소리를 내면 나도 또한 그렇게 해서 ‘도’ 소리를 낼 수 있다는 듯이. 아니, 네가 ‘도’를 치면 ‘도’ 소리가 날 것이고 한 음정 높여서 ‘도’를 치면 한 음정 높아진 ‘도’ 소리가 날 것이라고 말하기라도 하는 듯이. 석호는 이상하게도 창자가 싸늘해지며 마음이 깊숙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현수는 조금 전과는 반대 방향으로 모래밭 위를 걷고 있었다. 바람은 여전하였다. 노한 파도들이 뚫고 치솟는 탁한 젖빛 대기 속에는 태고로부터 내려오는 무시간의 가능성이 잉태되어 있었다. 물결이 높으면 공기가 얕았고 공기가 깊으면 물결이 낮았다. 그들은 서로를 떼밀면서 빨아들이고 있었다. 변덕스러운 바람에 어느 파도가 그 바람 못지않게 또한 바람둥이였다. 잦아지면 어디로 용솟음칠는지, 용솟음치면 또 어디로 잦아질는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뭐 별루…….”
“화나셨어요?”
“아니, 별루…….”
“그렇지만 이제부터 화나게 되실 거예요. 그러나 제 탓은 아닌걸요. 전 현수 씨와 약속할 땐 정말 몰랐어요. 그 앤 편지두 안 해주었으니까요. 원래 그런 애예요, 그 앤. 전보두 없이 오늘 아침에 갑자기 나타났지 뭐예요. 지금 저쪽 과자집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정말 미안해요. 기다리실까 봐서 잠깐 다녀온다구 하고 간신히 빠져나왔어요. 곧 가봐야 돼요.”
“그래요? 바쁘시군요.”
“그렇지만 모처럼 찾아온 옛 친구를 버려둘 순 없잖아요. 서울서 여기까지 나 하날 보구 왔는데.”
그들은 다방을 나와 나란히 골목을 걸었다.
“그럼 인제 가보세요. 너무 나쁘게 생각지 마세요.”
“저두 이쪽으로 갑니다.”
“어머, 댁으루 안 가세요?”
“아뇨, 송도…… 송도 친구 집엘 가볼 일이 있어서요.”
“오늘이나 내일쯤 상경하신다구 했죠? 편지하세요. 한 석 달쯤 후에요.”
“석 달? 그때쯤이면 설마 공작이 문 닫진 않겠지만.”
“물론 제가 없을는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누가 알아요, 그때까지두 있을는지? 그럼 안녕히 가세요. 전 이쪽으루……. 정말 미안해요.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걸요. 잘 가세요. 네, 잘…….”
편지를 하지. 삼 년 후, 삼십 년 후에 편지를 하지……. 삼십 년 후, 환갑 잔치 때 와주십사 하고 편지를 해주지……. 현수는 두 눈을 껌벅거렸다. 티가 들어간 탓이었을까? 바람이 몹시 불고 있으니까. 석호는 낮은, 그러나 저력 있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 동안 폐가 많았소, 밥맛을 떨어지게 해서. 오늘 옮기겠소.”
“기껏 그 소리요?”
“그럼 내가 당신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소, 옮긴다는 거 외에.”
“옮기면 옮기는 거지 무슨 말이 많아요?”
“말이 많다구? 아직 할 말은 정작 한마디두 안 했는데?”
“당신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길래 사사건건 시빈가 하는 그 말씀요'”
“그렇소. 숙이가 내 심부름 좀 하는 게 뭐가 그리 안 된단 말요?”
“내 집 아이더러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게 안 될 건 또 뭐란 말예요?”
“그래? 남의 집 식모애더런 물 한 모금 달래지 못한단 말이지? 말 다 했소?”
“다 하지 않구요?”
“좋소. 가시오. 나두 다 했소. 가요. 내 눈앞에서 썩 꺼져 버려.”
“병신 같은 자식.”
“뭐?” 그는 튀듯 그녀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그녀의 두 어깨를 쥐어짜듯 움켜잡았다. “뭐라구? 다시 한번 말해 봐.”
“병신 같은 자식이라구 했다.”
“뭣이? 이, 이 갈보년이.”
석호의 호흡은 급격히 거칠어졌다. 그녀의 두 어깨가 마구 흔들렸다. 목도리가 땅에 떨어졌다. 머리카락은 얼굴을 덮고 바람에 난무했다.
“그래, 갈보년이다. 그래서 도도한 너는 날 거들떠보지도 않았구나?”
“이걸, 이결 그냥…….”
그녀의 어깨를 붙들고 흔드는 석호의 두 팔이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머리통은 어깨가 흔들려짐에 따라서 앞뒤로 난폭하게 끄덕거려졌다. 그러다가 고개가 뒤로 젖혀졌을 때 얼굴을 덮고 있던 한 움큼의 머리카락이 양쪽으로 흩어져서 아래로 흘러내렸다. 시선은 똑바로 석호에게 향해져 있었다. 거기에는 저주와 비난과 멸시와 분노와 증오와 조소가…… 가득 차 있었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다시 얼굴을 가렸다. 석호의 두 눈은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다른 감정에 앞서서 분노만이 타고 있었다. 이걸 이대로 두고 돌이 되란 말이냐. 이대로 붙들고만 서서 동사하란 말이냐. 석호는 그녀를 움켜잡은 채 한 걸음 낭떠러지를 향하여 뒷걸음질 쳤다. 그녀는 버티지 않았다. 파도 소리가 높아졌다. 바람 소리 위로 파도 소리가 거칠게 귓전을 때리면서 덮쳐 왔다. 파도는 낭떠러지 밑에서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돌아서자. 돌아서서 이걸…….
“놔요!” 그녀가 소리쳤다. 퇘. “이 병신 같은 자식!”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었다. 석호는 무감각했다. 이렇게 꼭 붙들고 돌아서서 힘껏……. 철썩―
그녀가 석호의 뺨을 후려쳤다. 석호는 순간 발끈했으나 이내 쌀쌀해졌다. 힘껏 떠밀면…… 떼밀어 팽개치면…… 아―악. 그녀가 눈을 홉뜬다. 펄쳐지지 않은 낙하산. 펼쳐지지 않은……. 그녀가 뒤로 버틴다. 어깨를 꿈틀거린다. 석호는 그녀의 한 어깨를 놓아 주었다. 그리고 그 빈 손으로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휘어잡고 뒤로 나꿔챘다. 머리가 위로 제껴졌다. 새하얀 얼굴 위에 두 눈만 커다랗게 확대되어 있었다. 가슴이 두루마기 위로 물결처럼 부풀었다. 그녀는 가슴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마주 보는 여자의 눈동자, 그 점막 위로 물기가 스며들었다. 물기가 맺혀서 아랫눈썹을 적시며 방울지려 할 때 그녀는 두 팔을 벌리고 석호의 가슴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그녀의 부푼 가슴이 물결 자지러지듯 스러졌다. 석호는 순간 초인종의 단추가 눌리운 듯 가슴속이 찌르르 했다. 누가 찾아왔는가. 그리고 안에 서는 누가 대답할 것인가. 그녀는 두 손으로 석호의 등을 부여안았다. 석호는 그대로 한 손은 그녀의 어깨 위에, 또 한 손은 그 머리채 위에 두고 있었다. 누가 나올 것인가. 제복의 소녀? 그는 죽었을 테지. 부인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어머닌 아니었어. 어머닌 죽은 모양이야. 나를 낳자마자 죽었어. 틀림없이. 석호의 한 손이 그녀의 머리채에서 풀렸다. 풀린 손이 내려오면서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목덜미 언저리까지 흘러내려와선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있는 그의 왼손 위로 겹쳐졌다. 그는 마주친 그의 두 슨을 꼭 붙잡았다. 숨진 어머니의 가슴 위에 나는 매달려 있었을까. 박하사는 엎드려 있었지. 개인호 흉벽을 두 손으로 안은 채. 이마를 오른 손 팔목 위에 얹고. 시계만이 살아 있었어. 왼손 팔목에 감긴 시계만이. 초침은 분명히 소리를 내고 있었으니까. 짤깍짤깍. 조용두 했지. 석호는 자신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숨소리에 겹쳐서 그녀의 숨소리도 들려 왔고, 그 가슴의 동계도 전달되어 왔다. 자식, 그렇게도 시계를 자랑하더니. 어머닌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내가 시계를 풀어서 군화발루 밟아 버렸을 때 소대장은 낱 노려보았지. 난 정말 그렇게밖에는 할 수 없었는데. 시계가 미웠으니까. 시계가 살아 있는 시계가. 소대장은 내가 슬퍼서 우는 줄 알었을 거야. 시계를 두고 간 박하사가 가련했을 뿐이었는데. 석호는 그의 두 팔에 힘을 주었다. 츳, 춧, 네 에민 참 불쌍한 사람이었단다. 핏덩이가 켕겨서 어떻게 눈을 감았노. 아버진 노려보고 있었을까? 누구를? 둘 다 아무것도 몰랐을 톈데. 알 만한 사람은 죽어 있었구 살아 있는 사람은 너무 어렸을 테니까. 그는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의 빈 가슴속을 상대방의 그것으로 메우려는 듯이. 그녀는 그 속으로 파고들었다. 여자의 두 손은 그의 둥을 놀라운 힘으로 끌어당겼다. 펼쳐지지 않은 낙하산. 기습은 항상 따발총으로 시작되었어. 저 진저리나는 오륙 발 점사. 개천둑만 열심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화집점두 그 근처에 있었구. 엉뚱하게두 버드나무 곁에서. 사자는 슬프지 않았다. 죽어 버렸으니까. 슬픈 건 사자에서 예상되는 자기 자신의 죽음이었어. 그것이 자기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오히려 다행스러워했지. 그리고는 미안해하면서 불쌍타고 했지. 츳, 츳, 우물갓집 할머니의 깊은 주름살에는 슬픈 빛이 가득했으나 그것은 자기 자신의 임박한 죽음에 대한 것이었어. 불쌍타고 하면서 딴 걸 슬퍼하고 있었지. 바람이 몹시 부는구나. 파도가 돌담처럼 무너진다. 머리칼이 날린다. 풀잎처럼 뺨을 간질인다. 석호는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또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밀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석호는 갑자기 할 일이 없어져 버렸다. 정오를 알리는 고동 소리가 멀리서 들려 왔다.
오포를 들으면서 현수는 송도 백사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는 걸으면서 생각하였다. 끝났다. 편지를 쓰자. 삼십 년 후가 아니라 지금 당장. 없었던 정사의 간단한 종말이라고. 삶에는 꼭 들어맞는 톱니바퀴가 없었다. 어디엔가 반드시 맞지 않는 데가 있어서 불협화음이 있었다. 톱니바퀴를 둘 다 완전히 알지 못하는 이상 고장이 어디쯤인가를 누가 알 것인가. 엇갈리다 어느 한 편이 짓부숴진대도 어쩔 수없는 일이었다. 짓부숴지면서 만들어지는 것이 톱니바퀴였으니까. 현수는 어금니 사이로 바람을 들이켰다. 슭슭. 시계를 찾자. 시계는 잠자고 있을 거다. 태엽을 감아 주지 않았으니까. 벌써 며칠짼가. 슭슭. 고동 소리가 바람 소리 속에 엷게 파묻혀 갔다. 화요일의 구름 낀 정오가 꿈틀거리는 바다 위로 스러져 가고 있었다. 현수는 돌충계 위에 올라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모래밭이 거기 홀로 있었고 오르막길은 뿌옇게 언덕을 돌고 있었다. 그리고 젖빛 대기로 뒤덮인 바다에는 물결이 높았다.
(《사상계》, 1963. 8. 1995년 부분 수정)
2016년 5월 6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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